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비폭력대화]

    국문과 전공수업에서 “폭력의 반댓말이 무엇인가?” 를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농담 반으로 “비폭력이라고 하면 죽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정답이 있는 숙제는 아니었다. 나는 폭력은 왜 발생하는가. 라는 물음부터 출발해보았다. 폭력은 욕망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유없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행위자는 폭력하는 자신의 쾌감을 위해서라도 ‘폭력’을 행한다. 그렇다면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평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느 것처럼, 폭력도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평화나 안정이라는 고정된 상황은 일시정지의 상태이지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현재의 상황이 자신에게 무지 유리한 인간들. 권력자, 힘 쎈 자, 돈 많은 자 들에게 평화와 안정은 매우 달콤할지라도, 현재의 상황이 무지 혹독한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은 곧 ‘폭력당하는 상황의 지속’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난 대답을 “유희, 놀이” 라고 해서 갔다. 적어도 유희, 놀이는 행위자들의 욕망이 충돌하기 보다는, 좋은 정서상태를 위해 하게 되는 행위니깐. 그런데 선생님은 ‘유희, 놀이’ 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합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폭력. 폭력은 나쁜 것이겠지? 폭력적인 대화도 나쁜 것이겠구.

    비폭력 대화는 우리의 대화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치 말을 다시 가르쳐주는 것처럼 한다. 말을 하는 당신의 목적과 당신의 욕구가 그렇다면, 그것을 말할 것. 이라는 아주 단순하면서 상식적인 진리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비폭력 대화를 읽으면서 재사회화 교육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느낌을 이야기할 것, 느낌에 대한 책임을 질 것. 등등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효율적인 방식의 말들을 책은 권유한다. 그것도 서로간에 ‘폭력적’ 이지 않게끔 하는 대화방식을 추구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대화방식에 대해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고, 많은 상황에서 그런 방식을 시도해 볼 생각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비폭력 대화는 현재의 폭력적인 대화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 마련이 될 수 있다는 데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는 형태에는 조금 비판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 자신이 비폭력대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이질감과 거리감. 그것은 우선적으로 문화차이에서부터 비롯되기도 하는 것 같다. 미국적 현실과 한국적 현실의 차이라고 할까? 나는 미국 드라마 등을 볼 때마다 느낀 것이 ‘대화’ 라는 것을 참 합리적으로 하고 있다고 느꼈다. 대화를 포함한 그들의 여러 가지 정서교류는 모조리 언어화 시킬 수 있는 것 같은… 어떤 합리성. 그런데 그와 대조되게,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정서교류를 언어화 시킬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적 현실에는 대단히 비합리적인 정서교류가 대화와 언어를 빗겨나간 상태로 여기저기서 터져나간다고 느낀다. 그래서 한국적 현실에서 비폭력적인 합리성의 추구가 얼마만큼 효율적일 것인지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것이다.
    비폭력 대화는 정말 다시 생각하더라도 논리적을 딱딱 들어맞는다. 그것은 대화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상호간의 상처를 심화시키지 않는 방식의 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메커니즘이 바로 작용되었을 때 올 평화나 안정이… 과연 비폭력적인가 라고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 자신이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쓰고 있어서,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지만… 나는 어느 정도 폭력적인 상황. 그 상황속에서 견뎌내는 인간과 서로 위안주는 인간들이 조금 더 인간미가 넘친다고 생각한다. 비폭력대화 방식의 서로간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정내미가 뚝 떨어진다고나 할까. 마치 기계들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의 삶을 너무 획일화시킨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너무 나간 우려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뚝뚝한 어떤 인간에게서 느끼는 정내미와 욕쟁이 할머니에게서 느끼는 어떤 정내미… 이런 것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 [검정치마-201] 좋구나~

    시간은 29에서 정지 할 거야 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오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19살 때도 난 20살이 되고 싶진 않았어
    모두 다 무언가에 떠밀려 어른인 척 하기에 바쁜데
    나는 개 나이로 3살 반이야 모르고 싶은 것이 더 많아

    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개가 되려나 봐 손을 델 수 없게 자꾸 뜨거워
    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내 꼬리가 아닌 거 같아
    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거야

    짖어대는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지마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If your lights are blinking and you are running low
    Come on get filled up so you can drive away
    With my love
    With my love

    뭐냐, 이 정확히 인디스러운 이름은…
    이거 그냥 어중이 떠중이 인디밴드고만!
    했는데…

    그 구린 음질의 mp3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확 나를 잡아두고 놓칠 않게 된 음반이 되었다.

    조금 혀 꼬부라진 가사가
    질러주고, 쑤셔주고, 능구렁이 처럼 슬슬 넘어가는 것이
    내공이 장난아니다

    가사 또한 음미할 만하고
    우린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저런 것도 할 줄안다는 듯이
    이것 저것 다 들려주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연히 발견하게 된 감격스러운 그룹!16

  • [펭귄뉴스-김중혁] 펭귄뉴스와 전쟁

    나는 좋은 음악이 있으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그 음악이 내게 지겨워질때까지 들어서 그야말로 ‘단물’을 쪽 뺀 다음에야 새로운 노래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비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움을 찾을 수 없어서, 같은 음악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고 느낄것만 같다. 아무런 느낌도 자아내지 못할테니깐. 반복되는 비트니깐.전쟁과 테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멈추려고 하지도 않고, 멈춘적도 사실 그리 없다. 뉴스를 틀면 나오는 누구의 테러로 인해 누구누구가 죽고, 누구누구가 부상당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완전히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복되고 있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간의 분쟁 이야기, 아랍 지역에서의 분쟁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슬픔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망’ 이란 명명은 누군가 죽었어 라는 감정적인 정서을 자아내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까지 미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것은 정치로 이해된다. 테러 규모가 컸을 때 상대편 국가의 대응은 어떻게 될 것인가. 테러소탕작전에 테러집단은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활까지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원거리의 전쟁이 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을 안다.헌데 죽음 자체가 울리는 비트는 매우 강렬하다. 펭귄뉴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느낀 것처럼 죽음의 비트는 엄청난 진폭을 울릴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십, 수백의 강렬한 진폭-전쟁과 테러를 매우 진부한 비트로 느끼고 마는 것은 뭘까? 그것은 우리 안의 P칩 때문이 아닐까? 강렬한 죽음의 비트를 P칩과 같은 것들은 차단한다. 그것은 우리와 너희의 범주에서 너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칩은 존재 자체로 비트 개인주의자를 양산한다. P칩을 경계로 우리와 너희의 범주를 가르는 것이다. 너희의 이야기는 그 어떤 강렬함이 있다 하더라도 P칩을 통해 들어온다면 단순한 반복으로 들려온다. 그 어떠한 진폭도 형성하지 못하는 진부함이 될 것이다.다시 전쟁으로 들어가보면, 우리는 내면화된 P칩 때문에 외부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트를 이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비트를, 아랍인의 비트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P칩이 형성한 외연에 갇혀, 우리의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뻗고 있는 서구 열강에 적극적으로 포섭된 시야를 가지고 있다.전쟁과 테러 그리고 죽음이 갖고 있는 비트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단지 P칩이 있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비트를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로 아랍권과 이스라엘권의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무감각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한국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조승희씨의 테러때에도 마찬가지였다. P칩이 갇고 있는 외연의 안쪽에서 죽음의 비트가 조금이라도 울려퍼지면 우린 엄청난 충격을 느끼곤 했다.개별 비트들이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별로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과 집단의 비트들이 공정하게 울려퍼질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한국의 광장에선 주변부 국가들의 비트를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강렬한 비트라 할지라도…

  • [연극 |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 캐릭터 연극

    “한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좋아서 탈이야. 원작품의 의도는 염두에도 없고 제멋대로 재주만 부리는군요. 막걸리 연극이랄까. 너무 텁텁해요. 깨끗하지 못하고 …” -전혜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연극을 그리 많이 봐오진 않았건만… 한국에선 배우들의 오버스러운 혹은 대단히 연극스러운 연기들로 인해 작품을 보기 보단, 연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곤 했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데, 당연히 연극의 작품마다 나오는 캐릭터들은 연기자들의 ‘재주넘기’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싶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의 일환으로…
    이젠 그런 연기자들에 맞춰져서 ‘창작’ 이 되는 것 같다.
    푼수떠는 오버 캐릭터와 고집 센 사람, 바보 혹은 광인 등으로 압축지어지는 해당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절규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아님 웃어댄다. 희비의 감정선이 매우 극단적으로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에 표출하는 캐릭터들… 현실에서 보면 조울증에 걸렸나 보다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캐릭터들이… 이젠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져서, 연극에선 원래 이런가보다 하고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젠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연극이라곤 거의 없으니깐.

    연극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는 그런 캐릭터들의 집합이었다.
    그야말로 캐릭터들의 향연으로 연극을 이끌어 가는데…
    아니, 인물은 왜 이렇게 많고, 극은 왜 이렇게 긴지… 그리고 몇몇 거슬리는 형식적 결함들.

    * 전형적인 연극 캐릭터
    여기서도 전형적으로 ‘연극에서만’ 드러나는 캐릭터가 모조리 총출동한다.
    억척어멈 캐릭터, 바보 캐릭터, 주접떠는 푼수 캐릭터, 이해할 수 없는 내숭 캐릭터
    현실감이 뚝뚝 떨어지지만, 우리는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수없이 많은 연극에서 봐왔던 캐릭터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캐릭터 양식에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적당히 연기력을 선보이고, 웃음을 자아내고 그런 상투성이 좀 답답하다.

    * 독백이 너무 많다.
    독백은 너무나 쉬운 장치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 장치이다. 어디 영화에서 나래이션 장치를 쓴 영화 말고, 독백을 그리 많이 하던가. 보통 그리스 비극을 보아도, 오오! 하는 짧은 독백을 쓰고 인물간 충돌로 극을 진행시켜가는데, <감포…> 는 그야말로 독백 천지다. 그것은 극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이, 현재진행형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를 보여줌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엄청난 과거’ 들을 독백으로 보여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감포…> 에선 이런 독백을 통한 고백’ 의 맹점을 ‘단순한 과거’ 대신 복잡하게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힌 ‘복잡한 과거’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고, 고백할 때 관객의 감정선을 극도로 자극하는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독백에서도 엄청나게 고함지른다…;;)근데 이것은 또 다른 맹점이다.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것과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는 것.

    *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다.
    연극 내내, 배우들은 고함지르고, 슬퍼하고,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자주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나로서는 시종일관 불편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모잘라 감정을 너무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연출하는 지 말이다. 그것이 극의 주요한 전개와 필연성을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슬픔과 웃음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연출자의 목표가 너무 심플하고 단순하게 드러난다. 아님 복잡다나한 감정보다, 극단적인 감정 연기가 연기하기 쉬워서 그런가?

    *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
    캐릭터의 과거만을 추적하는 것도 빡센데… 별 관련없는 인물의 사건들이 마구 등장한다. 예를들어 핵폐기장 건립 문제가 그렇고, 침 뱉는 고시생에 얽힌 사건이 그렇고, 시장통에서 야채 파는 에피소드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그렇고… 제일 결정적이면서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 시장통 깡패들의 등장이었다. 아아 너무도 진부한 깡패들의 방해행위는… 또 너무도 신파적으로 연출된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핵심서사에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그것도 별로 신선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기어이 2시간 넘는 시간을 채우는지!

    왜 내용적 측면은 얘기 안하냐고?
    음… 솔직히, 너무 극이 산만하기도 하고, 경주 사투리 대사를 내가 몇 개 놓쳐서 내용을 충실히 파악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극의 주제라할까, 뭐 그런것은 그리 복잡하진 않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정도로 해두자. ㅋ
    그런데 극이 너무 형식적 측면에서 중구난방이어서 핵심서사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반성하시오! ㅋ

    PS:
    열수 역을 한 남자배우 참 잘생겼단 말이야 ㅋㅋ
    시장 아줌마 역을 한 여자배우 연기는 참 재미있었음.. 역시 오버스러운 캐릭터이지만 ㅋ

  • [연극 | 태수는 왜? – 극단 풍경] 필수는 왜?

    장군의 아들 태수는
    아버지가 소망하던 엘리트 코스로 다가가면 갈수록 아버지에게 경멸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태수 아버지의 이러한 이중성은 태수의 아버지가 태수를 예비 대결자로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태수 아버지는 ‘완전한 타자’에게는 자신은 무너지지 않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분신-아들’ 만이 자신을 무찌를 수 있다는 오만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 밑의 태수는
    아버지에게는 경멸을 받을지언정, 다른 이에게는 그야말로 ‘엄친아’ 이다.
    특히 태수의 곁에선 필수에게는 더더욱.

    필수가 보기에 태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영국에서 유학한 엘리트이기도 하며
    항시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으며, 콤플렉스 따윈 존재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을 만큼 외모도 준수하고
    다른 이들에게 신뢰를 안겨 줄만큼 대인관계 성격도 굿이다!
    아아~ 그야말로 엄,친,아

    하지만 태수는
    인정욕망으로 가득 찬, 빈 껍데기이기도 하다.
    태수는 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등 아버지의 권위체계에 도전하는 듯하지만
    태수의 행위는 완전히 인정욕망에 사로잡힌 행위였다.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시를 낭독하여 수배생활을 하며 운동권 내 스타가 되고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반공교육 관련 문건을 군대에서 써 내놓고
    친구 필수가 대신 써 준, 논문으로 교수가 된다.
    태수는 그가 제출한 진실성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필수가 대신 써 준 것들로, 태수 자신이 더 인정받기를
    더 그의 아버지에게 다가가기만을 욕망했을 뿐이다.

    또한 태수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다.
    태수는 지나간 시간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는 오직 아버지에게 다가갈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고
    그는 오직 현재 자신이 즐기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다.
    누군가 태수에게 지나감 속에서 과거에 도려냈던 상처에 대해 묻는다면
    태수는 선한 얼굴로 미소짓고 말 것이다.
    그 선함은 위선적인 선함이 아니라, 지나갔기 때문에 자신은 잊었을 뿐이라는 천연덕스러움이다.
    상처를 벌려놓았던 자 – 태수 는 사라지고 그 앞에 천연덕스러운 허공만이 남은 것이다.

    쉽게 망각하는 것은 권력자의 속성이다.
    부이든, 권위이든
    어느 한 곳에 편중되기 위해선 다른 많은 것들의 착취를 동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권력자는, ‘착취’를 봉합하기 위해서
    과거로의 시선을 거두고 발디디고 있는 현재에서 미래만을 바라보라고 한다.
    빼앗기고, 상처받은 자들을 현혹시키는 것… ‘환상’ 이다.
    그 환상은 이른바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 라는 욕망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 환상에 휩쌓이는 순간, 권력자의 발 아래서 권력자에게 포섭된 자로서 충실해 질 것이다.
    환상은 과정을 묻지 아니하는데… 또한 언제나 달성될 수 없다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 ‘환상’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과거’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수도…

    필수는
    그렇게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태수를
    한 권의 책으로 보존하는 행위를 돕는다.
    태수가 쓰고싶다던 자서전적 소설이었다.
    태수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키면서 자신도 반성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의 집필마저 필수의 몫으로 돌아간다.

    필수는 ‘책’ 이란 매개체를 얻었다.
    그런데 책le livre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내어놓는 순간 무한히 지속될 시간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책의 의미와 내용은 인간의 한계로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더라도, 책은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독립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것은 신적 권위에 버금가는 것이 될 수 있다.
    (-데리다의 개념)

    필수는 책을 통해
    태수의 과거를 송두리채 복원시킨다.
    영원히 정지된 시간을 갖는 ‘책’을 통해 과거를 모조리 현재화 시킨다.
    그 현재화된 과거가 연극으로 펼쳐지는 것인데
    이렇게 현재화된 과거가 태수라는 인물로 응축되는 그 순간
    필수는 이제 태수를 찌를 수 있게 된다.
    태수를 향하는 칼은 이제 허공이 아니다.
    과거를 ‘지나감’ 으로 내팽개치던 태수가
    모든 현재화된 과거로 응축된 태수가 되고
    태수의 아버지로 동질화 되가는 태수가 된다.

    필수는
    그렇게 과거의 복원과 함께
    새로움을 창조한다.
    그것은 책이 신적 권위를 갖는 매개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친구 필수를 찾아가려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 같던 태수의 결말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파멸하는 과정으로 바뀐다.

    그렇게 필수는 태수를 찌르고
    태수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씻는다…

    극 중에서 경찰이 필수에게 싸인을 부탁할 때
    필수는 싸인은 편집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하는 것이라 만류하였지만
    정작 싸인을 해야 할 것은 필수였다.

    **다른 후기!

    삼방면으로 관객석을 배치한 설정또한 매우 좋았던 듯하다.
    그리고 “태수” 역을 맡았던 “최광일”씨의 연기. 그야말로 최고였다.

  • [미나-김사과]

    수정의 비극 -김사과의『미나』비평-

    1. 들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하여, 현 대중영화의 주요한 골격으로 쓰이고 있는 비극tragedy 의 법칙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 주인공은 한명이고 고립되는 경향을 가질 것.
    – 주인공은 하마르티아Harmatia를 가지고 있을 것.
    – 주인공은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에 도전할 것.

    현대판 오이디푸스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올드보이>는 위의 법칙을 그대로 준수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하마르티아를 가지고 있었으며, <올드보이>의 오대수 또한 자신의 딸을 사랑한 하마르티아를 지닌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적인 현재에서,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경고에도 볼구하고 오만한 태도로 진실을 요구한다. 오대수 또한 자신에게 이미 닥쳐있던 ‘운명’ 의 실체를, 기억의 복원을 요구한다. 진실과 기억의 복원은 예정된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신’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넘어설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르게 하고, 오대수의 혀를 자르게 한다. 완벽한 비극tragedy이 완성된다.
    서사문학이 갖는 매체특질이 연극, 영화와는 상이하겠지만, 『미나』는 위 비극의 특질들을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충실한 비극이다. 여기선 주인공 수정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비극tragedy의 과정으로 보고, 많은 부분 위의 특징들을 찾아내는 과정 안에서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

    2. 수정이란 존재

    수정은 그들을 비웃으며 상한 불고기김밥을 입속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진정 비웃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수정이었다. 상한 불고기김밥은 먼저 수정의 얼굴에 약한 발진을 일으켰다. (중략) 열정의 삼일은 상한 불고기김밥을 클라이맥스로 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정에게 남은 것은 후유증과 그에 대한 학교당국의 냉담하고 형식적인 처리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뿐이었다. (p.71)

    위의 서술은 단순 수정에게 있었던 특정 상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수정의 탄생이며, 수정 그 자체이다. 수정은 극기훈련장에서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지휘교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른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극기훈련장의 모범이 되어 모두에게-박수치는 사람이 자의로 치던 타의로 치던- 박수를 받게 된다. 수정은 기존질서와 권위체계의 포섭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도구가 되어 준 것이다. 이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관계가 계속 성공적이었다면, 수정은 완전히 시스템을 신뢰하는 존재로, 사물화Vordinglichung 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거래는 일방적인 권위질서의 배신-상한 불고기기밥-으로 붕괴되었고, 수정은 식중독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런 계약파기에 대하여 기존 질서는 자기 시스템의 결함을 인정치 않는다. 또한 수정과 맺었던 일종의 밀약, 그 자체도 시스템은 인정치 않는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계약이라는 것은 순전히 수정이 벌인 것이고, 수정이 갖고 있던 기대였다고 시스템은 발뺌할 것이다. 시스템 자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헛된 기대를 품었던 수정이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다.

    수치심과 모멸감의 기억을 깊이 마주보면 결국 박지예처럼 자살에 이르게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은 단호하게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충분하게 사랑하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아존중감을 높이자. 수정은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계속하여 식중독의 추억에 몰두한다. (중략) 도시는 점점 더 수용소의 담장을 높이 쌓아가고 있으며 수정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없다. 그저 빨리 세계의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서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여길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모두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는 발밑에다 대고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72)

    수정이 그런 시스템을 대처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특이하기도 하지만, 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수정은 일명 ‘때리고 튄’ 시스템이란 테두리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수정은 경멸스러운 시스템 구조 안에서 가장 윗대가리가 되고자 한다. 상한 불고기김밥을 받지 않을 존재, 누군가에게 상한 불고기김밥을 주고 나서도 발뺌할 수 있는 존재를 추구하게 된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대자존재對自存在’ 이다. 축구공, 자동차 인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닌, 아무 이유없이 그냥 무대위로 밀려난 존재이다. 무대 위의 인물에게 주어진 행동, 대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무대 위의 존재는 작품 속 등장하는 ‘지예’ 처럼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 선택권도 지니고 있다. 존재는 자신을 자기 규정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예언자 오라클은 네오가 ‘the One’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주인공 네오는 자기 자신을 ‘the One’ 으로 정의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만든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면, 무대 위 수정은 자신을 시스템의 대가리가 될 존재로 규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수정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를 실현시킬 수 없다. 수정은 자신을 자기 정의하였다고 착각하지만, 수정의 선택은 수정이 서 있던 무대, P시라는 무대가 지니는 장력(張力)에 이끌린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정이 시스템의 윗대가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되어 수정을 비극으로 이끈다.

    3. P시 속 수정

    그런데 완성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장이다. 싸구려 미네랄오일과 글리세린을 일대일로 섞어 담은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가 찍힌 무겁고 우아한 유리로 된 화장품케이스 같은 것이다. (p.82)

    그녀는 초등학교 일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삼학년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관되게 들뢰즈와 데리다를 강의하며 안도한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일본어로 번역할 생각도 있으나 한국어로 옮길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그 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81)

    동물이라면 물리적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서열은 다소 독특한 면이 있다. 이미 서열 체계가 쌓여 있고, 그 서열의 극점이 구현에 얼마나 근접하였는가가 관건이 된다. 개인이 아닌, P시라는 도시인들의 집단도 그런 서열구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주변부’ 정도에 위치할 P시는 ‘중심부’의 모든 문화적 ․ 지적 체계를 모방한다. P시가 내재하고 있던 ‘주변부적’인 문화 관습들은 폐기하고, 프렌치 스타일의 로고로 자기를 포장하고, 중심부의 지적 체계에 포획되길 원한다.
    그리고 P시 내부에선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질서체계를 똑같이 구동한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이 가진 문법적 완성도, 구성적 완벽성 따위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종종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져 휘청거리며 우스워졌으나 그래도 그녀는 당당했다. 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으므로 떳떳하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여기에 적용가능한가의 여부이다.’ (p.76)

    수정은 P시라는 질서체계에서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을 순도높게 지니고 있는 학생’ 이다. 수정은 P시가 구동하고 있는 규칙들을 완전히 습득한 존재로 자기정의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자신을 정의한 자기정의가 아닌, 자유의 상실 즉 ‘인간의 사물화 Verdinglichung’ 이다. 극기훈련 과정에서 상한 불고기김밥을 먹기 전의 수정과 먹은 후의 수정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을 신뢰하건, 경멸하건 수정은 여전히 시스템 아래에서 대가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수정은 자기 정의를 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잃어버렸다. 수정은 P시의 규칙 외부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수정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정의 이런 욕망이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바라는 대가리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편리한 소비자의 비극이다. 소비자는 레스토랑이 가격을 올리는 것에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돈에 어울리는 것을 갖거나 지갑에서 돈을 좀더 꺼내는 가능성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가장 없는 자의 것을 조금 더 빼앗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p.80)

    P시의 질서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도구들’은 대가리가 되지 않고, 거대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비자의 미래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암담한 미래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수정은 자신을 거대한 소비자로 위치 짓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정은 시스템의 대가리가 되고 싶어하고, 서열 하(下)의 도시민들을 짓밟고 싶어한다. 시스템에 겉도는 존재 혹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어한다. 철저히 P시라는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품고 있는 이런 수정의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인 욕망’ 이며, 거대 소비자를 넘어 위계질서의 최상위층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허용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 오만이 수정의 하마르티아라 할 수 있다.

    4. 수정의 비극

    작품의 제목이 ‘미나’이지만 미나라는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긴 그리 쉽지가 않다. 작품에서 미나는 대부분 수정에 의해서 비춰지기 때문에, 일부분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도 같고, 왔다갔다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미나는 수정과 달리 P시라는 무대 위에서 살짝 빗겨난 존재라는 것이고, 그것이 수정을 참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박지예는 시험을 못 봐서 죽었다고 하니까 그건 나랑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 같고, 사실 나는 잘 모르겠고, 뭐 굳이 뭔가 알고 싶지도 않고, 사실 나는 박지예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p.33)

    미나는 결국 세 과목의 답안지를 모두 백지로  내고 나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완벽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이었다. 수정은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한 자신을 느낀다. (p.35)

    P시는 누가 죽건 말건, 시험시간에는 충실히 응해야 한다는 ‘비인간화된 도구’를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은 그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기 위해, 박지예의 자살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무화시킨다. 충실히 답안을 제출하여, P시의 대가리 근접하였음을 느끼고 조금은 희열하였다. 그런데 미나는 수정과 달랐다. 수정 눈에 비춰진 미나는 완벽하게 자신의 인간화된 모습을 향해 다가갔고, P시의 요구사항들을 뭉개버렸다. 미나는 P시의 무대에서 빗겨나가면서, P시의 도구화된 인간이기를 거부하였다. 수정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수정은 미나를 비웃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을 착하게 써봐 수정아. 이제부터라도. 안 그러면 아무것도 안돼. 봐 벌써 문제가 생기잖아? 너는 착한 마음이 뭔지 모르지. 그래서 인정을 안하는 거야. 하지만 니가 인정 안한다고 있는게 없어지는 건 아냐. 세상은 착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p.287)

    세상은 선한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눈으로 보기엔 그렇겠지. 악마에게 악은 선이고 또 선은 악이잖아. 그래 너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참말로 악이니까. 완전한 악.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해. (p.288)

    미나는 그야말로 P시의 질서를 내면화한 수정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설득이 가능할 리 없다. 작품에서 또 한편 문제시 하였던 것은 소통불가의 상태였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내뱉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의 말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서로를 이해시키지도 못한다. 타인의 말은 차단하거나 민호처럼 미끄러트릴 뿐이다.
    미나의 설득을 수정은 오히려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악의적으로의 정도가 아니라 미나를 아예 완전한 악의 덩어리로 규정한다. 수정이 미나의 ‘도덕’을 이해못하고 받아칠 수밖에 없는 것은, 수정이 완전히 P시의 규칙들을 내면화한 ‘비인간화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P시에서 가장 합당한 형태의 인물이 가장 비인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다는 것을 작품은 한편 예리하게 찌른다. 비인간-수정은 미나가 이야기하는 ‘도덕’을 이해할 수가 없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수정이 하필이면 미나를 표적으로 삼게 된 것은, 미나라는 존재가 P시에서 빗겨나간 너무도 괘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정의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이 곧 하마르티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P시가 수정에게 제공하는 거대 소비자라는 지위를 수정은 승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정은 ‘거대 소비자’가 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욕망한다. 하지만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아이러니 한 것은, 수정의 욕망은 수정이 P시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 했기 때문인데, 그 자체가 실현될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된다는 것이다. P시의 상태는 천연덕스럽게 아폴론적인 척 하고, 욕망하는 수정 그 자체가 하마르티아가 된다.
    붕괴할 수밖에 없는 수정의 표적은 미나가 된다. P시의 질서에서 빗겨나려고 노력하는 미나는 P시의 고장난 부속품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행위는, 수정이 P시의 작동원리를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동일자가 타자를 배제하는 행위이자, 수정 자신이 P시의 동일자로써 권력을 실현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폴론적인 척 하는 P시는 수정을 완벽한 타자로 인식하고, 아마 ‘사이코패스’ 이런 식의 명명을 붙일 것이고, 미나는 비극적 희생양이 될 것이다. 수정의 비극은 이렇게 완성된다.

    5. 맺음말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적인 삶을 제약하는 여러 상황들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에게 맞는 여건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때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 즉 하나의 사물로 전락하게 된다.
    수정은 그녀 자신이 P시와 P시의 시민들을 철저히 경멸하였지만, 완벽한 P시 속의 ‘사물’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미나를 살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완전히 P시의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수정 자신은 포터블 음악을 귀에 꽂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었겠지만, 그것은 다른 목소리들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에 불과하였다. 수정이 귀를 막은 것은, 그녀 안으로 틈입해오는 P시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주변의 목소리’였다. 수정은 철저히 귀를 틀어막은 P시의 부속품의 한 형태다.
    그렇다고 미나 또한 대안적인 존재는 아니다. 미나도 존재의 자기정의를 통해, 상황을 만들어 나가려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미나는 현 상황에서 단지 살짝 빗겨나고자 하는 도피적 형태에 불과하다. 헌데, 수정은 그런 미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P시의 질서가 ‘미나같은 빗겨감’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P시는 가히 수정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세계체제에서 어떻게든 ‘반주변부’를 벗어나 ‘중심부’로 나아가고 싶은 P시 또한, 수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꿈꾸고 있고, 내부에선 미나 같은 존재를 살해하게끔 내버려 둔다. 그리고 수정이 직접 미나를 칼로 찌른 후에야, P시는 아폴론적인 선한 표정을 하고, 수정을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수없이 많은 수정을 양산하는 것이 바로 P시이다. 수정의 비극처럼, P시가 맞게 될 비극은 더 파국적일 수 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비극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 경쟁력 강화’, ‘선진국이 되자’ 라는 모토 아래 우리는 지금도 제 3세계 국가들을 착취하고, 중심부 국가들이 벌인 전쟁에 협조하고 있지 않은가.

    * 참고문헌

    김사과『미나』창비, 2008
    아리스토텔레스 / 천병희 엮 『시학』문예출판사, 2002
    마이클 티어노 / 김윤철 역『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아우라, 2008
    이왕주『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
    이서규『현대철학의 이해』건국대학교 출판부, 2003
    장 폴 샤르트르 /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예출판사, 1981
    지오반니 아리기「발전주의의 환상 : 반주변의 재개념화」『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공감, 1998

  • [연극 | 삼도봉 美스토리]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요즘 영화를 보고 몇 줄로 축약해서 쓰는 숙제를 하곤 하는데…
    삼도봉 미스토리의 주제를 한 줄로 확 축약해서 쓰는 걸 시도해본다면

    “농민들의 애환과 삶”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축약해보지만, 찝찝한 점들이 좀 있다. 위의 주제로 축약하기에는 연극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접점들이 부수적으로 더 존재하고 있는 것도 같고,
    또 그것이 삼도봉 미스토리가 품고 있는 시사적인 ‘접점’이라고 여기기엔 형상화 작업이 그리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못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상도봉 미스토리는 웃음과 감동, 시사성 그리고 다양한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고, 그 어느 것도 쉽게 건져올리지 못하고 있다.

    연극은 추리극을 모티브를 취하면서 다양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농민들의 과거를 추적한다.
    추리극으로 일종의 서스펜스 몰입효과를 주면서 농민운동가, 이장 그리고 결혼 못하는 시골 청년, 강원도 농민들이 ‘양키놈들의 쌀’ 을 불태우려고 하기까지의 기억들을 더듬으려고 하는데…
    내용상으로 양키놈들의 쌀을 불태우기 까지에 그들 기억은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장은 아내가 떠난 것을 비통해 하기 때문이고
    결혼 못하는 시골 청년은 국제결혼 사기를 당하였기 때문이고
    농민운동가는 아들을 안타깝게 잃었기 떄문이고
    강원도 농민은 강원도에 사는 비애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양키놈들의 쌀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어서, 갑자기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양키놈들의 쌀을 불지르려고 하는 것보다, 각자의 고통과 비애를 더욱 심화시켜서 그냥 산불을 내려고 하였다는 설정으로 갔으면 더욱 그럴 듯 할 수도 있었을 것을 말이다. 물론 각자의 고통과 비애를 심화시키기엔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고, 각자의 이야기가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작품에선 농민이기 때문에, 그러했지 않은가. 라고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편인데, 그들이 농민이어서 어떤 현실적 맥락과 접점을 지녔는지 말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저 농민이어서 가난했고, 그저 농민이서 자연과 싸워야만 했고… 한다고 지금껏 도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 어느 정도의 전제에서 그대로 출발하고, 그것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사유패턴은 농민분들 참 불쌍하지 라는 겉도는 동정심으로 흘러간다. 그러할진데 농민의 애환에 감동을 느낄 수가 없고, 연극이 최종 목적지로 소망하고푼 미국 헤게모니의 폭력에 대한 분노에는 더 다다를 수가 없다. 통념과 정서에서 출발하지 말고 현실성을 직접 보듬어 안아야 감동이 오는 것이란 단순한 진리를 연극은 놓치고 있다.

    극은 농민들의 현실성과 개연성을 지닌 애환에 집중하기보다, 캐릭터와 에피소드에 더욱 방점을 찍고 진행하고 있는데… 그러면 과연 캐릭터와 각기 에피소드들은?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배우들이 각기 등장하는데… 이건 솔직히 매우 개그콘서트스럽고, 진정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도대체 왜 삼도의 농민들이 나와야만 하는가. 그것에 대한 주제적인 이유, 필연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 삼도 사투리를 연습한 배우들의 노력을 보여주려고 했구나 하는 미약한 감탄만 나오게 한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기억의 퍼즐들은, 맞춰지지 않고 따로 노는 에피소드들에 불과하다.
    각 에피소드들은 웃음에서 출발하여 신파로 흘러가는 투스텝 구조를 지키면서 넘실넘실 흘러가는데… 주제의식의 형상화와 진정성을 상실한 캐릭터로 인해, 각 에피소드에 몰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저 음악과 조명이 짜내는 넘쳐 흐르는 정서를 관찰하게 두거나, 혹은 저 짜내는 신파에 절로 반응하는 눈물샘을 느끼면서, 아 젠장… 하게 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겉도는 가운데…
    극은 결말에 치닫는데.. 극이 최대의 서스펜스로 품고 있었던 도대체 누구의 시체인가에 대한 대답이 희안하다.
    결론적으로 시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것이 일종의 메타포 장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말해보자면..

    미국산 쌀 푸대에서 나온 시체가 빵으로 형상화 되었다는 데 주목해보아야 한다.
    쌀 푸대에서 미국의 것, 빵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머리 없는 시체라는 점은… 바로 극을 보는 ‘당신’ 과 ‘당신들’에게 경고하고, 부탁도 하는 것이다. 농민들을 이렇게 시름에 빠트리는 미국 헤게모니가 비단 농민만이 아닌 당신에게 까지 미칠 수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머리 없는 시체가 바로 당신의 모습이라는 뭐 그런…

    뭐 그런데… 이런 ‘고차원적(?)’ 은유에 도달하기까지 과정이 갈팡질팡 비실비실 하였으니… 이건 뭥미~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작위적으로 웃음, 시사, 은유, 시사성, 캐릭터 이 모든 것을 여기저기 쑤셔넣은 듯한 이 연극은… 너무 자신감 혹은 소신이 부족했다. 이것저것 뒤섞어 놓은 퓨전이라니…

  • [씨네21리더스에디션 장려상] 어린이 영화를 부탁해 外

    어린이 영화를 부탁해 -발로 뛴 삼인방 어린이에게 영화를 묻다.

    “네들이 영화 맛을 알기나 알어?”어른들의 속마음은 그랬을지 모른다. 집에서 TV나 보면 되지. 애들에게 영화, 극장이 무슨 사치냐고. 그리고 어린이 영화가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전체관람가 영화가 얼마나 많냐는 식으로 말이다. 헌데 영화 속 이미지의 폭력성과 선정성의 허용 정도를 지시하는 전체관람가가 모두 어린이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주로 한국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로 만들어지는 슬랩스틱 코메디나 신파물이 얼마나 아이들 을 심도깊게 고려하였을까 우려스럽다. 아이들이 진정 원하는 영화는 무엇이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화는 무엇일까? 제법 할 수 있는 고민이기도 한데, 그 어느 곳에서도 어린이 관객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는 노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항시 ‘수용자’ 란 주체에서 미끄러져버렸던 어린이 세대. 그런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직접 들어보았다.

    “영화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첫 인터뷰 장소는 정독 도서관이었다. 부산스럽게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길을 지나던 아이에게 다짜고짜 들이댔다. 첫인상이 조숙했던 초등학생 A군은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참 인상 깊었다고 했다. 헐… 이거 생각했던 것과 다르잖아! 이른바 ‘애들이 좋아할만한’ 이란 관용어가 붙었던 온갖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들이 우장창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도서관 마당에 놀기 위해 오는 아이들에게 차례로 인터뷰를 시도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서먹하게 굴다가, 영화이야기가 나오자 들뜬 목소리로 좋아하는 영화들을 나열했다. <과속스캔들>, <우주전쟁>, <해리포터>, <쿵푸팬더> 등이 쏟아져 놔왔다. 그 중에는 <워낭소리>도 있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 답지 않게’ 15세 이상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전체관람가 영화 중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워낭소리>를 제외하곤 거의 전부 외국 애니메이션 이었다.

    “한국 어린이 영화요? 너무 유치해요.”

    과거 1980~1990년대는 어린이 영화기 활황이었다. 당대 최고 인기 개그맨들은 어린이 영화를 제작하여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극장은 물론 비디오 시장에서도 그야말로 핫hot한 콘텐츠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0년전 이야기. 요즘 아이들의 감수성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 개봉된 영구 씨리즈의 연장판인 <갈갈이 패밀리>를 아이들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다하였고, 어린이 영화라고 나오는 것들은 너무 유치하다고 답했다. 어떤 아이는 어린이 영화는 거의 다 슬프고 뻔한 것이라 싫다고 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안녕, 형아>, <마음이…> 같은 영화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주연으로 하는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신파적이고, 착하디 착한 영화만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우린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 정도면 재밌어하지 않겠어? 하면서 어린이 영화를 던져주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한국 어린이 영화를 외면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예견된결과였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외화에 의존하거나 어른 영화를 봐야만 했던 것이다. 어떤 아이는 <추격자>를 언급하여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어른 영화는 너무 잔인하고, 야한 장면도 막 나와요.”

    도서관 일대에서 벗아나 우린 학교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먼저 재동초등학교. 헌데 그날은 놀토였을 뿐이고, 우린 몰랐을 뿐이고… 텅 빈 운동장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화초등학교로 향하였는데, 그곳에는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야구를 하고 있었다. 학원이다 공부다 시달리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이렇게 야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잠시 외곽에서 이야기 중인 두 아이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앞서 인터뷰했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15세 이상 관람가를 주로 본다고 대답하는 아이들. 어떤점이 싫으냐고 묻자,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이후 낙산공원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어른 영화가 재밌긴 재밌는데 보고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되서 싫다고 대답하였다. 너무도 ‘재미없게끔’ 만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재미있는 어른용 영화를 보면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희생이 참 씁쓸했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

    “어린이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가 좋아요.”

    우린 좀 더 차분하게 아이들이 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서 현재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 녀석과 ‘접선’했다. 친구에게 우리가 이런 목적으로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니, 흔쾌히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강북구 모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을 직접 만나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는가란 질문을 던져보았다. 주로 코미디, 액션, SF, 판타지 등을 좋아한다 하면서도, 아이들은 한편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은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하고 선생님한테 혼나는 이야기,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녀서 힘들어 하는 아이 이야기, 왕따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졌음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평소에 느끼던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 아이들이 즐겨보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소재들이었다. “그런 영화를 사람들이 보러 올까?”라고 물으니”그래도 그런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른들도 같이 봐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아이들이 답했다. 부끄러워졌다.

    “극장에 왜 안가냐구요?” 인터뷰 내내 극장시설이나 환경적인 문제도 빈번히 거론 되었다. 성인에 비해 많은 제약이 있는 아이들은 주로 어른(부모)에 의해 영화를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끼리 극장에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가려고 해도 부모의 허락을 얻기란 좀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밖에도 아이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감수하면서 영화를 봐야만 한다. 신장이 성인에 비해 작기 때문에 앞자리의 어른에 의해 화면이 가려지거나, 화장실 사용의 불편함(상영중에 화장실에 갈 수 없음), 기본적인 극장 매너를 어기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등이 있었으며, 극장에 어린이만 갈 경우 어른들이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고 답한 아이도 있었다.

    한국에서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80년대 영구시리즈의 연장판이나 다소 신파적인 어린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였다. “어린애들은 원래 이런 걸 좋아해”라며 변화없는 어린이 영화만 생산하는 것은, 어린이들을 더욱 성인용 영화나 외국 애니메이션으로 발 돌리게 할 것이다. 이젠 어린이 세대가 품고있는 소망과 욕구 그리고 그들 세대의 문제에 대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 어린이들의 ‘영화 볼 권리’를 위해 어린이 전용극장 등 시설 정책적 문제에 대한 노력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상황, 어린이 영화 제작에 도전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 3인방 타조, 아랑, 나미는 한 자리에 모였다. 그네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고민해본다. 자뭇 엄숙한 그러나 그닥 어울리진 않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

    타조: 아이들이 의외로 코미디는 유치하고, 착한 애가 나오는 영화는 신파라서 재미없다고 하더라.

    아랑: 생각해보니 그래. 코미디는 그렇다 쳐도, 착한 어린이가 풀어가는 착한 줄거리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그렇게 크길 바라는 어른들의 소망일뿐이지. 전혀 아이들이 원하는 내용은 아니야.

    나미: 어린이 영화에는 어린이가 없더라. ㅋㅋ 인터뷰도 한 김에 어린이의 욕망을 표출해 줄 수 있는 영화, 만들어 보자 우리!

    아랑 : 대책 없다.(한숨) 하루 만에 그게 가능하겠어?

    타조 : 음…….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해보자. 못 할 것 없어. 좀 빡빡하지만 ㅋㅋ

    아랑 : 흠… 아이들의 욕구라면 인터뷰에서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 학교, 공부, 부모님이 꾸중하시는 것, 왕따 문제… 이런 게 소재가 될 수 있겠다.

    타조: 그래, 아이들은 그런 욕구를 갖고 있어. <지각대장 존>이라는 그림동화를 보면, 학교 가기 싫은 아이의 욕구를 실현해주면서, 그것이 마냥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욕망을 이해 못하는 어른들을 풍자하잖아.

    아랑: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이라는 동화도 있어. 거기에 보면 잔소리 듣기 싫은 아이의 욕구를 판타지로 실현시키면서 강제하지 않는 교훈을 주고 있지.

    나미: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더라?

    신속하게 회상모드에 들어가는 삼인방. 타조는 학교가 활활 타는 소망을 고이 품었고, 나미는 구준표 같은 재벌아빠가 짠~하고 나타나 주기를 바랬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랑은 죽도록 미워하던 아이가 가는 곳마다 도랑에 빠지는 꿈을 살포시 떠올리며 흐믓해 한다. 과연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아름다운 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미: 아이들이 대체로 비일상적인 판타지를 좋아했었으니까, 판타지로 풀어보는 건 어때?

    아랑 : 그래! 학원을 너무 많이 다니는 아이가 학원가방 때문에 점점 작아지는 거야.

    타조 : 그거 <마법의 설탕 두 조각>에서 잔소리 하는 엄마 점점 작아지는 거랑 비슷한데?

    나미 : 근데 작아지는 걸 어떻게 표현해? 그 특수효과를?

    잠시 흐르는 정적…….

    타조 : 그럼, 만만한 초능력 같은 걸 해볼까? 내용은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욕망을 실현시키는 걸로.

    아랑 : 어떻게?

    나미 : 얘들아, 난 천잰가봐~! 잔소리만 필터링 하는 초능력이 생기는 거야. 잔소리할 때만 엄마 목소리를 무음 처리하는 거야. 잔소리할 때 엄마 목소리를 무음처리 하는 거지!

    타조 : 오, 그 정도 특수효과는 가능해! 그러면 결말을 어떻게 끝내지? 계속 못 듣고 끝나나?

    나미 : 멍~

    아랑 : 이렇게 해보면 어때? 잔소리만 골라서 안 듣다가 필요할 때조차 못 듣게 되서 이번엔 잔소리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야.

    나미 : 굿!

    _제목: <잔소리가 싫엇!>.

    _테마: 잔소리 듣기 싫은 주인공 청 테잎으로 귀 막는 스킬 획득하여 겪는 좌충우돌 어드벤쳐 판타지

    만들어진 영상은 아래 주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만, 정말 하루만에 모든 촬영이 끝났다는 점. 생전 처음 써보는 캠코더로 촬영하였 다는 점. 무지 많이 고려해주세요. 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후훗!

    _영상주소 : https://youtu.be/QnU89qahjco

    _P.S: 주인공 제외한 인물 1인 3역 이상은 기본이니 이름표를 보고 파악해 주실 것.

    충무로엔 아무것도 없다.

    오늘 타조와 나미의 데이트 장소는 충무로 입니다. “미국에 헐리웃이 있듯이, 우리에겐 충무로가 있다!” 라는 막연한 환상은 변두리 청년 타조와 나미의 꿈을 잔뜩 부풀려놓았습니다. 충무로에 가면 영화 촬영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어서 장동건이 영화 찍다 코 파는 것도 볼 수 있고, 카페엔 영화인들이 바글바글, 거리에는 온통 영화인들의 손바닥이 찍혀있을 것만 같았죠.

    드디어 충무로역 도착! 오오, 생긴 것부터 웬 석기시대 동굴 같은 분위기. 이것은 정녕 한국 영화의 기원이 있는 곳임을 은유하는 건가요? 조금 올라가보니 대종상 사진들이 보이기까지 하네요. 기대백배 충전하여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려던 타조와 나미. 앗, 지하철역 한쪽에 웬 센터 같은 것이 있네요. <재미동 극장>이라 써있습니다. 헌데, 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군요. 이런, 뭐, 리모델링중인가보지. 하고 타조와 나미는 아쉬움을 남기고 지하철역을 나섭니다.

    나섰죠, 나섰는데.. 뭐 그리 별 다를 것 없는 도심 풍경이 타조와 나미 앞에 있습니다. 허둥대는 타조를 보며 나미가 오랜만에 3겹 미간 주름을 만들어 주시는군요. 타조는 얼른 아무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어랏, 이건 뭔가요? 타조와 나미는 마치 고향과도 같은, 너무도 구수한 골목풍경에 좀 당황합니다. 이쪽으로 돌아도 인쇄소, 저쪽으로 돌아도 인쇄소 뿐이군요. 타조가 여기 인쇄소가 많은것은 한때 충무로 영화 포스터 제작을 맡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 되었다고 나미에게 알려주는군요. 내가 인쇄소 보러 왔니? 여기 오면 온갖 스타들 손도장 타일이 쫙 깔려 있을 거라며! 당황한 타조는 나미를 다른 골목으로 이끕니다.

    여기는 웬 사진 현상소만 가득하군요. 나미에게 타조가 또 아는 척을 합니다. 여기 사진관이 많은 것은 배우 지망생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이렇게 된 거야. 헌데 나미가 그거 확인하러 충무로에 왔던가요. 나미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쩔쩔매는 타조에게 그 순간 저 멀리 극장하나가 보입니다. 오오 그 이름도 많이 들어 본 대한극장이에요. 얼른 나미를 이끌어 휘달려 가는데요. 자세히 보니, 그저 멀티플렉스 극장일 뿐이군요…타조가 어쩔 수 없이 ‘다이버 지식검색’ 정보를 꺼내서 다시 한 번 나미를 고양시키려 합니다. 옛날에는 여기에 영화제작소가 있었고, 여기엔 뭐가 있었고… 주절대는 타조에게 나미가 묻습니다.“그런데 지금은 뭐 어쨌다는 거지? 아무것도 없잖아. 근데 뭐가 충무로 영화야?”

    한국영화 하면 맨날 졸졸 따라오는 이름 충무로. 지금은 제작사조차 철수 했다 쳐도, 한국영화의 역사적 기원으로 불리 우는 충무로를 한국인들은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왜 충무로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어머니 담론과 가족 담론

    0. 들어가며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조주은 씨는 논평에서 어머니를 위와 같이 언술하며, 현대사회 속의 어머니를 자동판매기에 비유하기도 하다. 우린 설탕프림커피라는 현모양처의 명령버튼을 누르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하게끔 행동하기를 강요하고, 거기서 블랙커피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땐 “어떻게 엄마가 이럴 수가 있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하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억압 기제는 단순, 가족관계 상에서 ‘어머니 외의 사람들’이 ‘어머니’를 식민화한다는 단편적인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동판매기 버튼이 요구하는 어머니 상이 조금 더 엄격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게 되는 비난의 정도가 크기 때문이지, 아버지, 자식 등등의 가족 구성원 모두 그에 합당한(?) 버튼을 부여받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를 덧씌워놓고, 서로를 감시하고 타박하는 그물망이 바로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런 가족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 속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도 하고, 아내가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가족관계에서 “난 이만 빠질래.”라고 외쳐보며 가족의 해체를 말하기도 하고, 또한 <가족의 탄생> 같은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행해진 현대사회의 가족에서, ‘현대사회’에 방점을 찍고 현대사회 이전의 가족 형태로의 향수를 일으키는 형태도 있다. 그것이 지금부터 살펴 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경우이다.
    작품 해설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오랜 흐름을 한곳으로 모아낸 빼어난 소설적 결정(結晶)’ 이라는 민망한 찬사를 들을 만큼, 이 작품은 신경숙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너무도 익숙한 흐름이다. 그리하여 『엄마를 부탁해』의 텍스트에 직접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경숙의 이제까지 창작경향과 평가를 잠시 살핀 후에 들어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이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1. 90년대 문학과 작가 신경숙

    1990년대 한국문학 자신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당시에 나타났던 문학적 경향 전환은 뚜렷했다. 그 중 신경숙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금이 있던 자리』의 위치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해당 작품은 진보이념의 급격한 퇴조가 불러일으킨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사적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공세적 자기노출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이 주류 문단에게 승인되었다는 현상을 넘어서 90년대 소설의 경향성 변모를 상징적으로 징표하는 것이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데, 신경숙 특유의 서정적인 심리 묘사와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딸기밭』 으로 이어지는- 역시 그리 큰 변화없이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경숙의 특징들이 90년대 한국문학의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경숙은 공지영, 은희경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대중에게 승인받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비롯한 주요 문학상을 휩쓸어 왔던 것이다.
    외부의 시선에 묻혀 있었던 개인의 발견과 개인 정체성의 구현과정. 그 개인이 이제껏 익숙했던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 특유의 더듬거리는 문체 등의 특질은 신경숙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갈등의 지표를 형성해 오기도 했다. 이른바 ‘여성문학’, ‘사소설적 경향’ 그리고 ‘감성적 문학’에 관한 것이다. 이 중 여성문학에 관한 논의는 넓은 폭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편이다. 한편에선 여성의 목소리를 주체화하고, 독자에게 ‘감정의 위안’을 안겨준다는 데 의의를 두는 반면, 한편에선 신경숙이 이상화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의 전근대적 형태에 주목한다.
    이런 논란과는 별개인 것처럼 신경숙은 주류 문단에게 두루 찬사를 받아왔는데, 이것이 90년대에서 21세기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문학의 현 위치를 지시해 준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전까진 방향이 비교적 뚜렷했던 이른바 ‘창비’와 ‘문지’는 신경숙이란 대형 작가에 대해서는 토스해주기 바빠서 서로를 희석시켰고, 신경숙은 조선일보에 『리진』을 연재하고,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단으로 상징권력을 획득하는 한 편, 『엄마를 부탁해』를 창비에 연재하고 대히트를 쳤다.

    2. 식민지 엄마의 귀착지

    2.1.  엄마와의 대면

    목적어와 서술어는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제목 ‘엄마를 부탁해’. 부탁해라는 호소형 서술어가 때리는 파장이 꽤 크다. 그리고 책을 열어보면, 바로 등장하는 ‘너’라는 인칭. 실제로『엄마를 부탁해』가 구사하고 있는 형식은 대단히 이채로운데, 그 이채로움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각 장마다 서술인칭이 달라지는데, 1장은 큰딸의 2인칭, 2장은 장남 형철의 3인칭, 3장은 남편의 2인칭 그리고 유언장 혹은 넋두리처럼 쓴 4장만이 1인칭으로 되어있다. 먼저 2인칭으로 서술된 1장과 3장은 ‘엄마의 자식’, ‘아내의 남편’이라는 주체를 설정하여 독자가 자식이든, 남편이든 강력하게 이입할 수 있는 기제가 2인칭으로 제공되고 있다. 더욱이 1장과 마주하는 독자는 자식이란 이입코드 외에 작가 신경숙이란 실제인물의 코드와도 대면하여 더욱 강력하게 엄마와 마주하는 존재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다소 이질적으로 튀어오르는 것이 3장 형철-그 라는 3인칭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질성을 서술의 일관성으로 덮어버린다.
    각 장에서, 각 장의 주체들은 실종된 어머니의 상태에 멈추어 서서, 자신의 서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너-큰딸, 그-형철 그리고 당신-남편의 서사는 그들 주체의 이야기이기보다 그들의 기억 속에 담긴 엄마의 형상화 작업들이다. 엄마의 형상화 작업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태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엄마가 어떤 사람임을 만들어간다. 에피소드들을 더듬어서 각 장을 이끄는 주체가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하면 할수록, 주체는 더욱 선명해지는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장의 결미로 갈수록 주체는 마주한 엄마와 자신을 비교, 대조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강화시켜나간다. 이러한 일관성은 다소 다채롭게 변하는 인칭변화를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 결국,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각 주체의 개별 특질들은 소멸하고, 엄마와 ‘엄마를 대하던 가족 구성원’이란 관계로 재구성된다. 2장의 형철-그 라는 3인칭 또한 그것이 유별나게(?) 존재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질이 포기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떤 주체로 나타나건 간에 감성적인 고백조의 문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존재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2장의 3인칭의 존재이유는 일종의 숨고르기 정도라 할 수 있다. 너라는 지칭이 고조시킬 수 있는 추궁의 포즈를 조금 완화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론, 1장에서 형성한 ‘작가 신경숙’-너-독자라는 강력한 이입관계의 틀에서, ‘작가 신경숙’이 빠진 상태에서 2인칭을 유지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겉으로 보기엔 다채롭지만, 실상은 다층적인 ‘엄마와 대응하는 이들’과 ‘각기 다른 모습의 엄마’ 이기를 포기하고 일대일 대면의 포즈를 보여주면서 작자는 같은 이야기를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면 작자는 결국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각 장의 주체들의 통해 어떤 엄마의 모습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에 주목해볼 수밖에 없다.
    개별 주체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엄마이지만, 그 작업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앞서 말했듯이, 개별 주체는 ‘개별’ ‘주체’란 말이 무색할만큼, 특이성 없이 일관된 형태로 엄마 앞에 끌려나와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엄마도 오로지 단일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그것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습으로.

    너의 엄마는 몇해 전부터 내 생일은 따로 챙기지 마라, 했다. (중략) 식구들이 모이게 되면 며칠전에 새 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끊어오고, 치약과 칫솔들을 준비했다. 돌아갈 때 한병씩 나눠주려고 참기름을 짜고 참깨들깨를 따로 볶아 찧었다. 가족들을 기다릴 즈음의 너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나 시장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 단연 활기를 띠었고 은근히 자부심이 배어나는 몸짓과 말투를 보였다.(pp. 11-12)

    위 인용이 작품 속 엄마에 대한 첫 서술이다. 엄마의 일상생활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여기서 등장하려는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고기를 끊어오고, 참기름을 짜서 준비한다는 다소 상투적인 모양새에서부터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의 가족 속에 그런 엄마가 있든 없든, TV드라마만 틀어도 곧잘 뛰쳐나오던 엄마. ‘그런 엄마’는 자식을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가히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헌신적인 무한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명줄을 갉아먹는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가족사랑에 여념이 없는 엄마의 모습은 헌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후로 끊임없이 형상화되는 엄마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 보면, 작품이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진 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런 엄마’ 와 맞대면 하는 ‘당신’ 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데, 더 심혈을 쏟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작품 속 엄마의 모습이란 너무도 상투적이다 못해 신파적이며, 그런 잃어버린 엄마에 반응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형상화되는 엄마에 대한 죄의식에 취해 버렸다.
    아버지-당신을 주체로 하는 3장은 ‘아버지-당신’과 엄마의 대조관계를 통해 슬픔의 기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 1-2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을 형성하고 있다. 동어반복적인 죄의식과, 죄의식에 처해진 아버지-당신의 극적인 반응을 통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재하고 있는 아버지-당신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지난 기억들을 반추하고, 부재하는 엄마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독자. 독자는 결국 어떤 자신과 마주하는가. 작가가 ‘부탁했던 엄마’를, 부재하는 엄마의 귀환을 격정적으로 촉구하게 된다.

    2.2. 엄마의 귀착지

    엄마는 귀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를 귀환시키기보다, 엄마의 전환을 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그렇게 귀환을 고대하게 했던 그런 엄마의 다른 면모가 4장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엄마이다.

    곰소는 당신 때문에 내게 잊지 못할 곳이 되었재요. 나는 늘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이 생겨야 당신을 찾았재. 그리고 내가 그만그만 평화로워졌을 땐 당신을 잊었소. 곰소라 찾아간 나를 보고 당신이 내게 한 말도 무슨 일이요?였재.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당신을 찾아간 건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오로지 당신을 찾기 위해 간 길이었네. (pp. 233-234)

    은규란 남자는 엄마의 말을 빌어서, ‘내 인생의 동무’가 되어주었던 자였지만, 은규쪽에서는 사뭇 다른 듯했다. 은규는 엄마에 맺힌 감정의 내적 혼란을 겪어, 곰소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물론 은규 혼자만의 짝사랑은 아닌 듯하다.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모인정하게 굴었네. 생각해보면 참 나쁜 일이었네. 미안하구 미안허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랬고, 얼마 후엔 그래선 안될 것 같아 그랬고, 나중엔 내가 늙어 있었소이.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있어 보이고 싶었네.(p.234)

    엄마 또한 은규를 ‘죄’이고 ‘행복’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은규를 욕망하고 있었다. 단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삼켜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작품의 막바지로 치닫는 부분에서 나타난 이 갑작스러운 전환이 책 뒤 커버의 말처럼 ‘마지막 한 방의 충격’으로 충분히 드러났던가. 옛날 어머니를 복원하는데 머물지 않고, 실재했던 자신만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을 드러냈던가. 거기에 대해서 필자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엄마도 욕망이 존재했다는 에피소드가 수면위로 떠올랐을 뿐, 그것이 작품 내 가족 구성원이 그리고 있던 엄마와 다른 ‘또다른 여인’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껏 엄마라는 존재를 전혀 다층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에서부터 연유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너-큰딸이던, 그-형철이던, 당신-아버지이던 간에 구성되는 엄마의 상은 시종일관 ‘엄마’라는 명명에만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극한의 희생을 보여준 엄마를 구현하며, 마주하는 대상의 죄의식을 건드리기 바빴다. 작가가 최대의 호소력을 지니게끔 만든, 보편적이면서, 이상적인 식민지-엄마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비현실적 로맨스가 현실성을 확보하긴 힘들었다. 오히려 마지막 장은 엄마가 지닌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기보다, 그런 욕망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엄마로서의 자신을 수긍하였던 참된 존재였다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엄마를 최종적으로 성모로 수렴시키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원이자, 미래는 곧 ‘성모 마리아’ 로 신성화된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 극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인이 되는 존재. 이런 ‘성모 마리아 되기’ 는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다 살려내는 기술을 가졌다. 원래 이집의 짐승은 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개를 얻어다 기르면 새끼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낙갔다. (중략) 그리 데려온 강아지는 마루 및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 배 여섯 배 낳았다. (중략) 가지를 모종하면여름이 지나 가을까지도 보라색 가지가 지천이었다. 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pp. 160-161)

    밭에서 내려와 고모에게 이러저러한 사람하고 온종일 밭을 같이 맸다고 하니 고모의 얼굴이 굳어지며 얼굴의 생김을 묻더니 그이는 오래전 그 밭주인으로 그 밭에서 김을 매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이라 하더라, 했다. (중략) 무섭긴, 내 혼자 그 밭을 다 매려면 이삼일을 걸렸을 틴디 함께 매줘서 고맙기만 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p.65)

    위 인용은 엄마가 생명과 죽음에 있어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는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이 외에도 작품의 엄마가 지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자욱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타인의 아이(은규의 아이)에게까지 젓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이를 사산했을 때 별도의 의식을 치루던 모습. 뇌졸중이란 극한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 등의 것들 등.
    엄마란 존재를 이렇게 신성화시키는 것은, 작품 속 엄마를 특수하게 숭상할 만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이 세상의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마리아상을 덮어 씌움으로써 작품 속 엄마만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다. 극한 희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엄마들의 기원. 작가는 그런 이야기가 해 보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로 엄마를 치환하면서부터 혹은 치환하기 위해서 엄마에게 극한 희생은 어쩌면 당연한 전제가 된다. 성인은 고통을 품고 탄생하는 존재이고, 그 고통을 수긍하는 자세 때문에 숭상 받는 존재이다. 결국 가족 구성원들이 죄책감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껴야 하므로 어머니는 일탈할 수가 없다. 일탈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균’이라는 인물처럼 사랑해주고, 잘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면서, 모진 고통을 감수하는 동안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균’처럼 착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3. 가족의 귀착지

    3.1. 이분법적 세계관

    신경숙의 여타 작품에서도 두루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엄마를 부탁해』속에도 그녀 특유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촌과 도시의 대비, 그리고 문맹과 문자세계라는 대비는 그 형상 자체가 미묘한 효과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것 사이에 놓인 엄마라는 존재로 인해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하고, 작품이 방향하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부모세대로 대표되는 엄마는 농촌이자, 문맹이다. 작품 속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농촌과 문맹의 세계에 놓여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자식들이 문자의 세계에 그리고 도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신의 큰 딸을 어떻게든 문자세계에 들여놓게 하려고 가락지까지 팔았던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둘씩 서울에 집을 살 때, 이로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모습 등이 그러한 모습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자식세대들이 다른 세계에서 권력 주체자가 되는 것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큰아들 형철은 검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나마 큰딸이 문자세계의 발화자가 되면서 엄마의 자랑이 되긴 하지만 도시란 공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큰 딸은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글을 쓴답시고 연락두절로 집에만 박혀 있는 비정상적인 생활상이 언제나 엄마에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농촌과 문맹이라는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을 문자와 도시의 세계로 보내는 것은, 그녀의 자식들이 그 곳에 가서 자신의 기원을 발화하기를 원하는 것인 듯하다. 엄마 자신의 매개물이기도 한 감나무를 막내딸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그러한 엄마의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렇게 서울의 땅에 심겨진 감나무는 좁은 흙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쫙 뻗은 채 엉겨붙어’ 서울의 흙에서 생존할 것이다. 문자와 도시의 세계에서 엄마라는 기원은 그렇게 끊임없이 현대산업사회를 ‘좋았던 시절’로 이끌려고 한다. 실종된 엄마의 복원을 바라는 서사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식세대가 엄마와 함께했던 시골 가족공동체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는 것과 대응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못 말릴 회귀가 퇴행으로 보이지 않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시골 공동체의 행동양식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결국 이분법적 세계관의 노림수는 두 가지 절차를 밟는다. 문자와 도시 세계로의 진입 그리고 진입 후 자신들의 기원을 소망하라는 것. 어찌보면 전도사의 역할이라고까지 극단화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을 소망하게 하는 그 가족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3.2.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

    『엄마를 부탁해』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소적으로 그려지는 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족 내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가족의 맏며느리인 ‘올케’이다.

    이번엔 올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수를 적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p.14)

    – 진이가 와서 뭘 해요? 내가 오지 말라구 했어요. 우리도 찾아 볼 만큼 다 찾아봤잖아요. 경찰도 못 찾는 걸 우리가 어떡해요. 서울의 이 많은 집들마다 초인종 눌러가며 혹시 여기 우리 어머니 안 계시냐고 물어요? 어른들도 속수무책이라 이러구 있는 판인데 진이가 뭘 하느냐구. 학교 다니는 아이는 학교 다녀야지, 그럼 우리 어머니 안 계신다고 우리 모두 자기 일 팽개치고 말아요?
    – 안 계신 게 아니라 잃어버렸잖아.
    – 글쎄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구요! 당신도 회사 다니잖아요!
    – 뭐?
    그가 분개해서 방 안에 있는 골프채를 집어던지려고 할 때였다 (p.135)

    – 좋으시겠다, 어머니는. 이렇게 비싼 옷을 척척 사주는 딸이 있구. 난 우리 어머니 여우목도리도 한 장 못 사드렸는데. 밍크는 대물림하는 거래요. 돌아가실 때 제게 물려주세요.
    –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뭐 사달라고 한 것이에요! 왜 그러세요!
    작은딸 화내듯이 며늘애에게 퉁박을 줬을 때야 알앴재. (p. 244)

    올케는 도시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시의 사람이며, 엄마의 귀환에 그리 애가 달아있지도 않은 현실감각을 가진 이다. 죄의식에 들끓어 있는 형철은 올케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서고 있는 분노를 풀어버리려고도 한다. 그것은 올케가 ‘엄마의 가족’ 외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올케라는 외부인이 형상화는 작품 『엄마를 부탁해』가 귀환하고자 하는 가족은 철저히 혈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통과 비혈통이란 이분법이 형상화되면서, 성모 마리아란 인류의 어머니상은 ‘인류의’ 어머니상이 아닌 각자의 사적 가정 속의 어머니상으로 갇히게 된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엄마의 가족’을 구성하는 같은 혈통으로 묶이게 되었던가. 그리고 올케는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작품에선 엄마의 승인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당신의 누님이 살림 말아먹을 여펜네! 라며 아내를 처가로 보내버렸다. 열흘이나 지난 밤에 술에 취해 당신의 발걸음이 처갓집으로 향했다. (중략) 무슨 말 끝에 장모가 목소리를 높이며 그깟 놈의 집구석으론 들어가질 말고 짐 싸들고 아예 나와버리라, 하니 아내는 훌쩍이며 장모에게 대들었다. 중어도 그 집으로 들어가 죽을란다, 하였다. 거기가 내 집인디 내가 왜 나오냐, 하였다. (중략) 대나무숲을 지나서 아내의 손을 놓은 뒤론 앞서 걸었다. 이슬이 바지에 툭툭 떨어졌다. 그때도 뒤처진 아내는 당신의 등뒤에서 좀 천천히 가시요잉! 벅찬 숨소리를 내며 따라왔다.(pp. 183-184)

    엄마는 죽어도 그 집에 가서 죽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친정어머니의 계통을 잇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선언’은 가부장에 의해 승인받게 된다.

    엄마는 그길로 집에 들어와 여자를 부엌에서 밀어내고 밥을 지었다. 여자와 아버지가 마을의 다른 집을 얻어 살자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집으로 달려가 여자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아궁이에 걸린 솥을 떼어내 도랑물에 떠내려보내버렸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움꾼이 되기로 한 것 같았다. (p. 105)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밤이 되어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또 어느날붙턴가 아침에 밥을 풀 때 아버지 밥그릇에도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었다. (중략) 여름에 나갔다가 겨울에 들어온 아버지를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온 사람 대하듯 엄마가 아무 말 않고 그저 숭늉을 떠다 밥그릇 옆에 놓아 주는 것도. (pp. 107-108)

    위의 서술도 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에 의한 엄마의 승인이 있어야만, 엄마가 가족의 혈통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그려내고 있는 귀환해야 하는 가족의 상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그것은 혈통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고모라는 시어머니, 아버지라는 가부장 그리고 가부장에 의해 승인된 엄마까지 전통적인 가족상으로 확고히 존재하고 있다. 올케가 여기서 그 계통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진 않지만 올케 자신이 그 계통성 자체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올케는 앞의 서술에 등장한대로 시어머니의 실종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있다.

    3.3.  위기의 가족을 대하는 방법

    영화 <좋지 아니한 家>에서 가족의 모습은 『엄마를 부탁해』와 상당히 다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가족들이 모두 마루에 나와 밥을 먹을 때이다. 영화 속 가족들은 각기 자신에게 부과된 친숙하지도 않은 가족 내 역할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다. 또한 더 불편해하는 것은 서로 사랑해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다. 영화에선 낯선 타인들의 어색하고도 긴장된 식사시간이 연출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은 이제 더 이상 특수한 풍경만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나마 마루에 나와서 같이 밥이라도 먹고 있지만, 수많은 가족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서로가 얼마나 가족 내에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지 불평하고, 자기 자신만은 또한 자유롭게 욕망하는 근대적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김영하의 단편<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아빠’와 ‘주인공 나’는 그런 모습의 극단적 형태이다.
    『엄마를 부탁해』도 이러한 가족의 위기 속에 탄생한 서사이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의 위기라는 문제에 ‘현대 가족의 위기’로 지시하고, ‘현대’라는 말을 뺀 복원시켜야 할 가족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현 가족의 관계망은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안에 혈통주의와 가부장제가 온전히 들어있음에도,『엄마를 부탁해』는 발뺌한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기원에서부터 존재할 수 있었던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확고한 기반 아래 가족이란 틀 자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확고한 사랑할 수 있는 관계망을 두고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독자를 설득한다.
    사랑이라는 관계망은 사실상 근대부터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근대 이전의 가족의 형태에서 부모자식 간에는 일방의 공경이나 복종의 관계 그리고 형재․자매 간에는 장남을 중심축으로 하는 서열관계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족 관계망은 그대로 사회적 관계망으로 확장하여도 무리가 없는 상태가 바로 근대 이전이었다. 가정의 확장이 사회가 될 수 있었던 일률적인 세계관 속에 놓여있었기에 가족에 별 다른 위기가 없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 그런 일률적인 세계관은 붕괴하고, 독립된 개인은 자기 자신의 합리성과 욕망의 조합으로 제 인생을 자기규정 해야만 했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더 이상 아니며, 독립된 개인의 집합이 될 위험을 지니게 된다. 가족형태의 이런 빈틈 속에 ‘사랑’ 이라는 감정의 기제가 채워진다.
    근데 만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 이란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엄마를 부탁해』는 왜 가족이란 좋은 걸 두고 사랑할 수 없느냐라고 되묻는 것이다. 전통적 가족의 틀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그것 자체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해야할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엄마가 무한으로 주는 사랑에 열심히 대답하여, 엄마가 깨는 장독 뚜껑의 수를 줄여주자고 이야기 한다. 헌데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답변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다라고 말해보기도 하고, 가족이란 확고한 틀을 먼저 선정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가족이다라고 말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같은 경우에는 폭력과 권위에 의한 가족형태를 문제시하며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가족이 위기인 이유를 말하고 있고, 영화 <가족의 탄생> 같은 경우에는 사랑해서 가족이다라는 다소 돌출된 대안을 제시하여 현 상태 ‘위기의 가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가족이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관계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헌데,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었던 관계망이 더 이상 현 시점에서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기보다, 위기로 다가가게 하고 있다면, 가족이란 관계망을 송두리째 문제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욕망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을 이상적 전통 가족 관계의 틀에 맞추도록 뒤돌아보게 하는 일은 너무 쉬운 결론이다. 개인을 확고한 가족이란 틀에 짓뭉개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도 생각이 든다.

    4. 맺음말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당신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부탁하기보다 사실상, 강요한다. 큰 딸, 큰 아들 그리고 남편이란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인 엄마를 보여주면서 엄마에게 좀 잘해줘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희생을 대가로 숭고 대상이 되는 엄마의 서사는 현실의 엄마들에게도 ‘어떤 방향’ 을 제시한다.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서 성모로 불릴 수 있게끔 착한 엄마가 되라고 귓속말을 뿜기도 할 것이다.
    어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호주제 찬반토론 중에 나왔던 말이 생각이 난다. 호주제를 찬성하는 입장의 어느 부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늘 아래 핀 꽃이 왜 아름답지 않습니까?” 라고. 그늘 아래 핀 꽃을 구현하는 것이 꼭『엄마를 부탁해』인 것만 같다. 타자를 배제하는 혈통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그늘. 그 그늘 때문에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라는 명명이 붙여지기도 하는 엄마. 그 고통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피었을 때만 성모가 되는 엄마란 꽃을 과연 아름답다고만 해야 될지 고민이 든다.

  • 카쉬Karsh 사진전

    나도 취미로 사진을 좀 좋아해 라고 이야가한다.

    근데, 이것저것 찍다보니…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찍어서, 내가 얼마나 사진을 잘 찍었는지 자랑하기 위해서?
    셔터를 누른다는 행위 자체가 뭔가 보람차서?
    인화물을 기다리기까지의 그 기다림이 너무 즐거워서?

    그 어떤 것도 해답이 아닌 것만 같았다.

    또한, 나는 왜 찍는가? 찍어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까지 시달리니…
    사진이라는 게 꽤 어려운게 되어버렸다.

    단순, 그림같은 사진, 예쁜 사진만 원한다면…
    그런 것이야 얼마든지 대충 찍어두고 포토샵으로 처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왜 가급적이면 보정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잘 찍으려고 할까’
    왜 그런 욕망이 발생하는가…. 까지 가니 좀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진관련 서적도 빌려보고 그랬는데.. 그다지 깨우치는 것은 없다…
    근데… 날 조금 깨우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네이버 오늘의 포토” 였다.

    거기선 사진작가들이 하루마다 하나씩 사진을 정해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주는데… 그것을 하루하루 보다보니깐… 아, 사진이라는 게 이런거구나 하는 감이 좀 오는 것 같다.
    이론적인 뭐 스킬 이런 건 전혀 아니고…

    난 이제껏 마냥 좋아 라고 일관해왔다면
    사진이라는 것이

    기록, 시각적 자극이 주는 즐거움, 찍는 자와 찍히는 것(자)의 교감, 그리고 새로운 의미생산까지 할 수 있는 매체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림같이 쨍한 사진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다녀온 (이제야 사진전 이야기 ㅋㅋ)

    Karsh 사진전은 정말 강렬했다.

    인물사진이 얼마나 강한 힘을 주는 지, 알게 해 준 사진전이었다.
    사진 한 장을 통해서, 그 인물의 성격부터 직업까지 인물의 총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진들…
    그야말로 기가막혔다.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전시회에서 보는 것은 또한 차원이 다른 행위였다.
    바로 내 앞에서 으르렁 거리는 처칠을 맞닦드리다 보니, 귀엽기도 하고… 뭐 암튼 각 액자에 걸린 사진들이 뿜는 오오라가 장난이 아니니…. 말이다.

    인물사진의 힘! 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대권이 있어서 공짜로 다녀왔지만
    돈내고 가더라도 그리 아깝지 않은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을 잘 몰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Karsh의 사진이 전해주는 힘은 오롯이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