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을 쓰기는 난해하다. 그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것이 전해주는 가슴의 울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서 거리를 두고 메스질을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메스질은 해부학처럼 마구 찢겨지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성역을 치고 그것에서 느끼는 아련한 감동을 아련한 것 이상 어느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느끼게 하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이렇게 도식적인 질문은 경계하더라도 어떤이라는 물음은 부득이도 필요한 것이다. 사회성과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가만 놔두지 않고 침범하는 것이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어떤 감동이던가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그 작품과 작가를 위한 최대한의 배려일 것이다.
안도현의 <짜장면>을 읽었다. 전에 안도현의 몇 구절의 시를 훑어본 것 외에 아는게 없는 작가였다. 이름이 익숙한것으로 보니 꽤 유명한 작가인가보다 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짜장면>은 성장이야기인가?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가 이어진다. 어른이 읽는 동화를 표방하는 <짜장면>에게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초월을 이야기 하는 것일거다. 지나친 초월성과 다르게보이기는 우리 시대 어떠한 것들이든지 팽배하여서 더 자극적인 것, 더 엽기적인 것의 행태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짜장면>에게서 거기까지를 기대하지 말자. 익숙한 것들의 이야기 속에서, 일상성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들은 수없이도 많다.
17살 주인공. 전교1등을 놓쳐보지 못했던 아이가 반항이라고 불릴만한 일탈을 한다. 이유라 할 것은 어른들의 세계속에 짓눌리는 자신이고 싶지 않아서, 그 아이가 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탈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인 오토바이를 탄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주인공. 만리장성의 배달부가 된 주인공은 주변 상가와 젊은이들간의 일상성속에서 사회에 대한 관찰을 시도한다. 중화요리를 시켜먹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들, 하지만 <짜장면>이 그것의 주된 포커스는 아니다. 주된 포커스는 주인공의 젊음과 방황 그리고 그의 가정이다. 모범생처럼 길들여져야 하는 가정. 권력욕과 가정폭력이란 실상을 감춘 체 거기로의 편입을 강요하는 세계의 지리멸렬함에서 일탈하는 청년이 이제 선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양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자신이란 존재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아 버리고, 짜장면에 버무러지면 짜장면이 되고 마는 양파. 양파까던 이의 손끝에 독한 향을 남겼다가도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 양파. 그것이 우리의 젊음이란 말일까? 젊음의 열정은 그렇게 한꺼풀 한꺼풀 벗겨져버리고는 이내 사회속에서 침윤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침윤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장이다. 짜장면이라는 요리는 분명 양파를 필요로 하는 것. 양파는 짜장면을 이루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잊었던 것을 생각하자.
잊고 있었던 것 획일성의 사회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자는 것이 주된 교훈처럼 들린다. 짜장면은 양파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젊음의 열정에서 성공의 신화로 둔갑했던 것이 우리 사회 자양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정하려는 사회의 논리는 새로운 자양분들이 어떻게 양질의 것이던가 판단할 여유조차 두지 않은 채 짓눌러버리려고만 한다.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방황이 마구 돌출되는 것이 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른과 닮은 청소년, 어른과 닮은 어린아이들이 존재하면서 자양분들은 일찍 빛을 일어버리고 어른들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자양분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타자 혹은 이방의 것들로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로 전락시켜지고 만다.
관찰하는 것
염색물을 들인 배달부들을 단순 문제아로 치부하지는 않았는가.
어머니의 자아의 배태됨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가.
우리 자식 짜장면 먹을 때 입가에 묻히는 춘장에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는가.
한때는 젊었을 때가 있었지
모두는 한 때 젊었을 때가 있었지. 열정, 방황, 일탈의 시기란 게 있었지. 그때는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왜 어른이 되면 속물인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속물로 되려 하는 것일까? <짜장면>은 이야기하길 젊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분노하려 했던 것 그것들을 자신이 압제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떠올리게 만든다.
주인공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그때가 있었지.
그런때가 있었지만 이미 오토바이는 바다로 쳐박혀 버리고, 주인공은 운좋게도 팽나무에 걸쳐 살아남는다. 그때 수평선을 보면서 나 자신을 위해 눈물지었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되물으면서 눈물흘리는 주인공. 너무 착한 결말이 아닌가? 관찰하는 것과 일탈하는 것들에 더불어 이것은 너무도 착한 성장이야기로 남아버리고 만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이것은 동화이다. 여기서 과격한 어떤 것을 바랄 수는 없다. 동화라는 것은 일상의 이야기, 바로 자신의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속에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돌발적으로 무언가가 뛰쳐나올 필요는 없다. 나도 저랬더랬는데 지금 나는 과거의 모든 것들을 잊고 있었어 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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