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은 박완서의 장편소설이었다. 전에 읽은 것은 단편모음집이었으니 일명 거장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참 늦게도 읽은 셈이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묶여 온 단편들의 섬세함, 역시 거장답다(?) 라는 그 역량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장편을 읽는 사이 시종일관 나는 자유롭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사실 작가 박완서는 내게 작품보다 그녀의 활동과 말들로 익숙한 작가였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을 지내고 있는 작가, 조선일보에 가끔씩 논설을 기고하는 작가, 더욱이 이문열의 거침없는 발언(?)에 항의하는 뜻으로 네티즌들이 이문열 책 장례식을 벌였던 그 때 조선일보에 이보다 더 시대의 비극은 없을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기고했던 작가… 그래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J-1비자’ 라는 살짝 반미감정이 드러난 작품을 읽었을 때도 놀랍고 아리송했던게 당연했다. 이게 웬일이람 하고. 사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지내는 것 자체만 두고 이 작가는 안 좋은 작가라고 딱지를 떼 버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우선 언론매체이고, 문학상이니깐. 그래서 기고하는 것 하나만을 가지고 작가에 대한 평가기준을 내려오진 않았다. 문학권력 논쟁의 태풍의 눈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비평가 권성우조차도 조선일보에 몇 차례 작품을 소개하는 기고를 한 적이 있는 것이다(그것에 빌미잡혀 강준만한테 질타를 당했지만). 하지만 박완서는 조선일보를 언론매체로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야합했다’ 고 여겨지는 여러 겹치는 활동들을 해 왔고, 그것과의 공조에서 얻어지는 권력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 거기에 문인들의 비판이 잇따를 때마다 조선일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라는 둥의 반응을 보여왔던 것이다. 비평가 정과리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 합류할 때조차 조선일보가 나쁜 줄은 알지만 그것도 언론매체이기 때문에 내부속의 비판자가 되보이겠다는 핑계를 달았던 사례(그것은 붙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를 보면 문인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극악함은 널리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겠는데? 하며 자연스럽게 손 맞잡은 모습. 그래서 작가 박완서의 작품을 피해왔었다. 사실 헤깔릴까봐 피해왔다. J-1비자 같은 작품을 볼 때 이 작가 도대체…뭘까. 라고 당황하게 되는 것. 더욱이 내가 충분치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으아.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래서 박완서의 이 장편소설을 대하던 와중에도 수없이 의심해보았다. 더욱이 6.25를 전후로 하여 이념갈등의 모습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었지만 미군 앞에서 그 단물을 얻어보고자 하는 한국인들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에 혐의를 두어야 할 부분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읽다가 판단정지. 자전적 소설인 이것에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데 있어서 작가의 주요 포인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 앞에서 내게 닥쳐온 것은 이런 것들이었고 전 이렇게 했답니다. 여기에 그리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었고 그렇다고 가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실 가학적인 서술은 일종의 치켜세움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그냥 솔직했다. 그러니 우선 외부의 박완서는 치워보고 작품을 한 번 보자.
6.25, 피난, 생존을 위한 갖은 몸부림들, 주인공의 연애 등 그 시대의 갖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언제나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작품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처음부터 등장하고 있지 않다. 없는 가부장 때문에 가부장에 익숙해 있던 존재들은 차기 가부장을 찾고자 하는 데 차기 가부장의 유력한 후보인 오빠는 다리에 총구멍을 간직한 채 말을 더듬고, 광기에 접어드는 때도 있으며, 말도 안되는 떼를 써서 가족을 육체적 정신적 위험에 빠트리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는 오빠의 회복에 전념한다. 그것을 가부장의 복권 그 자체가 이 위기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최고의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 나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주인공은 가부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족들을 거리감 있게 바라보면서도 가부장의 복권을 내심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가부장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때문이다. 그녀가 가부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추측하기로, 가부장이란 직위는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로 자기실현을 포기해야 하는 존재이며 또한 주인공 일가의 가부장이라 함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노릇을 하기 위해 어찌 보면 비근대적일 수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올케와 주인공 나는 부양을 일부분 책임 지면서 가부장이 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지만 집안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양은 누군가가 해야 할 것을 대신 내가 잠깐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올케와 주인공 나의 속내가 있으며 거기에는 가부장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나의 엄마는 가부장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부장 역할의 일부분을 수행하는 데 그것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전통적, 비근대적 가치의 수호이다. 이런 미완의 가부장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 나에게 보이는 가족은 언제나 불안하며, 누구도 생계부양의 의무를 떠맡으려 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를 혐오하기 까지 한다. 작품은 주인공 나는 다른 가정을 꾸리고 그녀의 본가에선 올케와 주인공 나의 엄마로 꾸려지는 가정을 보여줌으로 해서 끝을 맺는데 주인공 나의 엄마는 일정 부분 옛 가치들을 단념할것 같은 예감을 보이고 있으며, 올케는 종래 가족이 바라던 가부장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이것은 가부장과 가부장제 자체의 부정이 아닌 비근대적 모습의 가부장이 근대적 가부장 모습으로 바뀐다라는 함의일 것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가족 내의 생계부양의 문제와 가부장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하고 있는 한편 급물살 같은 사회모습 속에서 안정을 바라고는 있되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보다는 근대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는 마음을 눈치챌 수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걸맞는 새로운 가부장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자체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근대화를 모두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재래적 관습(치료법 등)의 따뜻함, 구수함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산업화 속에서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감정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하나의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과 사건속에 대응하는 것들속에 드러나는 사회의식을 캐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이 반영일지, 어떤 것이 신변잡기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현재의 작가임에 주목할 때 그때는 그랬어 라는 생각에서 그때를 그랬어로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를 추측할 수는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맥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 속의 맥락에서 연관지어 생각해야한다. 작품 속에서 인민치하에서 본 무용극에 분노하는 모습이나, 어서 국군의 통치아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을 현재 작가의 반공 가치관에서 강조된 것이 아닐까 하는 판단은 너무 섣부를 수가 있다. 그 시절 다른 이념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불가능했던 조건에서 계속 국군아래 있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인민군을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작품속에 드러나는 가부장에 대한 기대, 위의 통치자가 있었으면 한다는 기대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였고 이어지는 현상에서 주인공 나가 그려내고 있는 시선이 어떠한가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작품에서는 주인공 나에 의해 가부장은 기대함과 동시에 부정되는데 그 부정은 종래 비근대적인 가부장의 부정이 되고, 근대적 가부장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산이라 함은 가부장, 전통적인 가치관들의 통칭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마치 힘겨웠던 군대에서의 경험을 후에 추억으로 삼듯이 비근대적인 가부장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 가부장의 조건지움이 오로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냉엄한 자본주의 시장 법칙에 대한 토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데 과거의 모습을 변형하면서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어투가 조금 씨니컬하지만 나는 작품을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려내는 과거의 모습과 일화속에서 표현되는 주인공 나의 감정묘사의 섬세함. 시대상황을 너무 광범위하게 벌려놓지도 않고 주인공 나와 상관지어지는 사회현실상이 작품내에 적절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것 등등. 문장화 할 수 없는 뭉클함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앞서 작가 박완서와 조선일보와의 밀월아닌 밀월으로 인한 내 의심은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 박완서 자신이 이문열처럼 자신의 문학권력을 이용하고, 무지함인지 신념일지 모를 것으로 선택이나 아가 같은 작품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반공사상에 철두철미한 발언을 한 경력은 물론 없으며, 정치적 발언을 한 적은 거의 없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나쁜 것들에 대해 자기는 문학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모습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나와 올케를 향해 자신은 모르니 결백해 라는 듯한 행동양식을 취한 엄마의 행태가 박완서의 모습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니길 바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