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위선적인 가면을 써왔던 것이다. 그녀는 외도를 했던 남편을 계속 사랑하고자 한다. 그를 잊지 못해 그녀는 남편의 고향에 까지 내려와 눌러 산다. 또한 그 남편에게 그녀 자신이 위선의 가면을 씌워준다. 남편은 오직 자신과 준만을 사랑해 온 충실한 남편이라고. 그것이 그녀의 극복법. 이미 죽은 자, 남편은 그녀가 가면을 씌워졌으니 그녀에게 귀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죽은 자를 소유하고 있는 주체다. 죽은 자를 사랑하는 ‘주체’, 그리워하여 고통하는 ‘주체’. 그것은 준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준은 그녀에게 귀속된다. ‘주체’ 가 위선적인 가면을 자신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씌워왔다. 그런데 주체가 소유해 왔던 아들 준을 잃게 된다. 그것도 타살이다. 그녀는 아들 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주체로서’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살인자’가 아들 준을 죽이는 주체의 권리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 균열하는 주체. 그녀는 절대자에게 손을 내민다. 절대자가 그녀의 주체를 대신하여 준다. 그러나 동일한 절대자가 ‘살인자’ 조차 포괄하고 있다는 순간 그녀의 ‘주체’ 가 꿈틀거린다. 어쩌면 그녀가 절대자에게 맡겼던 것은 그녀 자신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맡긴 것은 남편과 준에 대한 그녀의 소유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같은 과정으로 ‘살인자’의 주체를 인도하고자 하였다. 소유하게 되는 것은 절대자이지만 그녀가 손을 잡고 넘겨주는 것이니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붙들고 갈 ‘살인자’ 의 손은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체가 진동한다. 그녀의 위선의 가면이 조각나고 만다. 그리고 절대자에게 그녀 스스로의 투쟁을 시작해본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 남편도 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살인자’에 대한 증오로 인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송두리째 자각되어진다. 그리고 그 투쟁의 한 가운데서 그녀는 그녀의 팔을 긋는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녀는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애원하듯 절규한다. 살려달라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그녀는 ‘살인자’를 증오한다. 그녀는 무고한 ‘살인자’의 딸 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인간이 되었다. 이전의 주체와는 다른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녀는 그녀 자신의 감정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허위허식을 벗어던진 듯 하다. 그녀는 이제 빙 돌아서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마주치는 상처들을 만나면 다시 아파하겠지만 … 건강한 아픔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가 견뎌 낼 건강한 아픔.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나누면서 조금씩 짐을 덜어 내겠지.
전도연이 상을 탄 영화라는 것을 계속 의식하면서 봐서 그런지 전도연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전도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정말 쉽지 않은 역할인데, 튀는 캐릭터도 아니고, 자질구레한 대사들로 커버치는 그런 배역도 아닌 데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는 게 정말 대단하긴 했다. 그런데 뭔가 전율을 불러 일으킬 정도, 팍! 팍!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왜일까. 이제것 봐 오던 전도연의 다른 작품에서의 모습과 조금 겹친다고나 해야할까. 그것은 송강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송강호의 능글맞음의 연기 센스는 칭찬할만 하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극중 배역과 충돌하는 모습이 자꾸 보였다. 경상도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했던지 자꾸 수그러들어지는 것만 같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것일까. 중년 연기자라 어찌할 수 없는 건가? 그러다가 안성기 처럼 될라. 아 그리고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라고 하는 광고카피는 송강호와 전도연의 러브스토리 혹은 송강호의 해바라기 사랑을 광고하는 듯 한데 내 보기에 러브 스토리는 주요 포커스가 전혀 아닌 듯하다. 왜 그런 카피문구를 썼는지… 팔아 먹으러면 어쩔 수 없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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