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상상해본다.
미래라고 부를 수 없는 시간적 텀 안에서, 지금 바로 내 앞에 일어날 수 있을 위험한 판타지.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나와 연관되어 있고 또한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내 눈 앞에서 나와 연관된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은 공포일수도 있다.
그것은 ‘나’라 하는 주체가 대중속으로 편입되는 순간에…
‘내’가 어떤 예외적인 생물체가 아닌,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라고 부를 존재가 되어 있는 동안에…
나의 확장형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
나의 생존을 오직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원동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판타지.
작품은 그러한 판타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들의 삶은 직접 제시되는 일이 없지만, 에비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어느 정도는 암시한다.
오직 제공되는 언론과 교통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는 대중들의 암흑상.
언론과 교통의 마비는 대중들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도 있다. 아주 간단하게도 말이다. 거기에 질병이라는 거대한 ‘위생권력’ 은 대중들을 사육되는 일종의 동물로 만들어 버릴수도… 말이다.
작품의 판타지는 조지오웰의 <1984>부터 끊임없이 제시되어 오던 통제사회와
인류 온 역사에 주기적으로 나타나오던 독재사회의 혼합판이다.
빅프라더의 존재는 대법관이로 나타나고,
밀고자들과 군대가 그 대법관을 지탱해주어 형성하고 있는 독재사회.
아주…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로마의 시저, 히틀러, 빅브라더… 등등등…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의 현대 영국을 배경으로 그런 융합을 만들어 냈을까.
영국 국기에 미국국기를 박아놓고… 영국이 수많은 근대 제 3세계국들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왠지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의 현재와 관련이 깊은 것만 같다.
전쟁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인류 지구촌의 세기는 이미 전쟁으로 얼룩져있고, 이념논쟁 혹은 전쟁이 끝나버린 지구 위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혁명을 일으킬 줄을 모른다. 연일 계속되는 반전시위에도 영국은 결국 미국의 푸들이 되어 버렸다는… 인간보다 이윤을 선택하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풍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작품이 깔아두는 배경과 여러 상황적 탄생이유 혹은 주제를 다시 곱씹어본들…
일관되게 엉터리 연출, 짜깁기 한듯한 시나리오, 기본적 개연성의 부족.
주제의 결말까지의 방식은 다분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전혀 개연성이 없는 진행이 우선 눈에 띠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마는데…
처음, 어느 시대일줄을 모를 시대에 누군가 죽는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와 맺는 인과적 이유가 부족하며, 거리에서 만나는 V와 에비와의 만남이 너무나도 상투적이어서 어이가 없으며, 에비를 도와주는 방송국 동료가 어이없게 자초하는 자신의 위험이란 그저 이해가 안되며, 매번 V를 쫓기보다 음모를 파헤쳐주는 관찰자 역할을 하던 경찰이 어떤 이유도 없이 그 지하철을 발견해서 때에 맞춰 찾아오는 것 하며, 먼저 오는 V와 뒤에 와주는 경찰이라는 기가막힌 타이밍이라는 것, 방탄조끼 하나 입었다고 추풍낙엽처럼 적들을 쓰러트리고 다시 에비에게 까지 찾아가 그녀 품안에서 유언까지 남기고 죽는 것 하며… 이로 셀수도 없이 끔찍한 빈약한 개연성들.
또한 전체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이 오줌 찔찔 흘리듯 제공하고 있어서… 그것은 조금씩 실마리를 푸는 듯한 느낌이기보다 그때그때 머릿속에서 짜낸듯한 인상이며…
그 소재차제도 이로 말할 수 없이 진부다하다는 것이다.
빅 브라더의 존재, 언론 통제의 사회, 정부권력의 어떤 실험실에서의 실험.
같은 것들… 다 어디서 본 듯한 것들이 이로 말할 수 없이 얼기설기 엉성하게만 엮어 있어서 진부함들이 지저분하게 얽혀있다.
또한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어떠한가. 상투적 대사와 인과성 없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경찰은 총을 쥐고 있는 모습조차 어색하게 서 있으며… 의미심장함과 각성함의 모습들이 모두 어설프게만 처리되고 있다.
마치 TV 방영 드라마를 영화로 뭉뚱그려 놓은 듯한 전개를 지나면… 브이 포 벤데타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대중들에게 자각을, 주체성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브이의 마스크를 씌워주는데… 그래서 우리 자신이 모두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브이라는 개별자가 그리고 에비라는 개별자는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이라 여기기에는… 그 각성의 과정 또는 그 자각의 과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던 것이다.
특별한 희생과 위장된 고통으로 자각함이라 함은…. 너무 대중적 호응도가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
조금 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는 고통이 좀 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 부분에 나왔던 어떤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더 진실성 깊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눈에 보이는 고통보다 일상적 삶을 압조여오는 고통들. 권력들, 폭력들 말이다.
그리하여 일정의 문제의식을 난잡하게 뒤섞어놓고 뻔하게 혹은 어이없이 폭죽을 터트려버리던 것 앞에서
관객들은 그저 관성적인 방식으로 박수를 치게 되고 만다.
레퍼토리. 해피엔딩 레퍼토리에 습관적인 박수. 그리고 끝.
그러면 영화의 주제는 소재가 되어지고… 영화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