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동생에게 성욕을 느끼는 주인공. 얼핏 매혹적인 여동생의 몸을 카메라가 훑을 것만 같은데 오히려 정반대다. 그 성욕과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는 주인공은 여동생을 제대로 보질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은 여동생이 아니면 그 어디도 좋다는 듯 뉴욕의 거리를 헤매며, 병적인 성적 집착을 보인다. 방황은 우울해 보이고, 성적 집착은 음란하기보다 걱정스럽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왜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가, 라고 묻는 것 같은데- 뉴욕의 풍경들은 너만 그런 건 또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구획된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 또한 성욕에 매달려 신음하고 있다. 여기서 남자는 원래 짐승이야 하는 식의 히히덕거림은 발생하지 않고, 방랑하는 인간의 덧없음은 이토록 애처로운 것이구나 라는 ‘현자 타임’에 관객 스스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편집되지 않은 시선으로 영화는 거칠게 묻기보다, 다소 체험하게 했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보게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너무 근원적이어서 공허해보이기도 한 질문. 그리고 의외로 놀라운 부분은 그 질문에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치스러워하는 주인공에 그 누구도 쉽사리 오만할 순 없으며, 영화가 던져준 묵직한 공에 나는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대답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냥 막, 이 아닌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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