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극단 백수광부] 북한 사람들이 던져주는 특별하지 않은 질문

‘북한소재!’ 하면 떠오르는 화두로 ‘그들도 인간이며, 화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
이제는 너도나도 여기저기서 같은 이야기를 방법만 달리 해서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상투적 소재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습니다 라는 다소 도덕적인 교훈이 계속해서 문제화되고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때문일거에요.

북한찬양을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동해바다에서 해양선을 넘어 온 북한선박이 격추됐다는 뉴스가 나면 남한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고 여기기 보단,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제거’했다고 느끼며 ‘우리’의 힘의 우위에 기뻐하는 곳이 바로 남한사회잖아요.
북한사람들, 그들이 대화할 수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다 라는 생각이 우선하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었다고만 할 수 없는 현실적 딜레마가 존재하지만

연예인 한 명이 자살하면 전국민적인 애도가 일어나는 현상과
북한 사람들 수십명이 남한사람에 의해 살해됐을 때, 그것이 일말의 안타까움보다는 승리의 기쁨에 먼저 휩쓸려 버리는 현상의 대조는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암튼, 암튼.
이런 문제적 현실 때문에 영화를 비롯해 문학, 연극 등등의 예술작품들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북한 사람’이란 지극히 당위적이면서 도덕적인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봅니다.

고래도 같은 화두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한 질문을 던져주죠.
“남한이 북한보다 나은가?” 라는 것이죠.
이 질문은 동시에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보다 덜 고통스러운가?” 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고
“자유인가 평등인가” 라는 위선적인 질문 말고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가 나은가, 독재자와 특권층을 열외로 둔 평등이 나은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될 수 있겠네요.

인생 목표를 “성공” 혹은 “축적” 보다 “행복” 이라고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질문들에 뜨끔뜨끔 하면서, 고래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우리에게 와도 그리 행복하지 못할 텐데 하면서 그들의 소박한 희망에 뜨끔뜨끔 해지고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그들이 꼭 내 신세 같구나 하는 동질감…. 뭐 제 개인적인 경우일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문제는
위의 질문들을 아싸리 깊게 파고들어서 관객의 심장을 팡! 하고 때려주든지
아니면 같은 질문과 메시지를 하면서도 신ㅅㅓㄶ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다른 형식 혹은 디테일을 축적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여타 작품에서 이미 마주쳤던 상투적인 질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작품 고래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첫 시작과 풍기는 분위기에서 결말을 예상할 수 있고
그들이 내뱉는 대사들에 디테일이 살아있지도 못하고, 그렇게 깊게 파고든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인물들은 관객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주긴 했지만
관객들은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이미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추측컨대,
“아 이 질문.
이거 저번에 풀으려고 했었는데, 잘 모르겠던데.“
하고 말아버릴 수 있어요.

이미 마주쳤던 질문이고
작품 고래가 그리 적절한 상황에서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작품 고래를 좀 아쉽게 봤습니다.
상투성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함을 보여주질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추천과 비추천 사이에 선택을 한다면
저는 추천에 한표를 주겠습니다.

그 질문들을 끌고 나가면서, 주체의 자살이라는 너무 쉬운 결말 대신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생은 계속된다 라는
삶의 리얼리티가 살아있었고, 그것이 주는 울림이 꽤 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배우 연기나, 무대 미술이 맘에 들기도 했구요.

여튼, 그렇게 봤습니다.
2010년 들어 처음 본 연극작품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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