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박은옥-92년 장마, 종로에서] 쓰디 쓴 물에 베이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에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맛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섰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
‘감동’을 주면 된다 정도로
어느 정도 마침표를 찍어주면 좋겠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노래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예전부터 알던 앨범이었지만
특정한 계기 때문에
요즘, 유심히 듣기 시작한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귀에서 뗄 수가 없다

보통의 기대와 달리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듣고 있으면
위로해주지도 않고
흥이 나지도 않고
노랫말을 따라하지도 못하고

온갖 인생사에서 겪을 수 있을
온갖 쌉싸름한 기억들이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내게 버겨울 정도로 말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을 때면
내 20대가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아
부끄러움,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 이 모든 것이 엉켜버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내가 만든 기억들
내가 만든 과거들
그것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면서
쓴 물이 짙게도 나온다.

“사람들”이란 곡을 들을 때면
변화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변하고 있구나
하는 인생의 쓰디 쓴 교훈이
쓰라리게 지나가버린다

인생이란게
열심히 가꾸고, 가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다 부질없나 보다 싶어지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지고
아직 더 살아봐야 알겠다 싶어진다

산체험과 세월에서 쏟아내려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은
그 어떤 앨범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앨범이다
적어도 내겐…

PS 1: 고음을 내고, 기교가 뛰어난 게 노래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신선한 충격을 위해서라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한번쯤 들어봤으면 좋겠다.

PS 2 : 정태춘 박은옥은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마지막 콘서트로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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