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고래-극단 백수광부] 북한 사람들이 던져주는 특별하지 않은 질문

    ‘북한소재!’ 하면 떠오르는 화두로 ‘그들도 인간이며, 화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
    이제는 너도나도 여기저기서 같은 이야기를 방법만 달리 해서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상투적 소재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습니다 라는 다소 도덕적인 교훈이 계속해서 문제화되고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때문일거에요.

    북한찬양을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동해바다에서 해양선을 넘어 온 북한선박이 격추됐다는 뉴스가 나면 남한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고 여기기 보단,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제거’했다고 느끼며 ‘우리’의 힘의 우위에 기뻐하는 곳이 바로 남한사회잖아요.
    북한사람들, 그들이 대화할 수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다 라는 생각이 우선하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었다고만 할 수 없는 현실적 딜레마가 존재하지만

    연예인 한 명이 자살하면 전국민적인 애도가 일어나는 현상과
    북한 사람들 수십명이 남한사람에 의해 살해됐을 때, 그것이 일말의 안타까움보다는 승리의 기쁨에 먼저 휩쓸려 버리는 현상의 대조는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암튼, 암튼.
    이런 문제적 현실 때문에 영화를 비롯해 문학, 연극 등등의 예술작품들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북한 사람’이란 지극히 당위적이면서 도덕적인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봅니다.

    고래도 같은 화두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한 질문을 던져주죠.
    “남한이 북한보다 나은가?” 라는 것이죠.
    이 질문은 동시에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보다 덜 고통스러운가?” 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고
    “자유인가 평등인가” 라는 위선적인 질문 말고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가 나은가, 독재자와 특권층을 열외로 둔 평등이 나은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될 수 있겠네요.

    인생 목표를 “성공” 혹은 “축적” 보다 “행복” 이라고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질문들에 뜨끔뜨끔 하면서, 고래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우리에게 와도 그리 행복하지 못할 텐데 하면서 그들의 소박한 희망에 뜨끔뜨끔 해지고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그들이 꼭 내 신세 같구나 하는 동질감…. 뭐 제 개인적인 경우일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문제는
    위의 질문들을 아싸리 깊게 파고들어서 관객의 심장을 팡! 하고 때려주든지
    아니면 같은 질문과 메시지를 하면서도 신ㅅㅓㄶ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다른 형식 혹은 디테일을 축적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여타 작품에서 이미 마주쳤던 상투적인 질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작품 고래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첫 시작과 풍기는 분위기에서 결말을 예상할 수 있고
    그들이 내뱉는 대사들에 디테일이 살아있지도 못하고, 그렇게 깊게 파고든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인물들은 관객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주긴 했지만
    관객들은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이미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추측컨대,
    “아 이 질문.
    이거 저번에 풀으려고 했었는데, 잘 모르겠던데.“
    하고 말아버릴 수 있어요.

    이미 마주쳤던 질문이고
    작품 고래가 그리 적절한 상황에서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작품 고래를 좀 아쉽게 봤습니다.
    상투성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함을 보여주질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추천과 비추천 사이에 선택을 한다면
    저는 추천에 한표를 주겠습니다.

    그 질문들을 끌고 나가면서, 주체의 자살이라는 너무 쉬운 결말 대신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생은 계속된다 라는
    삶의 리얼리티가 살아있었고, 그것이 주는 울림이 꽤 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배우 연기나, 무대 미술이 맘에 들기도 했구요.

    여튼, 그렇게 봤습니다.
    2010년 들어 처음 본 연극작품이었네요.

  • [테레즈 라캥-극단 동] 늪에 가라앉는 고통을 전시하다

    *
    예술가가 늪에 빠지려는 사람을 구출해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작품을 통해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아름다운 장면과 화해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예술가는 늪에 빠지려는 사람을 더욱 깊숙이 밀어버리고, 허우적대다가 죽음으로 기어들어가는 약자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도 있다. 출처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비평가는 짧은 일설에서 에밀 졸라는 후자와 같은 경우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니면, 에밀 졸라는 늪에 빠지려는 사람에게 다가가 같이 늪에 빠져버리는 작가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같다.

    *
    극은 시작하자마자, 라캥 부인의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떤 방문이나, 대화를 위해 준비하는 상황, 관객을 위해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다. 라캥 부인과 카미유의 힘겨운 몸짓은 이 조명불이 밝혀지기 이전부터, 어쩌면 카미유가 태어난 그 날부터 시작되었던 것만 같았다. 견디기 힘든 일상 그래도 살아야 하는 지긋지긋함으로 관객을 밀어버리는 제 1막 1장의 펼쳐짐이었다.
    극은 이후로도 영화의 몽타주 기법 같은 형식적 특이성을 발휘하고 있다. 각 장은 약 15분을 넘기지 못한다. 약 10분 주기로 암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장소가 바뀌지 않아도, 이 리드미컬한 암전은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 끊임없는 암전은 의도적으로 극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배우 네명. 라캥 부인, 테레즈, 카미유 그리고 로랑에 이입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그들이 느끼는 슬픔, 욕망에 동감을 할 수가 없다. 이제 관객들은 그들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인간 실험실이 된 무대에서 욕정을 나누고, 욕정에 의해 살인을 하고,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간이란 동물을 관객이 관찰한다.
    세 번째, 네 번째 암전까지는 이 암전을 받아들여야하나 당황스러웠지만, 이 후 오히려 암전의 시간이 극을 곰씹는 시간이 되었다. 극의 등장인물들이 펼쳐내는 욕망의 벌려짐은  바라보고 있기에 불편하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어느 공간에선 저런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자연스러운 상기는 진실되기에 마주치기 더 힘들지 모른다. 암전의 시간들은 방금 본 풍경을 정리하고, 곰씹는 준비시간이다. 그리고 암전 이 후 어김없이 찾아 올 더 잔혹한 풍경을 위한 준비시간도 된다.

    *
    각 풍경에서 배우들은 매우 딱딱한 대사를 한다. 특히 테레즈 라캥은 서로를 바라보며 하지 않고, 거의 허공만을 응시하면서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과 죽임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서 그녀는 어떤 동정심도, 어떤 이입도 거절하는 듯한 연기를 펼쳐낸다. 나머지 배역들도 테레즈 라캥보단 덜하지만 마찬가지 효과를 자아낸다. 이런 연기톤은 각 배역을 쉽게 적으로도 만들지 못하고, 내 편으로도 만들지도 못한다. 각 인물들이 관객의 파토스 내에서 설 자리는 없다. 동시에 소화를 거절하는 이 ‘이물질들’ 때문에 관객들도 편안히 앉을 자리가 없다. 서서히 늪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차라리 끝나기를, 죽음을, 극의 종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극의 종결은 새로운 극의 시작이 될 것이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라캥 부인, 테레즈, 카미유 그리고 로랑은 이제 극을 보았던 인물, 단 한명의 주인공, 나 자신으로 응축된다. 늪에 빠져 죽었던 한 인간이, 인생이란 광활한 늪 속에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이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테레즈 라캥>의 연극을 보면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원작은 읽지 못하고, 최근에 본 영화 <박쥐>만을 접하고 보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연극 <테레즈 라캥>이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지, 아니면 얼마나 <박쥐>의 영향을 받았던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연극 <테레즈 라캥>이 좀 미흡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결말 부분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카미유의 환영을 보는 로랑과 테레즈 그리고 자살에 이르게 되는 로랑과 테레즈가 거의 약 2,3 장 정도로 축약해서 처리돼 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은 어찌보면 매우 갑작스러운 반전일진데, 이미 내용을 다 아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듯 예정된 수순처럼 처리해 버렸다. 시간의 제약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카미유를 죽이기까지의 시간을 줄이고, 후반부에 더 핵심적인 임팩트를 주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 [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난 여름, 기억하시나요?

    김선우씨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제 ‘인생의 한 구절’이랍시고 외우고 다니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이라는 구절이 바로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이란 시에서 왔죠.

    김선우 시인의 시집은 몇 권 읽었지만, 그녀가 쓴 산문, 소설 등은 읽지를 못했어요.
    <캔들 플라워>가 제가 읽은 그녀의 첫 산문인 것 같네요.
    기억이 맞다면요.

    <캔들 플라워>는 문화웹진 나비라는 곳에 연재된 소설이구요.
    바로 며칠전에 마지막회가 나왔습니다.
    저는 새로 옮긴 곳에 업무가 그리 많지않아
    시간 때울 겸(ㅈㅅ)
    봤어요.

    소설의 1,2 회를 보고 조금 뜨아함과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소설 제목 ‘캔들 플라워’가 좀 스위트한 감이 있었는데
    열자마자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큐트하고,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나열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빨간머리 아이는 캐나다의 레인보우라는 마을에 살고
    그 아이의 보호자(?)는 레즈비언 커플이고
    계속해서 파티를 외쳐대는 그런 상황에
    주인공 아이는 무슨 초능력 비스무레 한 것까지 지니고 있었거든요.
    (초능력까지는 아니죠. 언어습득능력이 빠르고 동물과도 어느 정도 교감할 수 있는?!)

    아니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시인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더랬죠.

    근데…
    그 스위트하기만 한  가상의 상황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갑자기 르포 소설이 된 듯
    지난 6월 촛불 정국의 이야기가 툭! 튀어 나옵니다.
    에이, 에피소드 이야기 하나로 나온 거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 그때야 알았죠.
    아 제목 ‘캔들 플라워’는 ‘촛불 꽃’ 이구나!
    라구요. ㅋ
    결코 영어사전을 뒤지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ㅋㅋ

    암튼, 소설은 지난 여름에 관한 이야기에요.
    지난 여름을 아주 이상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에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보면, 체제 내의 규칙들에 너무 익숙해져 마치 당연한 듯, 그랬으니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외국인의 눈에 보기에는 왜 그런 라이프 스타일과 규칙들이 통용되는 거지? 라고 물을을 묻는 경우.

    그런 식으로
    레인보우 세상의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이
    촛불정국에 참여하고, 이것저것 바라보고, 느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난 여름에 촛불정국에 참여했던, 참여하지 않았던
    그 정국에 한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보는 내내 오버랩되는 내내 지난 여름을 돌아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중앙 보도만 믿어왔던 사람들은 또한 그 현장에 있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될 거에요.
    지난 여름의 이야기들이, 현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거든요.

    이 작품은
    지난 6월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거리에 있진 못했지만 함께 하고자 마음 먹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사와 같은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면
    주인공은 통! 하고 빠져버리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조금 말도 안되기 돌아가는 부분도 적지 않지요.
    조금 만화적이고, 유치한 상황도 있는 편이구요.

    그래도 저는 이 헌사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지난 6월이 겨우 작년밖에 안되었었나
    라고 까마득해지고, 무덤덤해졌다가

    이 헌사를 보고 선
    다시 되돌아보고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주길 기다려왔었구나
    했거든요.

    어쩌면 작가가 약간은 만화적인 상황처럼 글을 쓴 것은
    지난 6월 정국을 이끌었던 세대개 초중고등학생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주인공들인 그들에게 바치는 어른의 고개숙인 헌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여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대다련
    시인 김선우의 이 헌사를 한번 받아보시면 어떨까요?

    PS: <캔들 플라워>는 다음의 ‘문학속세상’이나 문화웹진 나비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나비 사이트는 “http://nabeeya.yes24.com/”

  • [정태춘,박은옥-92년 장마, 종로에서] 쓰디 쓴 물에 베이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에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맛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섰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
    ‘감동’을 주면 된다 정도로
    어느 정도 마침표를 찍어주면 좋겠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노래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예전부터 알던 앨범이었지만
    특정한 계기 때문에
    요즘, 유심히 듣기 시작한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귀에서 뗄 수가 없다

    보통의 기대와 달리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듣고 있으면
    위로해주지도 않고
    흥이 나지도 않고
    노랫말을 따라하지도 못하고

    온갖 인생사에서 겪을 수 있을
    온갖 쌉싸름한 기억들이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다
    내게 버겨울 정도로 말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을 때면
    내 20대가 통째로 굴러들어오는 것만 같아
    부끄러움,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 이 모든 것이 엉켜버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내가 만든 기억들
    내가 만든 과거들
    그것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면서
    쓴 물이 짙게도 나온다.

    “사람들”이란 곡을 들을 때면
    변화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변하고 있구나
    하는 인생의 쓰디 쓴 교훈이
    쓰라리게 지나가버린다

    인생이란게
    열심히 가꾸고, 가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다 부질없나 보다 싶어지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지고
    아직 더 살아봐야 알겠다 싶어진다

    산체험과 세월에서 쏟아내려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은
    그 어떤 앨범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앨범이다
    적어도 내겐…

    PS 1: 고음을 내고, 기교가 뛰어난 게 노래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신선한 충격을 위해서라도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한번쯤 들어봤으면 좋겠다.

    PS 2 : 정태춘 박은옥은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마지막 콘서트로 한다고 한다.

  • [멋진하루-이윤기] 한량과 함께 서울투어

    병운은 뺀질남입니다.

    그는 뺀질거리다 못해, 바람둥이끼도 있는 것 같고, 또 여기저기 돈 빌리는 꼴 봐서는 먹고 버리는 제비끼도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희수를 졸졸 따라다니게 하는 꼴이 그냥 얄미워 죽겠죠?

    그런데 병운은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사실, 너무 착하 문드러졌어요. 집안 말아먹고, 마누라 도망가게 했다는 사촌 앞에서 화 낼 줄도 모르고, 친구 사귀는 데 사람 가지리도 않아요. 여행사 대표,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 이혼녀, 첫사랑 후배, 날라리 고딩까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인사하죠. 희수가 혼내고, 또 혼내도 절대 마음 상하는 법도 없어요. 오히려 돈 갚아야 할 처지에 희수 맘을 풀어주려고 주차비 내겠다고, 밥값 다 내겠다고 하죠. 그는 희수 맘을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온갖 애교까지 떨어줍니다.

    사랑하던 남자를 다시 찾아온 것 같은 희수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영화의 주 포인트은 병운인 것 같아요.
    (물론 서사적으로 봤을 때 주인공은 희수지만요)

    병운이란 인간, 희수에게는 참 요상해 죽겠어요.

    화 내야 할 때도 모르고, 진지해질 법도 모르죠.
    돈 욕심도 별로 없고, 주변 사람들 챙겨주기에 참 바쁘시기도 하죠.

    그런데 가면 갈 수록 병운이란 인간, 참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입니다.

    콤플렉스에 시달려서 아내한테 병운이랑 잤냐고 물어보는 인간
    철 좀 들라면서 남 치부까지 다 드러내는 인간
    책임감 없는 선생과는

    참 딴판으로 정겹죠.

    그래서 돈 때문에 결혼할 남자도 버린 희수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해요.
    처음엔 깔끔하게 돈 생각밖에 없던, 희수가
    고등학생의 껌딱지를 같이 떼어주고, 이혼하고 아이와 혼자살고 있는 여자의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희수는 병운 덕에 차가웠던 가슴을 조금 녹였습니다.

    헤어졌던 연인의 재결합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영화는

    서울이란 도시와는 참 안 어울리는 남자와
    서울을 배회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드라이브 내내 서울이란 도시의 풍경들
    그것을 지나치는 주인공들.
    너무도 다른 태도의 두 주인공

    그리고 이윽고 변화하는 희수.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로맨스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로맨스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죠.

    그런데, 병운이란 인물을 희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훈남정도로만 봐버린다면

    서울 풍경 촬영분들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 [해운대-윤제균] 뜬 영화는 팍팍 씹어줘야…

    한국에서 천만인이 넘었던 영화를 쳐봤습니다. 시작은 실미도 부터이군요.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그리고 해운대입니다. 몇 년 후면 천만관객 넘은 영화들이 10위권을 구성할 시대도 올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벌써 5편이니깐요. 그다지 좋은 현상같지는 않네요. 그리 인구가 많지도 않은데 천만이라니요. 여기에는 영화사의 독과점 문제도 얽혀있는 것 같고, 배급사 횡포 문제도 있는 듯합니다. 괴물 때 김기덕 감독이 지적하기도 했었죠. 신기록이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데, 언론에선 또 그리도 날뛰는지요. 신기록입니다. 하는 것을 마치 스포츠 기록처럼 보도하네요. 영화라는 것은 상품이지만, 그래도 예술인 것인데…. 천만, 천만 막 이러니깐 철저히 상품같아 보이네요. 암튼 좀 느낌이 그렇습니다. 해운대를 봐서 그럴까요?
    천만 넘은 영화 중에서 제가 보지 않은 것은 실미도 뿐이군요. 그래도 실미도는 대략 압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에 원작 책을 읽었거든요. 책이 저질이라 볼 마음이 뚝 떨어졌었는데, 영화가 떠서 굉장히 의외였어요.

    그런데 저 중에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가 좋았다는 사람 볼 때마다 두루두루 욕하는 영화입니다. “어떻게 저게 천만을 넘을수가 있어, 참내.” 그런데 두루두루 욕해줄 영화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해운대이죠.

    망한 영화는 그래도 애틋한 마음이 들지만, 그리 고 퀄리티가 아닌데 뜬 영화는 팍!팍! 씹어주셔야 합니다.

    암튼 해운대.

    우선 볼거리가 있다는 거가 사람들을 이끌었겠죠. 이제 보니 천만 넘은 영화가 모두 그렇습니다. 괴수 영화 괴물,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도 그렇고… 왕의 남자는 사극에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이끌었겠네요. 해운대는 재난영화군요. 거기다가 최첨단 CG를 발라놓셨다고 하니, 뭐 호기심이 발동할 만 합니다.

    그런데 제 취향은…. CG가 얼마나 뛰어나건 뭐하건 영화 호감도에 별 영향을 못미칩니다. CG는 개인의 노력이기 보다, 돈을 얼마나 투하하였느냐에 따라 그 퀄리티가 나와요. 돈 많은 헐리우드 CG가 자연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스럽죠. 전 스토리가 저질이어도 CG 기술 하나는 인정해야겠다는 한 때의 ‘디워’를 도저히 용납 못하겠어요. CG가 얼마나 뛰어난지, 안뛰어난지만 본다 한다면 게임 동영상을 보지, 왜 영화를 보는걸까…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그리고 해운대의 CG가 특히나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CG가 스토리에 협조하는 기술로 쓰이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깨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마치, 그래 한번 보여줄게 하는 식으로 화려한 동선을 자랑하는 CG가 현실감 없이 툭툭 튀어나와버리는 것이죠. CG는 어디까지나 스토리 안에 있어야지, 그러면 됩니까. 그래도 헐리우드의 CG는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었는데, 해운대의 CG는 스펙타클을 보여주겠어 흐흐흐 제작자의 욕심이 드러날 만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 포토샵을 배운 사람이 포토샵 필터 이것저것을 막 써 놓은 듯한, 촌스러움이었어요.

    그리고 스토리의 주요 줄기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이 하나같이 전형적이고 진부해요.
    여기서 갈등은 넘쳐납니다. 약간은 옴니버스 같은 분위기를 내서 그런지요.
    설경구와 하지원의 러브러브와 설경구의 트라우마가 하나 있구요. 그 트라우마로 들어가면 설경구와 송재호의 갈등이 있구요. 엄정화와 박중훈과의 이혼부부 갈등이 하나 있구요. 또 뭐 있더라, 아. 이민기와 강예원의 러브 스토리도 하나 있군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 같이 상큼함이 없다는 겁니다. 설경구는 큰 아버지만 보면 화를 내고 있는데, 그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별로 공감이 되질 않아요. 하지원도 마찬가지에요. 설경구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정말 그것 때문에 거절한게 맞아? 라고 느낄만큼 기계적인 반응들을 합니다. 진정성이 없어요. 진정성이.

    여러 에피소드들에 배우들이 끼워맞쳐진 느낌이에요. 이혼부부의 이야기이든, 설경구의 트라우마이든, 이민기-강예원 커플 이야기이든… 너무도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또한 너무도 몰입하기 힘들게 두었어요. 그냥 여기는 이렇고, 저기는 저렇더라 정도에요. 그런 이유는 영화가 에피소드를 너무 많이 만들어 두어서 그럽니다.

    빨간리본 달기 등의 유치한 에피소드들을 빼고는, 여기 에피소드는 주로 관객에게 안타까움을 선사하려거나, 부산의 지역색깔을 드러내고자 하는데요. 롯데 팬들의 신문지 응원, 광안리 불꽃축제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넣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데로,
    그놈의 메가 쓰나미가 몰려 왔을 때, 모든 갈등들이 일순간에 팍! 하고 해결되는데, 여기에도 일말의 고민과 주저함이 없이, 쓰나미가 왔으니 서로 울고불고, 화해합니다. 엄정화의 전화통화나, 송지호가 설경구 잡아주는 것은 좀 너무하다 싶더라구요.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거긴 하지만요. 연출방식이 이건 좀 아니다 싶네요. 장중한 음악 촤악~~~ 깔고 나서, 일말의 눈동자 흔들림 하나 없이 사실은 정말 당신을 사랑했어 라고 기계적으로 고백하는 그들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객의 구경거리였을 뿐이었습니다. 슬로우 모션도 너무 많이 썼어요. 괜시리 영화 길어지게 말이죠.

    아, 그리고 한국형 재난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자의 욕심은 보이는데, 왜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것들을 그대로 갔다 썼는지… 차오르는 물 때문에 전신주가 잠기는 순간에 애태우는 씬은 제가 본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인데요.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고등학교 때 본 그 영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어서 차마 제가 낯뜨거워 지더군요. (제목을 알아내면 이건 추가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기연출을 못한 듯, 경력있는 연기자들이 모조리 TV 드라마 같은 ‘한국식’ 연기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군요. 매너리즘이에요! 매너리즘!

  • [도가니-공지영] 도가니가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진 않았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주안점으로 두고 있는 것이 장애인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소설에서는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장애인 아동들의 ‘삶’에 대한 문제는 그리 심도가 깊지 못하다. 주로 지적 장애와 청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나오는데 소설에서 그/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소설은 자꾸만 “아! 내가 이런 아이들의 아픔을 몰라주고!” 라며 감탄사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계속 주인공을 위해 동원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예로 몇몇 아이가 교사 강인호 선생님이 이제까지 자신을 대하였던 다른 선생님과는 달랐다면서 무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 필체와 거의 유사한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등의 행동에서 현실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도가니>가 독자들에게 “언젠가는 좋아질꺼야” 라는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지는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방관자 ‘정인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방관자 독자들을 너무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이 정말로 적극적인 해피엔딩이었으면 어떠했을까? 방관자였던 주인공이 투쟁에 직접 개입해서 투쟁을 승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가 ‘연민’을 느끼던 장애아동들과 서로 화목한 상태의 마무리. 그러면 지금 작품 <도가니>가 선사하고 있는 찝찝함이 어느 정도 상쇄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핑크빛 환상’을 선사해주는 것 아닌가. 독자들은 해피엔딩을 지켜보면서, “결국 불의는 종식될 것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서 어느 정도 심정적 동조만 해주면 될꺼야” 라는 생각을 가질 것 같고, 또 한명의 영웅 정인호 교사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심만 보여주면 된다. 헌데 단 한 명의 영웅,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세계를 뒤엎어버리는 완결된 ‘책의 세계’는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책의 세계는 그 순간 환희로 종식되고, 독자들은 한 편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어 라면서 눈물 찔끔 흘리면서 안심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은 독자들을 결국 배신한다. 독자 자신과 가장 닮은 듯한 주인공이 “에이 까짓것 한번 해보지.” 라고 나서지를 않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할 투쟁현장을 회피하고 찝찝한 현실의 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게 너무도 찝찝한 것은 주인공 정인호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고, 너무도 있을 수 있는 현실성 때문이다. 독자들은 <도가니>를 통해 핑크빛 환상을 획득하기는 커녕, 광주인화학교 사건이 도대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 경과가 궁금해져버렸고, 주인공 정인호와 닮아버린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어쩔 수 없다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던 과거의 문제들 또한 주인공 인호의 것과 마찬가지 핑계는 아니었던가 하게 되고, 미래에 닥칠 어떤 문제들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보기도 한다.

    소설 <도가니>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상록수>의 채영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작자의 접근법과 태도에 있다. 작자는 이번 소설에서도 주 타겟팅을 운동 이력이 있는 비장애인 386세대 정도로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그녀들에게 끊임없이 이것 보세요 너무도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이것 보세요 너무도 파렴치한 교장이 아니던가요. 라는 감정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건 작가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욕심에 휘말린 과도한 도취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 공지영이 일관되게 문제시 하는 화두,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일어서십시오.” 라는 미약한 구호를 386세대에게 해대고 있어서, 한편 장애인과 장애인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 에이블 뉴스에서 <도가니>가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었다는 글을 보고, 한번 써본 것.

    ** 아래 기사 실렸다! ㅋㅋ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9&NewsCode=000620090821113918608125

  • [도쿄!-옴니버스]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그리고 봉준호의 일본포착!

    “도쿄!” 는 도쿄를 배경으로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에요.
    미셸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 레오 까락스의 <광인>,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 이렇게에요.

    공드리의 작품에선 인간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그냥 가만 있을 때 별로 유용한 것이 못되죠? 인간이란 동물은 식물처럼 자연에 가만히 생존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고, 도구들처럼 그것 자체가 기능이 있어 유용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그래서 기능을 계발해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기능을 계발하는 것을 꿈을 꾼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저것 취미생활이 많아봐야 다 필요도 없구요. 착해도 달리 이로울 게 없는 것 같아요. 지금 현실에서는요. 우선, 직업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합니다.
    주인공 여자는 직업과 꿈 그리고 인간의 기능에 대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녀는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추고 있고, 취미생활도 많은 것 같지만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고, 직업으로 삼을만한 것도 없어요. 그녀는 남자친구의 꿈을 응원해주는 것을 잘하고, 그것을 최대한 서프트 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고 해요. 현실이요. 그래서 그녀는? 의자가 됩니다. 이제 그녀는 걱정이 없어졌어요. 의자는 존재가 기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즉자존재이죠. 그녀는 다재다능한 어느 남자의 집에 들어가는데요. 거기서 그 남자의 삶을 응원해주기도 하고, 의자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그녀는 만족합니다.

    까락스의 작품은 광인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왜 나타났을까요? 인간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몰라서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것이겠죠. 거리를 돌아다니는 뻔뻔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요?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도쿄에 나타난 광인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죄인들’ 일본인들 사이에 나타나요. 근데 예수와는 정 반대죠. 예수는 치료하고, 용서하고 그렇지만, 현대판 예수 광인은 일본인이 남긴 폭탄으로 테러를 합니다. 왜냐구요? 그 광인 말로는 일본인이 역겹게 생겼다고 했던가요? 못생겼다고 했던가요?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는 군요. 암튼, 일본인들은 그런 광인을 받아들일 수가 없죠. 그래서 결국은 재판에 붇히고 목을 매답니다. 근데 예수와 같이 광인은 죽었다가 부활도 해요. 그리고 결국 없어집니다. 광인의 이야기는 그 독특한 설정과 이것저것 실험적인 카메라들이 매우 세련되고 이색적이었어요. 전 까락스의 작품을 처음 본 셈인데… 굉장히 놀랬습니다.

    봉감독의 작품은 히키코모리의 이야기입니다. 히키코모리란 부모님한테 돈 타면서 집에서 나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죠. 여기서 주인공은 사람 많은 것도 싫고, 더운 햇빛도 싫어서 그랬다고 말해요. 암튼 혼자 사는 데 어느날 피자배달부가 나타납니다. 당연히 뿅가죠. 그래서 주인공의 최초의 외출. 그런데 10여년만에 도쿄가 너무도 달라져 있는 거에요. 다들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고, 배달부는 로봇들이었던 거에요. 그리고 여자를 만나서 웬지 로맨틱하게 영화가 끝납니다.

    세 감독 모두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어떤 중요한 포착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이거였고, 저건 저거였다라는 딱딱 떨어지는 기능으로 말하기는 힘들 것 같구요.

    셋을 뭉뚱그려보면..
    고도화된 후기 산업사회 일본 속, 일해야 하는 일본인.
    일 외에는 아무것도 자아실현 할 수 없고, 자기 정체성 없이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는 일본인.
    사실은 자기 정체성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잊으려 애쓰는 것 뿐이라는 역사적 인식까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을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지만요.
    여기서 단연 특출났던 것은, 레오 까락스였던 것 같아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스가 정말 남다릅니다. 거장은 거장인가 봅니다. 미셸 공드리도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내는 것 같은데요.

    오오, 내가 좋아하는 봉감독은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봉감독의 특기와 장점은
    어떤 그릇에 담던지 자기 색깔을 낸다는 것인데
    봉감독의 색깔은 항시 시사적이면서, 현실 관련성이 있었죠? 그리고 색깔이 대단히 한국적이죠…

    그 색깔을
    잘 모르는 나라 일본에서까지 발휘하긴 힘에 겨웠나 봐요.
    그렇게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까락스와 공드리와 함께 묶어 두니깐… 좀 그런 감이 느껴진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ㅋ
    전 <도쿄!>를 본 다음에 <마더>를 봤거든요. 히히

    PS: 광인을 연기했던 드니 라방 연기 잘 하더군요.

  • [마더-봉준호] 한국적인 정서

    한국적인 정서는 어떤 것일까요?

    보통 ‘한의 정서’ 라고들 하는데요.
    ‘한의 정서’ 라는 것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부여한 것이란 걸 아시나요?
    (국문과 전공수업에서 배웠지요)

    우리 고전문학을 보면 알수가 있듯이
    한국인에게 ‘한의 정서’가 그리 대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의 정서’가 익숙한 것은 ‘애수’ 나 ‘비애’의 정서를 갖고 있는 일본일걸요.
    화투장 비광만 봐도 얼마나 비애의 감정이 느껴집니까… ㅎㅎ 이건 농담입니다.

    우리 고전문학에서 대세인 정서는
    아무래도 해학의 정서 같아요.

    먹고 살기 힘든 민생들은
    내가 시름시름 앓는 구나 하지를 않고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라든가 양반님들은 똥이나 밟고 발랑 넘어져버려라(이건 지어낸거지만) 했잖아요.

    ㅎㅎ 허튼 소리가 역시나 많아집니다.

    영화 <마더>를 드디어! 봤는데요.
    봉준호 감독은 정말 한국적인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이 박찬욱 감독과 대조되는 부분인 것도 같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세계에서 상을 두루 받는 이유는 한편 그의 영화가 세계 어디서든 먹힐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의 영화는 전혀 한국적이지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봉준호가 더 뛰어나다거나, 박찬욱이 더 뛰어나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죠.
    정서의 원형이 어디에 있건 영화 잘 만들면 되는 건데요. 뭘. ㅋ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요. 이건 그냥 제 취향의 문제입니다 ㅎ

    다시 <마더>!
    영화는 그다지 시덥지도 않은 아줌마의 ‘비극’입니다.
    그녀의 비극은 궁상이 따로 없어요.

    진범을 찾는답시고
    아들 친구 그리고 피해자 고객인 고딩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물상 찾는 게 다입니다.
    저는 처음 비장미 넘치는 포스터를 보고
    진범 쪽에 무슨 조직폭력배라도 개입해가지고
    엄마 혼자서 조직폭력배랑 대결해서 싸우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덥지 않은 것들과 시덥지 않은 상황만을 만들어내죠.
    엄마는 혼자 빨빨거리면서 뛰어다니지만, 고등학생 하나 구출 못하고 소주병 깨트리고 숨는 그런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궁상떠는 아들내미한테는 혼 한번 제대로 못내고, 침맞자 하는 그런 아줌마에요.

    아줌마가 당하는 시련들도 그리 비장미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어떤 악의 축들과 대결하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궁상스러운 상황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막걸리 타령만 하는 할머니는 압권이지요.

    몰입도 떨어지게 뭐 이래 하신 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이게 더 리얼하지 않나요?
    그리고 굉장히 한국적이지 않았나요?
    해학적이면서 풍자적이고 뭐 그렇지 않았나요?
    뭐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겠지만
    전 이게 훨씬 더 리얼하고 우리 한국적인 삶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줌마의 이런 궁상이
    스틸컷으로 볼 때는 그리 비장미가 없을 수 있었겠지만요.
    절대 정곡을 놓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저를 “콕!” 하고 찌른 엄청난 비극 이었습니다.
    저를 콕 찌르는 이 영화는 제 순간적인 감흥을 넘어서, 제가 갖고 있는 한국인 어머니상에게까지 다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결론과 해학…
    그야말로 일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ㄲ ㅑ!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봉준호야!” 라는 환호와
    비극이 주는 뭉클뭉클함을 간직한 채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봉준호의 이야기 하는 방식과 영화 만드는 기술이
    나날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박찬욱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영상으로 말하기라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히히

    PS: 김혜자 선생님의 연기야 말로 비교 대상이 없는, 다른 차원의 경지였던 것 같아요. 원빈은 잘생긴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노력은 좋아보였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윤제문씨도 좋아요~

  • [폭력써클-박기형] 가오다시만 90년대

    이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배우 이태성 때문이었습니다.

    “사랑니”에서 연기했던 신인 배우 이태성에 꽤나 눈길이 갔었는데요.
    뭐 그런 것 있잖아요.

    남들은 잘 몰라주는데
    나만 알고 있는 숨어있는 유망주 발견하기… 같은 거요.

    근데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배우 이태성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번 역에선 조금 어두워질 필요가 있었는데요.
    여전히 “사랑니”의 고등학생처럼 순진무구한 학생처럼 굴어버렸어요.
    욕하는 것도 어설프구요, 사투리 섞인 억양도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 대신 정경호가 꽤 잘 해대군요.
    그가 요즘 뜨는 이유를 알겠어요. ㅋㅋ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이것은 1991년 이야기를 하는데요.
    결코, 결코, 결코!!! 1991년 같지 않은 화면을 연출해줍니다.
    저는 처음의 그 친절한 연도 타이틀을 보지 못해서, 계속 현대인줄만 알았어요.

    이게 과거인 줄 알았던 것은 지난 경찰 유니폼을 보고나서였어요.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교복도 최신 간지 교복인데다가
    입고 다니는 사복도 그리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옷들이었어요.
    서울 거리중에선 삼줄 아디다스 간판도 나와요. 다른 옷집들도 그냥 그대로구요.
    아주 가끔씩 의도적인 연출로 나이트크럽이니 뭉툭하게 생긴 전화기니 하는 게 나오긴 하는데요. 티가 날 정도로 소박한 소품일 따름입니다.

    전 굳이 이것을 1991년으로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90년대의 감성을 전혀 건드리질 못했어요.
    그럼에도 감독이 91년을 굳이 선택했던 것은
    이 학원 액션 로망스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면
    매력이 쭉쭉 떨어질 것만 같다는
    감독의 자신감 부족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소품 외에 90년대 감성을 건드리는 에피소드는 거의 전무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현대라는 시간 속에 90년대 감성을 건드리고 싶은
    어설픈 학원 액션 로망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또 실패작임과 동시에 아류라는 딱지를 붙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것저것 성공했던 학원 액션물들의 익숙한 장면들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 “친구”가 대표적이구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영향도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주인공의 친구들이 어설프게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 억양을 구사하는 것과 너무도 익숙한 당구장 격투씬 같은 것들이죠.
    슬로우 모션과 화려한 영상이 너무 과도했던 것도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암튼 영화는 구렸고, 이태성도 실망스러웠구요.
    그나마 정경호 건졌습니다 ㅋㅋ

    PS: 90년대 로큰롤 팝송을 줄기차게 틀어대는데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걱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