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어머니 담론과 가족 담론

    0. 들어가며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조주은 씨는 논평에서 어머니를 위와 같이 언술하며, 현대사회 속의 어머니를 자동판매기에 비유하기도 하다. 우린 설탕프림커피라는 현모양처의 명령버튼을 누르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하게끔 행동하기를 강요하고, 거기서 블랙커피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땐 “어떻게 엄마가 이럴 수가 있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하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억압 기제는 단순, 가족관계 상에서 ‘어머니 외의 사람들’이 ‘어머니’를 식민화한다는 단편적인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동판매기 버튼이 요구하는 어머니 상이 조금 더 엄격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게 되는 비난의 정도가 크기 때문이지, 아버지, 자식 등등의 가족 구성원 모두 그에 합당한(?) 버튼을 부여받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를 덧씌워놓고, 서로를 감시하고 타박하는 그물망이 바로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런 가족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 속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도 하고, 아내가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가족관계에서 “난 이만 빠질래.”라고 외쳐보며 가족의 해체를 말하기도 하고, 또한 <가족의 탄생> 같은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행해진 현대사회의 가족에서, ‘현대사회’에 방점을 찍고 현대사회 이전의 가족 형태로의 향수를 일으키는 형태도 있다. 그것이 지금부터 살펴 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경우이다.
    작품 해설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오랜 흐름을 한곳으로 모아낸 빼어난 소설적 결정(結晶)’ 이라는 민망한 찬사를 들을 만큼, 이 작품은 신경숙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너무도 익숙한 흐름이다. 그리하여 『엄마를 부탁해』의 텍스트에 직접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경숙의 이제까지 창작경향과 평가를 잠시 살핀 후에 들어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이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1. 90년대 문학과 작가 신경숙

    1990년대 한국문학 자신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당시에 나타났던 문학적 경향 전환은 뚜렷했다. 그 중 신경숙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금이 있던 자리』의 위치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해당 작품은 진보이념의 급격한 퇴조가 불러일으킨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사적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공세적 자기노출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이 주류 문단에게 승인되었다는 현상을 넘어서 90년대 소설의 경향성 변모를 상징적으로 징표하는 것이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데, 신경숙 특유의 서정적인 심리 묘사와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딸기밭』 으로 이어지는- 역시 그리 큰 변화없이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경숙의 특징들이 90년대 한국문학의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경숙은 공지영, 은희경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대중에게 승인받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비롯한 주요 문학상을 휩쓸어 왔던 것이다.
    외부의 시선에 묻혀 있었던 개인의 발견과 개인 정체성의 구현과정. 그 개인이 이제껏 익숙했던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 특유의 더듬거리는 문체 등의 특질은 신경숙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갈등의 지표를 형성해 오기도 했다. 이른바 ‘여성문학’, ‘사소설적 경향’ 그리고 ‘감성적 문학’에 관한 것이다. 이 중 여성문학에 관한 논의는 넓은 폭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편이다. 한편에선 여성의 목소리를 주체화하고, 독자에게 ‘감정의 위안’을 안겨준다는 데 의의를 두는 반면, 한편에선 신경숙이 이상화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의 전근대적 형태에 주목한다.
    이런 논란과는 별개인 것처럼 신경숙은 주류 문단에게 두루 찬사를 받아왔는데, 이것이 90년대에서 21세기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문학의 현 위치를 지시해 준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전까진 방향이 비교적 뚜렷했던 이른바 ‘창비’와 ‘문지’는 신경숙이란 대형 작가에 대해서는 토스해주기 바빠서 서로를 희석시켰고, 신경숙은 조선일보에 『리진』을 연재하고,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단으로 상징권력을 획득하는 한 편, 『엄마를 부탁해』를 창비에 연재하고 대히트를 쳤다.

    2. 식민지 엄마의 귀착지

    2.1.  엄마와의 대면

    목적어와 서술어는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제목 ‘엄마를 부탁해’. 부탁해라는 호소형 서술어가 때리는 파장이 꽤 크다. 그리고 책을 열어보면, 바로 등장하는 ‘너’라는 인칭. 실제로『엄마를 부탁해』가 구사하고 있는 형식은 대단히 이채로운데, 그 이채로움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각 장마다 서술인칭이 달라지는데, 1장은 큰딸의 2인칭, 2장은 장남 형철의 3인칭, 3장은 남편의 2인칭 그리고 유언장 혹은 넋두리처럼 쓴 4장만이 1인칭으로 되어있다. 먼저 2인칭으로 서술된 1장과 3장은 ‘엄마의 자식’, ‘아내의 남편’이라는 주체를 설정하여 독자가 자식이든, 남편이든 강력하게 이입할 수 있는 기제가 2인칭으로 제공되고 있다. 더욱이 1장과 마주하는 독자는 자식이란 이입코드 외에 작가 신경숙이란 실제인물의 코드와도 대면하여 더욱 강력하게 엄마와 마주하는 존재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다소 이질적으로 튀어오르는 것이 3장 형철-그 라는 3인칭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질성을 서술의 일관성으로 덮어버린다.
    각 장에서, 각 장의 주체들은 실종된 어머니의 상태에 멈추어 서서, 자신의 서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너-큰딸, 그-형철 그리고 당신-남편의 서사는 그들 주체의 이야기이기보다 그들의 기억 속에 담긴 엄마의 형상화 작업들이다. 엄마의 형상화 작업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태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엄마가 어떤 사람임을 만들어간다. 에피소드들을 더듬어서 각 장을 이끄는 주체가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하면 할수록, 주체는 더욱 선명해지는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장의 결미로 갈수록 주체는 마주한 엄마와 자신을 비교, 대조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강화시켜나간다. 이러한 일관성은 다소 다채롭게 변하는 인칭변화를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 결국,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각 주체의 개별 특질들은 소멸하고, 엄마와 ‘엄마를 대하던 가족 구성원’이란 관계로 재구성된다. 2장의 형철-그 라는 3인칭 또한 그것이 유별나게(?) 존재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질이 포기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떤 주체로 나타나건 간에 감성적인 고백조의 문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존재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2장의 3인칭의 존재이유는 일종의 숨고르기 정도라 할 수 있다. 너라는 지칭이 고조시킬 수 있는 추궁의 포즈를 조금 완화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론, 1장에서 형성한 ‘작가 신경숙’-너-독자라는 강력한 이입관계의 틀에서, ‘작가 신경숙’이 빠진 상태에서 2인칭을 유지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겉으로 보기엔 다채롭지만, 실상은 다층적인 ‘엄마와 대응하는 이들’과 ‘각기 다른 모습의 엄마’ 이기를 포기하고 일대일 대면의 포즈를 보여주면서 작자는 같은 이야기를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면 작자는 결국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각 장의 주체들의 통해 어떤 엄마의 모습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에 주목해볼 수밖에 없다.
    개별 주체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엄마이지만, 그 작업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앞서 말했듯이, 개별 주체는 ‘개별’ ‘주체’란 말이 무색할만큼, 특이성 없이 일관된 형태로 엄마 앞에 끌려나와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엄마도 오로지 단일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그것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습으로.

    너의 엄마는 몇해 전부터 내 생일은 따로 챙기지 마라, 했다. (중략) 식구들이 모이게 되면 며칠전에 새 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끊어오고, 치약과 칫솔들을 준비했다. 돌아갈 때 한병씩 나눠주려고 참기름을 짜고 참깨들깨를 따로 볶아 찧었다. 가족들을 기다릴 즈음의 너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나 시장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 단연 활기를 띠었고 은근히 자부심이 배어나는 몸짓과 말투를 보였다.(pp. 11-12)

    위 인용이 작품 속 엄마에 대한 첫 서술이다. 엄마의 일상생활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여기서 등장하려는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고기를 끊어오고, 참기름을 짜서 준비한다는 다소 상투적인 모양새에서부터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의 가족 속에 그런 엄마가 있든 없든, TV드라마만 틀어도 곧잘 뛰쳐나오던 엄마. ‘그런 엄마’는 자식을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가히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헌신적인 무한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명줄을 갉아먹는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가족사랑에 여념이 없는 엄마의 모습은 헌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후로 끊임없이 형상화되는 엄마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 보면, 작품이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진 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런 엄마’ 와 맞대면 하는 ‘당신’ 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데, 더 심혈을 쏟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작품 속 엄마의 모습이란 너무도 상투적이다 못해 신파적이며, 그런 잃어버린 엄마에 반응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형상화되는 엄마에 대한 죄의식에 취해 버렸다.
    아버지-당신을 주체로 하는 3장은 ‘아버지-당신’과 엄마의 대조관계를 통해 슬픔의 기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 1-2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을 형성하고 있다. 동어반복적인 죄의식과, 죄의식에 처해진 아버지-당신의 극적인 반응을 통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재하고 있는 아버지-당신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지난 기억들을 반추하고, 부재하는 엄마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독자. 독자는 결국 어떤 자신과 마주하는가. 작가가 ‘부탁했던 엄마’를, 부재하는 엄마의 귀환을 격정적으로 촉구하게 된다.

    2.2. 엄마의 귀착지

    엄마는 귀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를 귀환시키기보다, 엄마의 전환을 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그렇게 귀환을 고대하게 했던 그런 엄마의 다른 면모가 4장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엄마이다.

    곰소는 당신 때문에 내게 잊지 못할 곳이 되었재요. 나는 늘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이 생겨야 당신을 찾았재. 그리고 내가 그만그만 평화로워졌을 땐 당신을 잊었소. 곰소라 찾아간 나를 보고 당신이 내게 한 말도 무슨 일이요?였재.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당신을 찾아간 건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오로지 당신을 찾기 위해 간 길이었네. (pp. 233-234)

    은규란 남자는 엄마의 말을 빌어서, ‘내 인생의 동무’가 되어주었던 자였지만, 은규쪽에서는 사뭇 다른 듯했다. 은규는 엄마에 맺힌 감정의 내적 혼란을 겪어, 곰소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물론 은규 혼자만의 짝사랑은 아닌 듯하다.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모인정하게 굴었네. 생각해보면 참 나쁜 일이었네. 미안하구 미안허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랬고, 얼마 후엔 그래선 안될 것 같아 그랬고, 나중엔 내가 늙어 있었소이.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있어 보이고 싶었네.(p.234)

    엄마 또한 은규를 ‘죄’이고 ‘행복’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은규를 욕망하고 있었다. 단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삼켜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작품의 막바지로 치닫는 부분에서 나타난 이 갑작스러운 전환이 책 뒤 커버의 말처럼 ‘마지막 한 방의 충격’으로 충분히 드러났던가. 옛날 어머니를 복원하는데 머물지 않고, 실재했던 자신만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을 드러냈던가. 거기에 대해서 필자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엄마도 욕망이 존재했다는 에피소드가 수면위로 떠올랐을 뿐, 그것이 작품 내 가족 구성원이 그리고 있던 엄마와 다른 ‘또다른 여인’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껏 엄마라는 존재를 전혀 다층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에서부터 연유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너-큰딸이던, 그-형철이던, 당신-아버지이던 간에 구성되는 엄마의 상은 시종일관 ‘엄마’라는 명명에만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극한의 희생을 보여준 엄마를 구현하며, 마주하는 대상의 죄의식을 건드리기 바빴다. 작가가 최대의 호소력을 지니게끔 만든, 보편적이면서, 이상적인 식민지-엄마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비현실적 로맨스가 현실성을 확보하긴 힘들었다. 오히려 마지막 장은 엄마가 지닌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기보다, 그런 욕망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엄마로서의 자신을 수긍하였던 참된 존재였다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엄마를 최종적으로 성모로 수렴시키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원이자, 미래는 곧 ‘성모 마리아’ 로 신성화된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 극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인이 되는 존재. 이런 ‘성모 마리아 되기’ 는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다 살려내는 기술을 가졌다. 원래 이집의 짐승은 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개를 얻어다 기르면 새끼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낙갔다. (중략) 그리 데려온 강아지는 마루 및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 배 여섯 배 낳았다. (중략) 가지를 모종하면여름이 지나 가을까지도 보라색 가지가 지천이었다. 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pp. 160-161)

    밭에서 내려와 고모에게 이러저러한 사람하고 온종일 밭을 같이 맸다고 하니 고모의 얼굴이 굳어지며 얼굴의 생김을 묻더니 그이는 오래전 그 밭주인으로 그 밭에서 김을 매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이라 하더라, 했다. (중략) 무섭긴, 내 혼자 그 밭을 다 매려면 이삼일을 걸렸을 틴디 함께 매줘서 고맙기만 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p.65)

    위 인용은 엄마가 생명과 죽음에 있어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는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이 외에도 작품의 엄마가 지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자욱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타인의 아이(은규의 아이)에게까지 젓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이를 사산했을 때 별도의 의식을 치루던 모습. 뇌졸중이란 극한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 등의 것들 등.
    엄마란 존재를 이렇게 신성화시키는 것은, 작품 속 엄마를 특수하게 숭상할 만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이 세상의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마리아상을 덮어 씌움으로써 작품 속 엄마만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다. 극한 희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엄마들의 기원. 작가는 그런 이야기가 해 보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로 엄마를 치환하면서부터 혹은 치환하기 위해서 엄마에게 극한 희생은 어쩌면 당연한 전제가 된다. 성인은 고통을 품고 탄생하는 존재이고, 그 고통을 수긍하는 자세 때문에 숭상 받는 존재이다. 결국 가족 구성원들이 죄책감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껴야 하므로 어머니는 일탈할 수가 없다. 일탈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균’이라는 인물처럼 사랑해주고, 잘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면서, 모진 고통을 감수하는 동안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균’처럼 착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3. 가족의 귀착지

    3.1. 이분법적 세계관

    신경숙의 여타 작품에서도 두루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엄마를 부탁해』속에도 그녀 특유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촌과 도시의 대비, 그리고 문맹과 문자세계라는 대비는 그 형상 자체가 미묘한 효과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것 사이에 놓인 엄마라는 존재로 인해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하고, 작품이 방향하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부모세대로 대표되는 엄마는 농촌이자, 문맹이다. 작품 속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농촌과 문맹의 세계에 놓여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자식들이 문자의 세계에 그리고 도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신의 큰 딸을 어떻게든 문자세계에 들여놓게 하려고 가락지까지 팔았던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둘씩 서울에 집을 살 때, 이로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모습 등이 그러한 모습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자식세대들이 다른 세계에서 권력 주체자가 되는 것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큰아들 형철은 검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나마 큰딸이 문자세계의 발화자가 되면서 엄마의 자랑이 되긴 하지만 도시란 공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큰 딸은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글을 쓴답시고 연락두절로 집에만 박혀 있는 비정상적인 생활상이 언제나 엄마에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농촌과 문맹이라는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을 문자와 도시의 세계로 보내는 것은, 그녀의 자식들이 그 곳에 가서 자신의 기원을 발화하기를 원하는 것인 듯하다. 엄마 자신의 매개물이기도 한 감나무를 막내딸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그러한 엄마의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렇게 서울의 땅에 심겨진 감나무는 좁은 흙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쫙 뻗은 채 엉겨붙어’ 서울의 흙에서 생존할 것이다. 문자와 도시의 세계에서 엄마라는 기원은 그렇게 끊임없이 현대산업사회를 ‘좋았던 시절’로 이끌려고 한다. 실종된 엄마의 복원을 바라는 서사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식세대가 엄마와 함께했던 시골 가족공동체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는 것과 대응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못 말릴 회귀가 퇴행으로 보이지 않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시골 공동체의 행동양식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결국 이분법적 세계관의 노림수는 두 가지 절차를 밟는다. 문자와 도시 세계로의 진입 그리고 진입 후 자신들의 기원을 소망하라는 것. 어찌보면 전도사의 역할이라고까지 극단화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을 소망하게 하는 그 가족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3.2.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

    『엄마를 부탁해』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소적으로 그려지는 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족 내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가족의 맏며느리인 ‘올케’이다.

    이번엔 올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수를 적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p.14)

    – 진이가 와서 뭘 해요? 내가 오지 말라구 했어요. 우리도 찾아 볼 만큼 다 찾아봤잖아요. 경찰도 못 찾는 걸 우리가 어떡해요. 서울의 이 많은 집들마다 초인종 눌러가며 혹시 여기 우리 어머니 안 계시냐고 물어요? 어른들도 속수무책이라 이러구 있는 판인데 진이가 뭘 하느냐구. 학교 다니는 아이는 학교 다녀야지, 그럼 우리 어머니 안 계신다고 우리 모두 자기 일 팽개치고 말아요?
    – 안 계신 게 아니라 잃어버렸잖아.
    – 글쎄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구요! 당신도 회사 다니잖아요!
    – 뭐?
    그가 분개해서 방 안에 있는 골프채를 집어던지려고 할 때였다 (p.135)

    – 좋으시겠다, 어머니는. 이렇게 비싼 옷을 척척 사주는 딸이 있구. 난 우리 어머니 여우목도리도 한 장 못 사드렸는데. 밍크는 대물림하는 거래요. 돌아가실 때 제게 물려주세요.
    –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뭐 사달라고 한 것이에요! 왜 그러세요!
    작은딸 화내듯이 며늘애에게 퉁박을 줬을 때야 알앴재. (p. 244)

    올케는 도시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시의 사람이며, 엄마의 귀환에 그리 애가 달아있지도 않은 현실감각을 가진 이다. 죄의식에 들끓어 있는 형철은 올케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서고 있는 분노를 풀어버리려고도 한다. 그것은 올케가 ‘엄마의 가족’ 외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올케라는 외부인이 형상화는 작품 『엄마를 부탁해』가 귀환하고자 하는 가족은 철저히 혈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통과 비혈통이란 이분법이 형상화되면서, 성모 마리아란 인류의 어머니상은 ‘인류의’ 어머니상이 아닌 각자의 사적 가정 속의 어머니상으로 갇히게 된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엄마의 가족’을 구성하는 같은 혈통으로 묶이게 되었던가. 그리고 올케는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작품에선 엄마의 승인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당신의 누님이 살림 말아먹을 여펜네! 라며 아내를 처가로 보내버렸다. 열흘이나 지난 밤에 술에 취해 당신의 발걸음이 처갓집으로 향했다. (중략) 무슨 말 끝에 장모가 목소리를 높이며 그깟 놈의 집구석으론 들어가질 말고 짐 싸들고 아예 나와버리라, 하니 아내는 훌쩍이며 장모에게 대들었다. 중어도 그 집으로 들어가 죽을란다, 하였다. 거기가 내 집인디 내가 왜 나오냐, 하였다. (중략) 대나무숲을 지나서 아내의 손을 놓은 뒤론 앞서 걸었다. 이슬이 바지에 툭툭 떨어졌다. 그때도 뒤처진 아내는 당신의 등뒤에서 좀 천천히 가시요잉! 벅찬 숨소리를 내며 따라왔다.(pp. 183-184)

    엄마는 죽어도 그 집에 가서 죽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친정어머니의 계통을 잇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선언’은 가부장에 의해 승인받게 된다.

    엄마는 그길로 집에 들어와 여자를 부엌에서 밀어내고 밥을 지었다. 여자와 아버지가 마을의 다른 집을 얻어 살자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집으로 달려가 여자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아궁이에 걸린 솥을 떼어내 도랑물에 떠내려보내버렸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움꾼이 되기로 한 것 같았다. (p. 105)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밤이 되어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또 어느날붙턴가 아침에 밥을 풀 때 아버지 밥그릇에도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었다. (중략) 여름에 나갔다가 겨울에 들어온 아버지를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온 사람 대하듯 엄마가 아무 말 않고 그저 숭늉을 떠다 밥그릇 옆에 놓아 주는 것도. (pp. 107-108)

    위의 서술도 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에 의한 엄마의 승인이 있어야만, 엄마가 가족의 혈통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그려내고 있는 귀환해야 하는 가족의 상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그것은 혈통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고모라는 시어머니, 아버지라는 가부장 그리고 가부장에 의해 승인된 엄마까지 전통적인 가족상으로 확고히 존재하고 있다. 올케가 여기서 그 계통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진 않지만 올케 자신이 그 계통성 자체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올케는 앞의 서술에 등장한대로 시어머니의 실종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있다.

    3.3.  위기의 가족을 대하는 방법

    영화 <좋지 아니한 家>에서 가족의 모습은 『엄마를 부탁해』와 상당히 다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가족들이 모두 마루에 나와 밥을 먹을 때이다. 영화 속 가족들은 각기 자신에게 부과된 친숙하지도 않은 가족 내 역할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다. 또한 더 불편해하는 것은 서로 사랑해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다. 영화에선 낯선 타인들의 어색하고도 긴장된 식사시간이 연출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은 이제 더 이상 특수한 풍경만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나마 마루에 나와서 같이 밥이라도 먹고 있지만, 수많은 가족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서로가 얼마나 가족 내에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지 불평하고, 자기 자신만은 또한 자유롭게 욕망하는 근대적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김영하의 단편<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아빠’와 ‘주인공 나’는 그런 모습의 극단적 형태이다.
    『엄마를 부탁해』도 이러한 가족의 위기 속에 탄생한 서사이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의 위기라는 문제에 ‘현대 가족의 위기’로 지시하고, ‘현대’라는 말을 뺀 복원시켜야 할 가족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현 가족의 관계망은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안에 혈통주의와 가부장제가 온전히 들어있음에도,『엄마를 부탁해』는 발뺌한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기원에서부터 존재할 수 있었던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확고한 기반 아래 가족이란 틀 자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확고한 사랑할 수 있는 관계망을 두고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독자를 설득한다.
    사랑이라는 관계망은 사실상 근대부터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근대 이전의 가족의 형태에서 부모자식 간에는 일방의 공경이나 복종의 관계 그리고 형재․자매 간에는 장남을 중심축으로 하는 서열관계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족 관계망은 그대로 사회적 관계망으로 확장하여도 무리가 없는 상태가 바로 근대 이전이었다. 가정의 확장이 사회가 될 수 있었던 일률적인 세계관 속에 놓여있었기에 가족에 별 다른 위기가 없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 그런 일률적인 세계관은 붕괴하고, 독립된 개인은 자기 자신의 합리성과 욕망의 조합으로 제 인생을 자기규정 해야만 했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더 이상 아니며, 독립된 개인의 집합이 될 위험을 지니게 된다. 가족형태의 이런 빈틈 속에 ‘사랑’ 이라는 감정의 기제가 채워진다.
    근데 만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 이란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엄마를 부탁해』는 왜 가족이란 좋은 걸 두고 사랑할 수 없느냐라고 되묻는 것이다. 전통적 가족의 틀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그것 자체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해야할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엄마가 무한으로 주는 사랑에 열심히 대답하여, 엄마가 깨는 장독 뚜껑의 수를 줄여주자고 이야기 한다. 헌데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답변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다라고 말해보기도 하고, 가족이란 확고한 틀을 먼저 선정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가족이다라고 말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같은 경우에는 폭력과 권위에 의한 가족형태를 문제시하며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가족이 위기인 이유를 말하고 있고, 영화 <가족의 탄생> 같은 경우에는 사랑해서 가족이다라는 다소 돌출된 대안을 제시하여 현 상태 ‘위기의 가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가족이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관계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헌데,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었던 관계망이 더 이상 현 시점에서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기보다, 위기로 다가가게 하고 있다면, 가족이란 관계망을 송두리째 문제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욕망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을 이상적 전통 가족 관계의 틀에 맞추도록 뒤돌아보게 하는 일은 너무 쉬운 결론이다. 개인을 확고한 가족이란 틀에 짓뭉개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도 생각이 든다.

    4. 맺음말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당신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부탁하기보다 사실상, 강요한다. 큰 딸, 큰 아들 그리고 남편이란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인 엄마를 보여주면서 엄마에게 좀 잘해줘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희생을 대가로 숭고 대상이 되는 엄마의 서사는 현실의 엄마들에게도 ‘어떤 방향’ 을 제시한다.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서 성모로 불릴 수 있게끔 착한 엄마가 되라고 귓속말을 뿜기도 할 것이다.
    어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호주제 찬반토론 중에 나왔던 말이 생각이 난다. 호주제를 찬성하는 입장의 어느 부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늘 아래 핀 꽃이 왜 아름답지 않습니까?” 라고. 그늘 아래 핀 꽃을 구현하는 것이 꼭『엄마를 부탁해』인 것만 같다. 타자를 배제하는 혈통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그늘. 그 그늘 때문에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라는 명명이 붙여지기도 하는 엄마. 그 고통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피었을 때만 성모가 되는 엄마란 꽃을 과연 아름답다고만 해야 될지 고민이 든다.

  • 카쉬Karsh 사진전

    나도 취미로 사진을 좀 좋아해 라고 이야가한다.

    근데, 이것저것 찍다보니…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찍어서, 내가 얼마나 사진을 잘 찍었는지 자랑하기 위해서?
    셔터를 누른다는 행위 자체가 뭔가 보람차서?
    인화물을 기다리기까지의 그 기다림이 너무 즐거워서?

    그 어떤 것도 해답이 아닌 것만 같았다.

    또한, 나는 왜 찍는가? 찍어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까지 시달리니…
    사진이라는 게 꽤 어려운게 되어버렸다.

    단순, 그림같은 사진, 예쁜 사진만 원한다면…
    그런 것이야 얼마든지 대충 찍어두고 포토샵으로 처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왜 가급적이면 보정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잘 찍으려고 할까’
    왜 그런 욕망이 발생하는가…. 까지 가니 좀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진관련 서적도 빌려보고 그랬는데.. 그다지 깨우치는 것은 없다…
    근데… 날 조금 깨우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네이버 오늘의 포토” 였다.

    거기선 사진작가들이 하루마다 하나씩 사진을 정해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주는데… 그것을 하루하루 보다보니깐… 아, 사진이라는 게 이런거구나 하는 감이 좀 오는 것 같다.
    이론적인 뭐 스킬 이런 건 전혀 아니고…

    난 이제껏 마냥 좋아 라고 일관해왔다면
    사진이라는 것이

    기록, 시각적 자극이 주는 즐거움, 찍는 자와 찍히는 것(자)의 교감, 그리고 새로운 의미생산까지 할 수 있는 매체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림같이 쨍한 사진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다녀온 (이제야 사진전 이야기 ㅋㅋ)

    Karsh 사진전은 정말 강렬했다.

    인물사진이 얼마나 강한 힘을 주는 지, 알게 해 준 사진전이었다.
    사진 한 장을 통해서, 그 인물의 성격부터 직업까지 인물의 총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진들…
    그야말로 기가막혔다.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전시회에서 보는 것은 또한 차원이 다른 행위였다.
    바로 내 앞에서 으르렁 거리는 처칠을 맞닦드리다 보니, 귀엽기도 하고… 뭐 암튼 각 액자에 걸린 사진들이 뿜는 오오라가 장난이 아니니…. 말이다.

    인물사진의 힘! 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대권이 있어서 공짜로 다녀왔지만
    돈내고 가더라도 그리 아깝지 않은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을 잘 몰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Karsh의 사진이 전해주는 힘은 오롯이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강렬하다…

  • [2009.4.2.] 일을 너무 많이 벌려놨다…

    국문과 수업들 발표준비에

    과제에다가

    시나리오 워크샵에

    공모전에

    중간고사..

    중간고사가 끝나면 조금 여유로워질까?

    그때는 또 졸업논문에, 졸업시험에 좀 더 강화된 시나리오 워크샵에 집중해야 하고

    6월엔 바로 기말고사다……

    기말고사만 끝나면 대학생활도 종결이라 할 만한데…

    그때까지는 여하튼

    좀 정신없겠어02

  • [2009.4.1.] 50문 50답

    <미디어액트 영화를 꿈꾸는 시나리오> 과제로 작성한 50문 50답.

    1. 이름?

    : 김덕중

    2. 본인의 이름에 만족하는가? 이름을 바꾼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 난 이름을 한번 바꾼적이 있었어. 그 전 이름은 비밀.. ㅋ 근데 지금 바꾼 이 이름도 만족스럽지가 못해. 집에서 어떻게든 돌림자를 써야한다고 강제로 지은 것아니 마찬가지였거든. 초등학교 4학년때 바꾼 이름인데, 그때 난 `김민수` 라는 이름을 강력하게 주장했지. 물론 내가 졌지만. 지금 다시 이름을 바꾼다면… 내 필명을 이름으로 쓰고 싶어. `초현`

    3. 필명과 그 이유는?

    : 영화 `마라톤`에서 초원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 같은 걸로 하고 싶진 않고, 초현… 좋은 것 같아. 현실을 초월하고 싶어 ㅋ

    4. 선호 인물

    : 난 웬만해선 인물을 존경하지 않아.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물이라는 `체게바라` 같은 인물은 존경보다는 내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어. 나는 `체게바라` 보다는 `전태일`을 존경해.

    5. 개인 홈페이지 주소는?

    : www.djinside.net

    6. 선호 음악?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라고 한다면 `이상은` 과 `이소라` 야. 좀 노인네 취향이란 소리를 많이 듣지. `한영애`를 좋아하기도 하고, 몇십년전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거든. 그런데 요즘엔 인디밴드쪽에 관심이 가고 있어. 난 고등학교때 한번쯤 관심가져봤다던 `락`은 관심도 없었는데, 나이들어서 `락` 계열을 듣고 있네. `델리스파이스`나 `언니네이발관` 류를 좋아하다가 요즘 `허클베리핀`을 좋아하게 ㄷㅚㅆ어. 근데 대체로 `포크`를 좋아하는 것도 같아.

    7. 취미는?

    : 난 영화를 좋아해. 책은 손에 쥐고 있으면 좋아하는데, 손에 잘 안쥐는 것 같기도 해. 음악듣기도 참 좋아하지. 아… 사진도 좋아해… 사진은 요새 좀 배우고 있는 듯 해. 뭔가 시야가 조금씩 트이는 느낌? ㅎ 쓰고보니 그리 특별한 취미는 없구나… 이런.

    8. 삶의 전공?

    : 난… 다른 사람보다 뭘 잘할까? 난 대체적으로 컴퓨터 관련한 것은 깊게는 아니고, 살짝쿵씩 잘해. 이미지 편집 같은 것을 대체적으로 좀 하는 편이야 ㅋ… 그래서 학교다닐 때도 유인물 만들고 하는 일 등에 시달렸어. 요즘엔 시켜주는 애들도 없지만 말이지. 요즘 애들 정말 다 잘한단 말이야.

    9.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

    : 큰 목표는 없어. 내게 길을 열어줬으면 해. 난 영상과 시나리오 관련으로 그리 체계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 감을 알게 해줬으면 해… 어떻게든 난 이 길을 가볼테니깐!

    10. 선호영화?

    :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하면 <빌리 앨리어트>야. <빌리 앨리어트> 같은 경우는 워낙 다층적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난 소재만 바꿔서 똑같은 전형들을 사용하고 있는 헐리우드식 영화들은 질색이야. 신선한 영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영화가 좋아.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는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야. 그것들은 너무 말쑥하게 빠져나와서 매력이 없어. 차라리 한국영화나 일본영화 쪽에 신선함이 많은 것 같아.

    11. 선호소설?

    : 난 소설가의 문체 이런 것보단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주 기준인 것 같아. 요즘 좀 질리긴 하지만 공지영 소설을 좋아했었어. 그녀의 소설에 담긴 고민의 수위가 꽤 깊다고 생각했어. 음… 그리고 `입 막힌 자들의 입을 터주는 자로서의 소임` 이라고 작가를 정의하였던 공선옥도 참 좋고, 요즘의 작가 중에 박민규가 신선했고, 이기호도 좋고, 김종광도 좋아하는 편이고,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 같은 경우는 읽으면서 흥분할 정도로 쾌감이었고!

    12. 기존 창작작업?

    : 학교 수업중에 영상학과랑 국문과랑 조인트로 하는 게 있어서, 그 수업에서 단편 2편을 써본 적 있어. 그리고, 나 혼자 TV 드라마 초고를 써본적이 있었고, 시나리오 스터디에서 장편영화를 초고 단계까지 가고 있다가…. 스터디가 깨지는 바람에, 그만뒀어.

    13. 1년 목표?

    : 졸업 후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 너무 불투명해서 사실 잘 모르겠어. 내 꿈을 향한 길이 바로 열릴 것 같진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 목표라 하면, 내가 불안한 마음 갖지 않고, 영화길을 걸도록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 정도.

    14. 10억이 생긴다면?

    : 영화를 만들고 싶어. 장편영화는 바로 무리겠고, 단편부터 바로바로 해보고 싶어. 그리고 좀 여유가 된다면, 해외에 나가보고 싶기도 하네. 나는 아직 한번도 안나가봐서 문화적 충격이 필요해. 그만 두고 싶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네. 아… 돈 중 일부는 꽤 안정적인 전세방을 하나 해야겠다.

    15. 주로 사람들과 만나 노는 동네

    : 대학로. 내가 대학로 살거든. 대학로는 너무 노는 분위기도 아니고, 문화공간이라서 참 좋은 것 같아. 물가가 비싸서 문제지만.

    16. 좌우명?

    : 난 몇 년째 싸이월드에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라고 써놨어. 근데 그게 좌우명은 아니야. 그건 그냥 써 놓은 거고… 난 그냥 이것저것 파란만장하게 살아보자 뭐 그런 가치관을 지닌 것 같아.

    17. 현재 가장 절실한 문제는?

    : 가족에게 나의 진로를 어떻게 설명하는 가. 그리고 졸업 후 생업 등… 정말 굶어죽는 거 아닌가 걱정돼.

    18. 문학 혹은 영상제작 등 창작 경험은?

    : 영상제작은 하루만에 찍은 영상이 2편 있어. 제목은 붙였지만, 작품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뭐 그런 찌꺼기. ㅋ 습작정도라 하면 되겠다. 문학은 군생활할 때 단편소설을 3~4편 정도 썼었어. 그때 쓸 때는 이건 정말 상받을 감이다 하고 신춘문예에 냈는데 모조리 떨어졌어. 전역 후, 학교 문학상에 썼던 것을 조금 고쳐서 냈는데, 거기서 우수상은 주더라. 근데 정말 내가 봐도 허접해.

    19. 소설, 영화 등 서사 가운데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되는 캐릭터는?

    : 음.. 일본영화에 주로 나오는 인생의 목적을 알 지 못하는 청년들 있잖아. 그거랑 좀 닮은 것 같아. 근데 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은 제 자신이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들처럼 방황하기 보다, 나는 여기저기 쑤셔볼꺼야.

    20.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3편 혹은 감독은?

    : <빌리 앨리어트>, <샤인>, <헤드윅> / 봉준호 감독

    21.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혹은 만화가 2인

    : 특별히 화가를 좋아한다곤 말하긴 그런데… 에곤쉴레 좋고… 만화가는 요즘 <이끼>를 연재중인 윤태호 참 좋던데. 완전 쩔어ㅋ

    22. 자기 휴대폰에 설정된 벨소리는?

    : 벨소리 여러개인데, 김광석의 <새장속의 친구> 랑, 숏버스 OST 랑, Lucid Fall 이랑, 비틀즈 노래랑 이렇게인데.. 그룹마다 맞춰서 한거야.

    23. 눈앞 책꽂이에 꽂힌 책의 제목은?

    : 난 소설을 좋아하는데, 소설은 빌려만보고 거의 사진 않아. 그래서 소설은 한편도 없어. 주로 군생활 할 때 읽으려고 사두었던 사회과학, 인문, 철학 서적이랑 시집이 조금 있네. 근데 이론서는 거의 못읽은게 태반이라 말하기 부끄럽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을 비롯한 것들이 좀 있고, 비평가 이명원씨의 <타는혀>를 비롯한 비평집이 몇 개 있고, 김선우씨의 시집을 비롯한 시집들이 몇 권 있구나.

    24. 컴퓨터 바탕화면은?

    : 난 주로 내가 찍은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하려고 하는 편이야. 지금은 짙푸른 하늘 아래 비행기 사진이야. 난 주로 파란색 하늘이 돋보이는 사진을 바탕화면을 설정하는 편이지.

    25. 즐겨 찾는 웹사이트는?

    : 포털말고, 즐겨찾는 웹사이트는… 음 .. 원어데이라는 이색적인 쇼핑 사이트도 가고, 박노자씨 블로그도 심심할 때마다 함씩 가고… 그래.

    26. 즐겨 보는 TV 프로는?

    : 난 TV는 거의 안봐. 그나마 가끔씩 백분토론을 컴퓨터로 보곤 해.

    27. 자신의 장점과 단점?

    : 난 의외로 남의 시선을 대단히 의식하는 것 같아. 그래서 좀 소심하지. 근데 좀 이기적인 면이 많아. 내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 막내라서 그런가봐. 그래서 타인에게 칭찬하거나 사과를 잘 못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이지. 그런데 속 안에선 이것저것 엄청나게 생각하는게 많다고! 아 몰라. 성격쓰기 참 어렵다.

    28. 자신 있는 요리?

    : 닭도리탕. 참 쉬워. 생각보다 말이지.

    29. 남들에게 지적받았던 습관/버릇이 있다면?

    : 나는 걸음걸이가 팔짜걸음이야. 대단히 마른 체구라 그게 좀 이상하게 보인데.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 걸 못해. 난 계속 제자리서라도 빙빙 움직여.

    30. 영화의 매력을 빠진 것은 언제부터인가?

    : 음… 대학교 다니면서 부터인데… 난 거의 모든 영화 제작자들이 그렇듯이 영화가 미치도록 좋아서 며칠동안 영화만 보고 그렇진 않았아. 그냥 심심할 때 한번 씩 보는 게 다야. 난 영화란 매체가 `말`을 하기에 참 좋은 매체라는 게 좋아. 그리고 영상이란 매체가 참 좋아. 글보다…

    31. 생애 최초의 기억 속의 영화는?

    : 내 최초의 기억 속 영화는 영구씨리즈같은데? 근데 우리집이 비디오를 빌려왔을 때 처음 빌려봤던 것이 `굿바이 마이 프렌드` 였어.

    32. 싫어하는 영화/영화인은?

    : 그… 두사부일체 삼인방. 정웅인이랑, 정준호랑 등등. 그리고 김수로도 별루고,

    33. 가장 여러 번 본 영화는? 몇 번?

    : 어렸을 때, 사운드오브뮤직을 집에서 사다 놨거든.. 한 10번 정도 본 것 같아. 좀 끊어서 봤지만 말이지. 아 어렸을 때만.

    34. 영화 한편을 추천한다면?

    : 음… 일본영화 <텐텐> 이나 <안경> 한번 추천해볼게. 좀 신선한 맛이 있어.

    35. 애장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면?

    : 난 파일로 애장하는데 ㅠ <빌리 앨리어트> 랑 <파이트 클럽>이랑 <샤인> 이랑 <헤드윅>이랑.

    36. 최근의 본 영화?

    : 앤티크

    37. 기억에 남은 최고의 명대사는?

    :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 이것밖에 기억 안나내. 명대사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38. 평생 단 한편의 영화만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겠는가?

    : 이제껏 영화에서 잘 다루지 못한 영화를 다루고 싶어. 요즘엔 시야가 트여서 동성애 영화를 만들고 있잖아. 나는 더 나아가서 금기를 깨는,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고 뭐 그래.

    39.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는?

    : 어디 있으면 편할까. 바다 앞에 가 있으면 참 좋은 것 같아.

    40. 가족 구성원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 막내야. 누나 둘이고 나만 아들.

    41. 외향적인가, 내향적인가?

    : 내향적

    42. 원리 원칙에 따르는가, 감정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가?

    : 감정 따라서

    43. 자신이 겪어 내며 살아가는 가장 큰 모순(들)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는 게 큰 모순인 것 같아. 추상적이지만, 이건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야. 나 혼자 정의한 나 자신의 의미를 어떻게 확대시켜나가는 가가 내 과제야.

    44. 두려워하는 것들은? (예를 들어 죽음과 그것에 대한 태도는?)

    : 난 죽음 자체는 그리 두려워 하지 않아. 죽음은 종결일 뿐이라고 생각해. 고통이 두려운 게지 뭐.

    45. 가장 싫어하는 행위?

    : 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걸 싫어하고, 귀찮다고 하는 걸 싫어해.

    46. 자신의 묘비에다 어떤 글을 새길 생각인가?

    : 묘비가 없었으면 좋겠어. 내 육체에 관련한 흔적은 그 어느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47. 어떤 경우에 가장 창의적인 기운을 느끼는가?]

    : 음… 터미널 같은 데서 지나가는 모든 타인들 곁에서 나 혼자만 있을 때.

    48. 학교 다닐 때 가장 신났던 학년은?

    : 대학교 새내기때가 거침없고 좋지.

    49. 가장 오랫동안 잠을 잔 기록은?

    : 24시간 잔 적 있어. 일어나보니 세상이 같았어ㅠ. 물론 그 전에 거의 이틀밤을 새긴 했지.

    50.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 베트남에 가보고 싶어. 물가도 싸고, 이것저것 느끼는 바가 많을 것 같아.

  • [2009.3.24.] 바쁘다

    일들이 폭풍처럼 밀어닥치고 있다.

    다 내가 벌인 일이다.

    다 재미난 일이다.

    발표준비만 빼고

  • [2009.3.21.] [독립영화 어디로 가는가] 상상마당열린포럼

    상상마당 웹진에서 포럼이 “무료” 라는 걸 보고
    낼름! 거렸는데, 됫다…ㅋ

    내겐, 독립영화에 관해선 처음 가보는 포럼이었고
    처음 접하는 실무자들의 이야기였는데…

    너무도 귀중한 시간이었다.

    독립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좀 감을 잡을 수 있었고
    내 자신에게 용기도 얻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 속에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한 위트가 하나 나왔는데..

    영화의 길이라는 게 정말 힘든데… 예비영화인들에게 어떤 자세가 필요한 것 같냐는 참가자의 질문에

    요즘, 불황이라 그래도 다행이지 않느냐고.
    다들 백수인데, 백수로 지내는 독립영화인들은 그래도 자기 하고싶은 거 하면서 사는 백수지 않느냐고…

    맹수진 패널께서 김종관 감독의 말을 인용하여 말씀해주셨다.
    농담이지만…

    성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독립영화의 길
    지난하지만, 그 즐거운 과정들
    멋지지 않은가!

    아! 그리고 또 하나 기분 좋은 일이었던 건
    무료로 그냥 왔다 가려는 내게, 염치없게도
    KARSH 사진전 초대권까지 줬다는 것이다.
    추첨으로 당첨되다니!
    요즘 당첨운이 좀 된다..
    8만원 상당의 연극티켓도 당첨된 것 같더니만
    이번에는 사진전까지~ 후후후

    PS: 오늘은 할 일이 꽤 되서 좀 바쁜데, 여유가 되면 독립영화와 이 포럼 관련 내용이 기억나는데로 정리해서 “단상”에 옮겨봐야겠다.

  • [2009.3.20.] 왜냐구?

    어떤 여자가 오토바이에서 이제 막 내린 남자를 붙잡아
    일행에 합류시켰다.
    엇갈려 손을 맞잡고,
    대명거리가 떠내려가도록
    그들만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그들.
    뭔가 자신만만하던 그들.

    나는 그때 하필
    장기하의 앨범을 들으면서 청승맞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왜
    너희들을 보며 깔보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지 알겠니?
    사실은
    질투하기 때문인 것 같아.

    나는 사실 얄팍한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거든.
    컴플렉스 덩어리거든….

    ㅋㅋㅋ
    재미있어

  • [2009.3.15.] 재미있는 인문학의 세계

    인문학이 재미있는 것은
    인문학의 시작점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을 포함한 여타의 것들이 인간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간
    인간이 만든 규칙들에서부터 시작하여
    규칙의 정합성과 시사성을 따지기 가거나
    아니면 오히려 미시적으로 인간의 일부 특질들에 대해서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인문학은
    인간이 왜 그런 규칙을 만들었느냐부터 시작한다.
    왜? 라는 끝없는 물음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왜 인간이
    국가를 만들었고
    민족을 만들었고
    역사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부터 던지기 시작하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정답없는 대답들을 끊없이 충돌시킨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런 환경에 놓여있던지
    내가 왜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던지
    를 막 파헤쳐버리는데…

    그 거침없는 손길이
    내 짱똘을 쥐어 흔들어버리면

    나는 조금, 희열을 느낀다.

  • [쉽게읽는 백범일지-도진순 역]

    삶의 의미를 자기 규정해야만 하는 혹독한 자유를 선포한 것이 근대이지만, 정령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은 자유로운 개인이 아닌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의 국민들이었다. 그런 제국-식민지 시대 속, 제국주의 국민들의 내면을 섣불리 판단내릴 순 없겠지만, 식민지 국민 혹은 식민지 개인의 풍경에, 우린 매우 익숙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자욱을 이따금씩 드러내곤 하는, 다소 상투적이라고 생각해봤던 그것. 그런 상투성 속에, 우리 역사속의 김구가 갇혀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조국독립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던 역사적 영웅이자 위인이란 사고의 틀 속에 ‘왜?’ 라는 이유가 빠져있는 것도 같다. 또한 한국사의 정점에 위치했던 김구가 방향했던 목표지점은 어디였던가. <백범일지>라는 자전적 기록의 면면들을 전형적 위인전이 아닌, 다중의 텍스트로 본다면, 죽어버린 위인 김구는 살아있는 개인 김구로 볼 수 있는 여지가 필자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위의 대장부가 바로 김구가 지향하는 삶이지만, 위의 모토에서 풍기는 대담한 결단력이 김구를 어디로 방향하게 하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동학접주로 활동하고, 의병에 참가하는 등 자부해도 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구에게 자주독립국가라는 이상(理想)은 근대적 사고체계에서 이뤄지기 보다는 오히려 봉건적인 사고체계안에 놓여있었다. 김구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는 스치다의 살해 계기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왜인을 죽였노라’ 였다. 사실상 스치다란 개인의 그 어떤 악행도 김구는 목격한 적이 없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 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에게 독버섯’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구 자신이 의병을 떠나기 이전에 일제에 의한 일가와 개인의 수난 등. 직접적인 계기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구에게는 조선의 쇠락과 수모가 꼭 자신의 쇠락과 수모로 등치되었던 것이고, 자신을 조선의 대장부로 위치짓고 있었다.
    김구는 어떤 이론적 학습에 의해 결단하기 보다는 그의 인생과 맞닿아 있던 여러 가지 체험들로부터 자신의 가치체계를 정립해왔다고 할 수 있기에, 1870년대에 태어난 김구가 봉건적 사고체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무작정 봉건성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만은 없는 것이, 김구는 아직 봉건적인 사회 속에서, 양반과 상놈의 구별없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도 신분차별 없는 새 세상이 그의 마음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단문으로 요약하자면, 치하포 사건까지 김구는 조선의 계통을 이으면서, 신분차별 없는 독립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김구의 사고의 전환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목표문장에서 조선의 계통을 이으면서는 괄호를 치게 된다. 김구에게 조선이란 외연이 없어진 연 후에도, 그가 공동체를 위한 ‘대인배’로의 길을 접지 않았던 것은 민족이란 외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족은 어떻게 서는가.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핵심적 활동을 했던 것처럼 근대적 국가 체제라는 형식으로 귀결이 되는 것인데, 김구는 오로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생각으로 근대적 국가 체제 앞에 괄호 쳐진 ‘서구 자본주의적’ 이란 엄청난 수식어를 놓쳐버리게 된다. 사회주의 운동 진영을 도외시 혹은 냉대하면서 중도 우경향을 취하는 것이다. 김구는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의 실현이 모범이 되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렇게 되도록 하자라는 사해 동포주의적 사고를 보이기도 하지만, 우선 우리 민족부터 라는 선후관계가 확실하였고, 그 실천적 방향은 이미 자리잡고 있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제 막 봉건에서 서구 근대성과 접점을 형성하기 시작한 한반도라는 공간적 배경. 그리고 그 속에 놓인 김구가 조금은 편향적인 활동 모습을 보이는 사회주의 운동진영을 대하면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구를 봉건성의 자장 안에 놓아보고, 좌우의 스펙트럼 안에 가두어 봄은, 결국은 한계적인 중도 우익적인 인물이었다는 단정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의 지도자’ 라는 수식어가 종종 붙여지곤 하는 김구라는 인물을 조금 더 선명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경향을 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흠집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좌경향이든, 우경향이든 그것이 흠집이 되는 것은 그런 정치성이 사사로운 이익과 결부되어 있거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김구는 기이할 정도로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문제와 관련없는 대장부정신 하나로 인생을 살아온 것만 같다. 우선 <백범일지>에서 보이는 바에 따르면 말이다. 어떤 객관적 자료조사도 없는 상태에서, 추측으로 김구란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 될 것이다. 필자가 <백범일지>에서 본 김구의 풍경은, 그래서 여기까지다.

  • [고고70-최호] 다소 긴 뮤직비디오

    암울했던 70년대가 배경입니다.
    오히려 통금 시간을 악용(?) 하여 12시부터 4시(?)까지 가둬놓고 놀아버리는 소울 로큰롤(?) 밴드의 이야기이죠.

    긴장 요인은
    그들의 음악을 즐길 줄 모르는 대중들
    그리고 이어서 돈 맛을 알아버리고 관성화된 밴드 멤버들
    그리고 이어서 암울하기만 한 시국
    인데요.

    글쎄요.
    세 긴장 요인 모두 원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탁 풀어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스토리는 과감히 삭제하고
    공연하는 비쥬얼 씬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서먹서먹하기만 한 배우들에게
    제작자 혼자 도취되어 공연에 미쳐버려랴고 주문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비쥬얼 자체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 비쥬얼지 주는 감동은 기반하고 있는 스토리가 탄탄하지 않기 때문에 미미하기만 합니다.

    배우들의 캐릭터가 개성있고 매력있으면서도 동감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빈약하고, 단절된 스토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화에 바탕해서 그런지 또 한 편 많은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공연씬들에 밀려버린 그 한쪽 귀투성이서 말이죠.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어찌볼 땐 너무 과도하게 순진한 설정들이 나오기도 하구요.
    엉뚱한 에피소드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황당할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 뮤직비디오 같았을 뿐이네요.

    그래도 조금 놀라웠던 것은
    의외로 신민아가 스토리 연기 이외의 면에서 훌륭한 퍼포먼스(?)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이었고
    조승우의 노래실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차승우는….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