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왈로우 테일-이와이슌지]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옌타운이란 단어가 있다. 옌이 한창 고가를 달리고 있을 때 못사는 나라의 못사는 사람들이 고가인 옌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본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어 일본을 옌타운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옌타운이라고 불렀다. 그렇게되어 옌타운은 이주노동자들이 부르는 일본이기도 하며, 일본 내의 이주노동자를 지칭하게도 되었다. 옌타운에 사는 옌타운들의 삶 속의 꿈을 그리고 있는 영화가 스왈로우 테일이다.

삶의 단면, 생활의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 영화의 특이한 연출 때문인데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환상할 법한 것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로 My Way 노래 테이프를 찾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등장인물, 위조지폐를 이용해서 쉽게 부자가 되어 버리는 옌타운, 국제 경찰 조직 인물들과 그 행위, 사회의 밑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등장인물이 일본열도를 뒤흔드는 일본내 대스타가 되는 이야기. 그 하나의 소재가 영화 하나를 만들만큼 영화적인데, 이것들이 뭉뚱그려 있으니 이것은 참 특이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유쾌하기도 하다. 생각해보길, 킬러의 존재는 참으로 비현실적이지만 킬러 소재 하나만 영화가 채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걸 제재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납이 된다. 그런데 그 킬러영화에서 갑자기 불치병이야기도 나오고, 외계인도 나오고, 거대 태풍이 몰아쳐서 도시가 잠기는 이야기도 나와버린다면? 각자 어느 영화의 제재나 될 법한 것들이 소재로 앙증맞게 혹은 뻔뻔하게 자리잡고 있어 버리니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 앞서 이것들은 무엇일까 하고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이것들은 도대체 뭘까? 이 비현실적 상상력들이란.

-뭘까?
그것들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치부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린다.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옌타운과 국가 정체성 문제도 짚고 넘어가고 싶고, 성장 이야기도 말해주고 싶고, 돈 앞에서 선 인간들의 이야기도 말해 보고 싶고 등등. 그런데 예술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 메세지로 명료하게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야기속에 어떻게든 쑤셔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는 그 사건들이 제법 있을 법한 일들이라고 개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의 사건들에 개연성을 모두 집어넣으려면 이야기를 굉장히 길게 끌어갈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압축하자니 어설프게 보일 것이 뻔하고… 그래서 아예 포기를 한다. 개연성 따위는 집어치워! 보여줄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큰 테두리 줄기 아래 곁 테두리 소재들의 엽기적인 출몰들. 그러나 이 포스토 모던틱한 무의미성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큰 테두리의 스토리라인조차 침범할 경우 그 영화를 완전 쓰레기 영화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만 한다면, 영화 자체가 쉬어진다. 개연성 불가와 개연성의 범주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유롭게 보여줄 것을 아주 쉽게 등장시키고, 생략할 것을 마음대로 생략하는 제작자 위주의 영화를 마음놓고, 대놓고 만들어 제낄 수 있기 때문. 또한 무의미한 척 했던 것 중 어떤 것에 살짝 의미를 덧씌우기를 한다면 영화는 ‘뼈 있는 농담’ 을 했다는 호평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영화(?) 는 그 모든 스토리 간에 구분선이 묘연해지고, 어떤 것이 유효하고 어떤 것이 유효하지 않은 것인지, 관객조차 내가 저것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던지, 감동했던지 조자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감동을 얻지는 못하였는데 어떤 마음의 움직임은 얻었는데 그것이 ‘새로운 감동’ 인 것인지 그저 ‘색다른 느낌’ 이었던지 판단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효성과 불필요의 구분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끝도 없는 SF란 상상력의 낭비이고 광대함이 광대해진만큼 공허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뜻 밖의 살인사건으로 부터 시작되는 엉뚱한 이야기들은, 그 큰 줄기를 이루는 위조지폐 사건, 클럽의 비약적 성공 사건, 대스타가 되는 사건, 메이홍이 죽는 사건에서는 유효하나 그 외의 것에서는 굳이 그 정도로 엉뚱함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점을 낳게 한다. My way 테잎을 찾으려는 것,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것 말이다. 테잎 찾기와 국제 경찰조직은 영화에 액션적 요소로서 볼 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방대하게 만들어 버렸고, 너무 엉뚱하였으며, 큰 줄기 이야기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한 마디로 불 필요한 부분에서 오버했다. My way 라는 노래로 하여금 인생의 길과 제 인생의 장애물들, 변해버린 자아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의 비약이 너무 심했던 듯 하며,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경우는 위조지폐를 만드는 배경이 되긴 하였으나 그것을 위한 필연으로 등장시킨 경우 치고는 너무 광대하였고, 의뭉스러운 점을 너무 많이 만들고 있다. 거의 묻지마 등장으로 일관하고 있어버리니 좀 황당해질 수 밖에… 이 모든 SF적인 요소들은 그래도 영화 자체에 이미지 형성 혹은 분위기 형성에 있어서는 적합하게 묘하고, 엉뚱하고, 쎈티멘탈하고, 삽화적인 느낌으로 착실히 녹아내려 있다. 하지만 영화는 분위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앞서 말했듯이 엉뚱한 것들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압축, 생략, 상상력의 발현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영화기법은 아주 유효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분별한 확장으로 영화 자체를 분위기로 이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므로 영화의 스토리 라인 일부를 사건으로 떼 내어서 말해 본 것이다.

– 엉뚱한 것들을 모두 껴안아 주는 것은
매우 광대한 스토리들, 수많은 등장인물들, 개연성 불가의 이어짐들 이것들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영화자체가 그리 산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 진행을 보여주는 것들은 고백체 혹은 1인칭 주인공의 나레이션에 상당부분 의지하여 안정감을 유지한다.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같은 경우가 그런 일면을 볼 수 있다. <스왈로우 테일> 에서도 초반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자막과 함께 등장하던 나레이션은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양하고 광범위한 이야기들을 산만하지 않게 소화하고 있다. 그것은 그 광범위한 이야기를 우선 1인칭 주인공의 한에서 소화해내고 있고, 그것이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와 결부되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성장 이야기야 말로 가장 거대해질 수 있는 스토리라인일 수 있다. 일부를 유아기적 상상력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고,  일부를 성년기의 새로운 세상의 모습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는 양면의 장점. 스왈로우 테일에서 주인공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주인공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 주인공은 외부의 것들 모두를 수용한다. (아니 수용하기 보다 외부의 것들에 반발하려는 의지가 없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어이없는 것을 어이없게 여기지 않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따라와야 할 법한 지저분한 고정관념과 충돌들이 없기 때문에 영화는 모두를 수용하면서도 그리 산만하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가 계속 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성장한다. 백지상태라고 여겨졌던 주인공의 과거는 결코 백지상태가 아니었다. 문신을 하는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낸다. 성장을 위해서 자신이 누락시켰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한 마리 나비로 성장하여, 한 주체가 된다. 가만히 있었던 주인공은 이제 자신이 무엇인가를 꾸미게 되는 데 그 행동양식이 옳건, 그르건 주인공과 함께 호흡했던 관객들은 이 성장의 모습이 감동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감동을 위한 초석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조금 넓히면 옌타운인데, 아무리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도 그들 모두의 이야기 주체는 옌타운이라는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선은 일관된 것이다. 1인칭 주인공의 성장이야기, 옌타운이라는 동일한 목소리라는 시선이 이 영화의 광범위를 수용해주는 동력이라면 동력, 원천이라면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
영화에서 주 타격대상이 되는 것은 돈이다. 돈은 영화 초반부 주인공 엄마의 죽음에서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못치루고, 그녀가 모아 둔 돈을 티격태격 하는 모습, 그리고 중반부 위조지폐로 쉽게 벌리는 돈, 주인공이 위조지폐를 만들었을 때 위조지폐를 찢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모두가 목숨 거는 돈이란 결국 무용한 것 이 이야기이다. 언제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수많은 뻔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감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왈로우 테일>에서는 돈은 의지만 있으면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 현대사회에서 돈에 부여한 그 주체를 탈각시키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 그것은 바로 위조지폐로 돈을 산더미처럼 모아 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라면 찢어도 상관 없는 것, 너도 찢어봐, 나도 찢어볼게 하는 식의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그것이 결국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으로 결부되는 것. 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놀랍고 현실적인 발상으로 만들어버린 시선이 놀랍다.

-정체성
옌타운은 일본 사람도 아니고, 자신들의 고국 사람들도 아니게 된다. 돈을 벌어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옌타운이다 라고 하고, 그들만의 클럽을 만드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는 그리 소용이 없어 보인다. 그저 동일성을 형성하는 집단이라면 그 집단 내부의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고 산다면 그 집단을 국가에 앞서서 생각해봐야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에는 일본인처럼 생긴 옌타운들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하는 미국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은 옌타운들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한 소리다. 그러면 모든 것은 분화된다. 국가라는 정체성으로만 상정하기에는 그것들이 포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협소한 것이다. 옌타운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일본인 처럼 생기지 않은 일본인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수많은 비주류들은 국가가 포함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이런 국가 정체성의 협소한 모습의 지적.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유효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최종후기
난 사실 영화를 매우 좋게 봤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게 보았던 부분은 영화의 분위기 자체였고, 영상미와 일부 의미심장하게 하려 했던 대사에 기인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바로 후에 반성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이 후에 다시 뜯어보았다. 이 생각의 과정은 아주 오래걸렸다. 영화 스토리의 일부분을 잊을정도의 시간동안 이 감상문이 쓰여졌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매우 후련하다. 이 글로 하여금 <스왈로우 테일>은 내게 새롭게 왔다. 확신하건대 더욱 좋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도록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의 울림이 더욱 깊어졌으며 더욱 오래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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