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사람들이 외줄 위에서…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해도 전할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실이 있을 수 없고
감각 외의 다른 인식을 불가하고
나 자신의 앎을 타인에게 진실되게 전할 수 없다는

이후 철학사는 고르기아스의 이 허무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무서운 진실앞에서

라쇼몽은 어떠한 대답을 내리고 있을까.

라쇼몽의 문제인식은 물론 고르기아스의 인식과는 다르다.

고르기아스는 철저히 철학적 입장에서의 이야기였고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라쇼몽 아마도 뭔가가 있고, 아마도 인식할 수 있고, 아마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의 전제아래서 시작한다.

그런데 라쇼몽의 최후는

뭔가가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되고
인식할 수 있음에도 인식 못하게되고
전할 수 있음에도 전하지 못하게된다

그리고 그것의 이유는 인간 감각과 자아와 타자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이 아닌
그 외부의 것들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이게도
가장 속물적인 것이면서
가장 원시적인 것이다.
사리사욕이면서,
동물적 생존의지이기도 하다.

산적, 사무라이, 부인의 명예를 위해?
그것보다는 더 절실한
인간 정체성을 지시하는 생존을 수반하는 명예자본이자 문화자본이 아니었을까.
축적욕구 보다 훨씬 밑바닥, 그 바로 위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 높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낭떠러지라고 이야기 한 것들이 얼마나 깊은 지 혹은 얼마나 얕은지는 잘 알지 못하면서
외줄 밧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곁에 있는 상대를 먼저 밀어버리는…

하지만 그 반동으로 더 위기로 치닫는 것은 제 자신일 뿐이다.

그리하여 영화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만큼
무서운 세상이다.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서로가 두려워하는 그 낭떠러지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그 ‘자신들’의 눈알로 만들어져 있으며
떨어진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겨우 손을 뻗으면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그 곳에서
눈동자들의 심연이 그것을 매몰차게 더 매몰차게
주저앉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밧줄을 쥐고 있을 누군가조차 덜덜덜 떨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이라고
라쇼몽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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