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비극 -김사과의『미나』비평-
1. 들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하여, 현 대중영화의 주요한 골격으로 쓰이고 있는 비극tragedy 의 법칙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 주인공은 한명이고 고립되는 경향을 가질 것.
– 주인공은 하마르티아Harmatia를 가지고 있을 것.
– 주인공은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에 도전할 것.
현대판 오이디푸스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올드보이>는 위의 법칙을 그대로 준수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하마르티아를 가지고 있었으며, <올드보이>의 오대수 또한 자신의 딸을 사랑한 하마르티아를 지닌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적인 현재에서,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경고에도 볼구하고 오만한 태도로 진실을 요구한다. 오대수 또한 자신에게 이미 닥쳐있던 ‘운명’ 의 실체를, 기억의 복원을 요구한다. 진실과 기억의 복원은 예정된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신’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르게 하고, 오대수의 혀를 자르게 한다. 완벽한 비극tragedy이 완성된다.
서사문학이 갖는 매체특질이 연극, 영화와는 상이하겠지만, 『미나』는 위 비극의 특질들을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충실한 비극이다. 여기선 주인공 수정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비극tragedy의 과정으로 보고, 많은 부분 위의 특징들을 찾아내는 과정 안에서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
2. 수정이란 존재
수정은 그들을 비웃으며 상한 불고기김밥을 입속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진정 비웃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수정이었다. 상한 불고기김밥은 먼저 수정의 얼굴에 약한 발진을 일으켰다. (중략) 열정의 삼일은 상한 불고기김밥을 클라이맥스로 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정에게 남은 것은 후유증과 그에 대한 학교당국의 냉담하고 형식적인 처리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뿐이었다. (p.71)
위의 서술은 단순 수정에게 있었던 특정 상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수정의 탄생이며, 수정 그 자체이다. 수정은 극기훈련장에서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지휘교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른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극기훈련장의 모범이 되어 모두에게-박수치는 사람이 자의로 치던 타의로 치던- 박수를 받게 된다. 수정은 기존질서와 권위체계의 포섭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도구가 되어 준 것이다. 이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관계가 계속 성공적이었다면, 수정은 완전히 시스템을 신뢰하는 존재로, 사물화Vordinglichung 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래는 일방적인 권위질서의 배신-상한 불고기기밥-으로 붕괴되었고, 수정은 식중독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런 계약파기에 대하여 기존 질서는 자기 시스템의 결함을 인정치 않는다. 또한 수정과 맺었던 일종의 밀약, 그 자체도 시스템은 인정치 않는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계약이라는 것은 순전히 수정이 벌인 것이고, 수정이 갖고 있던 기대였다고 시스템은 발뺌할 것이다. 시스템 자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헛된 기대를 품었던 수정이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다.
수치심과 모멸감의 기억을 깊이 마주보면 결국 박지예처럼 자살에 이르게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은 단호하게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충분하게 사랑하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아존중감을 높이자. 수정은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계속하여 식중독의 추억에 몰두한다. (중략) 도시는 점점 더 수용소의 담장을 높이 쌓아가고 있으며 수정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없다. 그저 빨리 세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서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발밑에다 대고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72)
수정이 그런 시스템을 대처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특이하기도 하지만, 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수정은 일명 ‘때리고 튄’ 시스템이란 테두리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수정은 경멸스러운 시스템 구조 안에서 가장 윗대가리가 되고자 한다. 상한 불고기김밥을 받지 않을 존재, 누군가에게 상한 불고기김밥을 주고 나서도 발뺌할 수 있는 존재를 추구하게 된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이다. 축구공, 자동차 인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닌, 아무 이유없이 그냥 무대위로 밀려난 존재이다. 무대 위의 인물에게 주어진 행동, 대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무대 위의 존재는 작품 속 등장하는 ‘지예’ 처럼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 선택권도 지니고 있다. 존재는 자신을 자기 규정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예언자 오라클은 네오가 ‘the One’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주인공 네오는 자기 자신을 ‘the One’ 으로 정의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만든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면, 무대 위 수정은 자신을 시스템의 대가리가 될 존재로 규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수정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를 실현시킬 수 없다. 수정은 자신을 자기 정의하였다고 착각하지만, 수정의 선택은 수정이 서 있던 무대, P시라는 무대가 지니는 장력(張力)에 이끌린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정이 시스템의 윗대가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되어 수정을 비극으로 이끈다.
3. P시 속 수정
그런데 완성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장이다. 싸구려 미네랄오일과 글리세린을 일대일로 섞어 담은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가 찍힌 무겁고 우아한 유리로 된 화장품케이스 같은 것이다. (p.82)
그녀는 초등학교 일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삼학년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관되게 들뢰즈와 데리다를 강의하며 안도한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일본어로 번역할 생각도 있으나 한국어로 옮길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그 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81)
동물이라면 물리적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서열은 다소 독특한 면이 있다. 이미 서열 체계가 쌓여 있고, 그 서열의 극점이 구현에 얼마나 근접하였는가가 관건이 된다. 개인이 아닌, P시라는 도시인들의 집단도 그런 서열구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주변부’ 정도에 위치할 P시는 ‘중심부’의 모든 문화적 ․ 지적 체계를 모방한다. P시가 내재하고 있던 ‘주변부적’인 문화 관습들은 폐기하고,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로 자기를 포장하고, 중심부의 지적 체계에 포획되길 원한다.
그리고 P시 내부에선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질서체계를 똑같이 구동한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이 가진 문법적 완성도, 구성적 완벽성 따위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종종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져 휘청거리며 우스워졌으나 그래도 그녀는 당당했다. 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으므로 떳떳하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여기에 적용가능한가의 여부이다.’ (p.76)
수정은 P시라는 질서체계에서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을 순도높게 지니고 있는 학생’ 이다. 수정은 P시가 구동하고 있는 규칙들을 완전히 습득한 존재로 자기정의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자신을 정의한 자기정의가 아닌, 자유의 상실 즉 ‘인간의 사물화 Verdinglichung’ 이다. 극기훈련 과정에서 상한 불고기김밥을 먹기 전의 수정과 먹은 후의 수정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을 신뢰하건, 경멸하건 수정은 여전히 시스템 아래에서 대가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수정은 자기 정의를 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잃어버렸다. 수정은 P시의 규칙 외부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수정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정의 이런 욕망이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바라는 대가리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편리한 소비자의 비극이다. 소비자는 레스토랑이 가격을 올리는 것에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돈에 어울리는 것을 갖거나 지갑에서 돈을 좀더 꺼내는 가능성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가장 없는 자의 것을 조금 더 빼앗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p.80)
P시의 질서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도구들’은 대가리가 되지 않고, 거대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비자의 미래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암담한 미래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수정은 자신을 거대한 소비자로 위치 짓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정은 시스템의 대가리가 되고 싶어하고, 서열 하(下)의 도시민들을 짓밟고 싶어한다. 시스템에 겉도는 존재 혹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어한다. 철저히 P시라는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품고 있는 이런 수정의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인 욕망’ 이며, 거대 소비자를 넘어 위계질서의 최상위층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허용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오만이 수정의 하마르티아라 할 수 있다.
4. 수정의 비극
작품의 제목이 ‘미나’이지만 미나라는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긴 그리 쉽지가 않다. 작품에서 미나는 대부분 수정에 의해서 비춰지기 때문에, 일부분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도 같고, 왔다갔다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미나는 수정과 달리 P시라는 무대 위에서 살짝 빗겨난 존재라는 것이고, 그것이 수정을 참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박지예는 시험을 못 봐서 죽었다고 하니까 그건 나랑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 같고, 사실 나는 잘 모르겠고, 뭐 굳이 뭔가 알고 싶지도 않고, 사실 나는 박지예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p.33)
미나는 결국 세 과목의 답안지를 모두 백지로 내고 나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완벽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이었다. 수정은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한 자신을 느낀다. (p.35)
P시는 누가 죽건 말건, 시험시간에는 충실히 응해야 한다는 ‘비인간화된 도구’를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은 그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기 위해, 박지예의 자살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무화시킨다. 충실히 답안을 제출하여, P시의 대가리 근접하였음을 느끼고 조금은 희열하였다. 그런데 미나는 수정과 달랐다. 수정 눈에 비춰진 미나는 완벽하게 자신의 인간화된 모습을 향해 다가갔고, P시의 요구사항들을 뭉개버렸다. 미나는 P시의 무대에서 빗겨나가면서, P시의 도구화된 인간이기를 거부하였다. 수정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수정은 미나를 비웃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을 착하게 써봐 수정아. 이제부터라도. 안 그러면 아무것도 안돼. 봐 벌써 문제가 생기잖아? 너는 착한 마음이 뭔지 모르지. 그래서 인정을 안하는 거야. 하지만 니가 인정 안한다고 있는게 없어지는 건 아냐. 세상은 착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p.287)
세상은 선한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눈으로 보기엔 그렇겠지. 악마에게 악은 선이고 또 선은 악이잖아. 그래 너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참말로 악이니까. 완전한 악.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해. (p.288)
미나는 그야말로 P시의 질서를 내면화한 수정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설득이 가능할 리 없다. 작품에서 또 한편 문제시 하였던 것은 소통불가의 상태였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내뱉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의 말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서로를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타인의 말은 차단하거나 민호처럼 미끄러트릴 뿐이다.
미나의 설득을 수정은 오히려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악의적으로의 정도가 아니라 미나를 아예 완전한 악의 덩어리로 규정한다. 수정이 미나의 ‘도덕’을 이해못하고 받아칠 수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완전히 P시의 규칙들을 내면화한 ‘비인간화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P시에서 가장 합당한 형태의 인물이 가장 비인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다는 것을 작품은 한편 예리하게 찌른다. 비인간-수정은 미나가 이야기하는 ‘도덕’을 이해할 수가 없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수정이 하필이면 미나를 표적으로 삼게 된 것은, 미나라는 존재가 P시에서 빗겨나간 너무도 괘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정의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곧 하마르티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P시가 수정에게 제공하는 거대 소비자라는 지위를 수정은 승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정은 ‘거대 소비자’가 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욕망한다. 하지만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아이러니 한 것은, 수정의 욕망은 수정이 P시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 했기 때문인데, 그 자체가 실현될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된다는 것이다. P시의 상태는 천연덕스럽게 아폴론적인 척 하고, 욕망하는 수정 그 자체가 하마르티아가 된다.
붕괴할 수밖에 없는 수정의 표적은 미나가 된다. P시의 질서에서 빗겨나려고 노력하는 미나는 P시의 고장난 부속품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행위는, 수정이 P시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동일자가 타자를 배제하는 행위이자, 수정 자신이 P시의 동일자로써 권력을 실현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폴론적인 척 하는 P시는 수정을 완벽한 타자로 인식하고, 아마 ‘사이코패스’ 이런 식의 명명을 붙일 것이고, 미나는 비극적 희생양이 될 것이다. 수정의 비극은 이렇게 완성된다.
5. 맺음말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적인 삶을 제약하는 여러 상황들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에게 맞는 여건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때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 즉 하나의 사물로 전락하게 된다.
수정은 그녀 자신이 P시와 P시의 시민들을 철저히 경멸하였지만, 완벽한 P시 속의 ‘사물’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미나를 살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완전히 P시의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수정 자신은 포터블 음악을 귀에 꽂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겠지만, 그것은 다른 목소리들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귀를 막은 것은, 그녀 안으로 틈입해오는 P시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주변의 목소리’였다. 수정은 철저히 귀를 틀어막은 P시의 부속품의 한 형태다.
그렇다고 미나 또한 대안적인 존재는 아니다. 미나도 존재의 자기정의를 통해, 상황을 만들어 나가려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미나는 현 상황에서 단지 살짝 빗겨나고자 하는 도피적 형태에 불과하다. 헌데, 수정은 그런 미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P시의 질서가 ‘미나같은 빗겨감’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P시는 가히 수정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세계체제에서 어떻게든 ‘반주변부’를 벗어나 ‘중심부’로 나아가고 싶은 P시 또한, 수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꿈꾸고 있고, 내부에선 미나 같은 존재를 살해하게끔 내버려 둔다. 그리고 수정이 직접 미나를 칼로 찌른 후에야, P시는 아폴론적인 선한 표정을 하고, 수정을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수없이 많은 수정을 양산하는 것이 바로 P시이다. 수정의 비극처럼, P시가 맞게 될 비극은 더 파국적일 수 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비극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 경쟁력 강화’, ‘선진국이 되자’ 라는 모토 아래 우리는 지금도 제 3세계 국가들을 착취하고, 중심부 국가들이 벌인 전쟁에 협조하고 있지 않은가.
* 참고문헌
김사과『미나』창비, 2008
아리스토텔레스 / 천병희 엮 『시학』문예출판사, 2002
마이클 티어노 / 김윤철 역『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아우라, 2008
이왕주『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
이서규『현대철학의 이해』건국대학교 출판부, 2003
장 폴 샤르트르 /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예출판사, 1981
지오반니 아리기「발전주의의 환상 : 반주변의 재개념화」『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공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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