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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물-봉준호] 장르영화 실짝 빗겨가기

    괴물에 대항하는 가족의 사투. 이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을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보통 상상하게 되길, 서울이란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고, 그것에 납치당한 주인공들의 딸내미를 구출하는 것이란 뻔한 것들로 매개될수도있다. 그것은 그 부류의 영화가 다들 그렇게 하는 것들, 평범한 일반인이 자신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괴물에 대항하는 과정이 영웅적으로 비춰지고, 그것은 영화 속 사회내에서 영웅으로 인정받는 정도의 스토리 라인? 주인공 자신은 딸내미를 구하기 위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을 테지만, 그것은 온 사회, 인류를 구하는 것으로 결론내려진다. 필사적인 사투는 필사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결말되었을 때 무지막지한 감동(?)을 낳으면서 관객들은 아! 저 사람 덕분에 살았어. 라고 여기가 되는 것. 뻔할 뻔짜이면서 재미있게 되는 액션/재난 영화 스토리가 이니던가. 어쨌든 주인공은 그럴 때 한 인간이기에 앞서 그가 지켜낸 집단을 상징하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기도 하고, 그것은 국가이기도 하고, 그것이 좀 과장하자면 인류이기도 하고.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노골적인 영화 말고도 수많은 액션영화들이 다 그런식이지 뭐. 그런데 괴물은 그것이 아니다.

    순차적으로 영화를 따라가보자면 장르영화에 대한 의심은 처음부터 해소될 순 없다. 미군에서 방출한 약품에 의해 괴물이 탄생한 것은 우선 소재로 치부하자. 여기서부터 의심을 말끔히 해소할 순 없는 것이 잔뜩 사회 비판적인/풍자적인 허세를 부리다가 그건 한낱 소재로 비껴치우고 결국은 평범한 스토리 라인에 지극히 상투적인 주제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액션영화가 얼마나 많은가.(그러한 영화의 소재화가 ‘심각한 것들을 무덤덤하게 하기’ 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 조금 이상한데? 라고 생각되는 것은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 누군가의 자살씬이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장르영화를 빗겨가고 있다. 그럴듯한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선 깨트리지 말아야 할 도덕률이,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이다.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고 치밀하게 지켜질 때 그 부류의 영화들은 관객에게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런데 괴물은 누군가의 ‘태연한 자살’ 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라는 것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류에 온 몸 받친 영웅의 사랑 보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송강호(극중 강두) 가족의 사투를 비춰지는 관점에 주목해보자. 보통 예상하길 처절한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다가, 분노하고 복수해야겠다는 의지를 돋아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송강호가 초반에 미군장교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것에는 누군가를 구해야 겠다는 정의감보다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깝다. 영웅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애처럼… 그리고 합동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이 뒤엉키는 모습도 희화화되고 있다. 왜 저렇게 가족의 슬픔을 가볍게 취급하지? 하는 물음은 곧 이어지는 정부의 생화학적 대책에 감독의 주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구나 하는 대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미군이 약품을 흘리게 되는 원인과 연관되어 이 가족의 시련이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의 다수에 대한 ‘no배려’로 생겨난 것인데, 거기에 항의해야 할 가족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목소리도 내지 못한 체 무작정 배제되는 상황, 배제되다 못하여 제 몸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체 해부되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것은 분노하게 만든다. 다분히 집단(정부, 미국?)에 대한 희롱은 슬픔과 분노로만 표현하기에 그 가족의… 뭐랄까 생존력이 억압당한 자들의 처절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풍자적인 성격으로 표현되면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표현된다.

    감독은 이것을 노린것은 아닐까? 분노로 표현하게 되면 격정적인 감정에 치우쳐 놓치게 되는 것들을 얼마만큼의 거리두기로 하여금 더 많은 말들을 하게끔… 그래서 영화 자체가 무겁지가 않다. 긴장감이 면면히 흐르고 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할 상황속에서도 웃음이 유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의 사투를 지켜보면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명확해 진다. 그것은 권력자들이다. 권력이란 일반적으로 하위체와 상위체의 쌍방합의에 의해서 생성되고, 하위체는 상위권력이 하위체의 권리를 시혜에 주기를 기대하는 양상을 띤다. 그런데 상위권력의 뒤퉁수를 치는듯한 행태를 <괴물>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으며, 그들 상위 권력체가 더이상 대다수 사람들의 권리를 대변할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제 하위체들,그들의 삶과 권리는 그들 스스로가 나서게 만든다.

    송강호를 비롯한 그들 스스로가 나섰다. 주인공 송강호는 그 캐릭터자체가 웃기다. 가장 슬퍼해야 하고, 가장 분노해야 하고, 가장 주인공 스러워야 할 그가 그러하니 그가 인류를 대표할 영웅이 되긴 글러먹었다. 보통의 영화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가족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슈퍼맨을 띠고 있는데, 송강호네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박해일(극중 남일)이나 배두나(극중 남주)가 더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가족관계가 아버지란 존재로만 대표해버리는 권력관계가 해체되고 있다. 가족은 ‘오로지 내림사랑(부모에게서 자식으로)과 가부장에 대한 기대’보다 상호사랑이다 라고 영화는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상위권력체가 일방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폭로하고, 상위권력체가 이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교차되면서 괴물이라는 영화가 권력관계의 구조적인 해체를 말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수직관계보다 수평관계에 <괴물>은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괴물을 없애는 씬은 약간 어설프다. 그 중요한 상황에서 경찰 혼자 등장해서 총을 쏠리는 없거니와, 모두 흩어져 있던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이 그 중요한 시점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 같은 설정은 약간 무리적인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 연극같은 설정이 그래도 아류작의 어떤 것과 다르게 생각되는 것은 이 영화 전체적으로 흐르는 풍자적인 성격과 희화화하기에 편승해서 쇄신된다. 전통적으로 클라이 막스에 이르는 장르영화의 과정들을 거부하는 반항의 표시라고 여긴다면 영화에 너무 편을 들어준 것 같지만, 일정정도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할 듯 싶다.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의 합동공격으로 괴물은 무찔러진다. 여기서 영화는 영웅은 없었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수배자로 찍혀버린 그들 셋이 사회의 공공의 적을 무찔러주었지만 그들이 영웅취급을 받을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어떤 명성과 어떤 굉장한 정의감이 아닌 자신의 생명과 권리를 자기들 스스로 싸워나가는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박해일이 어느 노숙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한 때 데모질을 했다는 부자친구는 배신했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노숙자는 돈거래를 거부하고 박해일을 도와준다. 그것은 민중들이 싸우는 것에서, 위로 표현되기(영웅화 되기, 권력화되기)를 거부하고 수평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우리들 삶은 우리가 지킨다는… 그렇다면 정부 등은 이제부터 어떻게 봐야지 라고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것들은 결국 소수가 정복하고 있는 집단 권력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라고 답을 내릴수 있다. 송강호는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딸내미를 못구했지만, 노숙꼬마를 하나 구했다. 마지막 씬에서 송강호와 식사하는 꼬마아이. 상부권력의 배신이 큰 충격이었고, 제 목숨은 제가 지키기 위해서 아직도 총을 옆에 끼고 있는 송강호. 한국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내는 TV는 재미없어라고 하는 말에 동조하며 꺼버리는 모습. 저것은 이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 어떤 자들의 입장에 취한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지 라는 송강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꼬마아이와 함께 사는 송강호의 결말은, 영화 초반에 누군가가 태연히 자살했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생명을 장르영화처럼 -절대 지고 지순한 도덕률-로 제시하면서 영화를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생명은 결코 하찮은게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진귀함에 있어서 가족, 인종, 위치지움에 의한 값싼 정의감보다 생명 자체가 소중하다는 본능적/인류애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영화가 계속 해체시키려는 진정한 적은 권력을 위한 권력체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면 도대체 그 괴물 자체는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괴물 자체가 어떤 감정을 가진 동물이 되어 어떤 무언가를 수행하려 한다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그런 성질을 지니지는 못하였어도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이유. 탄생은 미군의 no배려로 시작되었고 송강호 가족에 의해서 죽임당해야 하는 운명. 탄생부터 죽기위해서 태어난 그 것. 아직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 [Hanson-MMMBop] 더운 여름날, 매운 비빔면

    You have so many relationships in this life (너는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 )
    Only one or two will last (결국엔 그 중의 하나나 둘 정도만이 남게 될거야)
    You’re going through all this pain and strife (너는 이 모든 고통과 투쟁을 겪어야만 해)
    Then you turn your back and they’re gone so fast (네가 지난날들을 돌아볼 땐 이미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린 후일 테지)
    And they’re gone too fast (인생이란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거야)
    So hold on the ones who really care (진실로 아껴줄 사람들을 찾아)
    In the end they’ll be the only ones there
    When you get old and start losing your hair (네가 늙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 때 결국 그들이 너의 곁에 있어줄 거야)
    Can you tell me who will still care? (너는 누군가 아직도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니?)
    Can you tell me who will still care? (너는 누군가 아직도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니?)

    *MMMBop, ba duba dop Ba du bop, ba duba dop  Ba du bop, ba duba dop Ba du (Oh yeah)

    In an mmmbop they’re gone (Yeah∼ yeah∼ yeah) (그들은 떠나버렸어)
    Plant a seed, plant a flower, plant a rose (씨앗을 뿌려, 꽃을 피워 봐, 장미를 길러)
    You can plant any one of those (너는 이런 식물들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어)
    Keep planting to find out which one grows (꽃을 길러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It’s a secret no one knows (그건 아무도 알 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야)
    It’s a secret no one knows (oh∼ oh∼, No one knows) (그건 아무도 알 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야)
    In an mmmbop they’re gone (그들은 떠나버렸어)
    In an mmmbop they’re not there (그들은 거기에 없어)
    In an mmmbop they’re gone (그들은 가버렸어)
    In an mmmbop they’re not there (그들은 거기에 없어)
    Until you lose your hair (Whoa oh) (너의 머리카락이 빠질 때까지)
    But you don’t care (yeah∼ yeah)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Can you tell me? (Hoo) (내게 말해줄 수 있니?)
    No, you can’t ’cause you don’t know (아니, 모르는 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
    Can you tell me? (oh yeah) (내게 말해줄 수 있니?)
    You say can but you don’t know (알고 있지 못해도 너는 말할 수는 있을 테지)
    Can you tell me (Oh) (내게 말해줄 수 있니?)
    Which flower’s going to grow? (어떤 꽃이 잘 자라날지를?)
    No, you can’t ’cause you don’t know (아니, 너는 모르는 것을 말할 수는 없겠지)
    Can you tell me (내게 말해줄 수 있니)
    If it’s going to be a daisy or a rose? (여기서 데이지꽃이 피어날까 장미꽃이 피어날까)
    You say you can but you don’t know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나는 ‘고등학교 유학 생활’ 을 하기 전까지 어디 멀리 나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틀어박혀있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긴 했으나, 기껏 나다닌다는것이 동네 한바퀴, 그 이상은 별로 나다니지 않았다. 누구든지 틈틈히 친척집에 찾아가 놀고 한 그런 기억이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을진대, 나는 가족과 친척네만 갔다 하면 집에 가자고 마구 졸라댔다. 방에서 차분히 있는 성격도 아닌 녀석이 어디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집에 가자- 집에 가아아아자-

    라고 옹알이를 해대니 부모님도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어렷을 적부터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이를 잘 대해지 못하였고, 전에 허물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보기라도 하면 이를 어떻게 대하여 할지 당황하곤, 그 쪽에서 별 반응이 없으면 전에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처음 본다는 듯 뚱하게 있곤 했다. 완전 소심. 그것은 지금까지도 경향중인 것인데, 그래도 많이 나아진거다. 그렇게도 낯을 가려서 친척집이든 어디든 잘 놀러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집에 조용히 있지도 않고 혼자서 잘 놀았다.

    혼자서 요리를 해보겠다고 별 이상한 것을 다 만들어보기도 했고
    (평범한 것은 싫었던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특이한 것들)
    몇 시간동안 악보를 펼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어느날은 계속 그림만 그리고
    어느날은 혼자 나가서 소꼽장난을 하고
    어느날은 동네에 난 무를 찾아서 그 줄기만 뽑아먹고 다니고
    강아지풀만 가지고도 하루종일 잘 놀고

    그러면서도 혼자 노는 기분이 안들었던 것은 항상 한번 했던 것은 다시 잘 안하려 했고, 홀로 다중인격을 만들어 대화했으니 이를테면 이렇다.

    ‘오늘은 무엇무엇을 만들어보겠어요’
    ‘어머어머- 정말 흥미진진하겠네요’
    ‘그렇죠! 짜잔! 완성입니다!’
    ‘정말 당신은 세기의 천재가 따로 없는게 분명해요!’

    라는 식으로.
    자폐적이라고는 말아주길.
    나는 그래도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다.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노는것도 좋아서 이렇게 놀아왔던 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부터 나만의 시간은 매우 줄었다. 아니 없어졌으며, 시간이 있어도 더이상 그렇게 놀지 않았다. 한 학년이 4반까지 밖에 없는 조그만 중학교에 갔으니 초등학교때보다 성적이 조금 좋게 나왔고, 집에서 거는 기대는 컸다. 거의 그 시절, 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빡쎈 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그다지 욕망 없던 내게, 계속 야망이라는 것을 갖도록 만들었다.

    너는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좀만 하면 너도 전주로 고등학교를 갈 수 있어!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는 것이 서울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야!

    고등학교를 전주로 가고, 대학교를 수도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학교때 부터 공부하는 것도 늦은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 공부! 어이없게도 제일 내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그 학원이었다. 일명 부안군의 1등짜리들만 모아두었다는 그 학원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학생들을 공부시켰는데 그것을 포섭에 대한 환상과 배제에 대한 공포로도 부를 수도 있겠다. 잘하는 아이는 감싸쥐고, 못하는 아이는 때리고, 무한 푸쉬업. 그래도 안되면 내쫓기까지 한 그 학원은 정말 대단했다. 아이들은 모두 여기서 쫓겨나면 고등학교를 제대로 못가고, 대학교를 제대로 못가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RPG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업을 위한 노가다 몸부림을 하는 것처럼 공부를 했다. 그래도 제 때 집에 보내주기만 했다면 결코 집에서 책을 펴는 습관이 없던 나는 그 물결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을 텐데, 거기선 밤까지 자율학습을 시켰다. 요즘에는 흔한 풍경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때 내 기억에 시골의 중학생들이 어느 학원에서 밤까지 자율 아닌 자율학습을 한다는 것은 꽤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춰진 것 같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A반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잘하는데 좀 부진한 아이들에게 B반으로 내려가고 싶어? 라고 말하고 나면 아이들은 눈물을 떨구면서도 그 학원을 다니길 고집했다. 아주 단순한 운영방식이지만, 효과는 최고(?)였던 듯 싶다. 정말 각 중학교의 상위권을 모두 그 학원이 휩쓸었다 시피 했으므로…

    이제 판타지 소설을 읽고,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는 시간으로 내 여가시간은 채워졌다. 주말이 아닌 평일엔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밤이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 학원은 계속 되고, 결석을 할 때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퇴출이라는 협박에 못이겨 꼬박꼬박 나가긴 했으나, 그래도 한계가 있는 법. 수많은 시간을 다 잡아두기는 에어콘 전기세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 같다.

    그 어느 여름방학의 낮.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

    커튼 사이로 뜨거운 했빛
    달달거리는 선풍기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모든 방문은 열려 있었다.

    어디서 이 상황을 겪은 것 같은데 하는 데자뷰와 함께 컴퓨터 게임을 일시중지  하고 집안을 우왕좌왕했다.

    뭘 하지? 뭘 해야 하지?

    떠오른 물음이 낯설지가 않았다.
    한낮의 시간에 나 홀로 있는 것. 그냥 앉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으려 했던 초등학교 낮의 물음들. 그 뒤로 무슨 일을 꾸며내든 혼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던 것이었다.

    나는 누나방을 뒤적였다. 명곡앨범들 뒤로 Hanson 이라는 앨범이 있었다. 언젠가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바람난 듯 나갔다가 사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때 버림받았던 나는 대단한 것이 돌아오길 기대하였으나 기껏 온 것이 음악 CD 한 장이었으니,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누나들도 그리 틀은 적이 없었다. 혼자놀기 법칙의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것을 틀어보았다. 뭔가 낯선 음악일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익숙한 리듬의 MMMBop이 흘러나왔다. 별 음악을 취미로 삼지도 않던 내게도 익숙했으니 그때 Hanson의 인기는 대단했나보다.

    익숙한 리듬이 나오니 신났다. 신나서 열려있던 모든 방문을 모두 다 더 활짝 열어 제끼고, 음악소리를 최대로 크게 틀어두었다. 그리고 열무 비빔면을 끓였던 것 같다. 그때 내겐 너무 너무 매웠던 열무 비빔면을 거실 한바닥에 앉아서 먹고, Hanson 의 MMMbop은 집안 전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어느땐가, 누나들이 사서 모으는 유행가 악보 ‘PEACE’를 방바닥에 깔아두고, 50장 정도 되는 그것을 모두 크게 노래불렀던 때. 마치 가수가 된 마냥, 콘서트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으로 혼자 맞장구 치고 놀던 그때가 떠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느낀 데자뷰가 무엇이던지 깨달았다.

    내 기억속에 최초로 추억이라는 것을 잡으려 했던 그 때.
    처음으로  ‘그 때는 그랬는데’ 라고 읊조렸던 그 때.

    에어콘도 없이 달달거리는 선풍기 하나가 있었건만
    서늘한 기운속에 쇼크를 주는 매운 비빔면의 맛.

    Hanson의 MMMbop이 지금까지 내게 주는 느낌이다.

  • [Cher-Believe] 태어나 처음 산 정식앨범

    No matter how hard I try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You keep pushing me aside (당신은 나를 자꾸 밀어내는 군요)
    And I can’t break through (그러니깐 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어요)
    There’s no talking to you (당신과는 대화가 안됩니다)
    It’s so sad that you’re leaving (당신이 떠난다니 너무 슬프군요)
    It takes time to believe it (떠난단 사실을 믿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죠)
    But after all is said and done (결국 모든 것이 다 끝이에요)
    You’re gonna be the lonely one (당신만 외롭게 되겠지요)

    Do you believe in life after love? (사랑 후에 삶이 있다고 믿나요?)
    I can feel something inside me say (내 안에 뭔가 말하는 소리를 느낄 수 있어요)
    I really don’t think you’re strong enough now (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Do you believe in life after love? (사랑 후에 삶이 있다고 믿나요?)
    I can feel something inside me say (내 안에 뭔가 말하는 소리를 느낄 수 있어요)
    I really don’t think you’re strong enough now (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What am I supposed to do?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Sit around and wait for you (그냥 앉아 마냥 당신을 기다릴까요?)
    Well, I can’t do that (음, 난 그렇게는 못합니다)
    And there’s no turning back (그러니 돌이킬 수 없어요)
    I need time to move on (계속 살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I need love to feel strong (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Cause I’ve had time to think it through (왜냐면 충분히 생각해 봤거든요)
    And maybe I’m too good for you

    Well, I know that I’ll get through this (음 내가 이런 것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Cause I know that I am strong (왜냐면 내가 강하다는 걸 알거든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I don’t need you anymore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No, I don’t need you anymore (그래요 난 더이상 당신이 필요없어요)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타율학습, 거기서 이어지는 잠과 스트레스. ‘공부에 관심 없음’ 은 곧바로 ‘일탈’ 혹은 ‘저항’ 으로 생각해버리는 속에서 대개는 ‘열심히’ 책을 펼쳤을 것이다. 딱, 딱 네분단으로 줄맞추어진 책상과 의자. 거기에 앉아있던 까까머리 교복들. 바지를 줄이기도 하고, 머리에 스크래치를 긁기도 하고, 귀를 뚫기도 하고 그러하여도 고등학생이라고 불러지는 우리들의 이름.

    그 고등학교 시절.
    우리에게 가중되는 압박이 강압일수록,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들의 ‘자그마한 일탈’ 은 더 재미있고, 더 애틋한가보다. 고등학교 시절, ‘아 공부해야는데, 공부해야할 것 같은데…’ 하면서 읽었던 소설책들, 보았던 영화들, 들었던 음악들, 빠졌던 게임까지도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고, 그것들의 즐거움이 그 어느시절의 추억보다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등학생’ 이라는 압박속에서 누렸던 즐거움이기에 더 그러한 것일테다.

    그 ‘해소’를 위해 아이들은 쉬는시간만 되면 한결같이 이어폰을 끼고, 마치 음악에 심취한 듯 그렇게 있었다. 지금만은 내 감정에 휘둘리는 시간이야. 라는 듯이, 지금만은 내 감성을 살려두어야 겠어 라는 듯이. 양 귀를 감싸쥐고 듣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음악적 취향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뉜다.

    인기가요를 듣는 부류
    팝송을 듣는 부류
    좋아하는 가수 음반을 듣는 부류

    난 그 중에 팝송을 듣는 부류에 끼고 싶어했다. 왠지 고등학생이 되었으면 팝송을 들어야 할 것 같았고, 그게 좀 더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게  Cher-Believe에 닿게 된 연유였다. 팝송을 들어야지 하고 산 MAX라는 팝송 인기가요 컴플레이션 앨범에서 유독  Cher-Believe가 귀에 들렸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하기 힘들만큼 굵은 음색을 가지고 시원하게 카랑카랑 내뱉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들. 그리고 싸이버틱한 전자음들과 당시는 정말 신선한 기교였던 목소리 꺾기. 그것을 따라한답시고 얼마나 요상한 음을 내면서 연습했던지… 그래서 Cher 의 앨범이 내가 난생 처음 산 가수의 정식앨범이 되었다.

    이 나만의 기념비적인 노래인 Cher-Believe는 내게 뜻하지 않은 선물도 주었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처음 일주일을 지내고 집에 내려가면서 내리  Cher-Believe를 반복재생 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생긴 소환력(?)이다. 즉, 지금도  Cher-Believe를 들을때면 그때 기숙사에서 집에까지 가던 그 경로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되어버리는 것이다.

    음악은 본래 그런 묘한 마력 혹은 특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굉장히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Cher-Believe만큼 내게 강렬한 재현을 구사하는 노래는 없는 것 같다.

    전주발 부안행 버스안에서 가슴 두근거림. 차가운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를 쿵쿵 부딪혀 아파도 했지만, 그래도 유리창의 차가움이 좋아서, 기대고 있는 것이 좋아서, 기대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 흔들림에 몸을 맡겼던 기억.
    부안으로 진입하는 버스에서, 이제 부안이 더이상 ‘내가 사는 곳’ 이 아닌 ‘내가 살던 곳’ 이 겠구나. 이런 것이 ‘고향’ 이라는 것이구나라고 다짐하듯 생각하던 기억.
    우리집의 불빛을 앞에두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커지는 가슴떨림. 그때 불던 입김이 유난히도 꼬리를 달고 호호 날려서 그것을 보다가 밤하늘을 보고, 고향하늘에는 별이 참 많았구나 라고 인지했던 기억들을

    Cher-Believe는 내게 준다.

    그리 음색이 애틋하지도 않고, 가사도 관련 없지만  Cher-Believe가 주는 귀향의 이미지.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들이다.
    되도록 오랫동안 그것이 그대로 있었으면…

  • 시집 읽는 즐거움

    아직 그리 많이 읽지 않아 시집읽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붙이기가 살짝은 민망하지만
    요즘 시집에 재미를 붙인것은 사실이다.

    갇혀 있는 김(?)에 좀 어려운 것들을 두고두고 보다보면
    무엇이든 피가되고 살이되겠지 하는 마음에
    23살, 태어나서 처음 산 시집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이었다.

    거의 엎드려 자거나, 결석, 지각을 밥먹듣이 하면서
    얼핏 들었던
    어느 문학수업의 선생님이
    굉장히 높은 차원의 예술성을 지닌 작가라고 이야기 했던 것도 같았고
    주변에서 대명사처럼 기형도라는 인물을 흔히들 거론하기도 했던 것도 같았고
    뭔가 이름부터가 특이해서 마음에 들었고
    한 여러가지 심경에서
    내 생전 처음 구입한 시집이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이 되었던 것이다.

    그 문학수업 선생님이 알려 준
    시집읽는 요령으로는
    한 구절, 한 구절 노트에 베낄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소설 읽듯이 쭉 읽어라
    라고 한 것이 생각 나
    그냥 소설 읽듯이 쭉 읽었다.
    한번 읽고 또 읽고
    어느결에는 그냥 펼쳐서 나온 시를 읽고 읽고
    그랬더니
    정말

    시가 내게로 온 듯 했다.

    기형도의 시는
    절규를 외치는 것 마저
    약간의 희망을 품는 것으로 생각될만큼
    처절하고, 절망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나는
    그와 나를 끊임없이 비교대조 해보게 되고
    그인 척 해보기도 하고
    하는 사이
    읽는 순간만큼은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것을 더 알고 싶어서
    시라는 것을 더 읽고 싶어서
    산 시집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였다.

    기형도의 시가 고도의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면
    최영미의 시는 비교적 직설적이었다
    또 너무 솔직하기도 하였다

    최영미의 시는 한 번 읽는 순간
    시 속의 그녀가 내게로 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그녀의 상처와 성숙과 성찰의 고백들이
    내게 정말 힘을 주었으며
    나를 다시 바라보게도 했으며
    나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게 한 것 같다.

    그 리고
    김선우, 김정란, 박노해, 김수영의 시집들을
    그런 느낌들을 기대하며 지금 책장에 꽂아 두었다.

    시라는 것.
    왠지 너무 가볍거나
    왠지 너무 무겁거나
    한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시라는 것.
    문학중에서 가장
    작자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장르가 아닐까 한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시도 픽션이 아니라고 우길수만은 없겠지만

    작자의 생영혼에 스카타토를 뛰우고
    그것이 가장 꿈틀꿈틀 대면서 오게 하는 형식
    그것이 시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난 아직
    어느 작자의 시 한두편만을 봐서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간다
    시집 한권을 읽어야
    쭉 소설책 보듯 읽고, 틈날때마다 또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봐야
    시가 내게로 온다.

    뭐 더 독해력을 길러야지 하는
    그런 욕심따위는 없다
    그저
    작자와 공명하는 나 자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요즘은 즐겁다.

  • [슈거푸시-이명랑,작가세상,2005]

    가족내에서, 이 사회가 만들고 있는 가족내에서 여성이 제’ 인간구실’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작품에서 비춰지는 가족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냉정한 시장의 법칙을 연상하게끔 한다. 너무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그 모습때문에 설마 저럴리가, 이건 너무 한다 싶지 않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데, 소설의 이야기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의 냉철한 단면일 수 있다.

    -전복과 드러내기
    작품에선 마치 ‘장치’처럼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의 가족(친정)이 특히 그러한데 아무리 세상이 전쟁같다고 하여도 그런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일이’ 혹은 ‘출동 SOS’에나 등장할 것이다. 임신을 한 딸이 유산을 하였어도 그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약점으로 잡았다는 듯 ‘부정한 여자’ 로 계속 딸을 지칭하여 가족 내에서 딸의 지위를 사정없이 격하시키며, 딸에게서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고서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도록 자신에게 또한 충성할 법한 군인남성과 결혼시키는 행위, 딸이 준 선물이 값싼 모조 명품이라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위. 보통 억척어멈 중에서도 이런 억척어멈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억척어멈이 억척어멈이었던 조건은 밑에 숨겨져 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전쟁같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가정만을 지키고자 함, 그래서 몇몇 작품들 속에서 억척어멈들이 나타났지만 그녀들을 볼 때마다 독자들은 ‘너무한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연민을 느꼈으며 이 세상에서 어머니로 살기의 고단함을 바라보면서 공감하곤 했다. 그런데 슈거푸시의 어머니는 정말 너무했다. 묘사된 그녀에게서는 단 한번의 사랑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렇게 모질고 극악스러워도, 단 한번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 실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자아 수난의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태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해준다면 이 어머니 역시 억척어멈이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을, 슈거푸시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은 고사하고 시기, 분노, 경멸 외에 다른 긍정적인 감정조차 단 한번도 표현하지 않는 인물이다.
    세상에 저렇게 너무한 어머니가 존재할까? 설마?  라는 생각을 아니 갖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러한 어머니의 존재에 앞서 한번 돌려 생각해보자. 그 ‘악당스러운’ 인물이 만약 아버지였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가족내에서 권력을 탐하는 냉혈인 아버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구성원들조차 경쟁자로 생각하는 인간 남성의 모습은 슈거푸시의 어머니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된다. 슈거푸시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무엇보다 허구적 장치라고 느껴지는 연유에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방식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항시 달래주고, 어루만져주고 그러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으로 생각되어지는 어머니.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어머니상일 것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또한 지배질서와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반영하면서 현실의 극복의지를 드러내려는 근래의 많은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경향은 어쩌면 관습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왔던 점에 주목해보자. 슈거푸시에서 만일 어머니의 행태가 그대로 아버지에게서 나타난다면 이것은 종래 볼 수 있었던 여느 소설들의 경향성에 포함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 내에서 아버지가 가부장의 귄위를 점유하기 위하여 감정을 부인하고, 가족 구성원을 부인하는 냉혈인. 그러한 인물의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의 점유역할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배집단 혹은 주류질서체계를 상징하는 것까지 아우르게 된다. ‘ 그런 일반화된 문학 속 아버지들의 함의가 그러했던 것은, 현실에서 아버지만이 가족단위 내에서 유일한 사회적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그렇게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질서였다는 데 연유한다.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산적 경제활동’은 오로지 아버지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달린 식구들’ 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통념이 아니던가. 슈거푸시의 행위가 아버지의 행위였다면 행위의 이유를 ‘사회내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의무지어져야 했던 그 지난한 과정. 그리고 안식처가 되지 못했던 가정. 넘어서서 노동의 소외까지’ 이러한 틀거리를 가지고 해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어찌 보면 매우 익숙한 문학적 표현 소재이다.
    그러나 슈거푸시에서 주인공의 대립항이자, 권위 획득을 위한 냉혈인은 어머니로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의도적 전복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아버지 권위와 대항항들’ 의 문학작품에서 얻어질 것들이 단순 그것이 어머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태로 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고자 하는 어머니의 주도면밀한 투쟁으로 나타내지는 것이다. 여성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예상하는 모든 예비답들을 뿌리치고 냉혈인 어머니는 나도 인간이야, 나는 내가 욕망하고자 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이고, 지극히 이상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도 아니고 이 속물적이고 고정된 세계속에서 얼마만큼의 지위획득으로 그 만큼의 자유와 권리만을 갖으려 하는 인간이야 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벌의 생태 모습과 비교하여 그것은 비교적 명확하게 해설되고 있는데, 자신만이 로열젤리를 움켜쥐고자 하는 여왕벌의 생존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여왕벌이고, 로열젤리는 가족내에서 그녀가 점유하고 있는 권위이다. 그녀는 가족의 구성원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에 의무지어지는것들을 가차없이 버린다. 자신도 인간이기 때문에, 권력욕망과 축적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사회내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들을 자신도 추구하겠다고 거나하게 말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욕망과는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슈거푸시의 어머니가 어머니이자 아내로의 위치에서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 역시 경계선 없는 무한확장의 욕구로 사회 구성원 누구의 욕망과 다름 아닌지만, 그녀의 욕망은 바로 밑바닥에 생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녀가 욕망하고, 욕망을 위해서 냉혈인이 되어버렸던 것은 욕망하지 않으면 생존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욕망하지 않고서는 기계적인 어머니와 아내가 되어버리는 ‘죽은 것 같은’ ‘버티는 인생’ 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즉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욕망했던 것이다. 모든 욕망은 욕망할수록 범위를 넓혀버리고, 채울수록 불만족스러운 불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욕망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래도 버티면서 살기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것. 생존을 바라 밑바닥에 깔고 있는 그녀의 욕망이기에 악과 어리석음의 모습을 취하기 보다 자신을 위한 치밀한 책략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메세지가 소설 속에서 그토록 비정상적이고 특이하게 보여지는 것은 결국 그 냉혈인이 어머니였고 여성이었다는 이유에 일정부분 기인한다. 우리가 여성이었기에 그것도 어머니였기에 관습적으로 예상했던 것들. 수용에 앞선 그러한 장벽 설치가 있었음을 예상했다는 듯 작가는 이러한 전복을 꾀한 것 같다.

    -라틴댄스의 세계는
    사랑을 실현하지 못하고, 상처의 역사를 지녔으며 치유받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가정속에서 나와 가정을 꾸리나 역시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꾸리게 되는 주인공. 거기에 자기실현과 자기만족을 위한 그 무엇은 오직 남편 몰래 담배피우기 였던 주인공은 가슴뛰는 심정으로 라틴댄스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핍박과 억압에서의 도피처로 기능하고 했던 예술은 슈거푸시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
    강습일이 있는 날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것은 라틴댄스 자체의 즐거움이기 보다 다양한 삶의 굴레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어쩌면 같은 기제들로 인해 라틴댄스를 택한 이들을 바라보는 일. 그 군상안에 있는 주인공 자신을 응시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위안요소였지 라틴댄스라는 예술적 행위 자체에 심취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소설의 구성이 춤의 방법들에 빗대어서 구성되나 그것이 소설전체의 분위기를 예술적 아우라로 감싸쥐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기능하는 것은 비교에 의한 적절한 이해를 제공하면서도, 자아의 목소리가 독백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쭈구려 앉아있기에 머물러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까지라고 보는게 알맞으리라.
    중요한 것은 동네 구민회관이 아닌 자본의 집중체인 백화점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라틴댄스 강습실이 주인공에게 하나의 도피처 이기보다 다른 공간에서 사회와  그저 조금 다른 방식의(그러면서도 어쩌면 그게 그거인) 인간들을 보는 삶의 현장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조금 더 멋져보이려는 사람, 자신의 치장에 힘을 쓰는 사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염치란 것을 버린 사람 등등. 춤과 춤에 대한 즐거움의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강습실에 다니는 사람들은 강습실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과 지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자신에 대해 충만해하기 보다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지움을 확인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통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물론 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자신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 주인공에게 강습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다른 관점과 충언을 많이 보태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역시 사회적 관계에 지긋지긋하게 얽매여 있기에 유한한 투자며, 유한의 효과이다.(어떠게 보면 무한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절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대적인 효과. 하지만, 현실과 상상력으로 인해 현실외부로 탈피해가는 예술적 기능과 비교했을 때는 유한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 행복감은 예술적인 차원의 초월성과 자기응시, 자기쾌락과는 거리가 있다. 사회와 제도의 외부에 존재하기가 아닌 내부속에서 상대적인 우위점위 차지하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라틴댄스 강습실과 그 사람들이 ‘외부의 것들’ 이 아닌 내부에 존재하는 삶의 현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작품은 더 리얼해질 수 있었다. 만일 라틴댄스에 심취한 주인공이 댄스를 통해 삶의 상처들을 치유한다면 그것은 보통 볼 수 있는 영화 시나리오 겠으나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주인공은 자신을 구성한 공간 외부로 발걸음 내딛지 않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문제를 자신의 공간에서 치유하거나, 극복하거나, 점령해야 하거나 혹은 패배해야만 한다. 이것이 삶인 것이다. 상상력과 예술심취로의 우회전이 아닌 직면하는 것. 우리가 삶의 모습안에서 뒤엉켜야 한다는 것.

    -체념의 목소리는 어디서 부터 나오는가
    주인공의 말하는 목소리를 뭐라고 성격규정할 수 있을까. 라틴댄스의 강습실, 부부관계, 친정집의 공간과 첫사랑에서부터 현재에 가정꾸리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체념의 목소리에 가깝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 일탈과 임신 그리고 유산의 과거를 회상하는 데의 목소리 또한 그 과거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현재에 기반하여 과거를 회고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담담하기만 하고, 현재 같이 사는 군인남편의 사는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 또한 체념의 목소리다. 작품의 처음, 라틴댄스 전단지 앞에서의 심정만이 그 목소리를 벗어나 격정적으로 서술되고 있고,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체념의 목소리는 주인공이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고민하거나 상상하지 않으며, 일탈조차 수용될 수 일탈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념은 기대에 대한 포기의 감정이라는 데 주목하자. 그것은 주인공이 기대치라는 것이 허물어지고는 있되, 완전히 무화되지는 않았다는 것, 자신 외부의 것들과 대응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예리하게 바라보는 데서 올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 외부의 것들과 자신은 아직 융화되지 않았기에 체념의 목소리가 가능한 것이다. 강습실에서, 가정에서, 친정에서 주인공은 마치 강습실의 멤버가 아니고, 가정에서 아내가 아니고, 친정에서 딸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다. 주인공의 이 모든 공간에서 위치하고 있는 자아가 그 위치가 아닌 외부에서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자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라는 궁금증을 계속 유발하면서 주인공 외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긴장관계를 성립하고 비판적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독자에게로 들어가버렸다. 그러했기 때문에 한심한 남편의 귀를 파주면서 귀여운 곰탱이라고 불러버리는 그 순간, 자신도 로열젤리를 욕망하겠다고 말하던 그 순간 독자는 작품과 그 주인공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전복적 상황 장치들. 주인공의 목소리가 독자내에서 들어오고 거기서 생겨나는 예리한 목소리들. 어떻게든 삶과 직면하려는 태도. 이것들에 대한 공감형성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체념의 어투, 그러했기 때문에 그 체념의 목소리가 결국 주인공 자신이 어머니와의 권력투쟁을 벌여보겠노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화를 목표로한 목소리처럼 여겨지고 만다. 작품 전체가 주인공이 성찰하려는 다른 길들을 모색하지 않고, 그 현장 속에서 한계지워진 것들까지 인식하고 여기에 대한 끊임없는 동조 구하기로 인하여 이것은 한계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초월과 승리 같은 것이 등장해버린다면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할만큼 허구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예리한 현실의 단면인 작품이 동조하고 동감했던 독자들이 이 억울한 단면의 모습의 감흥하여 분연히 주먹을 쥐며 울분을 토하는 효과를 낫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기능성이 리얼하되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허구적 표피들이 전혀 리얼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친정에서 가족관계가 좀 더 구체화되어 표현될 필요가 있었지만, 단지 어머니의 행태를 벌의 생태 모습에 비교처리해버린 것은 너무나 쉬운 선택이었다. 또한, 주인공 자아의 가정구성에서 그녀 또한 아내이고 어머니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외부화된 체념의 목소리만을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부화된 목소리에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단지, 아내와 어머니가 장보기와 섹스생활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자식 현은 더욱이 작품초반에만 여가시간을 방해하는 조건으로만 인식되고 그 이후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섬세함이 부족하였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비현실적인 악조건 들이 동조의 목소리에 불구하고 삶과 직면 하려는 태도 또는 이런 사회 구성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들의 폭로 효과를 자아내지 못하고 하나의 보여주기 효과에 그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