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조주은 씨는 논평에서 어머니를 위와 같이 언술하며, 현대사회 속의 어머니를 자동판매기에 비유하기도 하다. 우린 설탕프림커피라는 현모양처의 명령버튼을 누르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하게끔 행동하기를 강요하고, 거기서 블랙커피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땐 “어떻게 엄마가 이럴 수가 있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하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억압 기제는 단순, 가족관계 상에서 ‘어머니 외의 사람들’이 ‘어머니’를 식민화한다는 단편적인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동판매기 버튼이 요구하는 어머니 상이 조금 더 엄격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게 되는 비난의 정도가 크기 때문이지, 아버지, 자식 등등의 가족 구성원 모두 그에 합당한(?) 버튼을 부여받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를 덧씌워놓고, 서로를 감시하고 타박하는 그물망이 바로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런 가족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 속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도 하고, 아내가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가족관계에서 “난 이만 빠질래.”라고 외쳐보며 가족의 해체를 말하기도 하고, 또한 <가족의 탄생> 같은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족형태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행해진 현대사회의 가족에서, ‘현대사회’에 방점을 찍고 현대사회 이전의 가족 형태로의 향수를 일으키는 형태도 있다. 그것이 지금부터 살펴 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경우이다.
작품 해설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오랜 흐름을 한곳으로 모아낸 빼어난 소설적 결정(結晶)’ 이라는 민망한 찬사를 들을 만큼, 이 작품은 신경숙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너무도 익숙한 흐름이다. 그리하여 『엄마를 부탁해』의 텍스트에 직접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경숙의 이제까지 창작경향과 평가를 잠시 살핀 후에 들어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더욱 이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1. 90년대 문학과 작가 신경숙
1990년대 한국문학 자신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간에 당시에 나타났던 문학적 경향 전환은 뚜렷했다. 그 중 신경숙이 주목받기 시작한 『풍금이 있던 자리』의 위치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해당 작품은 진보이념의 급격한 퇴조가 불러일으킨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사적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공세적 자기노출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이 주류 문단에게 승인되었다는 현상을 넘어서 90년대 소설의 경향성 변모를 상징적으로 징표하는 것이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데, 신경숙 특유의 서정적인 심리 묘사와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의 신경숙의 작품들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딸기밭』 으로 이어지는- 역시 그리 큰 변화없이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신경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경숙의 특징들이 90년대 한국문학의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경숙은 공지영, 은희경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대중에게 승인받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비롯한 주요 문학상을 휩쓸어 왔던 것이다.
외부의 시선에 묻혀 있었던 개인의 발견과 개인 정체성의 구현과정. 그 개인이 이제껏 익숙했던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 특유의 더듬거리는 문체 등의 특질은 신경숙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갈등의 지표를 형성해 오기도 했다. 이른바 ‘여성문학’, ‘사소설적 경향’ 그리고 ‘감성적 문학’에 관한 것이다. 이 중 여성문학에 관한 논의는 넓은 폭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편이다. 한편에선 여성의 목소리를 주체화하고, 독자에게 ‘감정의 위안’을 안겨준다는 데 의의를 두는 반면, 한편에선 신경숙이 이상화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의 전근대적 형태에 주목한다.
이런 논란과는 별개인 것처럼 신경숙은 주류 문단에게 두루 찬사를 받아왔는데, 이것이 90년대에서 21세기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문학의 현 위치를 지시해 준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전까진 방향이 비교적 뚜렷했던 이른바 ‘창비’와 ‘문지’는 신경숙이란 대형 작가에 대해서는 토스해주기 바빠서 서로를 희석시켰고, 신경숙은 조선일보에 『리진』을 연재하고,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단으로 상징권력을 획득하는 한 편, 『엄마를 부탁해』를 창비에 연재하고 대히트를 쳤다.
2. 식민지 엄마의 귀착지
2.1. 엄마와의 대면
목적어와 서술어는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제목 ‘엄마를 부탁해’. 부탁해라는 호소형 서술어가 때리는 파장이 꽤 크다. 그리고 책을 열어보면, 바로 등장하는 ‘너’라는 인칭. 실제로『엄마를 부탁해』가 구사하고 있는 형식은 대단히 이채로운데, 그 이채로움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각 장마다 서술인칭이 달라지는데, 1장은 큰딸의 2인칭, 2장은 장남 형철의 3인칭, 3장은 남편의 2인칭 그리고 유언장 혹은 넋두리처럼 쓴 4장만이 1인칭으로 되어있다. 먼저 2인칭으로 서술된 1장과 3장은 ‘엄마의 자식’, ‘아내의 남편’이라는 주체를 설정하여 독자가 자식이든, 남편이든 강력하게 이입할 수 있는 기제가 2인칭으로 제공되고 있다. 더욱이 1장과 마주하는 독자는 자식이란 이입코드 외에 작가 신경숙이란 실제인물의 코드와도 대면하여 더욱 강력하게 엄마와 마주하는 존재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다소 이질적으로 튀어오르는 것이 3장 형철-그 라는 3인칭인데, 작가는 이러한 이질성을 서술의 일관성으로 덮어버린다.
각 장에서, 각 장의 주체들은 실종된 어머니의 상태에 멈추어 서서, 자신의 서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너-큰딸, 그-형철 그리고 당신-남편의 서사는 그들 주체의 이야기이기보다 그들의 기억 속에 담긴 엄마의 형상화 작업들이다. 엄마의 형상화 작업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태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엄마가 어떤 사람임을 만들어간다. 에피소드들을 더듬어서 각 장을 이끄는 주체가 자신의 엄마를 형상화하면 할수록, 주체는 더욱 선명해지는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장의 결미로 갈수록 주체는 마주한 엄마와 자신을 비교, 대조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강화시켜나간다. 이러한 일관성은 다소 다채롭게 변하는 인칭변화를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 결국,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각 주체의 개별 특질들은 소멸하고, 엄마와 ‘엄마를 대하던 가족 구성원’이란 관계로 재구성된다. 2장의 형철-그 라는 3인칭 또한 그것이 유별나게(?) 존재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질이 포기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떤 주체로 나타나건 간에 감성적인 고백조의 문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존재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2장의 3인칭의 존재이유는 일종의 숨고르기 정도라 할 수 있다. 너라는 지칭이 고조시킬 수 있는 추궁의 포즈를 조금 완화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론, 1장에서 형성한 ‘작가 신경숙’-너-독자라는 강력한 이입관계의 틀에서, ‘작가 신경숙’이 빠진 상태에서 2인칭을 유지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겉으로 보기엔 다채롭지만, 실상은 다층적인 ‘엄마와 대응하는 이들’과 ‘각기 다른 모습의 엄마’ 이기를 포기하고 일대일 대면의 포즈를 보여주면서 작자는 같은 이야기를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면 작자는 결국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각 장의 주체들의 통해 어떤 엄마의 모습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에 주목해볼 수밖에 없다.
개별 주체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엄마이지만, 그 작업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앞서 말했듯이, 개별 주체는 ‘개별’ ‘주체’란 말이 무색할만큼, 특이성 없이 일관된 형태로 엄마 앞에 끌려나와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엄마도 오로지 단일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그것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습으로.
너의 엄마는 몇해 전부터 내 생일은 따로 챙기지 마라, 했다. (중략) 식구들이 모이게 되면 며칠전에 새 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끊어오고, 치약과 칫솔들을 준비했다. 돌아갈 때 한병씩 나눠주려고 참기름을 짜고 참깨들깨를 따로 볶아 찧었다. 가족들을 기다릴 즈음의 너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나 시장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 단연 활기를 띠었고 은근히 자부심이 배어나는 몸짓과 말투를 보였다.(pp. 11-12)
위 인용이 작품 속 엄마에 대한 첫 서술이다. 엄마의 일상생활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여기서 등장하려는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고기를 끊어오고, 참기름을 짜서 준비한다는 다소 상투적인 모양새에서부터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의 가족 속에 그런 엄마가 있든 없든, TV드라마만 틀어도 곧잘 뛰쳐나오던 엄마. ‘그런 엄마’는 자식을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가히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헌신적인 무한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명줄을 갉아먹는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가족사랑에 여념이 없는 엄마의 모습은 헌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후로 끊임없이 형상화되는 엄마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 보면, 작품이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진 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하기 보다는, ‘그런 엄마’ 와 맞대면 하는 ‘당신’ 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데, 더 심혈을 쏟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작품 속 엄마의 모습이란 너무도 상투적이다 못해 신파적이며, 그런 잃어버린 엄마에 반응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형상화되는 엄마에 대한 죄의식에 취해 버렸다.
아버지-당신을 주체로 하는 3장은 ‘아버지-당신’과 엄마의 대조관계를 통해 슬픔의 기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 1-2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을 형성하고 있다. 동어반복적인 죄의식과, 죄의식에 처해진 아버지-당신의 극적인 반응을 통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재하고 있는 아버지-당신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지난 기억들을 반추하고, 부재하는 엄마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독자. 독자는 결국 어떤 자신과 마주하는가. 작가가 ‘부탁했던 엄마’를, 부재하는 엄마의 귀환을 격정적으로 촉구하게 된다.
2.2. 엄마의 귀착지
엄마는 귀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를 귀환시키기보다, 엄마의 전환을 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그렇게 귀환을 고대하게 했던 그런 엄마의 다른 면모가 4장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엄마이다.
곰소는 당신 때문에 내게 잊지 못할 곳이 되었재요. 나는 늘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이 생겨야 당신을 찾았재. 그리고 내가 그만그만 평화로워졌을 땐 당신을 잊었소. 곰소라 찾아간 나를 보고 당신이 내게 한 말도 무슨 일이요?였재.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당신을 찾아간 건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오로지 당신을 찾기 위해 간 길이었네. (pp. 233-234)
은규란 남자는 엄마의 말을 빌어서, ‘내 인생의 동무’가 되어주었던 자였지만, 은규쪽에서는 사뭇 다른 듯했다. 은규는 엄마에 맺힌 감정의 내적 혼란을 겪어, 곰소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물론 은규 혼자만의 짝사랑은 아닌 듯하다.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모인정하게 굴었네. 생각해보면 참 나쁜 일이었네. 미안하구 미안허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랬고, 얼마 후엔 그래선 안될 것 같아 그랬고, 나중엔 내가 늙어 있었소이.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있어 보이고 싶었네.(p.234)
엄마 또한 은규를 ‘죄’이고 ‘행복’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은규를 욕망하고 있었다. 단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삼켜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작품의 막바지로 치닫는 부분에서 나타난 이 갑작스러운 전환이 책 뒤 커버의 말처럼 ‘마지막 한 방의 충격’으로 충분히 드러났던가. 옛날 어머니를 복원하는데 머물지 않고, 실재했던 자신만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을 드러냈던가. 거기에 대해서 필자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엄마도 욕망이 존재했다는 에피소드가 수면위로 떠올랐을 뿐, 그것이 작품 내 가족 구성원이 그리고 있던 엄마와 다른 ‘또다른 여인’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껏 엄마라는 존재를 전혀 다층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에서부터 연유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너-큰딸이던, 그-형철이던, 당신-아버지이던 간에 구성되는 엄마의 상은 시종일관 ‘엄마’라는 명명에만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극한의 희생을 보여준 엄마를 구현하며, 마주하는 대상의 죄의식을 건드리기 바빴다. 작가가 최대의 호소력을 지니게끔 만든, 보편적이면서, 이상적인 식민지-엄마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비현실적 로맨스가 현실성을 확보하긴 힘들었다. 오히려 마지막 장은 엄마가 지닌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기보다, 그런 욕망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엄마로서의 자신을 수긍하였던 참된 존재였다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엄마를 최종적으로 성모로 수렴시키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원이자, 미래는 곧 ‘성모 마리아’ 로 신성화된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 극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인이 되는 존재. 이런 ‘성모 마리아 되기’ 는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다 살려내는 기술을 가졌다. 원래 이집의 짐승은 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개를 얻어다 기르면 새끼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낙갔다. (중략) 그리 데려온 강아지는 마루 및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 배 여섯 배 낳았다. (중략) 가지를 모종하면여름이 지나 가을까지도 보라색 가지가 지천이었다. 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pp. 160-161)
밭에서 내려와 고모에게 이러저러한 사람하고 온종일 밭을 같이 맸다고 하니 고모의 얼굴이 굳어지며 얼굴의 생김을 묻더니 그이는 오래전 그 밭주인으로 그 밭에서 김을 매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이라 하더라, 했다. (중략) 무섭긴, 내 혼자 그 밭을 다 매려면 이삼일을 걸렸을 틴디 함께 매줘서 고맙기만 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p.65)
위 인용은 엄마가 생명과 죽음에 있어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는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이 외에도 작품의 엄마가 지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자욱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타인의 아이(은규의 아이)에게까지 젓을 물려주고, 자신의 아이를 사산했을 때 별도의 의식을 치루던 모습. 뇌졸중이란 극한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 등의 것들 등.
엄마란 존재를 이렇게 신성화시키는 것은, 작품 속 엄마를 특수하게 숭상할 만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이 세상의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마리아상을 덮어 씌움으로써 작품 속 엄마만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다. 극한 희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엄마들의 기원. 작가는 그런 이야기가 해 보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로 엄마를 치환하면서부터 혹은 치환하기 위해서 엄마에게 극한 희생은 어쩌면 당연한 전제가 된다. 성인은 고통을 품고 탄생하는 존재이고, 그 고통을 수긍하는 자세 때문에 숭상 받는 존재이다. 결국 가족 구성원들이 죄책감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껴야 하므로 어머니는 일탈할 수가 없다. 일탈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균’이라는 인물처럼 사랑해주고, 잘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면서, 모진 고통을 감수하는 동안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균’처럼 착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3. 가족의 귀착지
3.1. 이분법적 세계관
신경숙의 여타 작품에서도 두루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엄마를 부탁해』속에도 그녀 특유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촌과 도시의 대비, 그리고 문맹과 문자세계라는 대비는 그 형상 자체가 미묘한 효과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것 사이에 놓인 엄마라는 존재로 인해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하고, 작품이 방향하고 있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부모세대로 대표되는 엄마는 농촌이자, 문맹이다. 작품 속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농촌과 문맹의 세계에 놓여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자식들이 문자의 세계에 그리고 도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신의 큰 딸을 어떻게든 문자세계에 들여놓게 하려고 가락지까지 팔았던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둘씩 서울에 집을 살 때, 이로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모습 등이 그러한 모습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자식세대들이 다른 세계에서 권력 주체자가 되는 것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큰아들 형철은 검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나마 큰딸이 문자세계의 발화자가 되면서 엄마의 자랑이 되긴 하지만 도시란 공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 큰 딸은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불안한 상태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글을 쓴답시고 연락두절로 집에만 박혀 있는 비정상적인 생활상이 언제나 엄마에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농촌과 문맹이라는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을 문자와 도시의 세계로 보내는 것은, 그녀의 자식들이 그 곳에 가서 자신의 기원을 발화하기를 원하는 것인 듯하다. 엄마 자신의 매개물이기도 한 감나무를 막내딸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그러한 엄마의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렇게 서울의 땅에 심겨진 감나무는 좁은 흙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쫙 뻗은 채 엉겨붙어’ 서울의 흙에서 생존할 것이다. 문자와 도시의 세계에서 엄마라는 기원은 그렇게 끊임없이 현대산업사회를 ‘좋았던 시절’로 이끌려고 한다. 실종된 엄마의 복원을 바라는 서사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식세대가 엄마와 함께했던 시골 가족공동체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는 것과 대응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못 말릴 회귀가 퇴행으로 보이지 않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시골 공동체의 행동양식을 대단히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결국 이분법적 세계관의 노림수는 두 가지 절차를 밟는다. 문자와 도시 세계로의 진입 그리고 진입 후 자신들의 기원을 소망하라는 것. 어찌보면 전도사의 역할이라고까지 극단화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을 소망하게 하는 그 가족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3.2.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
『엄마를 부탁해』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소적으로 그려지는 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족 내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가족의 맏며느리인 ‘올케’이다.
이번엔 올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수를 적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p.14)
– 진이가 와서 뭘 해요? 내가 오지 말라구 했어요. 우리도 찾아 볼 만큼 다 찾아봤잖아요. 경찰도 못 찾는 걸 우리가 어떡해요. 서울의 이 많은 집들마다 초인종 눌러가며 혹시 여기 우리 어머니 안 계시냐고 물어요? 어른들도 속수무책이라 이러구 있는 판인데 진이가 뭘 하느냐구. 학교 다니는 아이는 학교 다녀야지, 그럼 우리 어머니 안 계신다고 우리 모두 자기 일 팽개치고 말아요?
– 안 계신 게 아니라 잃어버렸잖아.
– 글쎄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구요! 당신도 회사 다니잖아요!
– 뭐?
그가 분개해서 방 안에 있는 골프채를 집어던지려고 할 때였다 (p.135)
– 좋으시겠다, 어머니는. 이렇게 비싼 옷을 척척 사주는 딸이 있구. 난 우리 어머니 여우목도리도 한 장 못 사드렸는데. 밍크는 대물림하는 거래요. 돌아가실 때 제게 물려주세요.
–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뭐 사달라고 한 것이에요! 왜 그러세요!
작은딸 화내듯이 며늘애에게 퉁박을 줬을 때야 알앴재. (p. 244)
올케는 도시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시의 사람이며, 엄마의 귀환에 그리 애가 달아있지도 않은 현실감각을 가진 이다. 죄의식에 들끓어 있는 형철은 올케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서고 있는 분노를 풀어버리려고도 한다. 그것은 올케가 ‘엄마의 가족’ 외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올케라는 외부인이 형상화는 작품 『엄마를 부탁해』가 귀환하고자 하는 가족은 철저히 혈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통과 비혈통이란 이분법이 형상화되면서, 성모 마리아란 인류의 어머니상은 ‘인류의’ 어머니상이 아닌 각자의 사적 가정 속의 어머니상으로 갇히게 된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엄마의 가족’을 구성하는 같은 혈통으로 묶이게 되었던가. 그리고 올케는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작품에선 엄마의 승인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당신의 누님이 살림 말아먹을 여펜네! 라며 아내를 처가로 보내버렸다. 열흘이나 지난 밤에 술에 취해 당신의 발걸음이 처갓집으로 향했다. (중략) 무슨 말 끝에 장모가 목소리를 높이며 그깟 놈의 집구석으론 들어가질 말고 짐 싸들고 아예 나와버리라, 하니 아내는 훌쩍이며 장모에게 대들었다. 중어도 그 집으로 들어가 죽을란다, 하였다. 거기가 내 집인디 내가 왜 나오냐, 하였다. (중략) 대나무숲을 지나서 아내의 손을 놓은 뒤론 앞서 걸었다. 이슬이 바지에 툭툭 떨어졌다. 그때도 뒤처진 아내는 당신의 등뒤에서 좀 천천히 가시요잉! 벅찬 숨소리를 내며 따라왔다.(pp. 183-184)
엄마는 죽어도 그 집에 가서 죽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친정어머니의 계통을 잇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선언’은 가부장에 의해 승인받게 된다.
엄마는 그길로 집에 들어와 여자를 부엌에서 밀어내고 밥을 지었다. 여자와 아버지가 마을의 다른 집을 얻어 살자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집으로 달려가 여자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아궁이에 걸린 솥을 떼어내 도랑물에 떠내려보내버렸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움꾼이 되기로 한 것 같았다. (p. 105)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밤이 되어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또 어느날붙턴가 아침에 밥을 풀 때 아버지 밥그릇에도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었다. (중략) 여름에 나갔다가 겨울에 들어온 아버지를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온 사람 대하듯 엄마가 아무 말 않고 그저 숭늉을 떠다 밥그릇 옆에 놓아 주는 것도. (pp. 107-108)
위의 서술도 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에 의한 엄마의 승인이 있어야만, 엄마가 가족의 혈통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그려내고 있는 귀환해야 하는 가족의 상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그것은 혈통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고모라는 시어머니, 아버지라는 가부장 그리고 가부장에 의해 승인된 엄마까지 전통적인 가족상으로 확고히 존재하고 있다. 올케가 여기서 그 계통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진 않지만 올케 자신이 그 계통성 자체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올케는 앞의 서술에 등장한대로 시어머니의 실종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있다.
3.3. 위기의 가족을 대하는 방법
영화 <좋지 아니한 家>에서 가족의 모습은 『엄마를 부탁해』와 상당히 다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가족들이 모두 마루에 나와 밥을 먹을 때이다. 영화 속 가족들은 각기 자신에게 부과된 친숙하지도 않은 가족 내 역할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다. 또한 더 불편해하는 것은 서로 사랑해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다. 영화에선 낯선 타인들의 어색하고도 긴장된 식사시간이 연출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은 이제 더 이상 특수한 풍경만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나마 마루에 나와서 같이 밥이라도 먹고 있지만, 수많은 가족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서로가 얼마나 가족 내에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지 불평하고, 자기 자신만은 또한 자유롭게 욕망하는 근대적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김영하의 단편<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아빠’와 ‘주인공 나’는 그런 모습의 극단적 형태이다.
『엄마를 부탁해』도 이러한 가족의 위기 속에 탄생한 서사이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는 가족의 위기라는 문제에 ‘현대 가족의 위기’로 지시하고, ‘현대’라는 말을 뺀 복원시켜야 할 가족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현 가족의 관계망은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안에 혈통주의와 가부장제가 온전히 들어있음에도,『엄마를 부탁해』는 발뺌한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기원에서부터 존재할 수 있었던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확고한 기반 아래 가족이란 틀 자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확고한 사랑할 수 있는 관계망을 두고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독자를 설득한다.
사랑이라는 관계망은 사실상 근대부터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근대 이전의 가족의 형태에서 부모자식 간에는 일방의 공경이나 복종의 관계 그리고 형재․자매 간에는 장남을 중심축으로 하는 서열관계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족 관계망은 그대로 사회적 관계망으로 확장하여도 무리가 없는 상태가 바로 근대 이전이었다. 가정의 확장이 사회가 될 수 있었던 일률적인 세계관 속에 놓여있었기에 가족에 별 다른 위기가 없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 그런 일률적인 세계관은 붕괴하고, 독립된 개인은 자기 자신의 합리성과 욕망의 조합으로 제 인생을 자기규정 해야만 했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더 이상 아니며, 독립된 개인의 집합이 될 위험을 지니게 된다. 가족형태의 이런 빈틈 속에 ‘사랑’ 이라는 감정의 기제가 채워진다.
근데 만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 이란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엄마를 부탁해』는 왜 가족이란 좋은 걸 두고 사랑할 수 없느냐라고 되묻는 것이다. 전통적 가족의 틀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그것 자체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해야할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엄마가 무한으로 주는 사랑에 열심히 대답하여, 엄마가 깨는 장독 뚜껑의 수를 줄여주자고 이야기 한다. 헌데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답변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다라고 말해보기도 하고, 가족이란 확고한 틀을 먼저 선정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가족이다라고 말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같은 경우에는 폭력과 권위에 의한 가족형태를 문제시하며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가족이 위기인 이유를 말하고 있고, 영화 <가족의 탄생> 같은 경우에는 사랑해서 가족이다라는 다소 돌출된 대안을 제시하여 현 상태 ‘위기의 가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가족이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관계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헌데,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었던 관계망이 더 이상 현 시점에서 가족을 가족이게끔 만들기보다, 위기로 다가가게 하고 있다면, 가족이란 관계망을 송두리째 문제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욕망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을 이상적 전통 가족 관계의 틀에 맞추도록 뒤돌아보게 하는 일은 너무 쉬운 결론이다. 개인을 확고한 가족이란 틀에 짓뭉개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도 생각이 든다.
4. 맺음말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당신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부탁하기보다 사실상, 강요한다. 큰 딸, 큰 아들 그리고 남편이란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헌신적인 엄마를 보여주면서 엄마에게 좀 잘해줘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희생을 대가로 숭고 대상이 되는 엄마의 서사는 현실의 엄마들에게도 ‘어떤 방향’ 을 제시한다.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서 성모로 불릴 수 있게끔 착한 엄마가 되라고 귓속말을 뿜기도 할 것이다.
어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호주제 찬반토론 중에 나왔던 말이 생각이 난다. 호주제를 찬성하는 입장의 어느 부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늘 아래 핀 꽃이 왜 아름답지 않습니까?” 라고. 그늘 아래 핀 꽃을 구현하는 것이 꼭『엄마를 부탁해』인 것만 같다. 타자를 배제하는 혈통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그늘. 그 그늘 때문에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라는 명명이 붙여지기도 하는 엄마. 그 고통을 수긍하고, 인내하고 피었을 때만 성모가 되는 엄마란 꽃을 과연 아름답다고만 해야 될지 고민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