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푸시-이명랑,작가세상,2005]

가족내에서, 이 사회가 만들고 있는 가족내에서 여성이 제’ 인간구실’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작품에서 비춰지는 가족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냉정한 시장의 법칙을 연상하게끔 한다. 너무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그 모습때문에 설마 저럴리가, 이건 너무 한다 싶지 않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데, 소설의 이야기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의 냉철한 단면일 수 있다.

-전복과 드러내기
작품에선 마치 ‘장치’처럼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의 가족(친정)이 특히 그러한데 아무리 세상이 전쟁같다고 하여도 그런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일이’ 혹은 ‘출동 SOS’에나 등장할 것이다. 임신을 한 딸이 유산을 하였어도 그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약점으로 잡았다는 듯 ‘부정한 여자’ 로 계속 딸을 지칭하여 가족 내에서 딸의 지위를 사정없이 격하시키며, 딸에게서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고서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도록 자신에게 또한 충성할 법한 군인남성과 결혼시키는 행위, 딸이 준 선물이 값싼 모조 명품이라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위. 보통 억척어멈 중에서도 이런 억척어멈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억척어멈이 억척어멈이었던 조건은 밑에 숨겨져 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전쟁같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가정만을 지키고자 함, 그래서 몇몇 작품들 속에서 억척어멈들이 나타났지만 그녀들을 볼 때마다 독자들은 ‘너무한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연민을 느꼈으며 이 세상에서 어머니로 살기의 고단함을 바라보면서 공감하곤 했다. 그런데 슈거푸시의 어머니는 정말 너무했다. 묘사된 그녀에게서는 단 한번의 사랑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렇게 모질고 극악스러워도, 단 한번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 실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자아 수난의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태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해준다면 이 어머니 역시 억척어멈이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을, 슈거푸시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은 고사하고 시기, 분노, 경멸 외에 다른 긍정적인 감정조차 단 한번도 표현하지 않는 인물이다.
세상에 저렇게 너무한 어머니가 존재할까? 설마?  라는 생각을 아니 갖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러한 어머니의 존재에 앞서 한번 돌려 생각해보자. 그 ‘악당스러운’ 인물이 만약 아버지였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가족내에서 권력을 탐하는 냉혈인 아버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구성원들조차 경쟁자로 생각하는 인간 남성의 모습은 슈거푸시의 어머니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된다. 슈거푸시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무엇보다 허구적 장치라고 느껴지는 연유에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방식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항시 달래주고, 어루만져주고 그러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으로 생각되어지는 어머니.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어머니상일 것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또한 지배질서와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반영하면서 현실의 극복의지를 드러내려는 근래의 많은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경향은 어쩌면 관습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왔던 점에 주목해보자. 슈거푸시에서 만일 어머니의 행태가 그대로 아버지에게서 나타난다면 이것은 종래 볼 수 있었던 여느 소설들의 경향성에 포함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 내에서 아버지가 가부장의 귄위를 점유하기 위하여 감정을 부인하고, 가족 구성원을 부인하는 냉혈인. 그러한 인물의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의 점유역할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배집단 혹은 주류질서체계를 상징하는 것까지 아우르게 된다. ‘ 그런 일반화된 문학 속 아버지들의 함의가 그러했던 것은, 현실에서 아버지만이 가족단위 내에서 유일한 사회적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그렇게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질서였다는 데 연유한다.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산적 경제활동’은 오로지 아버지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달린 식구들’ 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통념이 아니던가. 슈거푸시의 행위가 아버지의 행위였다면 행위의 이유를 ‘사회내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의무지어져야 했던 그 지난한 과정. 그리고 안식처가 되지 못했던 가정. 넘어서서 노동의 소외까지’ 이러한 틀거리를 가지고 해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어찌 보면 매우 익숙한 문학적 표현 소재이다.
그러나 슈거푸시에서 주인공의 대립항이자, 권위 획득을 위한 냉혈인은 어머니로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의도적 전복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아버지 권위와 대항항들’ 의 문학작품에서 얻어질 것들이 단순 그것이 어머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태로 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고자 하는 어머니의 주도면밀한 투쟁으로 나타내지는 것이다. 여성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예상하는 모든 예비답들을 뿌리치고 냉혈인 어머니는 나도 인간이야, 나는 내가 욕망하고자 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이고, 지극히 이상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도 아니고 이 속물적이고 고정된 세계속에서 얼마만큼의 지위획득으로 그 만큼의 자유와 권리만을 갖으려 하는 인간이야 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벌의 생태 모습과 비교하여 그것은 비교적 명확하게 해설되고 있는데, 자신만이 로열젤리를 움켜쥐고자 하는 여왕벌의 생존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여왕벌이고, 로열젤리는 가족내에서 그녀가 점유하고 있는 권위이다. 그녀는 가족의 구성원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에 의무지어지는것들을 가차없이 버린다. 자신도 인간이기 때문에, 권력욕망과 축적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사회내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들을 자신도 추구하겠다고 거나하게 말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욕망과는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슈거푸시의 어머니가 어머니이자 아내로의 위치에서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 역시 경계선 없는 무한확장의 욕구로 사회 구성원 누구의 욕망과 다름 아닌지만, 그녀의 욕망은 바로 밑바닥에 생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녀가 욕망하고, 욕망을 위해서 냉혈인이 되어버렸던 것은 욕망하지 않으면 생존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욕망하지 않고서는 기계적인 어머니와 아내가 되어버리는 ‘죽은 것 같은’ ‘버티는 인생’ 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즉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욕망했던 것이다. 모든 욕망은 욕망할수록 범위를 넓혀버리고, 채울수록 불만족스러운 불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욕망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래도 버티면서 살기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것. 생존을 바라 밑바닥에 깔고 있는 그녀의 욕망이기에 악과 어리석음의 모습을 취하기 보다 자신을 위한 치밀한 책략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메세지가 소설 속에서 그토록 비정상적이고 특이하게 보여지는 것은 결국 그 냉혈인이 어머니였고 여성이었다는 이유에 일정부분 기인한다. 우리가 여성이었기에 그것도 어머니였기에 관습적으로 예상했던 것들. 수용에 앞선 그러한 장벽 설치가 있었음을 예상했다는 듯 작가는 이러한 전복을 꾀한 것 같다.

-라틴댄스의 세계는
사랑을 실현하지 못하고, 상처의 역사를 지녔으며 치유받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가정속에서 나와 가정을 꾸리나 역시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꾸리게 되는 주인공. 거기에 자기실현과 자기만족을 위한 그 무엇은 오직 남편 몰래 담배피우기 였던 주인공은 가슴뛰는 심정으로 라틴댄스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핍박과 억압에서의 도피처로 기능하고 했던 예술은 슈거푸시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
강습일이 있는 날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것은 라틴댄스 자체의 즐거움이기 보다 다양한 삶의 굴레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어쩌면 같은 기제들로 인해 라틴댄스를 택한 이들을 바라보는 일. 그 군상안에 있는 주인공 자신을 응시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위안요소였지 라틴댄스라는 예술적 행위 자체에 심취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소설의 구성이 춤의 방법들에 빗대어서 구성되나 그것이 소설전체의 분위기를 예술적 아우라로 감싸쥐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기능하는 것은 비교에 의한 적절한 이해를 제공하면서도, 자아의 목소리가 독백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쭈구려 앉아있기에 머물러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까지라고 보는게 알맞으리라.
중요한 것은 동네 구민회관이 아닌 자본의 집중체인 백화점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라틴댄스 강습실이 주인공에게 하나의 도피처 이기보다 다른 공간에서 사회와  그저 조금 다른 방식의(그러면서도 어쩌면 그게 그거인) 인간들을 보는 삶의 현장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조금 더 멋져보이려는 사람, 자신의 치장에 힘을 쓰는 사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염치란 것을 버린 사람 등등. 춤과 춤에 대한 즐거움의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강습실에 다니는 사람들은 강습실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과 지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자신에 대해 충만해하기 보다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지움을 확인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통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물론 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자신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 주인공에게 강습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다른 관점과 충언을 많이 보태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역시 사회적 관계에 지긋지긋하게 얽매여 있기에 유한한 투자며, 유한의 효과이다.(어떠게 보면 무한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절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대적인 효과. 하지만, 현실과 상상력으로 인해 현실외부로 탈피해가는 예술적 기능과 비교했을 때는 유한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 행복감은 예술적인 차원의 초월성과 자기응시, 자기쾌락과는 거리가 있다. 사회와 제도의 외부에 존재하기가 아닌 내부속에서 상대적인 우위점위 차지하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라틴댄스 강습실과 그 사람들이 ‘외부의 것들’ 이 아닌 내부에 존재하는 삶의 현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작품은 더 리얼해질 수 있었다. 만일 라틴댄스에 심취한 주인공이 댄스를 통해 삶의 상처들을 치유한다면 그것은 보통 볼 수 있는 영화 시나리오 겠으나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주인공은 자신을 구성한 공간 외부로 발걸음 내딛지 않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문제를 자신의 공간에서 치유하거나, 극복하거나, 점령해야 하거나 혹은 패배해야만 한다. 이것이 삶인 것이다. 상상력과 예술심취로의 우회전이 아닌 직면하는 것. 우리가 삶의 모습안에서 뒤엉켜야 한다는 것.

-체념의 목소리는 어디서 부터 나오는가
주인공의 말하는 목소리를 뭐라고 성격규정할 수 있을까. 라틴댄스의 강습실, 부부관계, 친정집의 공간과 첫사랑에서부터 현재에 가정꾸리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체념의 목소리에 가깝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 일탈과 임신 그리고 유산의 과거를 회상하는 데의 목소리 또한 그 과거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현재에 기반하여 과거를 회고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담담하기만 하고, 현재 같이 사는 군인남편의 사는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 또한 체념의 목소리다. 작품의 처음, 라틴댄스 전단지 앞에서의 심정만이 그 목소리를 벗어나 격정적으로 서술되고 있고,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체념의 목소리는 주인공이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고민하거나 상상하지 않으며, 일탈조차 수용될 수 일탈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념은 기대에 대한 포기의 감정이라는 데 주목하자. 그것은 주인공이 기대치라는 것이 허물어지고는 있되, 완전히 무화되지는 않았다는 것, 자신 외부의 것들과 대응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예리하게 바라보는 데서 올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 외부의 것들과 자신은 아직 융화되지 않았기에 체념의 목소리가 가능한 것이다. 강습실에서, 가정에서, 친정에서 주인공은 마치 강습실의 멤버가 아니고, 가정에서 아내가 아니고, 친정에서 딸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다. 주인공의 이 모든 공간에서 위치하고 있는 자아가 그 위치가 아닌 외부에서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자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라는 궁금증을 계속 유발하면서 주인공 외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긴장관계를 성립하고 비판적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독자에게로 들어가버렸다. 그러했기 때문에 한심한 남편의 귀를 파주면서 귀여운 곰탱이라고 불러버리는 그 순간, 자신도 로열젤리를 욕망하겠다고 말하던 그 순간 독자는 작품과 그 주인공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전복적 상황 장치들. 주인공의 목소리가 독자내에서 들어오고 거기서 생겨나는 예리한 목소리들. 어떻게든 삶과 직면하려는 태도. 이것들에 대한 공감형성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체념의 어투, 그러했기 때문에 그 체념의 목소리가 결국 주인공 자신이 어머니와의 권력투쟁을 벌여보겠노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화를 목표로한 목소리처럼 여겨지고 만다. 작품 전체가 주인공이 성찰하려는 다른 길들을 모색하지 않고, 그 현장 속에서 한계지워진 것들까지 인식하고 여기에 대한 끊임없는 동조 구하기로 인하여 이것은 한계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초월과 승리 같은 것이 등장해버린다면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할만큼 허구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예리한 현실의 단면인 작품이 동조하고 동감했던 독자들이 이 억울한 단면의 모습의 감흥하여 분연히 주먹을 쥐며 울분을 토하는 효과를 낫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기능성이 리얼하되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허구적 표피들이 전혀 리얼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친정에서 가족관계가 좀 더 구체화되어 표현될 필요가 있었지만, 단지 어머니의 행태를 벌의 생태 모습에 비교처리해버린 것은 너무나 쉬운 선택이었다. 또한, 주인공 자아의 가정구성에서 그녀 또한 아내이고 어머니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외부화된 체념의 목소리만을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부화된 목소리에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단지, 아내와 어머니가 장보기와 섹스생활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자식 현은 더욱이 작품초반에만 여가시간을 방해하는 조건으로만 인식되고 그 이후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섬세함이 부족하였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비현실적인 악조건 들이 동조의 목소리에 불구하고 삶과 직면 하려는 태도 또는 이런 사회 구성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들의 폭로 효과를 자아내지 못하고 하나의 보여주기 효과에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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