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뉴스-김중혁] 펭귄뉴스와 전쟁

나는 좋은 음악이 있으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그 음악이 내게 지겨워질때까지 들어서 그야말로 ‘단물’을 쪽 뺀 다음에야 새로운 노래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비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움을 찾을 수 없어서, 같은 음악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고 느낄것만 같다. 아무런 느낌도 자아내지 못할테니깐. 반복되는 비트니깐.전쟁과 테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멈추려고 하지도 않고, 멈춘적도 사실 그리 없다. 뉴스를 틀면 나오는 누구의 테러로 인해 누구누구가 죽고, 누구누구가 부상당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완전히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복되고 있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간의 분쟁 이야기, 아랍 지역에서의 분쟁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슬픔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망’ 이란 명명은 누군가 죽었어 라는 감정적인 정서을 자아내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까지 미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것은 정치로 이해된다. 테러 규모가 컸을 때 상대편 국가의 대응은 어떻게 될 것인가. 테러소탕작전에 테러집단은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활까지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원거리의 전쟁이 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을 안다.헌데 죽음 자체가 울리는 비트는 매우 강렬하다. 펭귄뉴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느낀 것처럼 죽음의 비트는 엄청난 진폭을 울릴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십, 수백의 강렬한 진폭-전쟁과 테러를 매우 진부한 비트로 느끼고 마는 것은 뭘까? 그것은 우리 안의 P칩 때문이 아닐까? 강렬한 죽음의 비트를 P칩과 같은 것들은 차단한다. 그것은 우리와 너희의 범주에서 너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칩은 존재 자체로 비트 개인주의자를 양산한다. P칩을 경계로 우리와 너희의 범주를 가르는 것이다. 너희의 이야기는 그 어떤 강렬함이 있다 하더라도 P칩을 통해 들어온다면 단순한 반복으로 들려온다. 그 어떠한 진폭도 형성하지 못하는 진부함이 될 것이다.다시 전쟁으로 들어가보면, 우리는 내면화된 P칩 때문에 외부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트를 이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비트를, 아랍인의 비트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P칩이 형성한 외연에 갇혀, 우리의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뻗고 있는 서구 열강에 적극적으로 포섭된 시야를 가지고 있다.전쟁과 테러 그리고 죽음이 갖고 있는 비트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단지 P칩이 있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비트를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로 아랍권과 이스라엘권의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무감각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한국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조승희씨의 테러때에도 마찬가지였다. P칩이 갇고 있는 외연의 안쪽에서 죽음의 비트가 조금이라도 울려퍼지면 우린 엄청난 충격을 느끼곤 했다.개별 비트들이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별로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과 집단의 비트들이 공정하게 울려퍼질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한국의 광장에선 주변부 국가들의 비트를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강렬한 비트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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