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책장 몇칸을 빼곡이 채워두고 있는 조정래 이라는 이름은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도 낳고, 크게만 느껴졌다.
더욱이 검은색 북커버에 “태백산맥” 이라는 한자 표지. 예전에 대학생들이 저 책을 갖고만 있어도 처벌받을 수 있었던, 금서 라는데, 저항의 이미지까지 덧씌워진다.

책을 있는 그대로 유희하기보다, 정복욕심을 갖고 있는 나이기에 – 나도 한때 “태백산맥”에 도전해 본 적이 있었다.
중학교때인가, 고등학교때인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만. 겨우겨우 1권을 읽어내고-
“아니 세상에 이걸 10권까지 언제 다 읽는담. 시험공부할 시간도 없겠는데 – “
하면서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하고 덮었다. 대충 그 시절에 10권짜리 “삼국지”도 읽었고, 이문열의 “변경”도 거의 다 읽었었는데 – “태백산맥”만 1권만 읽고 덮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 재미가 없어서였다.
자연스럽게 읽는 속도는 더뎠고, “태백산맥”의 군인들은 눈밭을 걸어다니기만 했다.
내가 당시 “태백산맥”을 다 읽지 못했던 것은 내가 아직 그런 거대한 문학을 읽기엔 부족했나보다 –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웬만큼 그런 대하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 적에 다시 접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당시 조정래는 멀어지고, 후광은 더 커졌다.
그리고 태백산맥에 다시 도전해보지는 못했지만
베스트셀러에 꾸준히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정글만리”라는 책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게 중국을 다루고 있는 건지, 뭔지… 사전 정보는 전혀 없었고 –
그냥 조정래 신작소설이라는 것과, 꽤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만 알고 책을 열어보았다.

책은 쑥쑥 잘 읽혔지만
한 1권 절반 정도를 지나면서 – 이건 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는데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1권을 다 읽을 때 쯤이면 실망인데 – 라고 생각하게 됐고,
2권 중반부를 지나면서부터는 – 이거 또 시작이군… 라는 혀 끌끌이 계속되고 3권 끝에 이르렀다.
내가 조정래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후광만 키워온 탓에
책을 읽기 전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 보다.
“정글만리”는 문학성이라는 것 자체를 논하기가 어려운 – 뭐라해야하나. 그냥 통속소설이라고 해야하나.
문학성이 높다, 낮다, 감동을 받았다, 못받았다 – 라고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하도록
철저히 문학성 자체는 버리고 있다.
일단 스토리 얼개 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하고
인물은 내적 그리고 외적 갈등 없이 평면적이다.
그리고 몇몇 인물은 필요에 의해서 꺼내었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버려져있다.
스토리와 인물은 철저히 보여주고, 듣게 해주는 데에 종사하고 있으며
인물의 입 뒤에는 조정래의 수다스러운 입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 하나의 소설 작품이기보다는
작가의 썰을 풀기 위해서 – 동원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도 나오는 줄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에 과학 탐구 만화 같은 게 꽤나 있었다.
거기선 이제 똘이와 영희 같은 애들이 나와서는 공룡의 세계 같은 곳에 간다.
그리고는 둘이서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똘똘한 똘이가
“아 저것은, 티라노 사우르스인데, 앞 다리가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평소 육식 습성이라 우리는 지금 도망쳐야돼!”
라면서 에피소드 곳곳마다 과학 정보를 주는 것이다.
똘이가 힘이 역부족이면 중간중간에 흰머리에 안경 쓴 박사님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면
똘이와 영희는 박수를 짝짝짝 치면서 –
“아, 그렇구나 ~!! 앞으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라고 감탄하고
박사님은 똘이와 영희에게
“어익후~ 녀석들. 금방금방 배우고 기특하기도 하지~!”
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훈훈함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과학탐구 만화 말이다.
“정글만리”를 읽으면서 꼭 그러한 과학 탐구 만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물들이 겪는 에피소드는 대게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작위적 에피소드일 때가 많으며 그 에피스도 곳곳마다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썰은 엄청나게 길다.
그래서 인물들이 다 말이 많고, 역사와 경제 문제에 해박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 것 같아, 무안할 지경에 이르면 –
“아이고 중국에서 오래살다 보니 역사학자가 다 되셨군요”
라는 병풍 인물들로 하여금 추임새를 넣는 센스를 종종 사용해가면서 말이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제일 중요하기에, 그 곁가지들은 모두 순식간인데다가 전형적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는 이 사랑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 라는 식으으로 끝내버리기 일쑤다.
그렇다면,
문학성을 내팽겨치더라도 인물의 입 뒤에 조정래의 말들이 가치있다면 –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할지언데 – 그 말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 말을 듣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게되고
그냥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상식들과 인상주의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중국에 관심 많으신 동네 어르신 이야기를 육성으로 든는 정도랄까.
계속해서 중국인구 많고, 지금은 G2지만, 몇 년 안에 인구를 무기로 G1에 이를꺼다.
서양애들은 중국애들을 얕보고 있지만, 절대 그럴 애들이 아니다.
라는 게 주요 기둥이고 그 곁가지로 중국사람들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나오는 게,
중국인들은 돈이라면 환장을 한다.
중국 여자들이라면 명품이라면 환장을 한다.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한다.
성 문화가 문란하다.
등등이다. 그래서 이게 원래 중국사람들의 DNA 에 새겨져있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이러한 본성론 자체에 대해서 동의를 못하겠는 것이다.
우선 구획짓기 자체부터 의문인데…
“정글만리”에서는 우선 서양과 동양으로 구획짓기를 하고, 동양은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로 구획을 나누다.
그래서 각각 구획들의 본성이라 함은
서양애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잘 나간다며 콧대 높은 애들
중국은 돈을 밝히긴 하지만 계속 성장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아이들
한국은 나름 깡다구가 있어서 지금까지 잘 해왔듯 잘 할 것 같은 애들
일본은 잘 나갔던 과거에 연연하는 꼰대들
동남아는 열대애들 특성으로 게으른 애들
뭐 이런 식으로 설정하고, 여러 에피소드를 들면서 맞지? 맞지! 라고 강요하는데
이런 광범위한 구획짓기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선 이야기의 주 무대인 중국만 해도 그 엄청난 인구가 또 얼마나 세분화해서 나뉠 수 있느냔 말이냐. 그리고 그 국가 사람들의 성향이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경향이 조금 있다라는 것 뿐인데 – 그것이 마치 핏줄을 타구 유유히 흘러서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렇게 강한 강변으로 독자들에게 색안경을 씌워서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더 많을 것 같다.
한국만 해도 보자. 한국 안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는가.
그 안에서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라는 삼분법마저 가능하고 – 충청도는 느리고 멍청하고 – 전라도는 사기꾼이고, 경상도는 사람들이 드세다 – 라는 인상을 씌우는 게 가능하다. 이러한 인상을 가짐으로써 각각 지역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더 편리해지는가. 오히려 필요치도 않는 구분법인 것을.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이러한 인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얘기들을 조금씩 과장해서 말하고….
가끔은 국가 구획에서 넘어서서 남성, 여성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도 감초처럼 집어넣는다. 주요 요지는 N극과 S극이 만나듯, 둘이 서로 만나야만 하고,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라는 것들.
그러면서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는 괘씸한 일본을 디스하고
한국은 강한 중국에서도 잘 살아남는 용하고 영리한 민족이라고 칭찬하여서
은근한 애국심을 자극했던 게 주요 흥행의 요인같은데, 이것은 소설가 김진명이 자주 사용했던 전략 아닌가.
그런데 김진명 보다 못한 것이,
김진명은 어느 정도 스토리의 얼개가 탄탄하고, 자료조사도 나름 잘 되어있는데 –
소설 “정글만리”는 그냥 말 잘하는 할아버지의 썰에 가까운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조정래라는 문학가가 갖고 있던 후광은 “정글만리”에서 우좡창창 무너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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