[현지합숙] On the Job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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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T란 On the Job Training 의 약자로 현지합숙 기간 중 각자의 부임지에서 선배단원과 함께 각 기관의 업무 등에 대한 간략한 인수인계를 받기도 하고, 지방단원의 경우에는 집을 구하기도 하는 일련의 활동 기간이다. 동기들 다들 함께만 지내다가 홀로 떨어져 홈스테이를 하면서 지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해서 이제껏 배웠던 현지어를 안 쓸래야 안쓸 수 없는 기간이기도 하다. 현지합숙 기간에는 언어가 조금 부족하면 코디의 도움을 받거나 다들 부족한 현지어이지만 협동해서 어떻게든 통했는데, 이제 홈스테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다. 조금이나마 한국어를 아는 학생의 홈스테이라면 그래도 가끔씩 도움을 받을 수 있을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농담조로 다들 그 기간 고행의 나날이었네 하고 회고하곤 하는 OJT 이다.

OJT 전 다들 낯선 환경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짐을 챙기곤 했다. 특히 지방단원의 경우에는 임지 파견때 짐을 한꺼번에 다 옮기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OJT때 짐의 절반 정도는 미리 갖다둬야만 해서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특별히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적었던 게 사실이었다. 거주지도 계속 살던 타쉬켄트, 심지어 기관도 계속 살던 세계경제외교대였던 것. 계속 학교를 왔다갔다 한다 치면 특별히 짐들을 다른 데 옮길 필요조차 없었다. 좀 못 챙긴 것들이 있으면 기숙사에 들어가서 들고 나오면 되니깐. 선배단원도 이미 몇 차례 인사했는데, 선배단원의 말에 의하면 수업이 거의 다 종강했기 때문에 시강 등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기대가 좀 되던 것은 홈스테이. 거기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보고, 듣게될까. 그리고 그것보다 더 기대되던 것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내 자신이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사실 지금까지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달리 다를 게 없었다. 동기들 다같이 돌아다니고, 다같이 공부하고, 다같이 놀다보니깐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 내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즈벡, 현지 문화에 직접 맞닿을 첫 순간이었던 것이다.
세계경제외교대의 선배 단원 두 분과 홈스테이집의 학생 한 명이 나와있었다. 현지학생의 이름은 Murod이라고 했다. 선한 얼굴로 웃는 Murod과 악수했다. 한국어 중급 정도 되는 Murod은 아직 현지어가 능숙치 않은 나를 위해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르시루트카를 타고 한참을 갔다. 약 40분 정도는 가는 것 같았다. 홈스테이할 집을 찾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선배 선생님들께서 말해주긴 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너무도 익숙한 학교 앞 아파트 같은 곳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게 되는 것이 내가 예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가능한한 번잡하지 않은 곳, 익숙치 않은 곳에서부터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그러면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지리 익히기도 좋고, 약간의 긴장감도 들려면 말이다.
마르시루트카에서 내려서 약 15분 정도를 걸었다. 어느새 어두워져 있어서 봄이어도 조금 추웠다. 타슈켄트 지역같지 않게 가로등이 드문드문 없는 듯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집들은 1층 집들이었다. 커다란 대문들이 인상적이었고, 길가에 가로수처럼 늘어선 나무들은 웬지 모르게 애틋했다. 꼭 한국의 내 고향 시골 부안 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Murod에게 이 나무들이 무슨 나무냐고 물으니 체리나무라고 했다. 이 체리나무에 곧 꽃들이 만개하고, 그 후에 바로 체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체리가 나올 적에 Murod의 할아버지의 딸기도 수확철이 되니 놀러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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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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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테이 집에 가는 길에 있던

집에 들어가니 Murod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나를 반겼다. 저녁때가 가까워진지라 저녁상도 차려져 있었다. 사실 말은 거의 통하지 않았다. 수업 초반부에 주로 배웠던 간단한 이름 소개 정도를 하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Murod의 도움도 있었고, 좋냐? 안좋냐? 라는 질문에 거의 대답하는 대화여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정말 화기애애한 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우셔서 상대방이 거의 외치듯 크게 말해야만 알아들으셨다. 그래서 나도 할아버지께 대답할 때는 유치원생이 제 목소리 크다 자랑하듯 짹짹거렸다. 우즈벡은 막내아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문화인지라, 막내아들 Nematjon이 집의 가장이었고 그 아래로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또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이제 유치원생 정도 되는 나이인 그네들은 나를 신기함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어댔다. 뭐라뭐라 하는 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다들 나를 적극적으로 반기는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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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테이 집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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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호나choyxona

한 밤에는 Nematjon의 형인 Umidjon이 오늘 동창회 모임이 있으니 같이 choyxona에 가자고 했다. choyxona는 직역하면 ‘다방’인데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한국처럼 점원이 있어 서빙을 보고 그런 형태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방이 덜렁 있고, 그 옆에 부엌까지 쓸 수가 있는 대신 서빙을 보는 점원이나 요리사 따위는 없었다. 사온 식재료들을 써서 알아서 요리를 해서 먹는 곳이었고,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choyxona는 여자들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끼리 큰 솥에 고기요리도 하고, 스프도 하고 그 옆 큰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술과 함께 수다를 떤다. 이런 동창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덩치가 산더미 같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어서 겁이 좀 나긴 했는데, 조금 지나자 긴장이 풀려서 보드카를 몇 잔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choyxona 다음에는 Umidjon의 친척집에를 가서 우즈벡의 축제 음식 비슷한 수말릭 만드는 데도 갔다. 수말릭은 보리를 밤새 저어서 만드는 잼 비슷한 것이었는데, 좋은 날만 만드는 것이어서 그런지 다들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차량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다들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하면서 다들 나를 마당 스테이지(?)로 끌어내서 나도 같이 흔들어대면서 그 날 하루가 지나갔다. 첫 날치고 굉장히 많은 이벤트가 있구나 싶었다.

사실 그 다음날들은 홈스테이 집에서 그리 많은 일들이 있지 않았다. 우리의 OJT 기간이 일주일인데 학교 관계자도 만나고, 물품 인수인계도 받고, 선배단원과 함께하는 여러 방문일정을 소화하다보니 홈스테이 집에서 뭔가를 많이 하진 못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때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Murod과 주변을 산책하고 그런 재미가 있긴 했지만.

내 OJT 기간 중 홈스테이가 한 축이었다면 기관에서의 일들도 제법 있었다. 사실 기관의 담당자를 만나 여러 가지 수업에 관한 세부사항을 조율하진 못했다. 이미 선임 선생님의 수업이 종강을 해버렸기 때문에 이어서 인수인계를 받을 수는 없었고, 곧 여름방학을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수업을 개설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세계경제외교대의 수업은 정규수업이었기 때문에 커리큘럼에 맞춰서 수업을 개설해야했고, 코이카 단원을 위한 전용수업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방과 후 수업을 열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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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사업이 필요했던 언어학부 소속의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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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선생님과 현지 선생님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래서 그런 환경이 내겐 좀 문제였다. 코이카 컴퓨터 단원을 위한 전용 수업공간이 없다는 것. 전에 하던 것처럼 원래 있는 교실을 현지 선생님들과 같이 쓰는 것을 고민해봤지만, 그렇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빔프로젝터를 띄울 수도 없고, 컴퓨터는 전부 러시아어 프로그램으로 세팅이 돼 있었기 때문에 일부 프로그램은 정말 난항이 예상됐다. 특히 엑셀의 경우에는 함수 조차도 전부 러시아어였기 때문에 일정의 러시아어를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언어학부에 있으면서, 아무도 쓰지 않는다던 컴퓨터실에 현장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는 현재 있는 컴퓨터실의 환경을 주로 조사했다. 이제껏 하던데로 하지 않고 새롭게 벌이는 일이어서 IT학부 및 언어학부 관계자와의 조율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향 후 세계경제외교대 코이카 컴퓨터 단원이 더 능동적으로 활동하려면 언젠가는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에게 필요하기도 헀고 말이다.
OJT 기간 중 매일 저녁은 거의 현지어 일기를 쓰고, 발표준비를 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즈벡어로 글을 쓰는 것이 능숙치가 않아서 굉장히 짧은 문장이라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론 문법이 맞은지, 틀린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저 한우사전을 펼쳐서 갖가지 단어들을 조합하는 데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발표준비는 타쉬켄트인지라 수도에 대해 발표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고, 홈스테이-기관-현장사업 계획에 대해 주로 준비했다. 현장사업이 나 혼자 하고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소측에 미리 어필을 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였다.

OJT 기간, 1주일. 다들 같이만 있다가 따로 떨어져서 지내서 그런지 때로 시간이 참 안간다 싶긴 했는데, 이것저것 활동하고 준비하려다 보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종종 동기들에게 연락하곤 할 때 다들 재밌는 것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지만 그래도 동기들 다시 한번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부터 나왔다. 겨우 한달반 같이 살아놓고, 겨우 일주일 떨어진 것 가지고 신파를 찍는구나 싶겠지만, 정말 모두의 마음이 그랬다. 그 짧은 기간 같이 살면서 정이 이토록 두텁게도 쌓였구나 싶었다. 다들 부임지로 뻗어 나갈때는 아쉬워서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다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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