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기대가 가지 않았지만 공지영이 쓴 문학이란 전부 읽어 해치우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시나 빌렸다. 전체 소감은 이전의 작품에서 발휘되었던 가치들이 회색빛 뿌연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고나 해야할까. 공지영의 문학에는 힘이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거나 절규하고 있지만 그래도 힘이 있었다. 그 상처는 명쾌하게 치료되지 못하고 끝나버리기 일쑤였고, 읽는 이까지 음울해질 정도였지만 밑바닥 치는 음울함은 아니었다. 왜였을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지나온 삶이었다고 느끼게 하는 호소력 외에도 언제나 그 이야기들이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지 않고 현재로의 소환 형식을 띠며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이 그랬었어가 아닌 삶은 이런 지난한 과정이야 라고 이야기 함 속에서,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향한 방향설정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었던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몇년간의 공백을 지나고서 나온 별들의 들판이라는 작품집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래왔던 레파토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였고, 그녀가 취급했던 익숙한 소재들은 베를린이란 이색적인 공간에서도 여전했으며 전의 작품들에서 보였던 미래지향적인 희망은 그만 퇴색되어버렸다. 전의 작품들을 읽었던 독자라면 느끼게 될 재현효과의 힘에 기대어서 어느 정도의 충만감정도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베를린이라는 공간
별들의 들판은 베를린을 공간설정으로 하여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각 작품의 공통적 요소는 베를린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베를린의 아우라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작소설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베를린이랄까. 작자후기에서 말한 우연히도 베를린에서 1년정도 살게 된 기회를 얻게 되었고, 베를린에서 몇 년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경험적 소산이 결정적 이유이겠으나 그것은 외부에서 얻은 힌트에 불과한 것이고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베를린의 이미지를 바라보자.
베를린은 주지하다시피 초고속성장신화가 있던 곳이고, 동서분쟁의 공간적 ,정치적 공간이었으며 현재는 독일통일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미래상을 전망해볼 때 독일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청사진이 될 수도 있겠는데, 작품에서는 동서분쟁에서 통일로 인해 남북갈등으로 전환되어버린 베를린의 현주소를 되짚기 보다, 그러한 동서갈등과 남북갈등의 상처들. 그 상처받은 도시의 거주민들이 풍기는 ‘향기’ 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는 누가 어떤 성향이던가, 누가 어느정도 부자였던가에 주목하지 않고 상처를 받았던가, 지금 그것을 치유했던가에 주목하고 있으며, 공지영 특유의 변해버린 사람들에 대한 관찰자 정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망명자와 거의 인력수출이라는 명목으로 독일에 간 여성들, 유학 간 사람들을 주 주인공으로 삼는데 그들이 베를린에 갔던 이유는 자의적 선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베를린은 그 이방인들 모두를 받아들이는 도시로 그려진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베를린이 동서분쟁 당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계선에 서면서 정점에 서 있었던 그러한 긴장감의 형성과 갈등의 국면 국면들을 넘어왔던 도시라는 것이다. 상처받은 도시 베를린의 사람들은 경계와 정점에 동시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이방인들이 부유하는 향기를 내뿜는데, 베를린의 사람들이 부유하는 것은 그 어떠한 끈도 매여있지 않고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시 베를린에서의 서로다름과 상처에 대한 동질감이 그들을 엮어주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이었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 살 수 있었고, 살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베를린의 현장은 다른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맺는 존중과 배려속에서 자기 자신이 상처를 가다듬게 만들고 달랐던 것은 베를린의 포용력 속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이다.
-강제하지 않는 치유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해. 라는 메세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은 강제하지 않는 치유와 대립되는 것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상대방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동일선상에서 눈을 맞대야 해야 하지만, 현재에서 상처의 치유 방식은 그렇게 아늑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줄꺼야 라는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상처입었던 사람들이 유행같은 주류질서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차이를, 자신의 상처를 망각시키고 다수의 질서에 동화하는 것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처를 거듭난 자아의 성숙이 아닌 상처를 망각한 자아의 변화인 것이다. 거기서 작가는 제발 그들을 좀 내벼려둬! 라고 이야기하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성을 먼저 강조하고 그들 치유의 과정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서 결국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사랑이었다고 나타낸다. 수평적 사랑. 한 사람은 들어주고, 한 사람은 말하고만이 아닌, 끝없이 ‘좋은 이야기’를 내뱉는 권위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구멍뚫린 가슴안을 바라봐주는 사랑. 강제하지 않는 치유는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에 첨가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걷어버린 동류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으로?
공지영의 전작들에서 주로 보이던 소재, 주로 보이던 문제의식, 주로 보이던 인물들, 주로 보이던 치유의 방식들이 나타났으나 앞서 말했듯 소환형식을 띠며 현재에서 미래지향적이던 문제의식은 이미 퇴색되어 버렸다. 티백을 두번 세번 우려내서 더이상 색깔도 향기도 만들지 못하면서 녹차라고 우기듯이 되버린 것은 무엇일까? 문제의식과 미래지향적 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루만짐, 어루만짐. 이 세상에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들은 물론 많다. 한국의 폭력과 광기의 역사속에서 묻혀 버린 것들을 다시 소환해야 하고 재평가해야하고 그것들을 치유해야 함은 당연한 말일진대 전망없는 치유는 단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는 보상금과 명패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상처입었던 이유들을 되짚어 보면, 현재에 계속 행해지고 있는 칼질의 칼손잡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금방 분명해질것인데, 어루만짐 그 자체 만으로 그쳐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추억에 권위 부여하기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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