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 캐릭터 연극

    “한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좋아서 탈이야. 원작품의 의도는 염두에도 없고 제멋대로 재주만 부리는군요. 막걸리 연극이랄까. 너무 텁텁해요. 깨끗하지 못하고 …” -전혜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연극을 그리 많이 봐오진 않았건만… 한국에선 배우들의 오버스러운 혹은 대단히 연극스러운 연기들로 인해 작품을 보기 보단, 연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곤 했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데, 당연히 연극의 작품마다 나오는 캐릭터들은 연기자들의 ‘재주넘기’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싶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의 일환으로…
    이젠 그런 연기자들에 맞춰져서 ‘창작’ 이 되는 것 같다.
    푼수떠는 오버 캐릭터와 고집 센 사람, 바보 혹은 광인 등으로 압축지어지는 해당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절규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아님 웃어댄다. 희비의 감정선이 매우 극단적으로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에 표출하는 캐릭터들… 현실에서 보면 조울증에 걸렸나 보다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캐릭터들이… 이젠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져서, 연극에선 원래 이런가보다 하고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젠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연극이라곤 거의 없으니깐.

    연극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는 그런 캐릭터들의 집합이었다.
    그야말로 캐릭터들의 향연으로 연극을 이끌어 가는데…
    아니, 인물은 왜 이렇게 많고, 극은 왜 이렇게 긴지… 그리고 몇몇 거슬리는 형식적 결함들.

    * 전형적인 연극 캐릭터
    여기서도 전형적으로 ‘연극에서만’ 드러나는 캐릭터가 모조리 총출동한다.
    억척어멈 캐릭터, 바보 캐릭터, 주접떠는 푼수 캐릭터, 이해할 수 없는 내숭 캐릭터
    현실감이 뚝뚝 떨어지지만, 우리는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수없이 많은 연극에서 봐왔던 캐릭터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캐릭터 양식에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적당히 연기력을 선보이고, 웃음을 자아내고 그런 상투성이 좀 답답하다.

    * 독백이 너무 많다.
    독백은 너무나 쉬운 장치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 장치이다. 어디 영화에서 나래이션 장치를 쓴 영화 말고, 독백을 그리 많이 하던가. 보통 그리스 비극을 보아도, 오오! 하는 짧은 독백을 쓰고 인물간 충돌로 극을 진행시켜가는데, <감포…> 는 그야말로 독백 천지다. 그것은 극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이, 현재진행형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를 보여줌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엄청난 과거’ 들을 독백으로 보여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감포…> 에선 이런 독백을 통한 고백’ 의 맹점을 ‘단순한 과거’ 대신 복잡하게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힌 ‘복잡한 과거’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고, 고백할 때 관객의 감정선을 극도로 자극하는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독백에서도 엄청나게 고함지른다…;;)근데 이것은 또 다른 맹점이다.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것과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는 것.

    *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다.
    연극 내내, 배우들은 고함지르고, 슬퍼하고,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자주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나로서는 시종일관 불편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모잘라 감정을 너무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연출하는 지 말이다. 그것이 극의 주요한 전개와 필연성을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슬픔과 웃음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연출자의 목표가 너무 심플하고 단순하게 드러난다. 아님 복잡다나한 감정보다, 극단적인 감정 연기가 연기하기 쉬워서 그런가?

    *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
    캐릭터의 과거만을 추적하는 것도 빡센데… 별 관련없는 인물의 사건들이 마구 등장한다. 예를들어 핵폐기장 건립 문제가 그렇고, 침 뱉는 고시생에 얽힌 사건이 그렇고, 시장통에서 야채 파는 에피소드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그렇고… 제일 결정적이면서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 시장통 깡패들의 등장이었다. 아아 너무도 진부한 깡패들의 방해행위는… 또 너무도 신파적으로 연출된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핵심서사에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그것도 별로 신선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기어이 2시간 넘는 시간을 채우는지!

    왜 내용적 측면은 얘기 안하냐고?
    음… 솔직히, 너무 극이 산만하기도 하고, 경주 사투리 대사를 내가 몇 개 놓쳐서 내용을 충실히 파악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극의 주제라할까, 뭐 그런것은 그리 복잡하진 않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정도로 해두자. ㅋ
    그런데 극이 너무 형식적 측면에서 중구난방이어서 핵심서사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반성하시오! ㅋ

    PS:
    열수 역을 한 남자배우 참 잘생겼단 말이야 ㅋㅋ
    시장 아줌마 역을 한 여자배우 연기는 참 재미있었음.. 역시 오버스러운 캐릭터이지만 ㅋ

  • [2009.5.17.] 오늘 하루

    일어나보니 오후 4시 정도였다.

    그는 오늘까지 발표문을 올려야 한다는 마음에
    어제 새벽 5시가 넘도록 발표문을 붙잡고 있었지만
    역시 별 소득은 없었다.

    몸은 계속 찌뿌등했다.
    감기기운과 ‘정상적’이지 못한 수면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발표문은 더이상 손보지 말고 어제 짜집기 했던 상태 그대로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밖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는데
    왜 밖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천천히 몸을 놀려 저녁시간때쯤이나 되었을까.
    밖은 생각보다 추웠다.

    기껏 환히 밝힌 마트에 가보면
    정작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는 가끔 영화나 드라마속에 나오는 대사로
    “냉장고에 먹을 것 있으니깐, 아무거나 빼서 먹어.”
    라는 대사를 참 부러워했다.

    그의 기억속에 냉장고에, 간단하게 빼서 먹을 수 있는 것이 들어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저 집엔 냉장고만 열면, 뭐든 있나보다 하고 부러워했었다.

    마트에 살만한 건 과자밖에 없다.
    더이상 과자는 싫었다

    그는 처음 오는 사람처럼, 마트를 빙빙- 돌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결혼을 하나보다 싶어졌다.

  • [2009.5.16.] 오랜만에 백분토론

    인터넷 기사를 보다보니 백분토론 얘기가 나오길래 찾아보니

    이른바 끝장토론으로

    보수 VS 진보

    로 대략 3시간 넘는 토론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잠깐의 여유도 생긴김에 틀어보는데…

    참 후회스럽다… 흑흑…
    (그래도 틀은김에 끝까지 봐야 된다는 마음 때문에… 지금 새벽 3시가 넘었다…ㅠ)

    전체적으로는

    역시나 이렇게 보면 안되지만… 논리적인 부분에서 보수쪽이 확실히 밀린다.

    그래도 진보쪽도 좀 캥기는 부분이 있는지라, 몇몇 부분에선 자연스럽게 말 돌리는 것도 보였다.

    그래도 보수쪽이 품고 있는 허공에 뜬 담론의 진상이 확실히 보인다.

    그런데… 보수 짓뭉개고, 진보 이겨라! 라고 응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인것 같다.

    누구의 지적대로

    토론문화가 청군백군 배틀 하듯이,

    누구 이기고, 누구 지고, 응원하고 하는 식으로 스포츠 경기 식으로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이빨이 더 뛰어나고, 누가 더 똑똑하고 mvp를 뽑으려고 하고…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이 되버리는 속에…

    동일자와 타자라는 구분선이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같다..

    나는 진보든 보수든 “우리 진보” “우리 보수” 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어떤 집단을 지칭하면서 우리라는 거지?

    라는 궁금이 생긴다…

    상생, 상생… 하는데…

    진보팀 들어갈래? 보수팀 들어갈래?

    라는 식으로 양측으로 갈라서서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하는 그 구분선부터 의심해보아야

    상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앗…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좌우를 넘어서… 란 뭐 합리적 중도의 입장을 취하는 것만 같다…

    그런 건 아닌데….. ;;

    뭐 나는…. 몇몇 패널들이

    그 “우리” 라는 명명을 하면서, 모든 좌/우의 스펙트럼 대표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게 참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서로 싸우세요 하는 듯이 양측으로 갈라 선 자리배치를 한다는 게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ps: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백분토론 ㅋ

  • [2009.5.14.] 스트레스

    책임감 없는 사람들 때문에

    일을 몽땅 짊어지는 경우가

    내겐,왜 곧잘 생기는 걸까

    아, 화딱지 나.

    지금이 몇신줄 알어? 새벽 5시 직전이라고!

    그리고 지금 분량의 1/5 정도를 했을 뿐이라고….!

  • [연극 | 태수는 왜? – 극단 풍경] 필수는 왜?

    장군의 아들 태수는
    아버지가 소망하던 엘리트 코스로 다가가면 갈수록 아버지에게 경멸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태수 아버지의 이러한 이중성은 태수의 아버지가 태수를 예비 대결자로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태수 아버지는 ‘완전한 타자’에게는 자신은 무너지지 않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분신-아들’ 만이 자신을 무찌를 수 있다는 오만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 밑의 태수는
    아버지에게는 경멸을 받을지언정, 다른 이에게는 그야말로 ‘엄친아’ 이다.
    특히 태수의 곁에선 필수에게는 더더욱.

    필수가 보기에 태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영국에서 유학한 엘리트이기도 하며
    항시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으며, 콤플렉스 따윈 존재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을 만큼 외모도 준수하고
    다른 이들에게 신뢰를 안겨 줄만큼 대인관계 성격도 굿이다!
    아아~ 그야말로 엄,친,아

    하지만 태수는
    인정욕망으로 가득 찬, 빈 껍데기이기도 하다.
    태수는 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등 아버지의 권위체계에 도전하는 듯하지만
    태수의 행위는 완전히 인정욕망에 사로잡힌 행위였다.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시를 낭독하여 수배생활을 하며 운동권 내 스타가 되고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반공교육 관련 문건을 군대에서 써 내놓고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논문으로 교수가 된다.
    태수는 그가 제출한 진실성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필수가 대신 써 준 것들로, 태수 자신이 더 인정받기를
    더 그의 아버지에게 다가가기만을 욕망했을 뿐이다.

    또한 태수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다.
    태수는 지나간 시간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는 오직 아버지에게 다가갈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고
    그는 오직 현재 자신이 즐기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다.
    누군가 태수에게 지나감 속에서 과거에 도려냈던 상처에 대해 묻는다면
    태수는 선한 얼굴로 미소짓고 말 것이다.
    그 선함은 위선적인 선함이 아니라, 지나갔기 때문에 자신은 잊었을 뿐이라는 천연덕스러움이다.
    상처를 벌려놓았던 자 – 태수 는 사라지고 그 앞에 천연덕스러운 허공만이 남은 것이다.

    쉽게 망각하는 것은 권력자의 속성이다.
    부이든, 권위이든
    어느 한 곳에 편중되기 위해선 다른 많은 것들의 착취를 동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권력자는, ‘착취’를 봉합하기 위해서
    과거로의 시선을 거두고 발디디고 있는 현재에서 미래만을 바라보라고 한다.
    빼앗기고, 상처받은 자들을 현혹시키는 것… ‘환상’ 이다.
    그 환상은 이른바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 라는 욕망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 환상에 휩쌓이는 순간, 권력자의 발 아래서 권력자에게 포섭된 자로서 충실해 질 것이다.
    환상은 과정을 묻지 아니하는데… 또한 언제나 달성될 수 없다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 ‘환상’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과거’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수도…

    필수는
    그렇게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태수를
    한 권의 책으로 보존하는 행위를 돕는다.
    태수가 쓰고싶다던 자서전적 소설이었다.
    태수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키면서 자신도 반성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의 집필마저 필수의 몫으로 돌아간다.

    필수는 ‘책’ 이란 매개체를 얻었다.
    그런데 책le livre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내어놓는 순간 무한히 지속될 시간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책의 의미와 내용은 인간의 한계로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더라도, 책은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독립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신적 권위에 버금가는 것이 될 수 있다.
    (-데리다의 개념)

    필수는 책을 통해
    태수의 과거를 송두리채 복원시킨다.
    영원히 정지된 시간을 갖는 ‘책’을 통해 과거를 모조리 현재화 시킨다.
    그 현재화된 과거가 연극으로 펼쳐지는 것인데
    이렇게 현재화된 과거가 태수라는 인물로 응축되는 그 순간
    필수는 이제 태수를 찌를 수 있게 된다.
    태수를 향하는 칼은 이제 허공이 아니다.
    과거를 ‘지나감’ 으로 내팽개치던 태수가
    모든 현재화된 과거로 응축된 태수가 되고
    태수의 아버지로 동질화 되가는 태수가 된다.

    필수는
    그렇게 과거의 복원과 함께
    새로움을 창조한다.
    그것은 책이 신적 권위를 갖는 매개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친구 필수를 찾아가려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 같던 태수의 결말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파멸하는 과정으로 바뀐다.

    그렇게 필수는 태수를 찌르고
    태수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씻는다…

    극 중에서 경찰이 필수에게 싸인을 부탁할 때
    필수는 싸인은 편집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하는 것이라 만류하였지만
    정작 싸인을 해야 할 것은 필수였다.

    **다른 후기!

    삼방면으로 관객석을 배치한 설정또한 매우 좋았던 듯하다.
    그리고 “태수” 역을 맡았던 “최광일”씨의 연기. 그야말로 최고였다.

  • [2009.5.9.] 오늘은 영화 한편을 찍었다

    영화라기 하기 좀 거시기 한 제목조차 없는

    대략 1분짜리 영상이 될 것이었는데

    내가 남자배우역할을 맡았다

    만인이 나의 카메라울렁증을 인정하였고

    1분짜리 영상을 찍는데, 대략 4시간이 걸렸다.

    즐거웠다

    내가 연출할 순서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할까?

    하는 기대반 걱정반.

  • [미나-김사과]

    수정의 비극 -김사과의『미나』비평-

    1. 들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하여, 현 대중영화의 주요한 골격으로 쓰이고 있는 비극tragedy 의 법칙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 주인공은 한명이고 고립되는 경향을 가질 것.
    – 주인공은 하마르티아Harmatia를 가지고 있을 것.
    – 주인공은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에 도전할 것.

    현대판 오이디푸스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올드보이>는 위의 법칙을 그대로 준수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하마르티아를 가지고 있었으며, <올드보이>의 오대수 또한 자신의 딸을 사랑한 하마르티아를 지닌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적인 현재에서,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경고에도 볼구하고 오만한 태도로 진실을 요구한다. 오대수 또한 자신에게 이미 닥쳐있던 ‘운명’ 의 실체를, 기억의 복원을 요구한다. 진실과 기억의 복원은 예정된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신’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르게 하고, 오대수의 혀를 자르게 한다. 완벽한 비극tragedy이 완성된다.
    서사문학이 갖는 매체특질이 연극, 영화와는 상이하겠지만, 『미나』는 위 비극의 특질들을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충실한 비극이다. 여기선 주인공 수정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비극tragedy의 과정으로 보고, 많은 부분 위의 특징들을 찾아내는 과정 안에서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

    2. 수정이란 존재

    수정은 그들을 비웃으며 상한 불고기김밥을 입속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진정 비웃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수정이었다. 상한 불고기김밥은 먼저 수정의 얼굴에 약한 발진을 일으켰다. (중략) 열정의 삼일은 상한 불고기김밥을 클라이맥스로 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정에게 남은 것은 후유증과 그에 대한 학교당국의 냉담하고 형식적인 처리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뿐이었다. (p.71)

    위의 서술은 단순 수정에게 있었던 특정 상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수정의 탄생이며, 수정 그 자체이다. 수정은 극기훈련장에서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지휘교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른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극기훈련장의 모범이 되어 모두에게-박수치는 사람이 자의로 치던 타의로 치던- 박수를 받게 된다. 수정은 기존질서와 권위체계의 포섭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도구가 되어 준 것이다. 이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관계가 계속 성공적이었다면, 수정은 완전히 시스템을 신뢰하는 존재로, 사물화Vordinglichung 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래는 일방적인 권위질서의 배신-상한 불고기기밥-으로 붕괴되었고, 수정은 식중독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런 계약파기에 대하여 기존 질서는 자기 시스템의 결함을 인정치 않는다. 또한 수정과 맺었던 일종의 밀약, 그 자체도 시스템은 인정치 않는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계약이라는 것은 순전히 수정이 벌인 것이고, 수정이 갖고 있던 기대였다고 시스템은 발뺌할 것이다. 시스템 자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헛된 기대를 품었던 수정이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다.

    수치심과 모멸감의 기억을 깊이 마주보면 결국 박지예처럼 자살에 이르게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은 단호하게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충분하게 사랑하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아존중감을 높이자. 수정은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계속하여 식중독의 추억에 몰두한다. (중략) 도시는 점점 더 수용소의 담장을 높이 쌓아가고 있으며 수정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없다. 그저 빨리 세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서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발밑에다 대고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72)

    수정이 그런 시스템을 대처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특이하기도 하지만, 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수정은 일명 ‘때리고 튄’ 시스템이란 테두리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수정은 경멸스러운 시스템 구조 안에서 가장 윗대가리가 되고자 한다. 상한 불고기김밥을 받지 않을 존재, 누군가에게 상한 불고기김밥을 주고 나서도 발뺌할 수 있는 존재를 추구하게 된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이다. 축구공, 자동차 인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닌, 아무 이유없이 그냥 무대위로 밀려난 존재이다. 무대 위의 인물에게 주어진 행동, 대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무대 위의 존재는 작품 속 등장하는 ‘지예’ 처럼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 선택권도 지니고 있다. 존재는 자신을 자기 규정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예언자 오라클은 네오가 ‘the One’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주인공 네오는 자기 자신을 ‘the One’ 으로 정의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만든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면, 무대 위 수정은 자신을 시스템의 대가리가 될 존재로 규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수정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를 실현시킬 수 없다. 수정은 자신을 자기 정의하였다고 착각하지만, 수정의 선택은 수정이 서 있던 무대, P시라는 무대가 지니는 장력(張力)에 이끌린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정이 시스템의 윗대가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되어 수정을 비극으로 이끈다.

    3. P시 속 수정

    그런데 완성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장이다. 싸구려 미네랄오일과 글리세린을 일대일로 섞어 담은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가 찍힌 무겁고 우아한 유리로 된 화장품케이스 같은 것이다. (p.82)

    그녀는 초등학교 일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삼학년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관되게 들뢰즈와 데리다를 강의하며 안도한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일본어로 번역할 생각도 있으나 한국어로 옮길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그 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81)

    동물이라면 물리적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서열은 다소 독특한 면이 있다. 이미 서열 체계가 쌓여 있고, 그 서열의 극점이 구현에 얼마나 근접하였는가가 관건이 된다. 개인이 아닌, P시라는 도시인들의 집단도 그런 서열구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주변부’ 정도에 위치할 P시는 ‘중심부’의 모든 문화적 ․ 지적 체계를 모방한다. P시가 내재하고 있던 ‘주변부적’인 문화 관습들은 폐기하고,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로 자기를 포장하고, 중심부의 지적 체계에 포획되길 원한다.
    그리고 P시 내부에선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질서체계를 똑같이 구동한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이 가진 문법적 완성도, 구성적 완벽성 따위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종종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져 휘청거리며 우스워졌으나 그래도 그녀는 당당했다. 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으므로 떳떳하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여기에 적용가능한가의 여부이다.’ (p.76)

    수정은 P시라는 질서체계에서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을 순도높게 지니고 있는 학생’ 이다. 수정은 P시가 구동하고 있는 규칙들을 완전히 습득한 존재로 자기정의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자신을 정의한 자기정의가 아닌, 자유의 상실 즉 ‘인간의 사물화 Verdinglichung’ 이다. 극기훈련 과정에서 상한 불고기김밥을 먹기 전의 수정과 먹은 후의 수정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을 신뢰하건, 경멸하건 수정은 여전히 시스템 아래에서 대가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수정은 자기 정의를 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잃어버렸다. 수정은 P시의 규칙 외부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수정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정의 이런 욕망이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바라는 대가리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편리한 소비자의 비극이다. 소비자는 레스토랑이 가격을 올리는 것에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돈에 어울리는 것을 갖거나 지갑에서 돈을 좀더 꺼내는 가능성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가장 없는 자의 것을 조금 더 빼앗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p.80)

    P시의 질서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도구들’은 대가리가 되지 않고, 거대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비자의 미래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암담한 미래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수정은 자신을 거대한 소비자로 위치 짓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정은 시스템의 대가리가 되고 싶어하고, 서열 하(下)의 도시민들을 짓밟고 싶어한다. 시스템에 겉도는 존재 혹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어한다. 철저히 P시라는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품고 있는 이런 수정의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인 욕망’ 이며, 거대 소비자를 넘어 위계질서의 최상위층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허용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오만이 수정의 하마르티아라 할 수 있다.

    4. 수정의 비극

    작품의 제목이 ‘미나’이지만 미나라는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긴 그리 쉽지가 않다. 작품에서 미나는 대부분 수정에 의해서 비춰지기 때문에, 일부분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도 같고, 왔다갔다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미나는 수정과 달리 P시라는 무대 위에서 살짝 빗겨난 존재라는 것이고, 그것이 수정을 참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박지예는 시험을 못 봐서 죽었다고 하니까 그건 나랑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 같고, 사실 나는 잘 모르겠고, 뭐 굳이 뭔가 알고 싶지도 않고, 사실 나는 박지예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p.33)

    미나는 결국 세 과목의 답안지를 모두 백지로  내고 나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완벽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이었다. 수정은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한 자신을 느낀다. (p.35)

    P시는 누가 죽건 말건, 시험시간에는 충실히 응해야 한다는 ‘비인간화된 도구’를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은 그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기 위해, 박지예의 자살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무화시킨다. 충실히 답안을 제출하여, P시의 대가리 근접하였음을 느끼고 조금은 희열하였다. 그런데 미나는 수정과 달랐다. 수정 눈에 비춰진 미나는 완벽하게 자신의 인간화된 모습을 향해 다가갔고, P시의 요구사항들을 뭉개버렸다. 미나는 P시의 무대에서 빗겨나가면서, P시의 도구화된 인간이기를 거부하였다. 수정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수정은 미나를 비웃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을 착하게 써봐 수정아. 이제부터라도. 안 그러면 아무것도 안돼. 봐 벌써 문제가 생기잖아? 너는 착한 마음이 뭔지 모르지. 그래서 인정을 안하는 거야. 하지만 니가 인정 안한다고 있는게 없어지는 건 아냐. 세상은 착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p.287)

    세상은 선한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눈으로 보기엔 그렇겠지. 악마에게 악은 선이고 또 선은 악이잖아. 그래 너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참말로 악이니까. 완전한 악.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해. (p.288)

    미나는 그야말로 P시의 질서를 내면화한 수정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설득이 가능할 리 없다. 작품에서 또 한편 문제시 하였던 것은 소통불가의 상태였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내뱉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의 말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서로를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타인의 말은 차단하거나 민호처럼 미끄러트릴 뿐이다.
    미나의 설득을 수정은 오히려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악의적으로의 정도가 아니라 미나를 아예 완전한 악의 덩어리로 규정한다. 수정이 미나의 ‘도덕’을 이해못하고 받아칠 수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완전히 P시의 규칙들을 내면화한 ‘비인간화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P시에서 가장 합당한 형태의 인물이 가장 비인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다는 것을 작품은 한편 예리하게 찌른다. 비인간-수정은 미나가 이야기하는 ‘도덕’을 이해할 수가 없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수정이 하필이면 미나를 표적으로 삼게 된 것은, 미나라는 존재가 P시에서 빗겨나간 너무도 괘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정의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곧 하마르티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P시가 수정에게 제공하는 거대 소비자라는 지위를 수정은 승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정은 ‘거대 소비자’가 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욕망한다. 하지만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아이러니 한 것은, 수정의 욕망은 수정이 P시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 했기 때문인데, 그 자체가 실현될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된다는 것이다. P시의 상태는 천연덕스럽게 아폴론적인 척 하고, 욕망하는 수정 그 자체가 하마르티아가 된다.
    붕괴할 수밖에 없는 수정의 표적은 미나가 된다. P시의 질서에서 빗겨나려고 노력하는 미나는 P시의 고장난 부속품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행위는, 수정이 P시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동일자가 타자를 배제하는 행위이자, 수정 자신이 P시의 동일자로써 권력을 실현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폴론적인 척 하는 P시는 수정을 완벽한 타자로 인식하고, 아마 ‘사이코패스’ 이런 식의 명명을 붙일 것이고, 미나는 비극적 희생양이 될 것이다. 수정의 비극은 이렇게 완성된다.

    5. 맺음말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적인 삶을 제약하는 여러 상황들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에게 맞는 여건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때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 즉 하나의 사물로 전락하게 된다.
    수정은 그녀 자신이 P시와 P시의 시민들을 철저히 경멸하였지만, 완벽한 P시 속의 ‘사물’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미나를 살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완전히 P시의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수정 자신은 포터블 음악을 귀에 꽂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겠지만, 그것은 다른 목소리들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귀를 막은 것은, 그녀 안으로 틈입해오는 P시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주변의 목소리’였다. 수정은 철저히 귀를 틀어막은 P시의 부속품의 한 형태다.
    그렇다고 미나 또한 대안적인 존재는 아니다. 미나도 존재의 자기정의를 통해, 상황을 만들어 나가려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미나는 현 상황에서 단지 살짝 빗겨나고자 하는 도피적 형태에 불과하다. 헌데, 수정은 그런 미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P시의 질서가 ‘미나같은 빗겨감’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P시는 가히 수정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세계체제에서 어떻게든 ‘반주변부’를 벗어나 ‘중심부’로 나아가고 싶은 P시 또한, 수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꿈꾸고 있고, 내부에선 미나 같은 존재를 살해하게끔 내버려 둔다. 그리고 수정이 직접 미나를 칼로 찌른 후에야, P시는 아폴론적인 선한 표정을 하고, 수정을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수없이 많은 수정을 양산하는 것이 바로 P시이다. 수정의 비극처럼, P시가 맞게 될 비극은 더 파국적일 수 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비극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 경쟁력 강화’, ‘선진국이 되자’ 라는 모토 아래 우리는 지금도 제 3세계 국가들을 착취하고, 중심부 국가들이 벌인 전쟁에 협조하고 있지 않은가.

    * 참고문헌

    김사과『미나』창비, 2008
    아리스토텔레스 / 천병희 엮 『시학』문예출판사, 2002
    마이클 티어노 / 김윤철 역『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아우라, 2008
    이왕주『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
    이서규『현대철학의 이해』건국대학교 출판부, 2003
    장 폴 샤르트르 /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예출판사, 1981
    지오반니 아리기「발전주의의 환상 : 반주변의 재개념화」『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공감, 1998

  • [2009.4.23.] .

    밤이 나를 진지하게 만들 것이다

    새벽이 나를 용기있게 만들 것이다

    그 밤에, 그 새벽엔

    수없이 많은 틈새가 벌어지기 때문에

  • [연극 | 삼도봉 美스토리]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요즘 영화를 보고 몇 줄로 축약해서 쓰는 숙제를 하곤 하는데…
    삼도봉 미스토리의 주제를 한 줄로 확 축약해서 쓰는 걸 시도해본다면

    “농민들의 애환과 삶”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축약해보지만, 찝찝한 점들이 좀 있다. 위의 주제로 축약하기에는 연극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접점들이 부수적으로 더 존재하고 있는 것도 같고,
    또 그것이 삼도봉 미스토리가 품고 있는 시사적인 ‘접점’이라고 여기기엔 형상화 작업이 그리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못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상도봉 미스토리는 웃음과 감동, 시사성 그리고 다양한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고, 그 어느 것도 쉽게 건져올리지 못하고 있다.

    연극은 추리극을 모티브를 취하면서 다양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농민들의 과거를 추적한다.
    추리극으로 일종의 서스펜스 몰입효과를 주면서 농민운동가, 이장 그리고 결혼 못하는 시골 청년, 강원도 농민들이 ‘양키놈들의 쌀’ 을 불태우려고 하기까지의 기억들을 더듬으려고 하는데…
    내용상으로 양키놈들의 쌀을 불태우기 까지에 그들 기억은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장은 아내가 떠난 것을 비통해 하기 때문이고
    결혼 못하는 시골 청년은 국제결혼 사기를 당하였기 때문이고
    농민운동가는 아들을 안타깝게 잃었기 떄문이고
    강원도 농민은 강원도에 사는 비애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양키놈들의 쌀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어서, 갑자기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양키놈들의 쌀을 불지르려고 하는 것보다, 각자의 고통과 비애를 더욱 심화시켜서 그냥 산불을 내려고 하였다는 설정으로 갔으면 더욱 그럴 듯 할 수도 있었을 것을 말이다. 물론 각자의 고통과 비애를 심화시키기엔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고, 각자의 이야기가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작품에선 농민이기 때문에, 그러했지 않은가. 라고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편인데, 그들이 농민이어서 어떤 현실적 맥락과 접점을 지녔는지 말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저 농민이어서 가난했고, 그저 농민이서 자연과 싸워야만 했고… 한다고 지금껏 도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 어느 정도의 전제에서 그대로 출발하고, 그것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사유패턴은 농민분들 참 불쌍하지 라는 겉도는 동정심으로 흘러간다. 그러할진데 농민의 애환에 감동을 느낄 수가 없고, 연극이 최종 목적지로 소망하고푼 미국 헤게모니의 폭력에 대한 분노에는 더 다다를 수가 없다. 통념과 정서에서 출발하지 말고 현실성을 직접 보듬어 안아야 감동이 오는 것이란 단순한 진리를 연극은 놓치고 있다.

    극은 농민들의 현실성과 개연성을 지닌 애환에 집중하기보다, 캐릭터와 에피소드에 더욱 방점을 찍고 진행하고 있는데… 그러면 과연 캐릭터와 각기 에피소드들은?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배우들이 각기 등장하는데… 이건 솔직히 매우 개그콘서트스럽고, 진정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도대체 왜 삼도의 농민들이 나와야만 하는가. 그것에 대한 주제적인 이유, 필연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 삼도 사투리를 연습한 배우들의 노력을 보여주려고 했구나 하는 미약한 감탄만 나오게 한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기억의 퍼즐들은, 맞춰지지 않고 따로 노는 에피소드들에 불과하다.
    각 에피소드들은 웃음에서 출발하여 신파로 흘러가는 투스텝 구조를 지키면서 넘실넘실 흘러가는데… 주제의식의 형상화와 진정성을 상실한 캐릭터로 인해, 각 에피소드에 몰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저 음악과 조명이 짜내는 넘쳐 흐르는 정서를 관찰하게 두거나, 혹은 저 짜내는 신파에 절로 반응하는 눈물샘을 느끼면서, 아 젠장… 하게 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겉도는 가운데…
    극은 결말에 치닫는데.. 극이 최대의 서스펜스로 품고 있었던 도대체 누구의 시체인가에 대한 대답이 희안하다.
    결론적으로 시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것이 일종의 메타포 장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말해보자면..

    미국산 쌀 푸대에서 나온 시체가 빵으로 형상화 되었다는 데 주목해보아야 한다.
    쌀 푸대에서 미국의 것, 빵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머리 없는 시체라는 점은… 바로 극을 보는 ‘당신’ 과 ‘당신들’에게 경고하고, 부탁도 하는 것이다. 농민들을 이렇게 시름에 빠트리는 미국 헤게모니가 비단 농민만이 아닌 당신에게 까지 미칠 수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머리 없는 시체가 바로 당신의 모습이라는 뭐 그런…

    뭐 그런데… 이런 ‘고차원적(?)’ 은유에 도달하기까지 과정이 갈팡질팡 비실비실 하였으니… 이건 뭥미~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작위적으로 웃음, 시사, 은유, 시사성, 캐릭터 이 모든 것을 여기저기 쑤셔넣은 듯한 이 연극은… 너무 자신감 혹은 소신이 부족했다. 이것저것 뒤섞어 놓은 퓨전이라니…

  • [씨네21리더스에디션 장려상] 어린이 영화를 부탁해 外

    어린이 영화를 부탁해 -발로 뛴 삼인방 어린이에게 영화를 묻다.

    “네들이 영화 맛을 알기나 알어?”어른들의 속마음은 그랬을지 모른다. 집에서 TV나 보면 되지. 애들에게 영화, 극장이 무슨 사치냐고. 그리고 어린이 영화가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전체관람가 영화가 얼마나 많냐는 식으로 말이다. 헌데 영화 속 이미지의 폭력성과 선정성의 허용 정도를 지시하는 전체관람가가 모두 어린이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주로 한국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로 만들어지는 슬랩스틱 코메디나 신파물이 얼마나 아이들 을 심도깊게 고려하였을까 우려스럽다. 아이들이 진정 원하는 영화는 무엇이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화는 무엇일까? 제법 할 수 있는 고민이기도 한데, 그 어느 곳에서도 어린이 관객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는 노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항시 ‘수용자’ 란 주체에서 미끄러져버렸던 어린이 세대. 그런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직접 들어보았다.

    “영화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첫 인터뷰 장소는 정독 도서관이었다. 부산스럽게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길을 지나던 아이에게 다짜고짜 들이댔다. 첫인상이 조숙했던 초등학생 A군은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참 인상 깊었다고 했다. 헐… 이거 생각했던 것과 다르잖아! 이른바 ‘애들이 좋아할만한’ 이란 관용어가 붙었던 온갖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들이 우장창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도서관 마당에 놀기 위해 오는 아이들에게 차례로 인터뷰를 시도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서먹하게 굴다가, 영화이야기가 나오자 들뜬 목소리로 좋아하는 영화들을 나열했다. <과속스캔들>, <우주전쟁>, <해리포터>, <쿵푸팬더> 등이 쏟아져 놔왔다. 그 중에는 <워낭소리>도 있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 답지 않게’ 15세 이상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전체관람가 영화 중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워낭소리>를 제외하곤 거의 전부 외국 애니메이션 이었다.

    “한국 어린이 영화요? 너무 유치해요.”

    과거 1980~1990년대는 어린이 영화기 활황이었다. 당대 최고 인기 개그맨들은 어린이 영화를 제작하여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극장은 물론 비디오 시장에서도 그야말로 핫hot한 콘텐츠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0년전 이야기. 요즘 아이들의 감수성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 개봉된 영구 씨리즈의 연장판인 <갈갈이 패밀리>를 아이들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다하였고, 어린이 영화라고 나오는 것들은 너무 유치하다고 답했다. 어떤 아이는 어린이 영화는 거의 다 슬프고 뻔한 것이라 싫다고 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안녕, 형아>, <마음이…> 같은 영화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주연으로 하는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신파적이고, 착하디 착한 영화만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우린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 정도면 재밌어하지 않겠어? 하면서 어린이 영화를 던져주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한국 어린이 영화를 외면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예견된결과였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외화에 의존하거나 어른 영화를 봐야만 했던 것이다. 어떤 아이는 <추격자>를 언급하여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어른 영화는 너무 잔인하고, 야한 장면도 막 나와요.”

    도서관 일대에서 벗아나 우린 학교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먼저 재동초등학교. 헌데 그날은 놀토였을 뿐이고, 우린 몰랐을 뿐이고… 텅 빈 운동장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화초등학교로 향하였는데, 그곳에는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야구를 하고 있었다. 학원이다 공부다 시달리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이렇게 야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잠시 외곽에서 이야기 중인 두 아이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앞서 인터뷰했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15세 이상 관람가를 주로 본다고 대답하는 아이들. 어떤점이 싫으냐고 묻자,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이후 낙산공원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어른 영화가 재밌긴 재밌는데 보고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되서 싫다고 대답하였다. 너무도 ‘재미없게끔’ 만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재미있는 어른용 영화를 보면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희생이 참 씁쓸했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

    “어린이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가 좋아요.”

    우린 좀 더 차분하게 아이들이 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서 현재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 녀석과 ‘접선’했다. 친구에게 우리가 이런 목적으로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니, 흔쾌히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강북구 모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을 직접 만나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는가란 질문을 던져보았다. 주로 코미디, 액션, SF, 판타지 등을 좋아한다 하면서도, 아이들은 한편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은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하고 선생님한테 혼나는 이야기,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녀서 힘들어 하는 아이 이야기, 왕따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졌음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평소에 느끼던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 아이들이 즐겨보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소재들이었다. “그런 영화를 사람들이 보러 올까?”라고 물으니”그래도 그런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른들도 같이 봐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아이들이 답했다. 부끄러워졌다.

    “극장에 왜 안가냐구요?” 인터뷰 내내 극장시설이나 환경적인 문제도 빈번히 거론 되었다. 성인에 비해 많은 제약이 있는 아이들은 주로 어른(부모)에 의해 영화를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끼리 극장에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가려고 해도 부모의 허락을 얻기란 좀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밖에도 아이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감수하면서 영화를 봐야만 한다. 신장이 성인에 비해 작기 때문에 앞자리의 어른에 의해 화면이 가려지거나, 화장실 사용의 불편함(상영중에 화장실에 갈 수 없음), 기본적인 극장 매너를 어기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등이 있었으며, 극장에 어린이만 갈 경우 어른들이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고 답한 아이도 있었다.

    한국에서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80년대 영구시리즈의 연장판이나 다소 신파적인 어린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였다. “어린애들은 원래 이런 걸 좋아해”라며 변화없는 어린이 영화만 생산하는 것은, 어린이들을 더욱 성인용 영화나 외국 애니메이션으로 발 돌리게 할 것이다. 이젠 어린이 세대가 품고있는 소망과 욕구 그리고 그들 세대의 문제에 대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 어린이들의 ‘영화 볼 권리’를 위해 어린이 전용극장 등 시설 정책적 문제에 대한 노력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상황, 어린이 영화 제작에 도전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 3인방 타조, 아랑, 나미는 한 자리에 모였다. 그네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고민해본다. 자뭇 엄숙한 그러나 그닥 어울리진 않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

    타조: 아이들이 의외로 코미디는 유치하고, 착한 애가 나오는 영화는 신파라서 재미없다고 하더라.

    아랑: 생각해보니 그래. 코미디는 그렇다 쳐도, 착한 어린이가 풀어가는 착한 줄거리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그렇게 크길 바라는 어른들의 소망일뿐이지. 전혀 아이들이 원하는 내용은 아니야.

    나미: 어린이 영화에는 어린이가 없더라. ㅋㅋ 인터뷰도 한 김에 어린이의 욕망을 표출해 줄 수 있는 영화, 만들어 보자 우리!

    아랑 : 대책 없다.(한숨) 하루 만에 그게 가능하겠어?

    타조 : 음…….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해보자. 못 할 것 없어. 좀 빡빡하지만 ㅋㅋ

    아랑 : 흠… 아이들의 욕구라면 인터뷰에서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 학교, 공부, 부모님이 꾸중하시는 것, 왕따 문제… 이런 게 소재가 될 수 있겠다.

    타조: 그래, 아이들은 그런 욕구를 갖고 있어. <지각대장 존>이라는 그림동화를 보면, 학교 가기 싫은 아이의 욕구를 실현해주면서, 그것이 마냥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욕망을 이해 못하는 어른들을 풍자하잖아.

    아랑: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이라는 동화도 있어. 거기에 보면 잔소리 듣기 싫은 아이의 욕구를 판타지로 실현시키면서 강제하지 않는 교훈을 주고 있지.

    나미: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더라?

    신속하게 회상모드에 들어가는 삼인방. 타조는 학교가 활활 타는 소망을 고이 품었고, 나미는 구준표 같은 재벌아빠가 짠~하고 나타나 주기를 바랬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랑은 죽도록 미워하던 아이가 가는 곳마다 도랑에 빠지는 꿈을 살포시 떠올리며 흐믓해 한다. 과연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아름다운 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미: 아이들이 대체로 비일상적인 판타지를 좋아했었으니까, 판타지로 풀어보는 건 어때?

    아랑 : 그래! 학원을 너무 많이 다니는 아이가 학원가방 때문에 점점 작아지는 거야.

    타조 : 그거 <마법의 설탕 두 조각>에서 잔소리 하는 엄마 점점 작아지는 거랑 비슷한데?

    나미 : 근데 작아지는 걸 어떻게 표현해? 그 특수효과를?

    잠시 흐르는 정적…….

    타조 : 그럼, 만만한 초능력 같은 걸 해볼까? 내용은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욕망을 실현시키는 걸로.

    아랑 : 어떻게?

    나미 : 얘들아, 난 천잰가봐~! 잔소리만 필터링 하는 초능력이 생기는 거야. 잔소리할 때만 엄마 목소리를 무음 처리하는 거야. 잔소리할 때 엄마 목소리를 무음처리 하는 거지!

    타조 : 오, 그 정도 특수효과는 가능해! 그러면 결말을 어떻게 끝내지? 계속 못 듣고 끝나나?

    나미 : 멍~

    아랑 : 이렇게 해보면 어때? 잔소리만 골라서 안 듣다가 필요할 때조차 못 듣게 되서 이번엔 잔소리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야.

    나미 : 굿!

    _제목: <잔소리가 싫엇!>.

    _테마: 잔소리 듣기 싫은 주인공 청 테잎으로 귀 막는 스킬 획득하여 겪는 좌충우돌 어드벤쳐 판타지

    만들어진 영상은 아래 주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만, 정말 하루만에 모든 촬영이 끝났다는 점. 생전 처음 써보는 캠코더로 촬영하였 다는 점. 무지 많이 고려해주세요. 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후훗!

    _영상주소 : https://youtu.be/QnU89qahjco

    _P.S: 주인공 제외한 인물 1인 3역 이상은 기본이니 이름표를 보고 파악해 주실 것.

    충무로엔 아무것도 없다.

    오늘 타조와 나미의 데이트 장소는 충무로 입니다. “미국에 헐리웃이 있듯이, 우리에겐 충무로가 있다!” 라는 막연한 환상은 변두리 청년 타조와 나미의 꿈을 잔뜩 부풀려놓았습니다. 충무로에 가면 영화 촬영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어서 장동건이 영화 찍다 코 파는 것도 볼 수 있고, 카페엔 영화인들이 바글바글, 거리에는 온통 영화인들의 손바닥이 찍혀있을 것만 같았죠.

    드디어 충무로역 도착! 오오, 생긴 것부터 웬 석기시대 동굴 같은 분위기. 이것은 정녕 한국 영화의 기원이 있는 곳임을 은유하는 건가요? 조금 올라가보니 대종상 사진들이 보이기까지 하네요. 기대백배 충전하여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려던 타조와 나미. 앗, 지하철역 한쪽에 웬 센터 같은 것이 있네요. <재미동 극장>이라 써있습니다. 헌데, 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군요. 이런, 뭐, 리모델링중인가보지. 하고 타조와 나미는 아쉬움을 남기고 지하철역을 나섭니다.

    나섰죠, 나섰는데.. 뭐 그리 별 다를 것 없는 도심 풍경이 타조와 나미 앞에 있습니다. 허둥대는 타조를 보며 나미가 오랜만에 3겹 미간 주름을 만들어 주시는군요. 타조는 얼른 아무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어랏, 이건 뭔가요? 타조와 나미는 마치 고향과도 같은, 너무도 구수한 골목풍경에 좀 당황합니다. 이쪽으로 돌아도 인쇄소, 저쪽으로 돌아도 인쇄소 뿐이군요. 타조가 여기 인쇄소가 많은것은 한때 충무로 영화 포스터 제작을 맡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 되었다고 나미에게 알려주는군요. 내가 인쇄소 보러 왔니? 여기 오면 온갖 스타들 손도장 타일이 쫙 깔려 있을 거라며! 당황한 타조는 나미를 다른 골목으로 이끕니다.

    여기는 웬 사진 현상소만 가득하군요. 나미에게 타조가 또 아는 척을 합니다. 여기 사진관이 많은 것은 배우 지망생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이렇게 된 거야. 헌데 나미가 그거 확인하러 충무로에 왔던가요. 나미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쩔쩔매는 타조에게 그 순간 저 멀리 극장하나가 보입니다. 오오 그 이름도 많이 들어 본 대한극장이에요. 얼른 나미를 이끌어 휘달려 가는데요. 자세히 보니, 그저 멀티플렉스 극장일 뿐이군요…타조가 어쩔 수 없이 ‘다이버 지식검색’ 정보를 꺼내서 다시 한 번 나미를 고양시키려 합니다. 옛날에는 여기에 영화제작소가 있었고, 여기엔 뭐가 있었고… 주절대는 타조에게 나미가 묻습니다.“그런데 지금은 뭐 어쨌다는 거지? 아무것도 없잖아. 근데 뭐가 충무로 영화야?”

    한국영화 하면 맨날 졸졸 따라오는 이름 충무로. 지금은 제작사조차 철수 했다 쳐도, 한국영화의 역사적 기원으로 불리 우는 충무로를 한국인들은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왜 충무로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