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레즈 라캥-극단 동] 늪에 가라앉는 고통을 전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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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가 늪에 빠지려는 사람을 구출해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작품을 통해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아름다운 장면과 화해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예술가는 늪에 빠지려는 사람을 더욱 깊숙이 밀어버리고, 허우적대다가 죽음으로 기어들어가는 약자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도 있다. 출처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비평가는 짧은 일설에서 에밀 졸라는 후자와 같은 경우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니면, 에밀 졸라는 늪에 빠지려는 사람에게 다가가 같이 늪에 빠져버리는 작가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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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은 시작하자마자, 라캥 부인의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떤 방문이나, 대화를 위해 준비하는 상황, 관객을 위해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다. 라캥 부인과 카미유의 힘겨운 몸짓은 이 조명불이 밝혀지기 이전부터, 어쩌면 카미유가 태어난 그 날부터 시작되었던 것만 같았다. 견디기 힘든 일상 그래도 살아야 하는 지긋지긋함으로 관객을 밀어버리는 제 1막 1장의 펼쳐짐이었다.
    극은 이후로도 영화의 몽타주 기법 같은 형식적 특이성을 발휘하고 있다. 각 장은 약 15분을 넘기지 못한다. 약 10분 주기로 암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장소가 바뀌지 않아도, 이 리드미컬한 암전은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 끊임없는 암전은 의도적으로 극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배우 네명. 라캥 부인, 테레즈, 카미유 그리고 로랑에 이입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그들이 느끼는 슬픔, 욕망에 동감을 할 수가 없다. 이제 관객들은 그들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인간 실험실이 된 무대에서 욕정을 나누고, 욕정에 의해 살인을 하고,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간이란 동물을 관객이 관찰한다.
    세 번째, 네 번째 암전까지는 이 암전을 받아들여야하나 당황스러웠지만, 이 후 오히려 암전의 시간이 극을 곰씹는 시간이 되었다. 극의 등장인물들이 펼쳐내는 욕망의 벌려짐은  바라보고 있기에 불편하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어느 공간에선 저런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자연스러운 상기는 진실되기에 마주치기 더 힘들지 모른다. 암전의 시간들은 방금 본 풍경을 정리하고, 곰씹는 준비시간이다. 그리고 암전 이 후 어김없이 찾아 올 더 잔혹한 풍경을 위한 준비시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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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풍경에서 배우들은 매우 딱딱한 대사를 한다. 특히 테레즈 라캥은 서로를 바라보며 하지 않고, 거의 허공만을 응시하면서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과 죽임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서 그녀는 어떤 동정심도, 어떤 이입도 거절하는 듯한 연기를 펼쳐낸다. 나머지 배역들도 테레즈 라캥보단 덜하지만 마찬가지 효과를 자아낸다. 이런 연기톤은 각 배역을 쉽게 적으로도 만들지 못하고, 내 편으로도 만들지도 못한다. 각 인물들이 관객의 파토스 내에서 설 자리는 없다. 동시에 소화를 거절하는 이 ‘이물질들’ 때문에 관객들도 편안히 앉을 자리가 없다. 서서히 늪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차라리 끝나기를, 죽음을, 극의 종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극의 종결은 새로운 극의 시작이 될 것이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라캥 부인, 테레즈, 카미유 그리고 로랑은 이제 극을 보았던 인물, 단 한명의 주인공, 나 자신으로 응축된다. 늪에 빠져 죽었던 한 인간이, 인생이란 광활한 늪 속에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이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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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즈 라캥>의 연극을 보면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원작은 읽지 못하고, 최근에 본 영화 <박쥐>만을 접하고 보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연극 <테레즈 라캥>이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지, 아니면 얼마나 <박쥐>의 영향을 받았던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연극 <테레즈 라캥>이 좀 미흡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결말 부분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카미유의 환영을 보는 로랑과 테레즈 그리고 자살에 이르게 되는 로랑과 테레즈가 거의 약 2,3 장 정도로 축약해서 처리돼 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은 어찌보면 매우 갑작스러운 반전일진데, 이미 내용을 다 아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듯 예정된 수순처럼 처리해 버렸다. 시간의 제약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카미유를 죽이기까지의 시간을 줄이고, 후반부에 더 핵심적인 임팩트를 주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 [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난 여름, 기억하시나요?

    김선우씨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제 ‘인생의 한 구절’이랍시고 외우고 다니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이라는 구절이 바로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이란 시에서 왔죠.

    김선우 시인의 시집은 몇 권 읽었지만, 그녀가 쓴 산문, 소설 등은 읽지를 못했어요.
    <캔들 플라워>가 제가 읽은 그녀의 첫 산문인 것 같네요.
    기억이 맞다면요.

    <캔들 플라워>는 문화웹진 나비라는 곳에 연재된 소설이구요.
    바로 며칠전에 마지막회가 나왔습니다.
    저는 새로 옮긴 곳에 업무가 그리 많지않아
    시간 때울 겸(ㅈㅅ)
    봤어요.

    소설의 1,2 회를 보고 조금 뜨아함과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소설 제목 ‘캔들 플라워’가 좀 스위트한 감이 있었는데
    열자마자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큐트하고,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나열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빨간머리 아이는 캐나다의 레인보우라는 마을에 살고
    그 아이의 보호자(?)는 레즈비언 커플이고
    계속해서 파티를 외쳐대는 그런 상황에
    주인공 아이는 무슨 초능력 비스무레 한 것까지 지니고 있었거든요.
    (초능력까지는 아니죠. 언어습득능력이 빠르고 동물과도 어느 정도 교감할 수 있는?!)

    아니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시인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더랬죠.

    근데…
    그 스위트하기만 한  가상의 상황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갑자기 르포 소설이 된 듯
    지난 6월 촛불 정국의 이야기가 툭! 튀어 나옵니다.
    에이, 에피소드 이야기 하나로 나온 거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 그때야 알았죠.
    아 제목 ‘캔들 플라워’는 ‘촛불 꽃’ 이구나!
    라구요. ㅋ
    결코 영어사전을 뒤지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ㅋㅋ

    암튼, 소설은 지난 여름에 관한 이야기에요.
    지난 여름을 아주 이상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에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보면, 체제 내의 규칙들에 너무 익숙해져 마치 당연한 듯, 그랬으니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외국인의 눈에 보기에는 왜 그런 라이프 스타일과 규칙들이 통용되는 거지? 라고 물을을 묻는 경우.

    그런 식으로
    레인보우 세상의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이
    촛불정국에 참여하고, 이것저것 바라보고, 느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난 여름에 촛불정국에 참여했던, 참여하지 않았던
    그 정국에 한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보는 내내 오버랩되는 내내 지난 여름을 돌아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중앙 보도만 믿어왔던 사람들은 또한 그 현장에 있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될 거에요.
    지난 여름의 이야기들이, 현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거든요.

    이 작품은
    지난 6월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거리에 있진 못했지만 함께 하고자 마음 먹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사와 같은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면
    주인공은 통! 하고 빠져버리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조금 말도 안되기 돌아가는 부분도 적지 않지요.
    조금 만화적이고, 유치한 상황도 있는 편이구요.

    그래도 저는 이 헌사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지난 6월이 겨우 작년밖에 안되었었나
    라고 까마득해지고, 무덤덤해졌다가

    이 헌사를 보고 선
    다시 되돌아보고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주길 기다려왔었구나
    했거든요.

    어쩌면 작가가 약간은 만화적인 상황처럼 글을 쓴 것은
    지난 6월 정국을 이끌었던 세대개 초중고등학생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주인공들인 그들에게 바치는 어른의 고개숙인 헌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여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대다련
    시인 김선우의 이 헌사를 한번 받아보시면 어떨까요?

    PS: <캔들 플라워>는 다음의 ‘문학속세상’이나 문화웹진 나비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나비 사이트는 “http://nabeeya.yes24.com/”

  • [2009.11.17.] 스왈로우여 나를 위로하라

    처음으로 외부에서 페이를 조금 주고 촬영감독을 써봤는데

    나중에 어두워져서 어떻게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출 엉망이어서 밝았다가, 어두워졌다가 엉망에

    촬영컷에 우리 장비들 찍혀버리고

    포커스도 그리 적절하지 않고

    조명은 또 왜 그렇게 쳤는지…

    미칠 노릇이다.

    빨리 편집해보고 싶으나

    속상한 마음에 편집을 할 수가 없다….

    아아~

    스왈로우여 나를 위로하라 ㅠㅠㅠㅠㅠㅠㅠ

    스왈로우 3집은 진정 감동이니….ㅠㅠㅠㅠㅠㅠㅠㅠ

    PS: 회계를 내보니 이번 촬영 때 쓴 돈이 대략 135만원을 넘었다… 물론 P2 카드 포함 가격이니, P2 카드 빼면 대략 50만원 정도….

  • [2009.11.16.] 촬영 한 번 할 때마다

    1년씩 늙는 느낌.

    어깨며, 팔이며, 다리며 모두 쑤신다….

    이젠 월요일이네

    이젠 겨울이네

    아흑…

  • [2009.11.13.] 저녁 놀 받은 한강을 보며

    저거 쓰레받이로 싹 쓸으면 쓸릴것도 같은데

  • [2009.11.9.] 문득, 2009년이 두달 남짓 남아

    지난 시기를 다이어리를 들춰보며 돌이켜보았다.
    반성의 차원이기도 했다.

    제주도에 있을 때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2008년, 2009년을 지나왔는데…

    2008년
    영화를 하고는 싶었으나 돈은 없었고
    복학을 했으니, 복학생으로 학교도 다니고 싶었고
    오랜만에 동아리도 좀 기웃거려보고 싶어서
    학교도 다니고, 동아리도 좀 기웃거리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고스란히 아르바이트로 반납했다.
    캠코더를 하나 장만하겠다는 마음으로
    남들 다가는 해외 배낭여행도 못가보고
    때때로 국내 여기저기를 쏘다녔던게 다였던 것 같다.
    2008년에는 학교생활, 동아리 기웃기웃, 알바생활로 싸악- 지나가버렸다.

    2009년
    1월, 2월은 역시나 알바생활로 반납하고
    드디어 캠코더를 구입하고
    영화 스터디라는 것도 해보고
    자본금도 생겼으니 미디액트 수업을 열나게 들었다.
    09년 1학기를 다니면서 주 1회 있던 미디액트 수업을 2개나 듣고
    정기적으로 미디액트 특강도 듣고
    봄에는 씨네 21에서 하는 공모전도 하고
    주말에는 “영화를 꿈꾸는 시나리오 모임”에서 주말마다 영화도 한편씩 만들어보고
    마지막 학기라고, 독문과 졸업시험도 보고
    국문과 졸업논문도 내고
    2009년 1학기는 쉴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졸업인 줄만 알고,
    여름에는 온갖 방송 관련 파견업체는 다 면접보러 다니고
    졸업 아닌 줄 앎과 동시에
    노들 산하(?) 인터넷 언론사 일도 시작하고
    그 와중에 After Effect 수업, Final Cut Pro 수업, 조명 수업도 듣고
    후배들 불러모아 단편 하나도 만들어보고…
    지금까지 왔네…

    돌이켜보니
    캠코더를 사자마자
    그것으로 찍은 게 지금까지 10편 정도나 되네~
    언론사에서 찍은 것도 상당하니…

    지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렇지
    그래도 나태하게 온 것만은 아니었구나
    계획도 없이 달려왔는데
    이것저것 쑤시고, 볶고 다 했었구나…

    아직 다 지나지도 않은 2009년이
    2년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래,
    뭐 내가 캠코더를 든 지는 아직 1년도 채 안된거야.

    이번에도 큰 욕심내지 말고 해보자!

  • [2009.11.7.] 장동건과 고소영이

    뭐 어쩌든지 말든지! 그게 나랑 뭔 상관이란말이냐!

    우체국 아저씨에게 문 앞에 두라고 했던 택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는데!!!!!

    문 앞의 장충동 할매보쌈 스티커만 어른거리고 있어

    그걸 친히 내 현관문에 붙이신 분이

    의심이 가긴 하지만………

    아………

    어쩌겠는냐

  • [정태춘,박은옥-92년 장마, 종로에서] 쓰디 쓴 물에 베이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에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맛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섰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
    ‘감동’을 주면 된다 정도로
    어느 정도 마침표를 찍어주면 좋겠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노래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예전부터 알던 앨범이었지만
    특정한 계기 때문에
    요즘, 유심히 듣기 시작한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귀에서 뗄 수가 없다

    보통의 기대와 달리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듣고 있으면
    위로해주지도 않고
    흥이 나지도 않고
    노랫말을 따라하지도 못하고

    온갖 인생사에서 겪을 수 있을
    온갖 쌉싸름한 기억들이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내게 버겨울 정도로 말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을 때면
    내 20대가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아
    부끄러움,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 이 모든 것이 엉켜버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내가 만든 기억들
    내가 만든 과거들
    그것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면서
    쓴 물이 짙게도 나온다.

    “사람들”이란 곡을 들을 때면
    변화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변하고 있구나
    하는 인생의 쓰디 쓴 교훈이
    쓰라리게 지나가버린다

    인생이란게
    열심히 가꾸고, 가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다 부질없나 보다 싶어지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지고
    아직 더 살아봐야 알겠다 싶어진다

    산체험과 세월에서 쏟아내려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은
    그 어떤 앨범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앨범이다
    적어도 내겐…

    PS 1: 고음을 내고, 기교가 뛰어난 게 노래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신선한 충격을 위해서라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한번쯤 들어봤으면 좋겠다.

    PS 2 : 정태춘 박은옥은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마지막 콘서트로 한다고 한다.

  • [멋진하루-이윤기] 한량과 함께 서울투어

    병운은 뺀질남입니다.

    그는 뺀질거리다 못해, 바람둥이끼도 있는 것 같고, 또 여기저기 돈 빌리는 꼴 봐서는 먹고 버리는 제비끼도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희수를 졸졸 따라다니게 하는 꼴이 그냥 얄미워 죽겠죠?

    그런데 병운은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사실, 너무 착하 문드러졌어요. 집안 말아먹고, 마누라 도망가게 했다는 사촌 앞에서 화 낼 줄도 모르고, 친구 사귀는 데 사람 가지리도 않아요. 여행사 대표,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 이혼녀, 첫사랑 후배, 날라리 고딩까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인사하죠. 희수가 혼내고, 또 혼내도 절대 마음 상하는 법도 없어요. 오히려 돈 갚아야 할 처지에 희수 맘을 풀어주려고 주차비 내겠다고, 밥값 다 내겠다고 하죠. 그는 희수 맘을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온갖 애교까지 떨어줍니다.

    사랑하던 남자를 다시 찾아온 것 같은 희수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영화의 주 포인트은 병운인 것 같아요.
    (물론 서사적으로 봤을 때 주인공은 희수지만요)

    병운이란 인간, 희수에게는 참 요상해 죽겠어요.

    화 내야 할 때도 모르고, 진지해질 법도 모르죠.
    돈 욕심도 별로 없고, 주변 사람들 챙겨주기에 참 바쁘시기도 하죠.

    그런데 가면 갈 수록 병운이란 인간, 참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입니다.

    콤플렉스에 시달려서 아내한테 병운이랑 잤냐고 물어보는 인간
    철 좀 들라면서 남 치부까지 다 드러내는 인간
    책임감 없는 선생과는

    참 딴판으로 정겹죠.

    그래서 돈 때문에 결혼할 남자도 버린 희수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해요.
    처음엔 깔끔하게 돈 생각밖에 없던, 희수가
    고등학생의 껌딱지를 같이 떼어주고, 이혼하고 아이와 혼자살고 있는 여자의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희수는 병운 덕에 차가웠던 가슴을 조금 녹였습니다.

    헤어졌던 연인의 재결합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영화는

    서울이란 도시와는 참 안 어울리는 남자와
    서울을 배회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드라이브 내내 서울이란 도시의 풍경들
    그것을 지나치는 주인공들.
    너무도 다른 태도의 두 주인공

    그리고 이윽고 변화하는 희수.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로맨스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로맨스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죠.

    그런데, 병운이란 인물을 희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훈남정도로만 봐버린다면

    서울 풍경 촬영분들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 [2009.11.1.] 반딧불의 묘를 봤다

    전쟁은

    가장 약한자를 죽이고
    가장 강한자의 배를 살찌우기 때문에

    어떠한 명분이라도
    해선 안되는 것, 같다

    이해관계보다
    사람이 우선이 돼야 하는 건
    상식논리면서도
    자주 잊혀지는 것, 같다.

    그런데
    피랍사태로 파병 철회했던 한국이란 나라는
    또다시 미국의 환영(?)을 받으며
    아프간에 또 파병을 한다지?

    이놈의 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