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5.27.] 잠

    어제 그리고 그제
    잠을 많이도 잤다

    그래서 오늘은 참았다

    그 대신 거의 아무것도 못했다.
    낮에 독일어 공부를 좀 하긴 했으나 저녁 이후로는…
    거의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함이 옳으리라

    글도 안 쓰고
    책도 안 읽었다

    그래 오늘은 잠 참은 적응기간이라고 치자
    내일부터가 진짜일테다!

  •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충만한 기쁨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영화일것이다.
    추석특선이었던가에서 처음 본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TV에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빙을 하지 않고 있었다! ㅋ 그럴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지만, 암튼 특선으로 본 영화가 너무너무너무 좋았던 어린 나는….

    집근처 비디오샵이 망하자 누나를 설득해, 저건 소장가치가 있는 영화라면서 구입을 권유했던 것이고… 이후 시도때도 없이 봐서 이후 그 어떤 영화도 이 영화만큼 많이 본 영화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대적할 영화를 찾는다면, 나홀로 집에 정도가 될려나? ㅎㅎ

    음악영화를 너무도 좋아하긴 하고,
    또 이 영화에 나오는 노래가 너무도 좋기도 하였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보게 된 연유는… 그 어느 장면을 보든지 충만해 있는 감정들 때문이었던 것같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있다.
    너무도 눈부시게도… 꽉 들어 차 있는 그것.

    거기에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끼어들고만 싶어서
    집에서 이 영화를 틀고, 또 틀고… 영어 노래인데도… 쉬운 것은 어린 나이에도 가사를 조금 외워 흥얼거리고도 했었다.

    그때도 특선명작이었던 것이, 이젠 정말 고전영화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이 영화…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재생된다면

    난 더없이도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그녀들의 기쁨과 환희에 겨운 노래들
    아… 듣고싶네

  • [스왈로우 테일-이와이슌지]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옌타운이란 단어가 있다. 옌이 한창 고가를 달리고 있을 때 못사는 나라의 못사는 사람들이 고가인 옌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본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어 일본을 옌타운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옌타운이라고 불렀다. 그렇게되어 옌타운은 이주노동자들이 부르는 일본이기도 하며, 일본 내의 이주노동자를 지칭하게도 되었다. 옌타운에 사는 옌타운들의 삶 속의 꿈을 그리고 있는 영화가 스왈로우 테일이다.

    삶의 단면, 생활의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 영화의 특이한 연출 때문인데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환상할 법한 것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로 My Way 노래 테이프를 찾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등장인물, 위조지폐를 이용해서 쉽게 부자가 되어 버리는 옌타운, 국제 경찰 조직 인물들과 그 행위, 사회의 밑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등장인물이 일본열도를 뒤흔드는 일본내 대스타가 되는 이야기. 그 하나의 소재가 영화 하나를 만들만큼 영화적인데, 이것들이 뭉뚱그려 있으니 이것은 참 특이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유쾌하기도 하다. 생각해보길, 킬러의 존재는 참으로 비현실적이지만 킬러 소재 하나만 영화가 채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걸 제재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납이 된다. 그런데 그 킬러영화에서 갑자기 불치병이야기도 나오고, 외계인도 나오고, 거대 태풍이 몰아쳐서 도시가 잠기는 이야기도 나와버린다면? 각자 어느 영화의 제재나 될 법한 것들이 소재로 앙증맞게 혹은 뻔뻔하게 자리잡고 있어 버리니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 앞서 이것들은 무엇일까 하고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이것들은 도대체 뭘까? 이 비현실적 상상력들이란.

    -뭘까?
    그것들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치부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린다.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옌타운과 국가 정체성 문제도 짚고 넘어가고 싶고, 성장 이야기도 말해주고 싶고, 돈 앞에서 선 인간들의 이야기도 말해 보고 싶고 등등. 그런데 예술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 메세지로 명료하게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야기속에 어떻게든 쑤셔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는 그 사건들이 제법 있을 법한 일들이라고 개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의 사건들에 개연성을 모두 집어넣으려면 이야기를 굉장히 길게 끌어갈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압축하자니 어설프게 보일 것이 뻔하고… 그래서 아예 포기를 한다. 개연성 따위는 집어치워! 보여줄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큰 테두리 줄기 아래 곁 테두리 소재들의 엽기적인 출몰들. 그러나 이 포스토 모던틱한 무의미성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큰 테두리의 스토리라인조차 침범할 경우 그 영화를 완전 쓰레기 영화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만 한다면, 영화 자체가 쉬어진다. 개연성 불가와 개연성의 범주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유롭게 보여줄 것을 아주 쉽게 등장시키고, 생략할 것을 마음대로 생략하는 제작자 위주의 영화를 마음놓고, 대놓고 만들어 제낄 수 있기 때문. 또한 무의미한 척 했던 것 중 어떤 것에 살짝 의미를 덧씌우기를 한다면 영화는 ‘뼈 있는 농담’ 을 했다는 호평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영화(?) 는 그 모든 스토리 간에 구분선이 묘연해지고, 어떤 것이 유효하고 어떤 것이 유효하지 않은 것인지, 관객조차 내가 저것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던지, 감동했던지 조자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감동을 얻지는 못하였는데 어떤 마음의 움직임은 얻었는데 그것이 ‘새로운 감동’ 인 것인지 그저 ‘색다른 느낌’ 이었던지 판단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효성과 불필요의 구분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끝도 없는 SF란 상상력의 낭비이고 광대함이 광대해진만큼 공허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뜻 밖의 살인사건으로 부터 시작되는 엉뚱한 이야기들은, 그 큰 줄기를 이루는 위조지폐 사건, 클럽의 비약적 성공 사건, 대스타가 되는 사건, 메이홍이 죽는 사건에서는 유효하나 그 외의 것에서는 굳이 그 정도로 엉뚱함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점을 낳게 한다. My way 테잎을 찾으려는 것,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것 말이다. 테잎 찾기와 국제 경찰조직은 영화에 액션적 요소로서 볼 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방대하게 만들어 버렸고, 너무 엉뚱하였으며, 큰 줄기 이야기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한 마디로 불 필요한 부분에서 오버했다. My way 라는 노래로 하여금 인생의 길과 제 인생의 장애물들, 변해버린 자아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의 비약이 너무 심했던 듯 하며,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경우는 위조지폐를 만드는 배경이 되긴 하였으나 그것을 위한 필연으로 등장시킨 경우 치고는 너무 광대하였고, 의뭉스러운 점을 너무 많이 만들고 있다. 거의 묻지마 등장으로 일관하고 있어버리니 좀 황당해질 수 밖에… 이 모든 SF적인 요소들은 그래도 영화 자체에 이미지 형성 혹은 분위기 형성에 있어서는 적합하게 묘하고, 엉뚱하고, 쎈티멘탈하고, 삽화적인 느낌으로 착실히 녹아내려 있다. 하지만 영화는 분위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앞서 말했듯이 엉뚱한 것들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압축, 생략, 상상력의 발현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영화기법은 아주 유효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분별한 확장으로 영화 자체를 분위기로 이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므로 영화의 스토리 라인 일부를 사건으로 떼 내어서 말해 본 것이다.

    – 엉뚱한 것들을 모두 껴안아 주는 것은
    매우 광대한 스토리들, 수많은 등장인물들, 개연성 불가의 이어짐들 이것들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영화자체가 그리 산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 진행을 보여주는 것들은 고백체 혹은 1인칭 주인공의 나레이션에 상당부분 의지하여 안정감을 유지한다.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같은 경우가 그런 일면을 볼 수 있다. <스왈로우 테일> 에서도 초반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자막과 함께 등장하던 나레이션은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양하고 광범위한 이야기들을 산만하지 않게 소화하고 있다. 그것은 그 광범위한 이야기를 우선 1인칭 주인공의 한에서 소화해내고 있고, 그것이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와 결부되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성장 이야기야 말로 가장 거대해질 수 있는 스토리라인일 수 있다. 일부를 유아기적 상상력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고,  일부를 성년기의 새로운 세상의 모습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는 양면의 장점. 스왈로우 테일에서 주인공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주인공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 주인공은 외부의 것들 모두를 수용한다. (아니 수용하기 보다 외부의 것들에 반발하려는 의지가 없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어이없는 것을 어이없게 여기지 않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따라와야 할 법한 지저분한 고정관념과 충돌들이 없기 때문에 영화는 모두를 수용하면서도 그리 산만하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가 계속 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성장한다. 백지상태라고 여겨졌던 주인공의 과거는 결코 백지상태가 아니었다. 문신을 하는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낸다. 성장을 위해서 자신이 누락시켰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한 마리 나비로 성장하여, 한 주체가 된다. 가만히 있었던 주인공은 이제 자신이 무엇인가를 꾸미게 되는 데 그 행동양식이 옳건, 그르건 주인공과 함께 호흡했던 관객들은 이 성장의 모습이 감동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감동을 위한 초석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조금 넓히면 옌타운인데, 아무리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도 그들 모두의 이야기 주체는 옌타운이라는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선은 일관된 것이다. 1인칭 주인공의 성장이야기, 옌타운이라는 동일한 목소리라는 시선이 이 영화의 광범위를 수용해주는 동력이라면 동력, 원천이라면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
    영화에서 주 타격대상이 되는 것은 돈이다. 돈은 영화 초반부 주인공 엄마의 죽음에서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못치루고, 그녀가 모아 둔 돈을 티격태격 하는 모습, 그리고 중반부 위조지폐로 쉽게 벌리는 돈, 주인공이 위조지폐를 만들었을 때 위조지폐를 찢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모두가 목숨 거는 돈이란 결국 무용한 것 이 이야기이다. 언제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수많은 뻔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감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왈로우 테일>에서는 돈은 의지만 있으면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 현대사회에서 돈에 부여한 그 주체를 탈각시키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 그것은 바로 위조지폐로 돈을 산더미처럼 모아 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라면 찢어도 상관 없는 것, 너도 찢어봐, 나도 찢어볼게 하는 식의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그것이 결국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으로 결부되는 것. 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놀랍고 현실적인 발상으로 만들어버린 시선이 놀랍다.

    -정체성
    옌타운은 일본 사람도 아니고, 자신들의 고국 사람들도 아니게 된다. 돈을 벌어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옌타운이다 라고 하고, 그들만의 클럽을 만드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는 그리 소용이 없어 보인다. 그저 동일성을 형성하는 집단이라면 그 집단 내부의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고 산다면 그 집단을 국가에 앞서서 생각해봐야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에는 일본인처럼 생긴 옌타운들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하는 미국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은 옌타운들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한 소리다. 그러면 모든 것은 분화된다. 국가라는 정체성으로만 상정하기에는 그것들이 포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협소한 것이다. 옌타운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일본인 처럼 생기지 않은 일본인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수많은 비주류들은 국가가 포함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이런 국가 정체성의 협소한 모습의 지적.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유효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최종후기
    난 사실 영화를 매우 좋게 봤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게 보았던 부분은 영화의 분위기 자체였고, 영상미와 일부 의미심장하게 하려 했던 대사에 기인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바로 후에 반성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이 후에 다시 뜯어보았다. 이 생각의 과정은 아주 오래걸렸다. 영화 스토리의 일부분을 잊을정도의 시간동안 이 감상문이 쓰여졌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매우 후련하다. 이 글로 하여금 <스왈로우 테일>은 내게 새롭게 왔다. 확신하건대 더욱 좋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도록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의 울림이 더욱 깊어졌으며 더욱 오래남을 것만 같다.

  • [다섯손가락-수요일엔 빨간장미를] 그 옛날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주고파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슬퍼 보이는 오늘밤에는
    아름다운 꿈을 주고파

    깊은 밤에도 잠 못 이루던
    내 마음을 그녀에게 주고 싶네

    한 송이는 어떨까 왠지 외로워 보이겠지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꺼야

    시린 그대 모습 씻어주고 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슬픈 영화에서처럼
    비 내리는 거리에서

    무거운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습관일진대 나는 서먹서먹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옆에 있어도 그야말로 대놓고 노래를 흥얼거려서 주위 사람들의 핀잔까지 들어가면서도 더 억지스러운 흥얼거림을 하는데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정작 또 사람들이 그래 너 한번 노래한번 해봐라 하고 멍석깔아줘서 노래를 시키는 것은 또 엄청 싫었다. 노래를 잘 못하기도 하고, 가사를 외운 노래가 거의 없기도 하고, 무대 공포증(?) 때문이기도 하고… 등등등. 그야말로 장난꾸러기 너 그래 어디 한 번 판벌려 줄게 맘놓고 저질러봐라 할 때 아무것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누나들은 노래 테이프 인기가요 테이프 대신에 줄기차게 PEACE 라고 하는 피아노 악보를 사왔다. 그것은 인기있는 대중가요를 피아노 음계로 편곡하는 것으로 악보당 500원주고 음악사 등에서 파는 것이었다. 나는 음자리를 볼 줄은 모르고 단순 거기에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사진이 있고 또 내가 못 외우는 가사가 바이브레이션 부분까지 물결로 그려지면서 착실하게 기재되어 있어 정말 할 일 없고 심심할 때마다 그것을 옆에 쌓아두고 한 곡씩, 한 곡씩 부르고 놀고 그랬다. 그 중, 유독 수요일 빨간장미를의 PEACE 만이 다른 악보처럼 누런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어서, 단순 그 이유 때문에 그 노래의 유행이 한참이나 지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PEACE를 찾아서 부르고 자연히 흥얼거리고 그랬다.

    6학년때던가, 5학년때던가. 이미 한참이나 유행지난 수요일에 빨간장미를을 매번 흥얼거리던 내가 우스워보였나보다. 몇몇 짓궂었던(내게 있어서 이제 그녀들은 짓궂다!) 여자아이들이 내가 무슨 일로 교단을 서게 될 일이 있자 담임 선생님을 추동하여 수요일에 빨간장미를 노래를 시키라고 했다. 아아! 정말 그 순간 앞이 시커멓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 모두가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노래라니. 동요도 아니고 유행도 지난 대중가요라니. 거기다가 가사도 다 못외웠는데! 가사를 모른다고 뻐튕겼더니, 맨날 흥얼거리면서 모를리가 있느냐고 반박. 정말 모른다고 뻐튕기니 그럼 맨날 흥얼거리던 그대로라도 한번 해보라고 당하고..

    앞이 시커먼 가운데 나 혼자 가사를 막 지어내서 억지로 쥐어 짜듯 수요일에 빨간장미를을 노래했다. 지금 생각들기로는 그저 앞에 가서 노래한거구만! 일텐데 그때는 꽤나 부끄러웠고, 나를 단체로 타박하던 그 여자아이들이 짖궂게만 보여 억울했던지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날이 비오는 수요일이었던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 데 지금 돌이켜 보길 그런 것만 같다.

  • [괴물-봉준호] 장르영화 실짝 빗겨가기

    괴물에 대항하는 가족의 사투. 이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을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보통 상상하게 되길, 서울이란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고, 그것에 납치당한 주인공들의 딸내미를 구출하는 것이란 뻔한 것들로 매개될수도있다. 그것은 그 부류의 영화가 다들 그렇게 하는 것들, 평범한 일반인이 자신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괴물에 대항하는 과정이 영웅적으로 비춰지고, 그것은 영화 속 사회내에서 영웅으로 인정받는 정도의 스토리 라인? 주인공 자신은 딸내미를 구하기 위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을 테지만, 그것은 온 사회, 인류를 구하는 것으로 결론내려진다. 필사적인 사투는 필사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결말되었을 때 무지막지한 감동(?)을 낳으면서 관객들은 아! 저 사람 덕분에 살았어. 라고 여기가 되는 것. 뻔할 뻔짜이면서 재미있게 되는 액션/재난 영화 스토리가 이니던가. 어쨌든 주인공은 그럴 때 한 인간이기에 앞서 그가 지켜낸 집단을 상징하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기도 하고, 그것은 국가이기도 하고, 그것이 좀 과장하자면 인류이기도 하고.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노골적인 영화 말고도 수많은 액션영화들이 다 그런식이지 뭐. 그런데 괴물은 그것이 아니다.

    순차적으로 영화를 따라가보자면 장르영화에 대한 의심은 처음부터 해소될 순 없다. 미군에서 방출한 약품에 의해 괴물이 탄생한 것은 우선 소재로 치부하자. 여기서부터 의심을 말끔히 해소할 순 없는 것이 잔뜩 사회 비판적인/풍자적인 허세를 부리다가 그건 한낱 소재로 비껴치우고 결국은 평범한 스토리 라인에 지극히 상투적인 주제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액션영화가 얼마나 많은가.(그러한 영화의 소재화가 ‘심각한 것들을 무덤덤하게 하기’ 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 조금 이상한데? 라고 생각되는 것은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누군가의 자살씬이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장르영화를 빗겨가고 있다. 그럴듯한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선 깨트리지 말아야 할 도덕률이,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이다.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고 치밀하게 지켜질 때 그 부류의 영화들은 관객에게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런데 괴물은 누군가의 ‘태연한 자살’ 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류에 온 몸 받친 영웅의 사랑 보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송강호(극중 강두) 가족의 사투를 비춰지는 관점에 주목해보자. 보통 예상하길 처절한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다가, 분노하고 복수해야겠다는 의지를 돋아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송강호가 초반에 미군장교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것에는 누군가를 구해야 겠다는 정의감보다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영웅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애처럼… 그리고 합동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이 뒤엉키는 모습도 희화화되고 있다. 왜 저렇게 가족의 슬픔을 가볍게 취급하지? 하는 물음은 곧 이어지는 정부의 생화학적 대책에 감독의 주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구나 하는 대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미군이 약품을 흘리게 되는 원인과 연관되어 이 가족의 시련이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의 다수에 대한 ‘no배려’로 생겨난 것인데, 거기에 항의해야 할 가족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목소리도 내지 못한 체 무작정 배제되는 상황, 배제되다 못하여 제 몸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체 해부되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것은 분노하게 만든다. 다분히 집단(정부, 미국?)에 대한 희롱은 슬픔과 분노로만 표현하기에 그 가족의… 뭐랄까 생존력이 억압당한 자들의 처절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풍자적인 성격으로 표현되면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표현된다.

    감독은 이것을 노린것은 아닐까? 분노로 표현하게 되면 격정적인 감정에 치우쳐 놓치게 되는 것들을 얼마만큼의 거리두기로 하여금 더 많은 말들을 하게끔… 그래서 영화 자체가 무겁지가 않다. 긴장감이 면면히 흐르고 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할 상황속에서도 웃음이 유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의 사투를 지켜보면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명확해 진다. 그것은 권력자들이다. 권력이란 일반적으로 하위체와 상위체의 쌍방합의에 의해서 생성되고, 하위체는 상위권력이 하위체의 권리를 시혜에 주기를 기대하는 양상을 띤다. 그런데 상위권력의 뒤퉁수를 치는듯한 행태를 <괴물>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으며, 그들 상위 권력체가 더이상 대다수 사람들의 권리를 대변할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제 하위체들,그들의 삶과 권리는 그들 스스로가 나서게 만든다.

    송강호를 비롯한 그들 스스로가 나섰다. 주인공 송강호는 그 캐릭터자체가 웃기다. 가장 슬퍼해야 하고, 가장 분노해야 하고, 가장 주인공 스러워야 할 그가 그러하니 그가 인류를 대표할 영웅이 되긴 글러먹었다. 보통의 영화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가족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슈퍼맨을 띠고 있는데, 송강호네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박해일(극중 남일)이나 배두나(극중 남주)가 더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가족관계가 아버지란 존재로만 대표해버리는 권력관계가 해체되고 있다. 가족은 ‘오로지 내림사랑(부모에게서 자식으로)과 가부장에 대한 기대’보다 상호사랑이다 라고 영화는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권력체가 일방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폭로하고, 상위권력체가 이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교차되면서 괴물이라는 영화가 권력관계의 구조적인 해체를 말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수직관계보다 수평관계에 <괴물>은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괴물을 없애는 씬은 약간 어설프다. 그 중요한 상황에서 경찰 혼자 등장해서 총을 쏠리는 없거니와, 모두 흩어져 있던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이 그 중요한 시점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 같은 설정은 약간 무리적인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 연극같은 설정이 그래도 아류작의 어떤 것과 다르게 생각되는 것은 이 영화 전체적으로 흐르는 풍자적인 성격과 희화화하기에 편승해서 쇄신된다. 전통적으로 클라이 막스에 이르는 장르영화의 과정들을 거부하는 반항의 표시라고 여긴다면 영화에 너무 편을 들어준 것 같지만, 일정정도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할 듯 싶다.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의 합동공격으로 괴물은 무찔러진다. 여기서 영화는 영웅은 없었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수배자로 찍혀버린 그들 셋이 사회의 공공의 적을 무찔러주었지만 그들이 영웅취급을 받을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어떤 명성과 어떤 굉장한 정의감이 아닌 자신의 생명과 권리를 자기들 스스로 싸워나가는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박해일이 어느 노숙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한 때 데모질을 했다는 부자친구는 배신했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노숙자는 돈거래를 거부하고 박해일을 도와준다. 그것은 민중들이 싸우는 것에서, 위로 표현되기(영웅화 되기, 권력화되기)를 거부하고 수평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우리들 삶은 우리가 지킨다는… 그렇다면 정부 등은 이제부터 어떻게 봐야지 라고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것들은 결국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 권력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라고 답을 내릴수 있다. 송강호는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딸내미를 못구했지만, 노숙꼬마를 하나 구했다. 마지막 씬에서 송강호와 식사하는 꼬마아이. 상부권력의 배신이 큰 충격이었고, 제 목숨은 제가 지키기 위해서 아직도 총을 옆에 끼고 있는 송강호. 한국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내는 TV는 재미없어라고 하는 말에 동조하며 꺼버리는 모습. 저것은 이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 어떤 자들의 입장에 취한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지 라는 송강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꼬마아이와 함께 사는 송강호의 결말은, 영화 초반에 누군가가 태연히 자살했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생명을 장르영화처럼 -절대 지고 지순한 도덕률-로 제시하면서 영화를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생명은 결코 하찮은게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진귀함에 있어서 가족, 인종, 위치지움에 의한 값싼 정의감보다 생명 자체가 소중하다는 본능적/인류애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영화가 계속 해체시키려는 진정한 적은 권력을 위한 권력체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면 도대체 그 괴물 자체는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괴물 자체가 어떤 감정을 가진 동물이 되어 어떤 무언가를 수행하려 한다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그런 성질을 지니지는 못하였어도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이유. 탄생은 미군의 no배려로 시작되었고 송강호 가족에 의해서 죽임당해야 하는 운명. 탄생부터 죽기위해서 태어난 그 것. 아직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 [Hanson-MMMBop] 더운 여름날, 매운 비빔면

    You have so many relationships in this life (너는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 )
    Only one or two will last (결국엔 그 중의 하나나 둘 정도만이 남게 될거야)
    You’re going through all this pain and strife (너는 이 모든 고통과 투쟁을 겪어야만 해)
    Then you turn your back and they’re gone so fast (네가 지난날들을 돌아볼 땐 이미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린 후일 테지)
    And they’re gone too fast (인생이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거야)
    So hold on the ones who really care (진실로 아껴줄 사람들을 찾아)
    In the end they’ll be the only ones there
    When you get old and start losing your hair (네가 늙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 때 결국 그들이 너의 곁에 있어줄 거야)
    Can you tell me who will still care? (너는 누군가 아직도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니?)
    Can you tell me who will still care? (너는 누군가 아직도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니?)

    *MMMBop, ba duba dop Ba du bop, ba duba dop  Ba du bop, ba duba dop Ba du (Oh yeah)

    In an mmmbop they’re gone (Yeah∼ yeah∼ yeah) (그들은 떠나버렸어)
    Plant a seed, plant a flower, plant a rose (씨앗을 뿌려, 꽃을 피워 봐, 장미를 길러)
    You can plant any one of those (너는 이런 식물들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어)
    Keep planting to find out which one grows (꽃을 길러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It’s a secret no one knows (그건 아무도 알 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야)
    It’s a secret no one knows (oh∼ oh∼, No one knows) (그건 아무도 알 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야)
    In an mmmbop they’re gone (그들은 떠나버렸어)
    In an mmmbop they’re not there (그들은 거기에 없어)
    In an mmmbop they’re gone (그들은 가버렸어)
    In an mmmbop they’re not there (그들은 거기에 없어)
    Until you lose your hair (Whoa oh) (너의 머리카락이 빠질 때까지)
    But you don’t care (yeah∼ yeah)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Can you tell me? (Hoo) (내게 말해줄 수 있니?)
    No, you can’t ’cause you don’t know (아니, 모르는 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
    Can you tell me? (oh yeah) (내게 말해줄 수 있니?)
    You say can but you don’t know (알고 있지 못해도 너는 말할 수는 있을 테지)
    Can you tell me (Oh) (내게 말해줄 수 있니?)
    Which flower’s going to grow? (어떤 꽃이 잘 자라날지를?)
    No, you can’t ’cause you don’t know (아니, 너는 모르는 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
    Can you tell me (내게 말해줄 수 있니)
    If it’s going to be a daisy or a rose? (여기서 데이지꽃이 피어날까 장미꽃이 피어날까)
    You say you can but you don’t know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나는 ‘고등학교 유학 생활’ 을 하기 전까지 어디 멀리 나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틀어박혀있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긴 했으나, 기껏 나다닌다는것이 동네 한바퀴, 그 이상은 별로 나다니지 않았다. 누구든지 틈틈히 친척집에 찾아가 놀고 한 그런 기억이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을진대, 나는 가족과 친척네만 갔다 하면 집에 가자고 마구 졸라댔다. 방에서 차분히 있는 성격도 아닌 녀석이 어디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집에 가자- 집에 가아아아자-

    라고 옹알이를 해대니 부모님도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어렷을 적부터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이를 잘 대해지 못하였고, 전에 허물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보기라도 하면 이를 어떻게 대하여 할지 당황하곤, 그 쪽에서 별 반응이 없으면 전에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처음 본다는 듯 뚱하게 있곤 했다. 완전 소심. 그것은 지금까지도 경향중인 것인데, 그래도 많이 나아진거다. 그렇게도 낯을 가려서 친척집이든 어디든 잘 놀러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집에 조용히 있지도 않고 혼자서 잘 놀았다.

    혼자서 요리를 해보겠다고 별 이상한 것을 다 만들어보기도 했고
    (평범한 것은 싫었던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특이한 것들)
    몇 시간동안 악보를 펼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어느날은 계속 그림만 그리고
    어느날은 혼자 나가서 소꼽장난을 하고
    어느날은 동네에 난 무를 찾아서 그 줄기만 뽑아먹고 다니고
    강아지풀만 가지고도 하루종일 잘 놀고

    그러면서도 혼자 노는 기분이 안들었던 것은 항상 한번 했던 것은 다시 잘 안하려 했고, 홀로 다중인격을 만들어 대화했으니 이를테면 이렇다.

    ‘오늘은 무엇무엇을 만들어보겠어요’
    ‘어머어머- 정말 흥미진진하겠네요’
    ‘그렇죠! 짜잔! 완성입니다!’
    ‘정말 당신은 세기의 천재가 따로 없는게 분명해요!’

    라는 식으로.
    자폐적이라고는 말아주길.
    나는 그래도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다.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노는것도 좋아서 이렇게 놀아왔던 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부터 나만의 시간은 매우 줄었다. 아니 없어졌으며, 시간이 있어도 더이상 그렇게 놀지 않았다. 한 학년이 4반까지 밖에 없는 조그만 중학교에 갔으니 초등학교때보다 성적이 조금 좋게 나왔고, 집에서 거는 기대는 컸다. 거의 그 시절, 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빡쎈 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그다지 욕망 없던 내게, 계속 야망이라는 것을 갖도록 만들었다.

    너는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좀만 하면 너도 전주로 고등학교를 갈 수 있어!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는 것이 서울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야!

    고등학교를 전주로 가고, 대학교를 수도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학교때 부터 공부하는 것도 늦은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 공부! 어이없게도 제일 내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그 학원이었다. 일명 부안군의 1등짜리들만 모아두었다는 그 학원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학생들을 공부시켰는데 그것을 포섭에 대한 환상과 배제에 대한 공포로도 부를 수도 있겠다. 잘하는 아이는 감싸쥐고, 못하는 아이는 때리고, 무한 푸쉬업. 그래도 안되면 내쫓기까지 한 그 학원은 정말 대단했다. 아이들은 모두 여기서 쫓겨나면 고등학교를 제대로 못가고, 대학교를 제대로 못가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RPG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업을 위한 노가다 몸부림을 하는 것처럼 공부를 했다. 그래도 제 때 집에 보내주기만 했다면 결코 집에서 책을 펴는 습관이 없던 나는 그 물결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을 텐데, 거기선 밤까지 자율학습을 시켰다. 요즘에는 흔한 풍경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때 내 기억에 시골의 중학생들이 어느 학원에서 밤까지 자율 아닌 자율학습을 한다는 것은 꽤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춰진 것 같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A반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잘하는데 좀 부진한 아이들에게 B반으로 내려가고 싶어? 라고 말하고 나면 아이들은 눈물을 떨구면서도 그 학원을 다니길 고집했다. 아주 단순한 운영방식이지만, 효과는 최고(?)였던 듯 싶다. 정말 각 중학교의 상위권을 모두 그 학원이 휩쓸었다 시피 했으므로…

    이제 판타지 소설을 읽고,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는 시간으로 내 여가시간은 채워졌다. 주말이 아닌 평일엔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밤이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 학원은 계속 되고, 결석을 할 때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퇴출이라는 협박에 못이겨 꼬박꼬박 나가긴 했으나, 그래도 한계가 있는 법. 수많은 시간을 다 잡아두기는 에어콘 전기세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 같다.

    그 어느 여름방학의 낮.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

    커튼 사이로 뜨거운 했빛
    달달거리는 선풍기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모든 방문은 열려 있었다.

    어디서 이 상황을 겪은 것 같은데 하는 데자뷰와 함께 컴퓨터 게임을 일시중지  하고 집안을 우왕좌왕했다.

    뭘 하지? 뭘 해야 하지?

    떠오른 물음이 낯설지가 않았다.
    한낮의 시간에 나 홀로 있는 것. 그냥 앉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으려 했던 초등학교 낮의 물음들. 그 뒤로 무슨 일을 꾸며내든 혼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던 것이었다.

    나는 누나방을 뒤적였다. 명곡앨범들 뒤로 Hanson 이라는 앨범이 있었다. 언젠가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바람난 듯 나갔다가 사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때 버림받았던 나는 대단한 것이 돌아오길 기대하였으나 기껏 온 것이 음악 CD 한 장이었으니,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누나들도 그리 틀은 적이 없었다. 혼자놀기 법칙의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것을 틀어보았다. 뭔가 낯선 음악일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익숙한 리듬의 MMMBop이 흘러나왔다. 별 음악을 취미로 삼지도 않던 내게도 익숙했으니 그때 Hanson의 인기는 대단했나보다.

    익숙한 리듬이 나오니 신났다. 신나서 열려있던 모든 방문을 모두 다 더 활짝 열어 제끼고, 음악소리를 최대로 크게 틀어두었다. 그리고 열무 비빔면을 끓였던 것 같다. 그때 내겐 너무 너무 매웠던 열무 비빔면을 거실 한바닥에 앉아서 먹고, Hanson 의 MMMbop은 집안 전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어느땐가, 누나들이 사서 모으는 유행가 악보 ‘PEACE’를 방바닥에 깔아두고, 50장 정도 되는 그것을 모두 크게 노래불렀던 때. 마치 가수가 된 마냥, 콘서트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으로 혼자 맞장구 치고 놀던 그때가 떠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느낀 데자뷰가 무엇이던지 깨달았다.

    내 기억속에 최초로 추억이라는 것을 잡으려 했던 그 때.
    처음으로  ‘그 때는 그랬는데’ 라고 읊조렸던 그 때.

    에어콘도 없이 달달거리는 선풍기 하나가 있었건만
    서늘한 기운속에 쇼크를 주는 매운 비빔면의 맛.

    Hanson의 MMMbop이 지금까지 내게 주는 느낌이다.

  • [Cher-Believe] 태어나 처음 산 정식앨범

    No matter how hard I try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You keep pushing me aside (당신은 나를 자꾸 밀어내는 군요)
    And I can’t break through (그러니깐 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어요)
    There’s no talking to you (당신과는 대화가 안됩니다)
    It’s so sad that you’re leaving (당신이 떠난다니 너무 슬프군요)
    It takes time to believe it (떠난단 사실을 믿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죠)
    But after all is said and done (결국 모든 것이 다 끝이에요)
    You’re gonna be the lonely one (당신만 외롭게 되겠지요)

    Do you believe in life after love? (사랑 후에 삶이 있다고 믿나요?)
    I can feel something inside me say (내 안에 뭔가 말하는 소리를 느낄 수 있어요)
    I really don’t think you’re strong enough now (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Do you believe in life after love? (사랑 후에 삶이 있다고 믿나요?)
    I can feel something inside me say (내 안에 뭔가 말하는 소리를 느낄 수 있어요)
    I really don’t think you’re strong enough now (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What am I supposed to do?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Sit around and wait for you (그냥 앉아 마냥 당신을 기다릴까요?)
    Well, I can’t do that (음, 난 그렇게는 못합니다)
    And there’s no turning back (그러니 돌이킬 수 없어요)
    I need time to move on (계속 살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I need love to feel strong (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Cause I’ve had time to think it through (왜냐면 충분히 생각해 봤거든요)
    And maybe I’m too good for you

    Well, I know that I’ll get through this (음 내가 이런 것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Cause I know that I am strong (왜냐면 내가 강하다는 걸 알거든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No, I don’t need you anymore (그래요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타율학습, 거기서 이어지는 잠과 스트레스. ‘공부에 관심 없음’ 은 곧바로 ‘일탈’ 혹은 ‘저항’ 으로 생각해버리는 속에서 대개는 ‘열심히’ 책을 펼쳤을 것이다. 딱, 딱 네분단으로 줄맞추어진 책상과 의자. 거기에 앉아있던 까까머리 교복들. 바지를 줄이기도 하고, 머리에 스크래치를 긁기도 하고, 귀를 뚫기도 하고 그러하여도 고등학생이라고 불러지는 우리들의 이름.

    그 고등학교 시절.
    우리에게 가중되는 압박이 강압일수록,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들의 ‘자그마한 일탈’ 은 더 재미있고, 더 애틋한가보다. 고등학교 시절, ‘아 공부해야는데, 공부해야할 것 같은데…’ 하면서 읽었던 소설책들, 보았던 영화들, 들었던 음악들, 빠졌던 게임까지도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고, 그것들의 즐거움이 그 어느시절의 추억보다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등학생’ 이라는 압박속에서 누렸던 즐거움이기에 더 그러한 것일테다.

    그 ‘해소’를 위해 아이들은 쉬는시간만 되면 한결같이 이어폰을 끼고, 마치 음악에 심취한 듯 그렇게 있었다. 지금만은 내 감정에 휘둘리는 시간이야. 라는 듯이, 지금만은 내 감성을 살려두어야 겠어 라는 듯이. 양 귀를 감싸쥐고 듣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음악적 취향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뉜다.

    인기가요를 듣는 부류
    팝송을 듣는 부류
    좋아하는 가수 음반을 듣는 부류

    난 그 중에 팝송을 듣는 부류에 끼고 싶어했다. 왠지 고등학생이 되었으면 팝송을 들어야 할 것 같았고, 그게 좀 더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게  Cher-Believe에 닿게 된 연유였다. 팝송을 들어야지 하고 산 MAX라는 팝송 인기가요 컴플레이션 앨범에서 유독  Cher-Believe가 귀에 들렸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하기 힘들만큼 굵은 음색을 가지고 시원하게 카랑카랑 내뱉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들. 그리고 싸이버틱한 전자음들과 당시는 정말 신선한 기교였던 목소리 꺾기. 그것을 따라한답시고 얼마나 요상한 음을 내면서 연습했던지… 그래서 Cher 의 앨범이 내가 난생 처음 산 가수의 정식앨범이 되었다.

    이 나만의 기념비적인 노래인 Cher-Believe는 내게 뜻하지 않은 선물도 주었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처음 일주일을 지내고 집에 내려가면서 내리  Cher-Believe를 반복재생 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생긴 소환력(?)이다. 즉, 지금도  Cher-Believe를 들을때면 그때 기숙사에서 집에까지 가던 그 경로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되어버리는 것이다.

    음악은 본래 그런 묘한 마력 혹은 특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굉장히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Cher-Believe만큼 내게 강렬한 재현을 구사하는 노래는 없는 것 같다.

    전주발 부안행 버스안에서 가슴 두근거림. 차가운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를 쿵쿵 부딪혀 아파도 했지만, 그래도 유리창의 차가움이 좋아서, 기대고 있는 것이 좋아서, 기대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 흔들림에 몸을 맡겼던 기억.
    부안으로 진입하는 버스에서, 이제 부안이 더이상 ‘내가 사는 곳’ 이 아닌 ‘내가 살던 곳’ 이 겠구나. 이런 것이 ‘고향’ 이라는 것이구나라고 다짐하듯 생각하던 기억.
    우리집의 불빛을 앞에두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커지는 가슴떨림. 그때 불던 입김이 유난히도 꼬리를 달고 호호 날려서 그것을 보다가 밤하늘을 보고, 고향하늘에는 별이 참 많았구나 라고 인지했던 기억들을

    Cher-Believe는 내게 준다.

    그리 음색이 애틋하지도 않고, 가사도 관련 없지만  Cher-Believe가 주는 귀향의 이미지.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들이다.
    되도록 오랫동안 그것이 그대로 있었으면…

  • [2007.5.24.] 잡스런 고민

    잠시 오늘 마음이 흔들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이다.

    정보품 관련 특품을 기왕이면 취득하고 싶은데…

    찾다보니 국제품 특품 기준이 토익 850점 이상임을 알았다.

    나는 바로 지난번 점수가 790이니 60점만 올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거만한 생각이…ㅎㅎ

    지금와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자!

    라는 생각이지만…

    구체적인 일정 계획표가 없으니 오늘도 책을 그리 많이 읽지 못하고 잠이나 퍼자고..

    이제 일정한 생활리듬이 쭉 유지될 것이니 어서 짜야지. 부지런한 생활 계획표를!

  • [2007.5.24.] 어떤 핑계에 대한

    “가능할까요?”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죠.”
    “하지만 한 사회의 희망이 개인의 희망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묘한 거짓말이죠. 그 누구도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순 없어요. 종교적 신비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죠.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식으로든 개인의 삶이 사회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그런 희망을 만들면서 살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같이 사는 사회니만큼 관심은 가져야 하죠. 한 사회의 불행이 개인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마치 나를 두고 말하는 듯싶었습니다. 상관 없다고, 관심 없다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들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한번 제대로 못 한 채 철저하게 짓밟힌 나를 두고 말하는 듯싶었습니다.
    -이인휘 [내 생의 적들]

    나는

    여성이 아니라고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장애인이 아니라고
    이주 노동자는 아니라고
    월급 100만원 미만의 노동자는 아니라고
    비정규직은 아니라고

    그 때 그곳에서 고문받던 그 사람이 아니니깐

    더 골치아파하고 싶지 않아서
    나만은 조금이나마 행복해지고 싶다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혹은

    푸르른 자연 속에서
    안위도식하는 것이 더 위대한 것이라고
    내 가정의, 내 연인의, 내 친구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 쪽 눈을 모두 감은 채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것은 모두 무채색을 가장하지만
    그것은 지독하게
    다수의 바탕색을 따르는 것

    처음부터 타고 있던 버스 안에서
    파이 한 부스러기를 움켜잡고
    그것, 조금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매트릭스 세계의
    전원 공급 밧데리

    식물인간 육체 속에서
    환각의 뇌세포들이
    행복해! 행복하다고!
    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지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이
    도저히 인지할 수 없어
    지금 먹고 있는 스테이크 맛 외에, 그 무엇도
    없다면 그것으로 족할 테지만

    어찌할 수 없겠지만

    누구든 이미 알고 있다

    네오가

    당사자들이
    저항하는자들이
    ……

  • 시집 읽는 즐거움

    아직 그리 많이 읽지 않아 시집읽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붙이기가 살짝은 민망하지만
    요즘 시집에 재미를 붙인것은 사실이다.

    갇혀 있는 김(?)에 좀 어려운 것들을 두고두고 보다보면
    무엇이든 피가되고 살이되겠지 하는 마음에
    23살, 태어나서 처음 산 시집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이었다.

    거의 엎드려 자거나, 결석, 지각을 밥먹듣이 하면서
    얼핏 들었던
    어느 문학수업의 선생님이
    굉장히 높은 차원의 예술성을 지닌 작가라고 이야기 했던 것도 같았고
    주변에서 대명사처럼 기형도라는 인물을 흔히들 거론하기도 했던 것도 같았고
    뭔가 이름부터가 특이해서 마음에 들었고
    한 여러가지 심경에서
    내 생전 처음 구입한 시집이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이 되었던 것이다.

    그 문학수업 선생님이 알려 준
    시집읽는 요령으로는
    한 구절, 한 구절 노트에 베낄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소설 읽듯이 쭉 읽어라
    라고 한 것이 생각 나
    그냥 소설 읽듯이 쭉 읽었다.
    한번 읽고 또 읽고
    어느결에는 그냥 펼쳐서 나온 시를 읽고 읽고
    그랬더니
    정말

    시가 내게로 온 듯 했다.

    기형도의 시는
    절규를 외치는 것 마저
    약간의 희망을 품는 것으로 생각될만큼
    처절하고, 절망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나는
    그와 나를 끊임없이 비교대조 해보게 되고
    그인 척 해보기도 하고
    하는 사이
    읽는 순간만큼은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것을 더 알고 싶어서
    시라는 것을 더 읽고 싶어서
    산 시집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였다.

    기형도의 시가 고도의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면
    최영미의 시는 비교적 직설적이었다
    또 너무 솔직하기도 하였다

    최영미의 시는 한 번 읽는 순간
    시 속의 그녀가 내게로 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그녀의 상처와 성숙과 성찰의 고백들이
    내게 정말 힘을 주었으며
    나를 다시 바라보게도 했으며
    나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게 한 것 같다.

    그 리고
    김선우, 김정란, 박노해, 김수영의 시집들을
    그런 느낌들을 기대하며 지금 책장에 꽂아 두었다.

    시라는 것.
    왠지 너무 가볍거나
    왠지 너무 무겁거나
    한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시라는 것.
    문학중에서 가장
    작자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장르가 아닐까 한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시도 픽션이 아니라고 우길수만은 없겠지만

    작자의 생영혼에 스카타토를 뛰우고
    그것이 가장 꿈틀꿈틀 대면서 오게 하는 형식
    그것이 시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난 아직
    어느 작자의 시 한두편만을 봐서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간다
    시집 한권을 읽어야
    쭉 소설책 보듯 읽고, 틈날때마다 또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봐야
    시가 내게로 온다.

    뭐 더 독해력을 길러야지 하는
    그런 욕심따위는 없다
    그저
    작자와 공명하는 나 자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요즘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