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꿈이었을까(은희경,현대문학,1999)

그것을 무어라 하더라. 미시감이라 하던가. 처음 접하는 장소와 분위기인데 마치 전에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가은 느낌. 처음 가본 곳을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스님이 내가 왜 스님이 되었을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생의 절반정도를 소비하는 꿈을 인생으로 믿는 다는 것. 허무맹랭하지만, 꿈과 인생이 정말 혼재한다는 상상은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라고 생각해버리면, 믿을려고 한다면 현재 또는 비현재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그 구분조차도 어쩌면… 어차피 인생을 사는 것은 몸뚱이가 있는 땅 위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주름잡는 횟빛 뇌가 아니던가. 더욱이 문학이란 장르 이래 꿈과 현실은 적절히 배합될 조건을 가지고 있다. 구분의 미묘한 조건은 무엇이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인가 일 뿐이다.
작품에서 은희경은 현실과 비현실을 매우 자유롭게 섞어버린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구분하는 것 조차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왜 꿈인가.
사회환경을 살펴보는 게 적절하다. 몇 명 등장하는 불친절한 사람들. 현실에 편협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에 비해 기묘한 주인공의 성격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진솔해 보이기는 한다. 적어도 그는 속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와 미나. 사람들을 무턱대고 따르는 사람. 사랑을 움직일 줄 모르는 지극한 순수함. 그녀들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또한 사랑에 관한 것 외에도 영원히자 못한 것, 그 중 인생살이가 어쩌면 찰라에 불과하다는 아쉬움도 적절히 섞여있다. 속물들에게 작품은 꿈으로서 이야기한다. 영원한 것, 완전한 사랑… 이것들을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그 삭막함을 간직하면서 살꺼냐고, 하지만 작품의 칼날은 너무 무디다. 또한 작품자체가 꿈이라는 현상혹은 매체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만큼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물에 대한 관심은 2차적이 되고 말았다. 꿈을 꾸는 이유가 있어 꿈이왔다가 아니라, 꿈이 꾸어졌는데 그 내용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더라 하는 식의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도전적 소설을 구성해본 작가 역량의 한계로 생각된다.

-주인공이 애타게 찾으면서 도망가는 이유는
주인공은 그 여자를 애타게 사랑하면서 도망간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가 아닐까 한다.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주인공은 죽음 혹은 사멸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육체를 현실에 둔 인간이 어찌 죽음을 순조롭게 맞을 수 있겠는가. 어찌 꿈의 세상속의 자기 존재를, 그 전도를 쉽사리 획득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주인고은 결국 그녀에게 간다. 그러면 이후부터는 전도되었다. 이상속에 살면서 현실이라는 괴로운 꿈을 꾸다 왔었지 하는 주인공의 자유료운 삶이 다음으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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