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사람들이 외줄 위에서…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해도 전할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실이 있을 수 없고
    감각 외의 다른 인식을 불가하고
    나 자신의 앎을 타인에게 진실되게 전할 수 없다는

    이후 철학사는 고르기아스의 이 허무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무서운 진실앞에서

    라쇼몽은 어떠한 대답을 내리고 있을까.

    라쇼몽의 문제인식은 물론 고르기아스의 인식과는 다르다.

    고르기아스는 철저히 철학적 입장에서의 이야기였고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라쇼몽 아마도 뭔가가 있고, 아마도 인식할 수 있고, 아마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의 전제아래서 시작한다.

    그런데 라쇼몽의 최후는

    뭔가가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되고
    인식할 수 있음에도 인식 못하게되고
    전할 수 있음에도 전하지 못하게된다

    그리고 그것의 이유는 인간 감각과 자아와 타자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이 아닌
    그 외부의 것들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이게도
    가장 속물적인 것이면서
    가장 원시적인 것이다.
    사리사욕이면서,
    동물적 생존의지이기도 하다.

    산적, 사무라이, 부인의 명예를 위해?
    그것보다는 더 절실한
    인간 정체성을 지시하는 생존을 수반하는 명예자본이자 문화자본이 아니었을까.
    축적욕구 보다 훨씬 밑바닥, 그 바로 위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 높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낭떠러지라고 이야기 한 것들이 얼마나 깊은 지 혹은 얼마나 얕은지는 잘 알지 못하면서
    외줄 밧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곁에 있는 상대를 먼저 밀어버리는…

    하지만 그 반동으로 더 위기로 치닫는 것은 제 자신일 뿐이다.

    그리하여 영화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만큼
    무서운 세상이다. 무서운 ‘인간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서로가 두려워하는 그 낭떠러지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그 ‘자신들’의 눈알로 만들어져 있으며
    떨어진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겨우 손을 뻗으면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그 곳에서
    눈동자들의 심연이 그것을 매몰차게 더 매몰차게
    주저앉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밧줄을 쥐고 있을 누군가조차 덜덜덜 떨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이라고
    라쇼몽이 말했다.

  • [거룩한 계보-장진] 느와르?

    곰 플레이어에서 무료상영하길래, 오랜만에 할 일없는 토요일

    나는 봤다.

    솔직히, 이전부터 이 영화, 재미없다, 재미없다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왔으니 기대하진 않았다.

    또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 내버려두고, 왜 하필 이 영화를 봤는가.

    머리 굴리기 싫어서 그랬다.

    토요일 아무 일정없이 집에 있었고, 점심을 혼자 만들어먹고 나니, 그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아무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공짜라니깐, 시간이나 보내보자 하고 봤던 영화.

    보고나니 망연자실해진다.

    어쩜 영화를 이렇게 못 만들수가 있을까!

    시나리오는 원래부터 저질이었고

    돈으로 발라놓은 여러 효과들로 그렇게 치장을 해놓고.. 이런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니 단지 기이할 따름이다.

    이 영화는 끊임없는 클로즈업과 고속카메라 그리고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울렁거리는 영상물을 내놓고 있는데, 내놓다가 말다가, 내놓다가 말다가 하는 그 흐름끊김도 문제지만,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과대포장 때문에 그야말로 울렁증이 날 정도다.

    그 효과들을 받쳐주고 있는 것들은 다분히 상투적이고 저질이기 짝이없는데

    누가

    어이없는 영웅탄생과
    등에서 칼 꽂는데 불 꺼주고
    비오는 날 싸워주다가 예상했던 결말이 튀어나오는 데에

    비장하다 라며 박수를 쳐 줄수 있을까

    또한 정준호의 캐릭터는 또 어떠한가
    조연으로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중에 한 역할 ‘맡는 척’ 하는 그의 존재는
    존재자체로 참 안쓰럽다.

    조금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은 감옥탈출(이것도 정말 어이없는 설정이지만)
    밖에 없었고
    상투적이고, 전형적이고, 흐름을 끊는 엇박자 유머와 비장감이
    울렁증 일으키는 화면들로 치장되어 있던 이 영화는

    오랜만에 봤던 오리지널 “쓰레기 영화” 였다.

    느와르 좋아하시네

  • [추격자-나홍진] 기대 후에

    영화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3류 액션영화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실화를 소재로 했다고 해서, 더 저질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대박이 났던 것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이런 종류의 영화치고 이슈화를 아무리 시키더라도 그 뻔한 스토리 때문에 흥행이 쉽지 않건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겠구나 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혹평이란… 너무도 끔찍하게 만들어졌고, 왜 이런 영화를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는…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내심 다른 종류의 기대를 품게 되었다.
    이것이 평범한 액션영화만이 아니라, 색다른 시도를 해 본 작품일수도 있겠다는 것.
    살인의 끔찍함을 흥미로 다룬 것만이 아니라, 소재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끔찍함의 극한에 서서 관객에게 직접 들이댔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라는 매체 앞에 언제나 붙어있는 ‘재미’ 라는 것을 한번쯤 떼어보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

    옛날 어떤 영화는 러브스토리를 그리면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제대로’ 느끼게끔 하기 위해서 관객에게 ‘지루함’ 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것은 초조해하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대략 10분동안 거의 변화없이 보여줬던 것. 요즘 시대에 영화의 강적인 ‘지루함’으로 동감을 얻으려 했다치면 어김없이 관객들은 상큼한 악플로 대응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아주 원론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언제나 재미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일상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면 되지 않는가. 그것이 지루함일수도 있고, 끔찍함일수도 있고 뭐 어떤 것이든 말이지. 제7의 예술이라 불리우는 영화가 언제나 이윤과 대중성 그리고 흥행이란 올가미에 갇혀있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는 것. 게임과 다를 바 무엇이랴.

    어찌되었든 간에, 추격자가 끔찍함의 혹평을 들어오는 데 있어서 나의 기대는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특히 실화를 소재로 했다고 하니 그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다.

    헌데, 추격자는 그냥 액션영화였다.

    끔찍함은 흥미를 돋구기 위한, 좀 더 큰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한 극적요소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폭력영화가 폭력성을 부추기는 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조폭영화 시리즈보다 <추격자>가 훨씬 낫다고 본다. 조폭영화 시리즈는 폭력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처리하고, 신화화하기까지 하지만 적어도 <추격자>의 폭력은 대단히 끔찍하여, 적어도 “그래선 안돼” 라고는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끔찍함의 문제.

    적어도 감독은 이런 폭력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돼! 라는 화두차원에서 좀 더 극단적 표현형태를 서슴지 않고 보여주었으나, 나는 폭력과 살인에 대한, 인간의 몸 부위들을 절단하는 행위 그리고 범죄자에 대한 고찰없이… 범죄자를 단순 사이코 악인으로 그리고 그의 행위들을 방지하기 위한 추격자의 추격 액션물로 그친 데 있어 유감을 표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나의 섣부른 기대로부터 발생한 것이지만 말이다.

    뭐 기대가 없었다면, 영화는 그리 이상하게 만들어지진 않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표현들’ 때문에 영화가 혐오스러워지거나, 정말 보기 싫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북함을 느끼지는 않았고, 영화 자체가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김윤석과 하정우의 뛰어난 연기가 그것을 바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액션영화에게서 너무나 큰 기대를 했고

    그 액션영화라는 것이 이젠 좀 더 먹히기 위해서, 더더 잔인해지고, 더더 인간들을 아무렇지 않게 찢어발기게 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실을 여과없이 그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잔혹한 세상의 실상들을 영화의 액션 레파토리의 일부소재로 써먹어버리면, 그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를 제작자들은 생각치 않는단 말인가!

    제법 잘쓰인 시나리오, 하정우와 김윤석의 뛰어난 연기라는 껍데기 때문에
    ‘재미있는’ 추격자에게 그래서 마음 놓고 박수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해서 몇 가지 덧붙인다면, 김윤석의 연기는 그야말로 최강이었으되, 캐릭터 설정에서 계속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일면일면 송강호의 모습이 보인다고나 할까. 그게 좀 안타까웠다. 연기는 뛰어난데… 쩝… 하면서…

  • [Lucid Fall-새] 햇빛이 쨍하던 지친 아침에

    새벽녘 내 시린 귀를 스치듯
    그렇게 나에게로 날아왔던 그대
    하지만 내 잦은 한숨소리
    지친듯 나에게서 멀어질테니
    난 단지 약했을뿐
    널 멀리하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진 마
    어쩔 수 없다 해도

    또 밤을 샌 어느 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금 자버리면, 아예 못일어날 것만 같았다.
    오후에 일정이 있었지만, 나는 한번 자면 24시간을 자기도 하는 경이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 내게 너무 위험했다…

    일정이라 함은 한 가지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없이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것이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면서 레포트들이 밀려오는 것,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것
    (시험공부 같은 것 별로 신경 안쓰는 타입이긴 하지만 국문과를 갈려고 했기 때문에ㅠ)
    동아리 행사 때에 틀어야 할 영상 같은 것을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학회에서는 1년지기 발표회가 있었고
    동연선거와 총학선거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 외

    내가 각별히 무슨 역할을 맡기보다도
    이것저것 불려다니다 보면 하루가 흘러넘쳐
    밤을 새게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서울이란 타지.
    대학이란 생소하고도 너른 그 공간.

    난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회든, 동아리든, 술자리든, 무엇이든
    며칠 밤을 지새우고
    몇날 며칠 집에 안들어가고
    어떻게든 서울의 밤을, 대학생의 밤을
    홀로 지내려 하지 않았던 듯싶다.

    이게 ‘낭만주의자’의 삶이라는
    조금은 유치한 멘트가
    내 잠재의식에 있어왔던 것 같고

    그래서 나는 폐인이자 놈팽이라는 자기규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낭만주의자야!” 하고 나르시스적 미소를 흘리면서,,.
    그런데

    밤을 새고 밝아오는 아침.
    잠에 들어버릴까봐, 눈을 비비며
    학교에 올라가는데
    아침 태양이 너무 눈이 부셨다.

    지쳐가는 몸을 더 지치게 만들던 태양.
    학교의 오르막…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라는 물음이 들던 그 때.

    평소에 듣지 못하던 생소한 음악을 귀에 꽂았었다.
    선배가 동아리 방에 두고 간 mp3에 담겨있던 Lucid Fall 앨범.
    어쿠스틱 기타 소리와 잔잔하고 가느다란 목소리.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던 내게
    Lucid Fall이 떠나감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지치고 부끄러워지는 아침에
    울리던 잔잔한 감동.

  • [기억의 집-최승자]

    바람이 독점한 세상.
    저 드센 바람 함대,
    등 푸른 식인 상어떼.

    반사적으로 부풀어오르는 내 방광.
    오늘 밤의 싸움은 팽팽하다.
    나는 그것을 예감한다.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고통의 춤>

    최승자의 시어들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슬프지 않다.

    죽음을 소망하기도 하고, 더러는 애원도 한다.

    죽음은 부활과 맞닿아 있을수도, 더러는 아예 끝장일수도 있다.

    그것은 작자도 우리도 모를 일.

    하지만, 작자는 죽음을 소망하고 죽음으로 가는 고통의 과정또한

    겸허하게 맞아들인다.

    마치 고통에 익숙한 듯,

    그러나 벌어진 틈새를 가격하면 더 큰 고통이 오듯

    그것은 역시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럴수록 강인해지는 주체.

    죽음과 맞닿으면서 용기를 얻는듯한 주체.

    작자의 이야기는 결코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다.

    죽음을 통해 끝내거나, 넘어서거나…

    죽음을 베개곁에 두고 있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속으로 직접 들어가면서, 비명을 지르고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이다.

    그녀의 고통의 춤의 사위가

    그리하여

    감동적인 것이다.

  • [숏버스-존 카메론 미첼] 발칙하게 벗겨내는…

    분수대 앞에서 어린아이 둘이 키스하는
    혹은 눈물젖은 두 남녀가 시선을 마주치며 키스하는
    이런 예쁜 사랑에 대한 동경이었을까?
    아니, 동경이기 보다는 내 내부의 금기같은 것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안된다” “나중에” “어느 정도까지만” 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내가 별 의심없이 받아들여왔기 때문에…

    그리 조명발을 살리지 못한 체
    엉키는 살갗들이 등장하면

    “하는구만!”
    라는 말이 불쑥 튀어올라버린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암튼 좀 당황한다. 해석과 보여짐 사이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근데, 이게 뭐 픽션도 아니고…
    필름이라는 저장매체 속에
    그냥 어딘가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기록한 것인데
    왜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게 외설인가, 예술인가 뭐 그런 질문.
    던지고 싶지도 않아졌다.

    영화가 별 거 있는가.
    그냥 표현수단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숏버스의 표현은 좀 쎄다.

    그러나 난 이 영화가 “외설적” 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솔직히 너무 잘 만들어놨고,

    감독도 정말 영화를 만들면서 만족했을 것 같다.
    모든 장벽을 깨고
    말하고 싶은 것 그대로 말해봐서 속이 다 시원했을 것 같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뛰어나고, 거침이 없으니 뭐가 모자르랴.
    OST 는 또한 여간 뛰어난 게 아닌데 뭐가 꿀리냐 말인가.

    내 두서없는 감상이 너무 길었는데,
    숏버스는 어떤 영화냐 하면,

    그냥 사랑영화다.

    사랑에 있어서 존재하는 여러 구분짓기들을 정말 총체적으로 쳐부수는 영화인 것 같다.

    누가 레즈비언이었고, 누가 변태였고, 누가 게이였는지, 또 누구랑 누구랑 사랑했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사람이 갇혀있지 않게 되는 것.
    사람이 사람과 즐거워하게 되는 것.

    의 모습들을 그냥 “그대로” 보여준다.
    쓰면서 느꼈는 데, “사랑” 이라는 명사가 우리 인간의 감정들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는 못하는 것만 같다…

    숏버스가 알려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수많은 관계들과 수많은 감정의 결들.

  • [브이 포 벤데타-제임스 맥테이그] 주제가 소재로 되게하는 엉성함들

    판타지를 상상해본다.

    미래라고 부를 수 없는 시간적 텀 안에서, 지금 바로 내 앞에 일어날 수 있을 위험한 판타지.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나와 연관되어 있고 또한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내 눈 앞에서 나와 연관된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은 공포일수도 있다.

    그것은 ‘나’라 하는 주체가 대중속으로 편입되는 순간에…
    ‘내’가 어떤 예외적인 생물체가 아닌,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라고 부를 존재가 되어 있는 동안에…
    나의 확장형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
    나의 생존을 오직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원동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판타지.

    작품은 그러한 판타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들의 삶은 직접 제시되는 일이 없지만, 에비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어느 정도는 암시한다.

    오직 제공되는 언론과 교통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는 대중들의 암흑상.
    언론과 교통의 마비는 대중들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도 있다. 아주 간단하게도 말이다. 거기에 질병이라는 거대한 ‘위생권력’ 은 대중들을 사육되는 일종의 동물로 만들어 버릴수도… 말이다.

    작품의 판타지는 조지오웰의 <1984>부터 끊임없이 제시되어 오던 통제사회와
    인류 온 역사에 주기적으로 나타나오던 독재사회의 혼합판이다.

    빅프라더의 존재는 대법관이로 나타나고,
    밀고자들과 군대가 그 대법관을 지탱해주어 형성하고 있는 독재사회.

    아주…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로마의 시저, 히틀러, 빅브라더… 등등등…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의 현대 영국을 배경으로 그런 융합을 만들어 냈을까.

    영국 국기에 미국국기를 박아놓고… 영국이 수많은 근대 제 3세계국들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왠지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의 현재와 관련이 깊은 것만 같다.

    전쟁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인류 지구촌의 세기는 이미 전쟁으로 얼룩져있고, 이념논쟁 혹은 전쟁이 끝나버린 지구 위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혁명을 일으킬 줄을 모른다. 연일 계속되는 반전시위에도 영국은 결국 미국의 푸들이 되어 버렸다는… 인간보다 이윤을 선택하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풍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작품이 깔아두는 배경과 여러 상황적 탄생이유 혹은 주제를 다시 곱씹어본들…

    일관되게 엉터리 연출, 짜깁기 한듯한 시나리오, 기본적 개연성의 부족.
    주제의 결말까지의 방식은 다분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전혀 개연성이 없는 진행이 우선 눈에 띠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마는데…

    처음, 어느 시대일줄을 모를 시대에 누군가 죽는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와 맺는 인과적 이유가 부족하며, 거리에서 만나는 V와 에비와의 만남이 너무나도 상투적이어서 어이가 없으며, 에비를 도와주는 방송국 동료가 어이없게 자초하는 자신의 위험이란 그저 이해가 안되며, 매번 V를 쫓기보다 음모를 파헤쳐주는 관찰자 역할을 하던 경찰이 어떤 이유도 없이 그 지하철을 발견해서 때에 맞춰 찾아오는 것 하며, 먼저 오는 V와 뒤에 와주는 경찰이라는 기가막힌 타이밍이라는 것, 방탄조끼 하나 입었다고 추풍낙엽처럼 적들을 쓰러트리고 다시 에비에게 까지 찾아가 그녀 품안에서 유언까지 남기고 죽는 것 하며… 이로 셀수도 없이 끔찍한 빈약한 개연성들.

    또한 전체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이 오줌 찔찔 흘리듯 제공하고 있어서… 그것은 조금씩 실마리를 푸는 듯한 느낌이기보다 그때그때 머릿속에서 짜낸듯한 인상이며…

    그 소재차제도 이로 말할 수 없이 진부다하다는 것이다.

    빅 브라더의 존재, 언론 통제의 사회, 정부권력의 어떤 실험실에서의 실험.
    같은 것들… 다 어디서 본 듯한 것들이 이로 말할 수 없이 얼기설기 엉성하게만 엮어 있어서 진부함들이 지저분하게 얽혀있다.

    또한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어떠한가. 상투적 대사와 인과성 없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경찰은 총을 쥐고 있는 모습조차 어색하게 서 있으며… 의미심장함과 각성함의 모습들이 모두 어설프게만 처리되고 있다.

    마치 TV 방영 드라마를 영화로 뭉뚱그려 놓은 듯한 전개를 지나면… 브이 포 벤데타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대중들에게 자각을, 주체성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브이의 마스크를 씌워주는데… 그래서 우리 자신이 모두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브이라는 개별자가 그리고 에비라는 개별자는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이라 여기기에는… 그 각성의 과정 또는 그 자각의 과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던 것이다.

    특별한 희생과 위장된 고통으로 자각함이라 함은…. 너무 대중적 호응도가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
    조금 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는 고통이 좀 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 부분에 나왔던 어떤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더 진실성 깊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눈에 보이는 고통보다 일상적 삶을 압조여오는 고통들. 권력들, 폭력들 말이다.

    그리하여 일정의 문제의식을 난잡하게 뒤섞어놓고 뻔하게 혹은 어이없이 폭죽을 터트려버리던 것 앞에서
    관객들은 그저 관성적인 방식으로 박수를 치게 되고 만다.

    레퍼토리. 해피엔딩 레퍼토리에 습관적인 박수. 그리고 끝.
    그러면 영화의 주제는 소재가 되어지고… 영화는 끝.

  • [빨간 기와-차오원쉬엔] 예상과는 다른

    조금 기대를 하고 본 것이었다.
    이명원씨가 추천을 한 것이기도 했고, 책 앞뒤로 수상목록이 나열되어 있으니…

    아! 또 내가 대단한 책 한권을 읽는구나

    하는 자뻑에 빠질 수밖에 야.

    그런데 찬란함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역사성 같은 것도 예상한 것과 달랐다

    음… 대단히 예쁜 뭔가가 나올 거라고 해서, 화려한 꽃무늬의 원피스를 상상했건만… 그저 민무늬에 라인이 예쁜 원피스가 나왔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대단한 것 없이 소박하고 아기자기 한 이야기들이었다.
    소설의 전체 구성은 각 챕터마다 끊어져 있어서, 장편소설이라기 보다 연작소설의 느낌이 아니 차라리 수필집을 읽는 다는 느낌이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진솔함과 소년이 겪는 중국 현대사가 상징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고스란히, 대단한 척 아니하고 나타나 있지만…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과 심리적 간극이 너무 컸던 것일까.

    나는 그냥 평이하게 읽었다.

    이명원씨가 방의 한 가운데 놓인 침대에 관한 해설이 없었더라면, 그의 추천 평이 없었더라면 그저 읽고 훅 던질 수 있는 ‘가벼운 소설’ 로 여겼을 가능성이 매우 큰…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번역이 너무나도 딱딱했다는 것도, 내가 그 소담한 아름다움을 캐치못한 핑계의 하나로 돌리고 싶다. 번역… 정말 기계식이었다!

  • [유랑가족-공선옥] 입 막힌 자들의 입을 대신 터주는 자로서의 소임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에서 이명원씨가 공선옥씨를 이렇게 지칭했었던 것 같다. 공선옥씨 자신이 그렇게 말하였던가, 확실히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입 막힌 자들의 입을 대신 터주는 자

    나는 그때까지 문학 그리고 예술이라는 것은 뭔가 본질적인 문제를 접근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떤 유랑기가 나오더라고 주인공이 겪는 사람들과 나는 먼저 맞닿지 않았다. 나의 물음은 항시 주인공이었다. 저 ‘주변환경’ 들이 주인공의 주체에 어떻게 영향 미치는가, 작가는 저 주인공에게 왜 저런 주변환경을 제공하고,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펼쳐내는가… 주안점은 언제나 주체의 성찰이이었다. 그 혹은 그녀의 심정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주인공이 영혼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주인공이 환경적 권력형태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하게 나타내고 있는가…

    그것들은 일개 작가의 입장을 파고들고 푼 마음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제까지 ‘작품으로서의 작품’ 의 접근방법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공선옥의 작가로서의 자기 입지를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이제까지 작품읽기의 오류를 인지했던 것도 같다.

    작가는 그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수도 있다. 그는 어떤 현자도, 철학자도, 운동가도 아니고… 또한 상처입은 영혼이 아니어도, 파란만장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글을 쓸 수 있어서, 입 막힌 자들의 입을 대신 터주는 자로서의 소임을 품고서 말이다.

    오히려 거기에는 어떤 제스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겪든, 안 겪든 간에 말을 해야 할 것을 말 해야 한다는 것에 충실한 것.
    숨기지 말아야 할 것을 드러놓는 일을 했다는 것에 충실한 것.
    기본적인 인간애로부터 우러나온, 더없이 인간적이고 그게 바로 더없이 우리 삶의 천착하여 진보적인 소설가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공선옥이 인지하고 있는 ‘입 막힌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좀 더 해설하자면 생존의 늪더미에서 살아가고, 권력의 근처에도 연관이 없으며 앞으로의 희망조차 막막한 자들이다. 작가는 가난한 자들의 이야기들을 지긋이 풀어낸다. 그들이 너무도 착하고, 성실한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라고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론 ‘죄’를 짓기도 하며, 시기하고, 서로를 경멸하고, 또 다독거리기도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상들이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것도, 뭔가 고귀하여 영원히 간직해야 하는 것들도, 존재의 의미같은 것도 묻지 아니한다.
    단지 좀,만,더 행복하게,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좀,만,더 잘 살아볼려는 소박한 욕구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삶은 작가의 작품속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왜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점을 낳게끔 한다.

    그런데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 라는 존재는 소수만을 지탱해준다는 사실이다… 진실이다. ‘부자’라는 개념어의 태생적 존재가 그러할진데, ‘가난한 자’ 의 의미가 중립적이지 아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조건 아래서 가난한 자들은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마치 악인인것처럼, 동화 속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 죄인, 추인… 온갖 숨겨야 할 것들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현실의 항상적인 대다수라는 것.

    작가는 그들의 불편한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끄집어 낸다.

    그러면서 자뭇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물어보고 있다.

    이럴 수 없는 거잖아요.
    이럴 순 없는 거잖아요.

    ‘멋진 한 세상’ 의 단편집에서의 이야기가 단편 각개마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물음과 그 관찰에서 나온 것이라면 ‘유랑가족’ 의 연작소설에서는… 뭐랄까, 그보다는 조금 더 어두워지면서 좀 더 다양한 생태상을 연작소설의 틀거리에 담아내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서로 엮이는 사람들 간에서 공선옥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긴장감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부분의 성과에 있어서는 나는 자뭇 유보하고 싶다… 약간은 유기적이지 못하면서, 속도조절이 일정치 못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동어반복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부분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입막힌 자들의 입을 대신 터주는 자로서의 작가 공선옥은

    여전히 우리 사는 세상에서나
    나에게서나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

  • [거짓말-장선우] 예상과는 다른 그러나 실패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좋았다’ ‘괜찮았다’ ‘재미있었다’ 라는 류의 말을 들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모두 ‘저질이다’ ‘포르노이다’ ‘토할것같았다’ ‘엽기적이다’ 라는 평이었으며 말하던 이는 잠시 미간을 조금 찌푸렸던가. 그것은 내 기억이 만들어 둔 환영-이미지 였던가. 암튼, 영화가 그렇게도 만인이 통용될 수 있도록 악하게 만들어 질 수 있는걸까? 그런 악평속에서 봐서 그런지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저질영화는 아니구나 했다. 뭐랄까. 자극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아주 빈약한 이유근거를 찾고, 이것이 폭로요! 라고 이야기하면서… 음… 더 엽기적일수록 마치 더 급진적인척 그런 제스쳐를 취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요란스러운 세상이 되면서 폭로예술, 고발예술인 척 온갖 원조교제요, 성폭행이요, 살인이요 등등의 매우 급진적(?)인 엽기 박물관을 연상케하는 것들! 그런 영화는 아니었던 것이다.영화는 처음에 씻김굿을 이야기한다. 죽은 이의 부정을 풀어주어 극락으로 보내주는 굿이 씻김굿이 아니던가. A학점감이라면서 스탭인지 영화감독인지 영화의 기획목표를 제일 처음에 씻김굿이라 이야기하는데, 영화 자체가 판타지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요 이 영화로 하여금 시청자의 응집되어 있었던 성욕을 풀어헤쳐주겠다 또는 발휘시켜주겠다 하는 것. 실제로 영화는 자기 자신이 계속 판타지라는 주문을 계속 세뇌시키듯이 걸고있는 게, 중간에 삽입곡의 가사가 ‘나는 판타지’ 를 계속 반복하고 있고… 영화 자체가 이것은 판타지라는 식으로이다. 카메라 앵글만 봐도 아니 이건 장난을 친 건지… 하는 식으로 어색한데, 마치 은밀하게 뒤에서 찍은 듯하며, 삽입곡들은 요상한 트롯이 나오게 되며,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전형화 되어 있어서 마치 게임 속의 인물들인것만 같다. 또한 단락 나누듯이 각 행위별로 소제목들을 나누고 있어서 이번엔 뭐가 나오겠군,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아! 영화는 스토리라 할 게 거의 없기 때문에 몇몇 급반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상할 수가 있긴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웰메이드 영화랑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기획자가 목표했던 것이기도 할 것이다. <거짓말>은 상상력을 요구하며, 시청자가 보고 있는 현실과 맺고 있는 연결선이 있다. 그리고 감독의 요구는 그 연결선을 어떻게 하면 적극적으로 움직여 볼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해보는 것이다. 보통 몰입식 장르영화들의 평가는 재미에서 시작해서 재미에서 끝난다. 주제라는 것을 어떻게 재미있게 요리했느냐에 따라서 장르영화들의 웰메이드냐, 비웰메이드가 정해지지 않던가. 그런데 <거짓말>은 그런 류의 판단을 애초부터 빗겨나가고 있다. 갑자기 쌩뚱맞게 출연진이 등장하여 촬영당시의 소감류를 말하고, 앵글은 편집을 한 건지 안 한건지 어색하게 휘둘러 대고, 스토리라 할 것은 거의 전무하고 하니 말이다. 영화는 자기 자신은 판타지이다 라고 먼저 이야기하며, 한 사람의 욕망을 극한으로 추적해본다. 연인이 좋은 것은 자기다 뭐든 다 좋다는 연인의 소유욕. 그 소유주(?)의 요구가 극한으로 치닫을수록 그 소요육의 만족감은 좀 더 커질 것이라는 발상에 우선적으로 기반한 듯 하다. 그런데 이 판타지는 ‘판타지’ 로서의 지위확보에 충족하고 있다. 영화는 어떻게 하면 관객을 최면효과와 흡사한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자기 동일화 시키고, 몰입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이 영화의 성행위는 로망스적 섹스가 아닌, 동물적 섹스이며 집요한 욕망의 지극히 현실적인 모양태이다. 로맨틱한 음악 한번 흐른 적이 없이 트롯 비슷한 게 제멋대로 난무하고 있으며, 깨는 듯이 나는 판타지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또 뭐람.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 따위, 공간적 배경, 시간적 배경 그저 아무렇지도 않아도 됩니다 라고 자기 스스로 나래이션 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감상방법은 몰입이 아니라 보면서 상상하세요. 정도라고 해야 맞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이것 자체로, 이 내부에서만 평가해서는 안될 것같다. 시청자와 영화와의 관계에서 이 영화는 시청자의 욕망을 어떻게 요리하였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영화의 시도는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이 시도가 매우 실패했다고 연긴다. 대다수 관객들의 평이 우선 그렇고, 또한 몇몇 혁신적인 기획들이 초반부에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지다가 후반부에 갈수록 똑같은 양상의 반복적인 영상들을 드러내고 있다. 앵글도 초반부에 긴장감을 펼치면서 독특한 효과를 내던 것이 중반부부터는 아예 그런 것이 없어지고 만다. 뭔가 시도하다가 말아버린 느낌. 그리고, 이 영화의 애초 시작점. 그것은 SM적 변태적 섹스욕보다는 일종의 보편적 성욕, 아니 성욕보다는 소유욕에 기반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유욕은 연애사에 있어서 얼마나 구태의연한 개념인가. 관계를 넘어선 소유. 소유를 통한 관계? 그런데 <거짓말>이 간과하고 만 것인 ‘관계’ 였다. 남녀간의 동물적 인간의 소유욕에 앞서, 동물적 인간의 관계부터 먼저 성찰해보았더라면 영화는 일편적이지 않고 좀 더 웅숭깊게 펼쳐졌을 것을…. 영화는 속설대로 저급영화는 아니었지만, 실패한 영화였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