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집을 읽으면, 특히나 김종광의 작품집중 이것을 첫번째로 읽어본다면 이런 단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을까? “이게 모-야?”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문체, 전하는 메시지 또한 너무 직설적이거나 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도 많고 말이다. 이야기이긴 이야기인데 이것이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식이면 나도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김종광의 내피까지 다다른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사실, 김종광의 작품을 쭉 따라 읽어 본 내게도 위의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만큼 <낙서문학사>의 외피들은 너무도… 뭐랄까 독창적? 기괴성? 이 유독 도드라져있었다. 설마 <모내기 블루스>에서 보였던 그 길 쪽으로 재미를 붙일줄이야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분명히 <낙서문학사>의 모습이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정말 ‘서슴없는 행위’ 만은 아니다. <경찰서여, 안녕>에서 <모내기 블루스> 그리고 <낙서문학사>로의 행로는 어찌보면 일관되어 있고, 예정된 일탈이라 할 수 있다.
1.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블루스>, <낙서문학사>
프로 소설가(김종광은 자신을 이렇게 명명한다고 한다) 김종광의 이름으로 처음나온 것이 <경찰서여, 안녕> 이다 등단작인 <경찰서여, 안녕> 부터 시간순서대로 딱 10개의 단편들을 모아 둔 그 소설집을 보면 아, 김종광이 어떤 작가이다 하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가 있다. 김종광은 자신만의 특색있는 문체를 취하면서, 삶의 다양하고,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담는 메세지를 해독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혹은 한꺼플만 살짝 벗겨보면 이해가 되는 그런 식의 글쓰기 방식을 수행한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은 농촌 쪽에 조금 더 집중되긴 하지만 주로 서민들 혹은 그 부근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담고 있는 그의 애정어린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이야기꾼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가 겪은 것,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말을 짓는 능력을 가진 그 자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도록 타령을 불러본다는 식으로 자세를 잡고 있는데, 물론 그가 객관적인 제스쳐를 취하거나 거리두기를 통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맹물 혹은 회색깔의 작품을 내고 있는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식하는 것 외부의 것에는 전혀 터치를 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것은 더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의 이야기타령은 분명 대상인 독자들에게 더 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유머를 적절하게 섞는 것이고, 텍스트 자체가 그리 어렵게 두지 않은 것이다. <경찰서여, 안녕> 에서부터 그러한 것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경향성인데… 중요한 첫번째 작품집을 볼 때 작품집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 특유의 문체가 더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 함이 옳을지언대 예를 들어 <전당포를 찾아서> 를 비롯한 첫 작품집 후기(?)는 그 특유의 말의 독특함은 조금 자제되었을 망정, 주인공 모습에 성찰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띤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님이 성찰의 모습은 분명 아니고, 우선 주인공의 정체성이 다른 이야기들처럼 고전적인 성격으로 딱 정해져버린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종광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인물들 성격이 고전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격부여가 원래 되있던 것 처럼, 착한 놈은 계속 착하고, 나쁜 놈은 계속 나쁘고 한다 할까? 거기에 그의 정체성도 규정되어 있어 작품내에서 그 주인공은 목적의식은 가져 목적은 달성하더라도 성찰이나 여러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는 인간상의 모습이 거의 없다. 변화과정이라 해도 거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지사라는 것. 그러나 <전당포를 찾아서>같은 경우는 그 인물 자체가 지향점이 없는 모호한 상태로 출발하여 방황하면서 자기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종광의 그 이후의 작품에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진다. 다시 보여주기 방식의 이야기풀이가 이어지게 되는데… <경찰서여, 안녕> 과 <모내기 블루스>의 구별선은 유독 눈에 띤다. <경찰서여, 안녕> 이 정말 다양한 영역들을 작가의 재치와 더불어 그가 지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점이 투영되어 향연을 벌이고 있다 싶을 정도라면 <모내기 블루스>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바로 농촌에서 농촌사람들이 농촌의 어려움과 더불어 농촌사랑 이야기한다 정도인데… 아니면 도시 빈민의 어려움인데 그 양상은 농촌 것들과 비슷하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규정지은 한계로 인함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꾼은 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을 이야기하여 울리는 감동을 원하기 보다, 새로운 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거기에 합당한 칭찬을 요구한다. 이야기꾼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이야기꾼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했던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하는 순간, 반응자의 반응은 시큰둥해진다. 그거 저번에 했던 얘기잖아요, 하고… <모내기 블루스>가 그런 꼴이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이어서 나온 것이 바로 <낙서문학사>인데… <낙서문학사> 에서도 비슷한 레파토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선 차치하고, 정말 괴기스러운 돌출작품부터 보자.
2. 낙서문학?
김종광은 정말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낙서문학 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부터 특이하지 않은가? 낙서문학이란 그 실체가 뭐냐 하면, 새로운 문학 장르. 그거다. 그 성격이 어떻게 되었든, 규범이 어떻게 되었든 그런것은 모두 상관없다. 새로운 문학 장르라는 것, 예술 장르라는 것. 그것이 한번 받아들여지게끔 만들어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서, 정말 뚱딴지 같은 것에서 고귀한 것으로 흐르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하다. 돈과 몇가지 권위를 짊어지는 것, 거기다가 신비화의 과정이랄까? 사실 예술이란느 것이 그렇다. 어떤 그 주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어떤 생성물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성물 그 자체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거장의 음악을 들려주어봐야, 거장의 그림을 보여주어봐야, 거장의 문학을 읽어주어봐야 어린아니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 또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술에게 감동받는 것은 그 생성물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생성물을 생성하기까지 생산자(?)가 깃들인 노력을 이해했기 때문이고, 생성물 자체를 다른 것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는 방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기를 어떻게 한 것도 예술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광은 새로운 것을 한 번 창조해봤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개끔 하는 과정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원래는 별것도 아닌 예술 가지고 온갖 갖은 권력과 돈놀음들을 하면서 대중들을 놀려대고 있는 문학권력을 직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런 겁없음이란! 우선 작품으로써 이렇게 본격적으로 현실문학 자체를 비꼰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는 것, 거기에 발을 내밀었다는 것에 정말 경의를 표한다. 이건 정말 이야기꾼의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의미없는 것을 의미있는 척 하려는 광대보다는, 왕 앞에서 왕의 부패상을 꼬집어 내는 촌철살인. 그럴 때 이야기꾼은 유희를 위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감동과 사랑을 위한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도 이야기꾼 김종광의 다른 영역에서의 개척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 진보한 모습은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투리 유희와 함꼐 농촌이야기가 나오고, 서민들의 삶이 나오는데 그 방식이 전과 비슷비슷하다. 거의 대게의 작가들이 자가만의 특유 소재에 계속해서 천착하긴 하지만, 김종광의 이야기 방식이 더욱 문제되는 것은 그는 이야기 형식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깊게 파고드는 성찰 없이 보여주기의 제스쳐를 취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는 것이다. 소설가 김종광이 좀 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면 내용에 맞는 형식조차 제멋대로 변용하는 재치를 발휘했으면 한다. 이전 소설가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떠랴,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딱히 그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서의 감동을 주는 형식을 주문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으로의 작가의 변모란 획득에 앞서 손실이다. 다만, 그가 그의 재미있고 쉽게 보여주는 형식만으로 취할경우 노출되는 한계점을 문체의 개발을 통해서 극복해주기 바랄 따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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