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쉽게읽는 백범일지-도진순 역]

    삶의 의미를 자기 규정해야만 하는 혹독한 자유를 선포한 것이 근대이지만, 정령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은 자유로운 개인이 아닌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의 국민들이었다. 그런 제국-식민지 시대 속, 제국주의 국민들의 내면을 섣불리 판단내릴 순 없겠지만, 식민지 국민 혹은 식민지 개인의 풍경에, 우린 매우 익숙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자욱을 이따금씩 드러내곤 하는, 다소 상투적이라고 생각해봤던 그것. 그런 상투성 속에, 우리 역사속의 김구가 갇혀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조국독립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던 역사적 영웅이자 위인이란 사고의 틀 속에 ‘왜?’ 라는 이유가 빠져있는 것도 같다. 또한 한국사의 정점에 위치했던 김구가 방향했던 목표지점은 어디였던가. <백범일지>라는 자전적 기록의 면면들을 전형적 위인전이 아닌, 다중의 텍스트로 본다면, 죽어버린 위인 김구는 살아있는 개인 김구로 볼 수 있는 여지가 필자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위의 대장부가 바로 김구가 지향하는 삶이지만, 위의 모토에서 풍기는 대담한 결단력이 김구를 어디로 방향하게 하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동학접주로 활동하고, 의병에 참가하는 등 자부해도 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구에게 자주독립국가라는 이상(理想)은 근대적 사고체계에서 이뤄지기 보다는 오히려 봉건적인 사고체계안에 놓여있었다. 김구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는 스치다의 살해 계기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왜인을 죽였노라’ 였다. 사실상 스치다란 개인의 그 어떤 악행도 김구는 목격한 적이 없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 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에게 독버섯’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구 자신이 의병을 떠나기 이전에 일제에 의한 일가와 개인의 수난 등. 직접적인 계기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구에게는 조선의 쇠락과 수모가 꼭 자신의 쇠락과 수모로 등치되었던 것이고, 자신을 조선의 대장부로 위치짓고 있었다.
    김구는 어떤 이론적 학습에 의해 결단하기 보다는 그의 인생과 맞닿아 있던 여러 가지 체험들로부터 자신의 가치체계를 정립해왔다고 할 수 있기에, 1870년대에 태어난 김구가 봉건적 사고체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무작정 봉건성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만은 없는 것이, 김구는 아직 봉건적인 사회 속에서, 양반과 상놈의 구별없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도 신분차별 없는 새 세상이 그의 마음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단문으로 요약하자면, 치하포 사건까지 김구는 조선의 계통을 이으면서, 신분차별 없는 독립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김구의 사고의 전환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목표문장에서 조선의 계통을 이으면서는 괄호를 치게 된다. 김구에게 조선이란 외연이 없어진 연 후에도, 그가 공동체를 위한 ‘대인배’로의 길을 접지 않았던 것은 민족이란 외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족은 어떻게 서는가.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핵심적 활동을 했던 것처럼 근대적 국가 체제라는 형식으로 귀결이 되는 것인데, 김구는 오로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생각으로 근대적 국가 체제 앞에 괄호 쳐진 ‘서구 자본주의적’ 이란 엄청난 수식어를 놓쳐버리게 된다. 사회주의 운동 진영을 도외시 혹은 냉대하면서 중도 우경향을 취하는 것이다. 김구는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의 실현이 모범이 되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렇게 되도록 하자라는 사해 동포주의적 사고를 보이기도 하지만, 우선 우리 민족부터 라는 선후관계가 확실하였고, 그 실천적 방향은 이미 자리잡고 있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제 막 봉건에서 서구 근대성과 접점을 형성하기 시작한 한반도라는 공간적 배경. 그리고 그 속에 놓인 김구가 조금은 편향적인 활동 모습을 보이는 사회주의 운동진영을 대하면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구를 봉건성의 자장 안에 놓아보고, 좌우의 스펙트럼 안에 가두어 봄은, 결국은 한계적인 중도 우익적인 인물이었다는 단정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의 지도자’ 라는 수식어가 종종 붙여지곤 하는 김구라는 인물을 조금 더 선명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경향을 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흠집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좌경향이든, 우경향이든 그것이 흠집이 되는 것은 그런 정치성이 사사로운 이익과 결부되어 있거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김구는 기이할 정도로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문제와 관련없는 대장부정신 하나로 인생을 살아온 것만 같다. 우선 <백범일지>에서 보이는 바에 따르면 말이다. 어떤 객관적 자료조사도 없는 상태에서, 추측으로 김구란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 될 것이다. 필자가 <백범일지>에서 본 김구의 풍경은, 그래서 여기까지다.

  • [고고70-최호] 다소 긴 뮤직비디오

    암울했던 70년대가 배경입니다.
    오히려 통금 시간을 악용(?) 하여 12시부터 4시(?)까지 가둬놓고 놀아버리는 소울 로큰롤(?) 밴드의 이야기이죠.

    긴장 요인은
    그들의 음악을 즐길 줄 모르는 대중들
    그리고 이어서 돈 맛을 알아버리고 관성화된 밴드 멤버들
    그리고 이어서 암울하기만 한 시국
    인데요.

    글쎄요.
    세 긴장 요인 모두 원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탁 풀어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스토리는 과감히 삭제하고
    공연하는 비쥬얼 씬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서먹서먹하기만 한 배우들에게
    제작자 혼자 도취되어 공연에 미쳐버려랴고 주문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비쥬얼 자체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 비쥬얼지 주는 감동은 기반하고 있는 스토리가 탄탄하지 않기 때문에 미미하기만 합니다.

    배우들의 캐릭터가 개성있고 매력있으면서도 동감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빈약하고, 단절된 스토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화에 바탕해서 그런지 또 한 편 많은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공연씬들에 밀려버린 그 한쪽 귀투성이서 말이죠.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어찌볼 땐 너무 과도하게 순진한 설정들이 나오기도 하구요.
    엉뚱한 에피소드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황당할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 뮤직비디오 같았을 뿐이네요.

    그래도 조금 놀라웠던 것은
    의외로 신민아가 스토리 연기 이외의 면에서 훌륭한 퍼포먼스(?)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이었고
    조승우의 노래실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차승우는…. 음…

  • [연극 | 아름다운 인연] 직설적인 교훈, 산만한 에피소드

    좋은 공연 싸게보기’ 지원 사업 같은 것이 있던지…
    만원이라는 싼 가격에 하고 있는 연극이었다. 원래 연극을 볼 계획은 없다가,
    밥 먹고 나서 연극이나 볼까? 하고 찾게 된 ‘값 싸고 괜찮을 것 같은’ 연극.

    배우 김갑수씨가 제작도 한다고 하고, 포스터도 대학로 일대에서 많이 본 것 같고,
    시덥지 않게 막 웃길려고만 하는 연극은 싫었는데
    이건 뭔가 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아서 선택했다.

    연극의 선택배경은 여기까지이고…

    연극의 관람후기는…

    “정신없다”

    그런데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성별감별 낙태하지 맙시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요.”

    너무도 착하고(?) 도덕적인(?) 주제의식 때문에…

    이걸 막 욕하기가 좀 꺼려지는데

    그래도 느낀점은 솔직하게 말해야겟다.

    우선, 저 단순한 메시지를 계속 직설법으로만 반복한다.
    연극 자체에 이야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배우가 출연하는 것에서 예상되듯이
    그들은 모두가 뭉쳐 스토리를 끌고 가기 보다는
    캐릭터를 보여주고 마는데 그친다.

    그리고 연극의 중심 플롯과 관계없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매우 산만하게 벌려놓고 있어서…
    한 면으로는 저 단순하고도 빈약한 주제의식에 재미를 붙인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해결될 일이랴.
    주제의식을 어떻게 하면 더 감동적으로 전달할 것을 고민해야 될 것을,
    이 연극에서는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설법으로 무한반복 하고
    이미 주제가 내뱉어져 끝나버리고 나자, 각종 캐릭터들이 코믹스러운 상황이거나 비쥬얼적인 상황, 그리고 별 상관없는 갈등을 일으키면서 산만하게 무대위를 들락날락거린다.
    각종 캐릭터와 장치, 조명효과, 춤사위 등등의 볼 거리는 덕분에 많아졌겠지만…

    “와 신기해~” 하다가

    “왜 저러고 있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조금 같은 이야기인데
    중심갈등이라고 불릴 만한 ‘축’ 이 보이질 않아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 끌고가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극이 결말에 치닫았을 때…
    극이 끝날 때 돼서 끝난 건 알겠는데, 뭔가 극을 본 느낌이 아니다 라는 시금털털함을 갖게 될 것이다.

    아, 그래도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래도 지루하진 않다는 것이다.
    굉장히 코믹적인 에피소드(이게 오히려 방해요소라고도 생각하지만)가 계속 이어져 있기 때문에… 웃음을 유발하는 지점도 많고, 뭔가 다양한 연출효과도 기대할 순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주제의식의 형상화 측면에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이 연극의 치명적인 결점이다.

  • [화려한 휴가-김지훈] 살아남은자의 슬픔

    우연히도
    이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임철우의 <봄날>을 힘겹게 힘겹게 다 읽었을 때를 즈음하여
    이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다지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뭔가 우려먹기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고
    역사적 진실을 앞세워서 돈 벌어먹으려는 상술만 같아 보였다.
    아마도 몇몇 역사적 재현을 짜깁기 하고, 대단히 숭고한 척만 하다가
    쫄딱 망하겠지
    싶었는데
    놀랍게도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의뭉스러워서 봤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대중장르영화의 테두리 내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적당한 코믹터치로 무거운 주제 속에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멜로와 형제애를 전면배치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의 정황 정황들을 놓치지 않고 긴장감 있게 이끌어 내는… 그야말로 상당히 공을 들였으리라.

    그래도 좀 아쉬웠던 부분은
    광주항쟁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지 않더라면 오독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전두환 등을 비롯한 역사적 범죄자들과 시국에 대한 분석이 별로 없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몇 인물의 액션극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광주 시민 중 일부만이 각성하여 항쟁을 이끌었다는 등의 인상을 풍기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액션 장르의 도식을 차용하고 있었기에
    위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무나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적 사건이라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
    나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충족시키려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말겠지.

    장르영화라는 테두리 내에서
    그래도
    화려한 휴가는 해야 할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린 폭도가 아니야!”
    라는 외침과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시도하는 것이 마음에 와닿는다.

    거의 모든 출연진들이 나와서 사진을 찍는 풍경인데
    모두가 활짝 웃음을 피우는 것과 달리
    정작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요원은 굳은 표정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화려한 휴가는 그것의 역사적 사건을 관찰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까지 연장선을 긋게 된다.

    현재까지 닿는 연장선.
    영화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만큼
    “우린 폭도가 아니야!” 라는 외침을 기억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살아남은 자를 슬프게 하는 근본적인 대상을 영화는 지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영화가 거기까지 조금만 더 나아갔더라면

    박근혜를 비록한 한나라당 일파의 단체 영화관람 등의
    아이러니한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았으련만…
    말이다.

  • [브로콜리 너마저-보편적인 노래] 다르게 들린 사랑 노래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자꾸 내가 발을 밟아
    고운 너의 그 두 발이 멍이 들잖아
    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

    이 춤을 멈추고 싶지 않아
    그럴수록 마음이 바빠
    급한 나의 발걸음은 자꾸 박자를 놓치는 걸
    자꾸만 떨리는 너의 두 손

    함께라면 어떤 것도 상관없나요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런 걸까
    함께라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데
    그만큼 그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우린 긴 꿈을 꾸고 있어
    문득 꿈을 깨진 않을까
    눈을뜨면 모든 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마치 없었던 일 처럼

    난 눈을 감고 춤을 춰

    지겹게도 반복되는 사랑 노래들 속에서
    유독 내게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만이
    다르게 들렸던 것은

    숱한 대중가요들이
    그대를 보면 기분이 좋아, 원츄 원츄
    이거나
    그대를 잃어 죽을것 같아, 슬퍼, 슬퍼
    라는 직설적 상투어만 무한반복하고 있었던 데 반해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은
    소박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상투적이고 보편적인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하지만

    어찌보면 직설적이면서도
    어찌보면 고도의 은유를 구사하면서
    ‘색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자차>에서 앙증맞게 이별을 은유하고
    <춤>에서 관계를 은유하는 것 등등.

    이것은 단순 이야기방식과 수사의 방식을 다르게 했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하다.
    진솔한 일상체험에서 건져올린 아기자기한 사랑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거절할 수 없는 사랑의 교훈이고 곧 그것은 인생의 교훈일 수 있는 것은

    그대를 얻으면 모든 걸 다 얻을 것만 같이 좋고
    그대를 잃으면 모든 걸 다 잃을 것만 같아 싫고
    의 1차원적 감정의 문제를 뛰어넘어

    사랑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할 것을 알고
    행복하더라도 언젠가는 이순간이 끝날 것임을 아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브로콜리 너마저는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의 아기자기한 노래는
    설레임과 애수를 동시에 자극하고 있다.

    EP 앨범부터 귀에 확 들어오진 않았지만
    은근히 계속 맴돌던 브로콜리 너마저

    이번 정규 1집에서는 EP에서의 약간
    지저분하게 들리던 음들이
    개선되고, 좀 심플해지고 어찌보면 세련되졌다.
    <앵콜요청금지> 같은 경우는 EP에서는
    뭔가 가슴을 찌르르하고 울리던 느낌이 있었는데
    정규 1집에서는 느낌이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정규 1집의 느낌도 내겐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무척이나 아쉬운 것은
    브로콜리 너마저가 이번 1집 앨범 발매와 동시에
    공식적인 활동중지에 들어갔다는 것. ㅠㅠ
    남녀 두 보컬의 목소리처럼
    화음 잘 맞는 밴드도 찾기 힘든데 말이지.
    아무쪼록 다시 의기투합 해서 2집도 들어봤으면 하는
    팬의 간절한 소망을 남겨본다.

  • [맘마미아-필리다 로이다] 사람들이 다들 좋다고 했는데…

    나는 음악영화, 뮤질컬식 영화면 거의 먹고 들어간다.

    사운드 오브 뮤직부터 해서

    시카고, 물랑루즈, 헤드윅 같은 뮤지컬 영화부터

    샤인, 불멸의 연인, 아마데우스 뭐 이런 음악 소재로 한 영화까지

    고루 사랑해주시는데

    그 찬탄이 대단하시던 맘마마아는 솔직히 별로였다.

    뭐라해야하나…

    좋은 음악과 함께…
    거기에다 영상미도 그리스의 푸른 바다와 맑은 날씨와 함께 게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자유로움, 그 미소들과 춤사위가 내겐
    나를 동경해봐 하는 미소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어디선가 그것을 보고 있을 어떤 뉴요커(?)들이 대단한 것을 봤다는 둥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라고 외치고 있을 것 같은 것은 왜일까.

    단순하게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행복과 기쁨의 충만에 진심이 없어보이고
    진실된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고

    결정적으로

    행복과 기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충만해있어서, 싫었다.

    인생은 그렇게 기쁜 것만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야.
    그래서 아름다운 거야.

    적어도 내겐…

  • [못mot-비선형] 상실, 그 지독한 매혹으로…

    널 처음 봤던 그날 밤과 설렌 맘과
    손톱 모양 작은 달 셀 수 없던 많은 별 아래
    너와 말없이 걷던 어느 길과 그 길에
    닿은 모든 사소한 우연과 기억

    널 기다렸던 나의 맘과 많은 밤과
    서툴었던 고백과 놀란 너의 눈빛과 내게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냐고 웃던 그 입술과
    그 마음과 잡아주던 손길과..

    (모든) 추억은 투명한 유리처럼 깨지겠지
    (날카롭게) 유리는 날카롭게 너와 나를 베겠지
    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

    뭐지? 신선하고 고급스러우면서… 이… 지독함이란…

    Mot 의 앨범은 상실에 관하여 ‘지독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들이 노래하는 “What a woderful world” 는 가사 하나 바꾸지 않고도
    얼마다 노래를 지독하게 만들 수 있을 지 알게 한다.
    몽롱한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배경으로 깔리는 일레트로닉이 그야말로 압권인 듯…

    가사는 마치 주문같아서… 자아의 슬픔을 위로도 없이 불러내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막 빨려들어가다 탁! 하고 벽에 부딪힌다.
    나는 아직 그런 상실을, 그런 절망을, 그런 저주(자기 자신에 대한)를 품어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보인는 듯하다…

    Mot 은 끝 모를 심연으로 자꾸만 빠져든다.

    떨어지고, 떨어지는 데…
    무서운 점은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기대 혹은 의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아직 바닥이 아닌가봐, 더 깊이 떨어지자 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만 같다.

    그들에게 상실은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만 같다.
    상실한 자, 상실하고 있는 자는
    지금의 상실감을, 오히려 “향유” 하고 있다.

    지독한 슬픔을, 지독한 자괴감을, 지독한 저주를
    향유하고 그것을 노래로 승화시킨다.

    노래는 나를 이해해주고 동정해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노래는 단지 상실하는 자의 잔인한 미소만을 보여준다.

    Mot의 앨범에서는 마치 더 슬픈 미소를 짓는 자가 더 우월해지는 것만 같다….

    이런 악마적 잔혹함의 매혹같으니라고…

  • [즐거운 인생-이준익] 인생? 단순하게 뒤엎어도 보는거야!

    꿈과 인생이란 소재는 영화 속에, 아니 영화 뿐이 아닌 모든 예술 속에서 지리멸렬하게도 나오는 단골메뉴일 것이다.

    꿈 vs 현실과의 장벽
    거의 같은 레파토리 속에서도 어떤 영화는 명작이 되고, 어떤 영화는 trash 가 되는데

    그것은 그게 얼마나 현실성을 담보하면서, 진지하게 다가가 주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뭐 모든 영화의 소재가 그렇지 않을려고…

    밴드 영화이기에 예전에 본 강렬했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생각나는데
    와이키키가 비참한 현실 속에서 걸어가는 기타리스트의 인생을 아주 담담하면서도 지독하게 그려냈다면…

    <즐거운 인생>은 그래도 좀 상큼했다.
    40대 아저씨들의 밴드 결성기라는 아주아주 비현실적이고, 아주아주 처절한 현실에 부닥칠것만 같은 내용을 조금은 낙관적으로, 조금은 순진하게 그려내었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즐거운 인생>이 주는 판타지가
    그리 허구맹맹하지는 않은 것이, 이 영화가 최소한의 현실감각만은 놓치고 있지는 않고 있기 때문.

    아저씨 3명이 부닥치는 현실과의 긴장관계는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들의 밴드 이야기가 그리 어둡지 않았던 것은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하는 마음.
    그러면 되지 않아?
    라면서 담담하게 밴드를 하니깐.

    밴드해서 그네들이 돈도 많이 벌고, 성공도 하고 그럴 가능성은 아주 묘연하지만
    그네들은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밴드 하는 게 좋아서 그냥 한 귀퉁이서 딴따라질을 하고 있겠지.
    그리고 감독은 그런 그들에게 마지막 열광의 무대를 선물한다.

    그네들만의 즐거운 인생에 박수를 쳐준다.

    그리고 추가로, 3명의 연기 그냥 죽여준다!
    영화를 절대적으로 살렸던 것은 그들 중견연기자들 연기! ㅋㅋ

  • [Viva, Diva! 3人3色 콘서트] 말로, 이상은 한영애 콘서트

    방학이 되기 전부터 시작했던 알바의 마지막 날이었고, 비는 퍼부어댔다.
    새로 지어진 “구로 아트밸리” 여서 찾아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어쨌든 친절한 식당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도착.

    혼자 찾아 가는 콘서트 여서 기다리는 게 다소 뻘쭘하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 가수의 팬들이 그리 젊은 층이 아니었던 것이고,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그나마 없진 않았다는 것이다.

    내 생애 최초로 가는 콘서트.

    일찍이 예매를 한 탓에 거의 맨 앞자리에 앉아 공연이 펼쳐질 무대를 기다리는 데
    설레임 만빵.

    [말로의 화이트]

    말로라는 가수는 원래 그리 좋아하던 가수는 아니었다. 앨범은 한 번 받아서 들어보긴 했었으나, 뭔가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 때문에 익숙한 ‘내 취향’들로 회귀하곤 말았었다. 그 이질감. 근데 그것이 재즈였나 보구나. 라고 콘서트 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난 재즈는 그리 좋아한 적도 없었고, 좋아하기에 앞서 우선 뭔지 모르는데…

    말로의 공연을 보면서 재즈라는 것은, 가수가 마치 악기처럼 된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흐느끼는 창법도 창법이지만서도
    말로만 그런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재즈보컬은 보컬의 목소리만 살리고 다른 악기들을 죽여버리는 발라드 같은 것과는 다르게… 음악 하는 동안에 “같이 논다” 라고나 할까?

    그래서 베이스도, 드럼도, 기타도 보컬 못지 않게 빛나 보였나 보다.

    그녀는 그녀 자체의 발성으로 모두를 그녀에게만 집중시키지 않고
    그녀는 드럼, 베이스, 기타와 “함께” 만들고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또한 그녀는 “스캣” 이라는 것을 내게 처음으로 들려주었는데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이었는지, 그 아우라를 언어화시키는 힘이 들고
    위 박스에서 mp3 로 자족하시길 ㅋ

    *스캣: 재즈에서 가사 대신 “다다다디다다” 등 아무 뜻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
    1926년 루이 암스트롱이 《Heebie jeebies》라는 곡을 취입하던 중, 악보를 떨어뜨려 즉흥적으로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하며, 1940년대 밥(bop) 유행기에 엘라 피체럴드 등이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부터 널리 보급되었다. 뒤에 밥 싱잉(bop-singing)이라고도 하였다

    [이상은]

    말로 다음에는 이상은이었다. 내가 콘서트를 예매했던 결정적인 이유였기도 했던 이상은.
    내가 그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말이다! 그런 이상은이 그냥 덥썩 걸어 와버렸다!!!

    처음 본 이상은의 느낌은, “키가 꽤 크네” 였다.
    난 웬지 대단히 작은 체구일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뭐 그게 환상을 깼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는 것.

    이상은은 “블루” 를 맡았는데, 이 부분은 그냥 공연 기획하는 데에서
    노래가 좀 우울하고 그러니깐 어겨 붙인 것 같고…
    암튼 공연은 어떠했냐면…

    아! 역시 거장이구나!

    하는 절로 감탄!
    무대시설의 음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 깨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정말 그녀야 말로 순위를 붙일 순 없지만 국가대표급 가수가 아닐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주옥같은 노래를 부르고 갔다.

    <돌고래자리> <바다여> <비밀의 화원> 등등의 노래는 뭐 그냥 그랬지만
    <어기여 디어라> <삼도천> 같은 노래를 부를 때는

    저런 가수가 있다는 게 너무 고맙게 느껴질 정도…
    그리고 대략 6곡 밖에 못하는 시간 사정이 정말 아쉬웠다!

    [한영애의 레드]

    한영애의 등장은 쇼킹했다.
    한영애가 진행하는 EBS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 를 즐겨듣던 터라

    한영애의 잔잔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에 익숙했던 나는
    마흔이 넘어가는 한영애에게 그런 passion 이 있을 줄이야!

    마치 신신애가 입고 올 듯한 레드 드레스를 입고 나온 한영애는
    노래도 노래였지만
    무대 장악령이 그야말로 “짱” 이었다.

    더욱이 <누구없소> 나 <코뿔소> 같은 노래를 불러주는 데
    어찌 관객들이 뻑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껏 가만히 박수만 치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고
    공연을 그야말로 클라이막스로 치솟게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를 거의 울음 섞인 노래로 부르는 그녀를 보면서

    노래라는 것은 그냥 발성이 아니고
    가수라는 것도 그냥 목청꾼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진정한 온 몸으로, 가슴 속까지 가수일 수 있구나
    라는 놀라움.

    국내 거의 최고급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세 가수의 콘서트를 보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총평으로 정말 짱이었는데!
    아쉬운 점을 끄집어 낸다면, 세 가수의 공연을 2시간 동안(부족해!) 보다 보니깐 감질맛이 난다는 것과, 연합공연 같은 것의 기획이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뭐 가수들이 주최가 된 공연이 아니라
    개관한 구로아트밸리의 기념식 성격이 짙어서
    어쩔 수 없겠지만…

  • [색계-이안] 어려운 영화

    뭐랄까 이 영화 정리하기 힘들다.

    나는 아직 이런 농후한 심리묘사의 영화는 소화하기가 힘든 것 같다.

    영화에서 인물의 감정은 “사랑” “배신” 질투” 뭐 이런 식으로 평면적으로 드러나곤 하는데

    그래서 내가 영화를 즐기는 방식은 곧잘도,

    그 감정들 사이사이에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가

    그 감정들을 얼마나 진실하게 그리고 있는가

    그 감정들이 내게까지 공감되는가

    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색계의 여주인공의 감정은 진정 다층적이다.

    사랑이란 표현도, 복선도, 은유도 없이

    그녀는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있었고

    어느 순간 그것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도 로맨틱하지 아니하고

    잔혹하다!

    그 표면상으로 김기덕 영화의 사랑과 잔혹성의 구조가 상기되는 데

    속내는 전혀 다른 것 같다.

    색계가 여주인공의 아리송한 심리를 다층구조 그대로 그려내면서도, 그것의 표현을 숨기는 반면
    김기덕의 영화는 확실한 감정들의 충돌을 그대로 그려내고, 그것은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뭐, 주제도 완벽하게 다르지 않은가.
    그냥 생각나서 한번 써봤고…

    색계는 좀 어려웠다.

    내용이 어렵거나, 주제가 어려운 것은 전혀 아닌데

    내 앞에 던져진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정말 현실적인 한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지켜보면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내 감정조차 어렵게 만드는 영화 색계였다.

    PS: 그렇다고 매우 뛰어난 영화라는 건 아니다..;;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