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 버린 시대에서 한 인간이 구성되어버리고, 혹은 그 시대에서 생성되었다면 그 인물은 지나간 시대를 추억할 수 없다. 기억한다고 말하기 조차 거리감 느껴질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나야! 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모두가 그 시대는 이미 끝나버렸다고 말해버린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존재의 변이뿐인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형되어왔던가? 하지만 시간과 역사와 인간의 구성물들은 마음먹은대로, 이성적으로(혹은 이해타산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 변하지 못할, 변하지 않은 인간이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어쩌면 자신이 희망이 될 것만 같은 아무것도 모를 사람에게도 이야기한다. 부르짖지 않고, 울먹이지 않고, 그렇다고 더듬더듬 힘겹게도 아니고, 나긋나긋은 더욱 그럴리 없고… 어찌보면 의뭉스럽게, 어찌보면 완고하게, 어찌보면 아파라고 직설적으로…
좀 더 인간적으로, 좀 더 민주적으로, 좀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을 열정으로 꿈꾸었던 시대. 그 속에서 만들어졌던 자아는 이제 모두 배반되어야 하나보다.
그럴 수 없는 것. 그땐 그래야 했었고, 지금은 이래야만 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단순 감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치기어린 의협심을 따질것도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느껴지는 것들. 그래서 ‘아직’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고, 어떻게든 버텨왔던 것이고, 기다려왔던 것인데 ‘하나 둘씩 떠나버리네, 아쉬운 사람들’ 이 어느 순간 이젠 목청 높여서 끝났다고, 끝나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목숨바쳐 지지키려 했던 것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이전의 것들은 유행지난 것일 뿐이라고 싸움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인가?
추억이란 감정만을 대동하는 것. 아니 좀 더 하면 몇 줄의 멋진 약력일뿐? 나는 마치 그때 이소룡의 매니아였어라고 이야기 하듯 매니아들의 번지르르한 자부심의 증거가 될 추억. 추억에서 그리움의 감정이나마 느낀다면 그것은 조금 더 양심적인 것일까? 그러나 최영미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추억 그리고 그리움과는 거리가 멀다. 4월을, 5월에를 부르짓지 않겠다는 작자는 과거가 지금껏 자신에게 남기는 상흔들을 반사된 표면들에게서 응시하고 그것을 다시금 받아들인다. 상흔의 반사 그리고 수용이라 함은 고통을 수반한다. 바로 그때의 고통에의 공감에서 오는 고통, 공감 이후의 자신에게 지어진 의무에의 고통, 현재와 자신과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고통. 그 아픔의 감정을 아파라고 이야기 하는 시. 4월을 그리고 5월을 노래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것이 이미 끝나버렸다고 인정하는 것일진대, 그녀에게 그날들은 죽지 않았다고, 평생을 아파하더라도 지고가겠다고 끈질기게 그날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은
과거를 지켜보는 감정은 시간과 세월과 하늘과 함께 온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과 세월속에 늙어가는 자신. 그리고 얄밉게 서럽게 생겨먹은 하늘. 부대끼며 산다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간과 세월은 흐르고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작자는 시간과 세월을 자신의 나이로 소화시키고 하늘을 전신주위에 얹힌 그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의 소산이기 보다 시간과 세월의 흐름속에서 느껴온 감정과 느낌의 축적물에 기대어있다.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늙어가는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은 사랑을 기다리고,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위해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상을 펴는 이가 그녀인 것이다.
하지만 상흔의 응시와 자아로의 받아들임에서 오는 고통은 그녀가 선택하였기에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진정 회복제로써 기능 할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 그리고 상처 이후에 넘어 설 ‘치유’가 작자의 시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변이를 뜻할 수도 있는 치유는 거부하는 것이 옳을 것임에 돌알을 깨물듯이 곱씹고 곱씹으면서 진정 올 치유를 기다리고 기다리겠다는 것인데 그 순간 독자는 내가 바로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하루하루를 같이 아파하면서 어느시절처럼 어깨동무하면서 목청 부르짖거나 하진 못하여도 끈질긴 인생을 동반하여야 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상을 펴두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와 함께 나설 수 있도록 그렇게… 그런데 지금 그녀의 이야기는 메아리 치고만 있지는 않은가. 그저 향수로, 추억으로 예전의 이야기로 그녀가 서러워할 그리움이라는 것으로 그렇고 있지는 않은가. 창자를 꺼내듯 영혼(느낌과 감정의 시간적 집적물들이란 용어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어찌할 수 없이)을 해부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그저 허탈해하는 군중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시집은 물어보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나, 당신과 함께 기다리게 될 것이나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기다림의 정서가 시 내면 깊숙깊숙히 그리고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한번 생각하게 하는데, 그날이 올 것인가? 살가죽을 벗겨서 장구를 만들고 징을 울려댈 그날이 올 것인가?
하지만 그날은 오지 않는다.
그녀가 온갖 창자를 다 해부하고 이야기를 하여도, 지나간 시대의 상처를 현재까지 품고 있는 그 허심탄회함에도 그날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그 날 ‘ 왔다 하여도 그것을 이루었던 칼자루와 총자루는 그 순간 뒤엎어져서 기뻐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깊숙히 찌를 것이다. 인간 그리고 인간들의 세상속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수는 있어도 모두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절대적인 그 날은 올 수 없는 이상향인 것. 그 이상향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어떤 이상향이었던지 어떻게 가야되는지를 말해야 조금 더 많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역사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지양의 발걸음. 오늘 하루를 사는 순간이 바로 공산주의다라고 선언할 삶.
최영미의 시는 과거를 소환함의 고통과 자아를 배반하도록 상처남기는 것들, 그리고 시간과 세월 속에서도 끊임없는 기다림. 이것들인데 어쩌면 당연하게 생겨나는 감정일지 모른다. 거기에까지 이른 작자의 끊임없는 성찰은 진정 우리시대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소중하기 때문에, 작자의 시가 노래이지 않기 위해서 과거가 현재에 도달해서 온 성찰과 양심적 감정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펼쳐내야만 한다. 그것은 작자와 우리들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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