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확인해보니 8시였다. 바로 출발하면 딱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김밥 10줄을 사서 챙겨가야만 한다. 촬영 시작하려면 세팅하느라 또 시간 까먹을테니 조금 늦어도 큰 상관은 없겠지. 그는 뉘역뉘역 김밥을 챙겼고, 149 버스를 탔다. 역시나 그 외의 모든 출연진과 스탭이 와 있었다. 11월에 불어왔던 혹한처럼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늘진 야외공간에서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이게 내가 늦은 이유라는 듯 태연히 김밥을 꺼내놓았다. 스탭들은 왔다갔다 분주하여 김밥은 거들떠보지도 못했고, 아이 어머니들이 김밥을 아이에게 내주었다. 아이 어머니의 얼굴에는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주연을 맡은 정이네는 부모님이 다 오셨다. 택시기사인 정이 아버지는 한쪽 도로에 택시를 세워두고 분주히 오가는 스탭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이 어머니는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며 따뜻한 국물을 구해올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며 안타까워했다. 저번 밤샘 촬영 때도 정이 부모님은 택시 안에서 밤을 꼴딱 샜는데, 오늘도 택시를 세워두고 계속 정이를 기다릴 셈이신것 같았다. 왜 넌 연기 같은 걸 하려고 하니… 휴. 잘 된다면야 좋겠지만. 아역 연기자 혹은 지망생을 볼 때마다 암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휴. 우선 이번에는 불평불만 안 하고 잘 도와야지. 스탭도 없는데. 그는 지하철에서 천원에 샀던 싸구려 장갑을 꼈다. 다행히도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소음도 크지 않았다. 단지 추울 뿐.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고, 아이들에겐 큰 문제였다. 발이 시려운 아이들이 정이 아버지네 택시문을 들락날락했다. 엉겁결에 동시녹음을 맡긴 맡았는데 그로서는 꽤나 성가신 일을 맡은 셈이었다. 으윽 제일 싫어하는 동시녹음이라니. 소리는 잘못되면 다시 따든지, 정 안되면 후시로 하든지 하는 생각이 팽배해있기 때문에 영상에 밀린다. 그래서 시야각을 피해 적당히 눈치껏 마이크를 갔다 대야 하는데, 그 적정치가 ‘최대한 가깝게’ 라는 데 문제가 있다. 화면에 안나오면서 최대한 가깝게 들이대고자 “붐대 보여요~” 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진 위로 치켜들고, 아래로 들이밀고를 계속해야한다. 거기에 마이크 선이 엉키지 않는 경우는 거의 기적에 가까우며, 카메라에 수음을 할 경우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은 사운드 선 뺐다 꽂았다 하는 걸 대단히 귀찮아 한다. 어쨌든 사람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 동시녹음까지 맡게 된 것이니, 프로덕션에서 그의 크레딧이 하나 늘은 셈이다. 조연출, 동시녹음, 편집… 열악한 프로덕션이군.아이들은 추운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열연을 펼쳐주었다. 아쉬운 점은 주인공 정이의 역할이 가난한 산동네에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인데, 너무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어그부츠에 캐쥬얼백을 매고 있어 전혀 그런 인물로 보이지가 않는 다는 것. 아무리봐도 어그부츠는 좀 아닌 듯 싶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 다른 초라한 신발로 바꿔 신게 할 수는 없다고 연출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출연료라도 많이 드릴 수 있었다면 모를까. 뭐 그렇게 촬영은 진행됐다. 연출이 시간과 공간관계상 컷수를 줄이는 바람에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불만이라 한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는 씬에서도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주머니에서 돌을 집어넣는 클로즈업 씬 같은 것은 반복해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지만, 이건 연출 스타일의 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그가 동시녹음을 하느라 화면을 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정이와 소연이의 연기는 생각보다 훌륭했고, 이지의 연기가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아이다운 호소력(?)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의 촬영이 너훌너훌 넘어가고 있었다.문제는 점점 햇빛이 놀이터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볕과 그늘의 경계선이 생겼던 것은 시간이 흐르자 놀이터에 전부 볕이 들면서 해결됐지만, 아침에는 눈바닥이었던 놀이터가 금새 녹아 초록색 타일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완성도의 문제는 관객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것이다. 대책이라곤, 눈이 녹는 인서트 컷을 삽입하는 게 다였고, 그것 외에는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것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다. 극의 의미와 상관이 없는 이 자연의 변화가 ‘열악한 촬영 조건’ 때문이라고 알아챌 것인가, 아님 극에 집중해서 그런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물 흐르듯 넘어갈 것인가. 그는 이런 날씨의 변화에 ‘새로운 의미’ 를 부여해서 뭔가 있어보이게 가오다시를 잡아보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딱히 부여할 의미란 것은 없었다… 어쨌든 프로덕션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 내일 뿐이다. 어떻게든 찍긴 찍어야만 한다. 그리고 더 최악인 것은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다. 연출이 걱정하길래, 그는 말도 안되는 자신감으로 비는 안 올꺼라고 호언장담했다. 뭔가 위로해주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왠지 그럴것만 같아서였다.과연… 내일 비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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