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앨리어트는 가장 오랫동안 아주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이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는 아무리 영화를 좋게 보았다고 해도 몇 씬과 함께 그것들이 주는 어리둥실한 느낌들로 영화를 추억하곤 하는데, 빌리 앨리어트만은 아주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서 발을 또각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다. 그것은 가끔씩 홀로 묻는 질문 때문일것이다
지금 나는 빌러처럼 살고 있을까?
나는 지금 나에게 충실한가? 나는 지금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럼 적어도 꿈을 향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가?
탄광촌 마을의 시멘트 바닥에서 발가락이 부러질 듯 춤을 추는 빌리. 마치 자아를 저주하는 듯 광기에 서려있다. 나는 왜 발레를 좋아하는가. 발레를 출 수 없다면 이 발가락을 부러트려버리고 말겠어. 라는 듯 빌리의 춤은 그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결국 보수적이던 아버지도 형도 빌리에게 발레를 허용하고 만다. 결국 비상하는 빌리. 그 빌리가 있기까지 아버지는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파업이 진행중인 광산의 엘르베이터를 타고 말았을 것이다.
꿈을 가진 것, 그것을 향한다는 것이 위대한 일이고 당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이 잔혹한 현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동화같지만 않은 현실의 중압감. 영화는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의를 배반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랬다면, 빌리 아버지가 엘르베이터 타는 모습이 그렇게 암담해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후에도 쇠락해가는 광산촌을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와 빌리의 형을 그려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중압감 속에서 자기세대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빌리에게 투영하는 것. 왜 다음 세대에 넘기는가. 자기세대에서 끝장을 봐야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이것은 중요한 한계이기도 하면서 지극힌 현실적인 반영이기에 그 문제의식과 풀이과정을 이제 빌리 앨리어트를 본 관객들에게 넘기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국적 자본을 비판하면서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
제 3세계에서의 노동착취를 안타까워하면서 나이키 신발을 신는 것.
한달을 10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이어나가는 극빈층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따뜻한 아랫목의 낭만적 겨울을 생각하는 것.
어쩌면 여가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
어쩌면 인생을 즐겨라 라는 단어 자체.
내 자신의 외부의 것들을 모두 부정해야만 하는현실.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런 현실속에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딜레마이고
그러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함부로 자신이 타자와의 존재가치를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내 자신을 내가 심판할 수는 있다.
최소한의 선을 두는 것.
가볍지 않은 꿈을 꾸는 것.
내 꿈을 살아가려는 그 지난한 과정.
외부의 타협적이고 고정적인 가치들이 정체하라고 말할 때
한번 내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빌리처럼 살고 있을까?
그 언제라도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 끝없는 물음의 과정속에서
어느때에는 빌리처럼 비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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