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에 대항하는 가족의 사투. 이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을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보통 상상하게 되길, 서울이란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고, 그것에 납치당한 주인공들의 딸내미를 구출하는 것이란 뻔한 것들로 매개될수도있다. 그것은 그 부류의 영화가 다들 그렇게 하는 것들, 평범한 일반인이 자신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괴물에 대항하는 과정이 영웅적으로 비춰지고, 그것은 영화 속 사회내에서 영웅으로 인정받는 정도의 스토리 라인? 주인공 자신은 딸내미를 구하기 위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을 테지만, 그것은 온 사회, 인류를 구하는 것으로 결론내려진다. 필사적인 사투는 필사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결말되었을 때 무지막지한 감동(?)을 낳으면서 관객들은 아! 저 사람 덕분에 살았어. 라고 여기가 되는 것. 뻔할 뻔짜이면서 재미있게 되는 액션/재난 영화 스토리가 이니던가. 어쨌든 주인공은 그럴 때 한 인간이기에 앞서 그가 지켜낸 집단을 상징하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기도 하고, 그것은 국가이기도 하고, 그것이 좀 과장하자면 인류이기도 하고.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노골적인 영화 말고도 수많은 액션영화들이 다 그런식이지 뭐. 그런데 괴물은 그것이 아니다.
순차적으로 영화를 따라가보자면 장르영화에 대한 의심은 처음부터 해소될 순 없다. 미군에서 방출한 약품에 의해 괴물이 탄생한 것은 우선 소재로 치부하자. 여기서부터 의심을 말끔히 해소할 순 없는 것이 잔뜩 사회 비판적인/풍자적인 허세를 부리다가 그건 한낱 소재로 비껴치우고 결국은 평범한 스토리 라인에 지극히 상투적인 주제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액션영화가 얼마나 많은가.(그러한 영화의 소재화가 ‘심각한 것들을 무덤덤하게 하기’ 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 조금 이상한데? 라고 생각되는 것은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누군가의 자살씬이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장르영화를 빗겨가고 있다. 그럴듯한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선 깨트리지 말아야 할 도덕률이,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이다.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고 치밀하게 지켜질 때 그 부류의 영화들은 관객에게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런데 괴물은 누군가의 ‘태연한 자살’ 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류에 온 몸 받친 영웅의 사랑 보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송강호(극중 강두) 가족의 사투를 비춰지는 관점에 주목해보자. 보통 예상하길 처절한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다가, 분노하고 복수해야겠다는 의지를 돋아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송강호가 초반에 미군장교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것에는 누군가를 구해야 겠다는 정의감보다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영웅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애처럼… 그리고 합동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이 뒤엉키는 모습도 희화화되고 있다. 왜 저렇게 가족의 슬픔을 가볍게 취급하지? 하는 물음은 곧 이어지는 정부의 생화학적 대책에 감독의 주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구나 하는 대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미군이 약품을 흘리게 되는 원인과 연관되어 이 가족의 시련이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의 다수에 대한 ‘no배려’로 생겨난 것인데, 거기에 항의해야 할 가족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목소리도 내지 못한 체 무작정 배제되는 상황, 배제되다 못하여 제 몸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체 해부되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것은 분노하게 만든다. 다분히 집단(정부, 미국?)에 대한 희롱은 슬픔과 분노로만 표현하기에 그 가족의… 뭐랄까 생존력이 억압당한 자들의 처절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풍자적인 성격으로 표현되면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표현된다.
감독은 이것을 노린것은 아닐까? 분노로 표현하게 되면 격정적인 감정에 치우쳐 놓치게 되는 것들을 얼마만큼의 거리두기로 하여금 더 많은 말들을 하게끔… 그래서 영화 자체가 무겁지가 않다. 긴장감이 면면히 흐르고 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할 상황속에서도 웃음이 유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의 사투를 지켜보면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명확해 진다. 그것은 권력자들이다. 권력이란 일반적으로 하위체와 상위체의 쌍방합의에 의해서 생성되고, 하위체는 상위권력이 하위체의 권리를 시혜에 주기를 기대하는 양상을 띤다. 그런데 상위권력의 뒤퉁수를 치는듯한 행태를 <괴물>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으며, 그들 상위 권력체가 더이상 대다수 사람들의 권리를 대변할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제 하위체들,그들의 삶과 권리는 그들 스스로가 나서게 만든다.
송강호를 비롯한 그들 스스로가 나섰다. 주인공 송강호는 그 캐릭터자체가 웃기다. 가장 슬퍼해야 하고, 가장 분노해야 하고, 가장 주인공 스러워야 할 그가 그러하니 그가 인류를 대표할 영웅이 되긴 글러먹었다. 보통의 영화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가족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슈퍼맨을 띠고 있는데, 송강호네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박해일(극중 남일)이나 배두나(극중 남주)가 더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가족관계가 아버지란 존재로만 대표해버리는 권력관계가 해체되고 있다. 가족은 ‘오로지 내림사랑(부모에게서 자식으로)과 가부장에 대한 기대’보다 상호사랑이다 라고 영화는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권력체가 일방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폭로하고, 상위권력체가 이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교차되면서 괴물이라는 영화가 권력관계의 구조적인 해체를 말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수직관계보다 수평관계에 <괴물>은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괴물을 없애는 씬은 약간 어설프다. 그 중요한 상황에서 경찰 혼자 등장해서 총을 쏠리는 없거니와, 모두 흩어져 있던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이 그 중요한 시점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 같은 설정은 약간 무리적인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 연극같은 설정이 그래도 아류작의 어떤 것과 다르게 생각되는 것은 이 영화 전체적으로 흐르는 풍자적인 성격과 희화화하기에 편승해서 쇄신된다. 전통적으로 클라이 막스에 이르는 장르영화의 과정들을 거부하는 반항의 표시라고 여긴다면 영화에 너무 편을 들어준 것 같지만, 일정정도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할 듯 싶다.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의 합동공격으로 괴물은 무찔러진다. 여기서 영화는 영웅은 없었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수배자로 찍혀버린 그들 셋이 사회의 공공의 적을 무찔러주었지만 그들이 영웅취급을 받을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어떤 명성과 어떤 굉장한 정의감이 아닌 자신의 생명과 권리를 자기들 스스로 싸워나가는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박해일이 어느 노숙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한 때 데모질을 했다는 부자친구는 배신했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노숙자는 돈거래를 거부하고 박해일을 도와준다. 그것은 민중들이 싸우는 것에서, 위로 표현되기(영웅화 되기, 권력화되기)를 거부하고 수평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우리들 삶은 우리가 지킨다는… 그렇다면 정부 등은 이제부터 어떻게 봐야지 라고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것들은 결국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 권력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라고 답을 내릴수 있다. 송강호는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딸내미를 못구했지만, 노숙꼬마를 하나 구했다. 마지막 씬에서 송강호와 식사하는 꼬마아이. 상부권력의 배신이 큰 충격이었고, 제 목숨은 제가 지키기 위해서 아직도 총을 옆에 끼고 있는 송강호. 한국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내는 TV는 재미없어라고 하는 말에 동조하며 꺼버리는 모습. 저것은 이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 어떤 자들의 입장에 취한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지 라는 송강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꼬마아이와 함께 사는 송강호의 결말은, 영화 초반에 누군가가 태연히 자살했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생명을 장르영화처럼 -절대 지고 지순한 도덕률-로 제시하면서 영화를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생명은 결코 하찮은게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진귀함에 있어서 가족, 인종, 위치지움에 의한 값싼 정의감보다 생명 자체가 소중하다는 본능적/인류애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영화가 계속 해체시키려는 진정한 적은 권력을 위한 권력체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면 도대체 그 괴물 자체는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괴물 자체가 어떤 감정을 가진 동물이 되어 어떤 무언가를 수행하려 한다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그런 성질을 지니지는 못하였어도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이유. 탄생은 미군의 no배려로 시작되었고 송강호 가족에 의해서 죽임당해야 하는 운명. 탄생부터 죽기위해서 태어난 그 것. 아직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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