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박완서,웅진씽크빅,2002)

    처음 읽은 박완서의 장편소설이었다. 전에 읽은 것은 단편모음집이었으니 일명 거장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참 늦게도 읽은 셈이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묶여 온 단편들의 섬세함, 역시 거장답다(?) 라는 그 역량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장편을 읽는 사이 시종일관 나는 자유롭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사실 작가 박완서는 내게 작품보다 그녀의 활동과 말들로 익숙한 작가였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을 지내고 있는 작가, 조선일보에 가끔씩 논설을 기고하는 작가, 더욱이 이문열의 거침없는 발언(?)에 항의하는 뜻으로 네티즌들이 이문열 책 장례식을 벌였던 그 때 조선일보에 이보다 더 시대의 비극은 없을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기고했던 작가… 그래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J-1비자’ 라는 살짝 반미감정이 드러난 작품을 읽었을 때도 놀랍고 아리송했던게 당연했다. 이게 웬일이람 하고. 사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지내는 것 자체만 두고 이 작가는 안 좋은 작가라고 딱지를 떼 버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우선 언론매체이고, 문학상이니깐. 그래서 기고하는 것 하나만을 가지고 작가에 대한 평가기준을 내려오진 않았다. 문학권력 논쟁의 태풍의 눈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비평가 권성우조차도 조선일보에 몇 차례 작품을 소개하는 기고를 한 적이 있는 것이다(그것에 빌미잡혀 강준만한테 질타를 당했지만). 하지만 박완서는 조선일보를 언론매체로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야합했다’ 고 여겨지는 여러 겹치는 활동들을 해 왔고, 그것과의 공조에서 얻어지는 권력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 거기에 문인들의 비판이 잇따를 때마다 조선일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라는 둥의 반응을 보여왔던 것이다. 비평가 정과리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 합류할 때조차 조선일보가 나쁜 줄은 알지만 그것도 언론매체이기 때문에 내부속의 비판자가 되보이겠다는 핑계를 달았던 사례(그것은 붙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를 보면 문인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극악함은 널리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겠는데? 하며 자연스럽게 손 맞잡은 모습. 그래서 작가 박완서의 작품을 피해왔었다. 사실 헤깔릴까봐 피해왔다. J-1비자 같은 작품을 볼 때 이 작가 도대체…뭘까. 라고 당황하게 되는 것. 더욱이 내가 충분치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으아.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래서 박완서의 이 장편소설을 대하던 와중에도 수없이 의심해보았다. 더욱이 6.25를 전후로 하여 이념갈등의 모습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었지만 미군 앞에서 그 단물을 얻어보고자 하는 한국인들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에 혐의를 두어야 할 부분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읽다가 판단정지. 자전적 소설인 이것에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데 있어서 작가의 주요 포인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 앞에서 내게 닥쳐온 것은 이런 것들이었고 전 이렇게 했답니다. 여기에 그리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었고 그렇다고 가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실 가학적인 서술은 일종의 치켜세움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그냥 솔직했다. 그러니 우선 외부의 박완서는 치워보고 작품을 한 번 보자.

    6.25, 피난, 생존을 위한 갖은 몸부림들, 주인공의 연애 등 그 시대의 갖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언제나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작품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처음부터 등장하고 있지 않다. 없는 가부장 때문에 가부장에 익숙해 있던 존재들은 차기 가부장을 찾고자 하는 데 차기 가부장의 유력한 후보인 오빠는 다리에 총구멍을 간직한 채 말을 더듬고, 광기에 접어드는 때도 있으며, 말도 안되는 떼를 써서 가족을 육체적 정신적 위험에 빠트리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는 오빠의 회복에 전념한다. 그것을 가부장의 복권 그 자체가 이 위기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최고의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 나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주인공은 가부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족들을 거리감 있게 바라보면서도 가부장의 복권을 내심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가부장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때문이다. 그녀가 가부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추측하기로, 가부장이란 직위는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로 자기실현을 포기해야 하는 존재이며 또한 주인공 일가의 가부장이라 함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노릇을 하기 위해 어찌 보면 비근대적일 수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올케와 주인공 나는 부양을 일부분 책임 지면서 가부장이 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지만 집안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양은 누군가가 해야 할 것을 대신 내가 잠깐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올케와 주인공 나의 속내가 있으며 거기에는 가부장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나의 엄마는 가부장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부장 역할의 일부분을 수행하는 데 그것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전통적, 비근대적 가치의 수호이다. 이런 미완의 가부장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 나에게 보이는 가족은 언제나 불안하며, 누구도 생계부양의 의무를 떠맡으려 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를 혐오하기 까지 한다. 작품은 주인공 나는 다른 가정을 꾸리고 그녀의 본가에선 올케와 주인공 나의 엄마로 꾸려지는 가정을 보여줌으로 해서 끝을 맺는데 주인공 나의 엄마는 일정 부분 옛 가치들을 단념할것 같은 예감을 보이고 있으며, 올케는 종래 가족이 바라던 가부장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이것은 가부장과 가부장제 자체의 부정이 아닌 비근대적 모습의 가부장이 근대적 가부장 모습으로 바뀐다라는 함의일 것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가족 내의 생계부양의 문제와 가부장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하고 있는 한편 급물살 같은 사회모습 속에서 안정을 바라고는 있되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보다는 근대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는 마음을 눈치챌 수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걸맞는 새로운 가부장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자체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근대화를 모두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재래적 관습(치료법 등)의 따뜻함, 구수함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산업화 속에서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감정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하나의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과 사건속에 대응하는 것들속에 드러나는 사회의식을 캐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이 반영일지, 어떤 것이 신변잡기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현재의 작가임에 주목할 때 그때는 그랬어 라는 생각에서 그때를 그랬어로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를 추측할 수는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맥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 속의 맥락에서 연관지어 생각해야한다. 작품 속에서 인민치하에서 본 무용극에 분노하는 모습이나, 어서 국군의 통치아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을 현재 작가의 반공 가치관에서 강조된 것이 아닐까 하는 판단은 너무 섣부를 수가 있다. 그 시절 다른 이념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불가능했던 조건에서 계속 국군아래 있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인민군을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작품속에 드러나는 가부장에 대한 기대, 위의 통치자가 있었으면 한다는 기대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였고 이어지는 현상에서 주인공 나가 그려내고 있는 시선이 어떠한가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작품에서는 주인공 나에 의해 가부장은 기대함과 동시에 부정되는데 그 부정은 종래 비근대적인 가부장의 부정이 되고, 근대적 가부장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산이라 함은 가부장, 전통적인 가치관들의 통칭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마치 힘겨웠던 군대에서의 경험을 후에 추억으로 삼듯이 비근대적인 가부장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 가부장의 조건지움이 오로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냉엄한 자본주의 시장 법칙에 대한 토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데 과거의 모습을 변형하면서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어투가 조금 씨니컬하지만 나는 작품을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려내는 과거의 모습과 일화속에서 표현되는 주인공 나의 감정묘사의 섬세함. 시대상황을 너무 광범위하게 벌려놓지도 않고 주인공 나와 상관지어지는 사회현실상이 작품내에 적절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것 등등. 문장화 할 수 없는 뭉클함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앞서 작가 박완서와 조선일보와의 밀월아닌 밀월으로 인한 내 의심은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 박완서 자신이 이문열처럼 자신의 문학권력을 이용하고, 무지함인지 신념일지 모를 것으로 선택이나 아가 같은 작품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반공사상에 철두철미한 발언을 한 경력은 물론 없으며, 정치적 발언을 한 적은 거의 없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나쁜 것들에 대해 자기는 문학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모습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나와 올케를 향해 자신은 모르니 결백해 라는 듯한 행동양식을 취한 엄마의 행태가 박완서의 모습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니길 바라지만…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이왕주,효형출판,2005)

    갑자기 택시에서 고등학생이 내리길래
    무슨 사정인가 봤더니만
    택시비가 없는 아이가 택시를 탔다고 택시기사가 떨구고 가버린 것이다.

    원래는 아버지가 매일 태워다 주셨다던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는 고등학생.

    외딴 곳에 돌아갈 방도도 없어서 신호봉을 들고있는 우리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그런데
    한 20분쯤 지났을까.

    어느 택시기사가 갑자기 서는 거였다
    택시비가 없어서 지나가던 차에게 가는 김에 데려다 주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그런데 택시비가 없으니 택시는 그냥 보낼 참이었는데

    지나가다가 도로에 서있는 우리를 봐서 다시 돌아왔단다
    행선지도 안물어보고, 차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선뜻 어서 타라는 택시기사 아저씨.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렇게 골고루 있는거다.

    헤헤헤

  • 영화 읽기(영화진흥위원회교재편찬위원회,커뮤니케이션북스,2004)

    도서관에서 영화 관련 기본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을 찾는데 다 예전에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좀 컬러플하고 그러면서도 쉽게 쉽게 설명한 책이 없을까 하다가 이 책을 골랐다. 사실 내가 원하던 그런 책이 아니었는데 좀 뜻밖이었다. 이것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과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 영화 이야기도 교과서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뜨아하고 여기던 내가 너무 갇힌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미술, 음악 등은 당연히 교과수업으로 편성되어도 영화는 아직이라고 생각하는 것. 제 7의 예술이라는 영화는 문학, 미술보다는 훨씬 우리 일상에 친숙한데도 불구하고 일명 작품성 있는 작품은 관객의 냉소를 받기 일쑤지 않는가. 그럴수록 영화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임을 왜 생각치 못했을까.
    국내 최초의 영화 교과서라고 한 이 영화 읽기는 영화 기술에 관한 정보 교육 보다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우해서는 어떻게 바라봄이 필요할 것인가에 목적을 두고 제작된 듯 하다. 예술영역의 교과서 답지 않게(?) 그 나름의 관점도 형성되어 있어서 재밌고 안재미있고의 이분법적 가치평가에서 다양한 가치평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 교재가 학교에서 활용되어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토론의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던 책은 아니었지만 새로웠고 기쁜 책이었다.

    *책으로 알게된 추천 사이트
    영상 미디어 센터 미디어 액트 www.mediact.org
    영상 시나리오 작가 협회 www.scenario.or.kr
    영화인 회의 www.kafai.or.kr
    한국 독립 영화 협회 www.coincine.co.kr
    한국 영상 자료원 www.koreafilm.or.kr
    한국 영화 감독 협회 www.kfds.org
    한국 영화 학회 www.fisak.com
    한국 독립 영화 협회 독립영화 데이타베이스 www.indiedb.net

  • [강화도] 폭우, 갯벌 그리고 히치하이킹

    강화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라는 말이 딱 맞는 곳이다. 서울 근교라고도 할 수있으면서도 지하철이 안다녀서 그러한지 왠지 어딘가 박혀있는 곳 이라는 생각만 들게 하고… 그 가까운 곳 언제 한번 갈 일 있겠지 하면서도 그 언제가 쉽사리 다가오지는 않는 곳이다. 저 멀고 먼 동해안, 안면도 등지는 핑계만들어서 가볼 일 있어도 강화도는 쉽사리 그래 지지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일까? 내게 강화도는 그러하였다. 국사시간에만 종종 나오던 강화도는 수도권 근교라 맑고 깨끗한 곳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리 가깝지도 않아서 기왕에 갈꺼면 좀 멀리 동해안이나 가보자 하는 식으로 떠돌아서 도로로 한박에 연결되어 있던 섬, 강화도는 쉽사리 내게 다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1학년때 역사기행 명목으로 강화도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때서야 강화도 지도를 처음으로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강화도는 정말 여러 장점을 지닌 섬이다. 가깝기 때문에 저비용으로 바다와 산 그리고 유서깊은 여러 역사 유적지까지 꼭꼭 챙겨다닐 수 있으며 강화도 본섬(?)이 좀 크고 도로와 연결되어 있어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면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여러 잔섬(?)들을 한번씩 가보면 작은 섬들의 정취를 정말 두루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강화도는 어디 한 곳에 관광객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 없이, 여기저기 두루 다니면서 느낄만한 곳이라서 여름에도 그리 북적대는 곳이 없다. 그러면서도 숙박을 해결할만한 곳은 웬만큼 갖추어져 있다.기행반 일행은 신촌에서 강화도로 한큐에 가는 버스를 탔다. 대교를 건넜긴 했어도 버스로 한큐에 가버리니 섬에 온 것인지, 아닌 지 좀 그러하였는데… 바다냄새는 별로 나진 않았어도 서울과는 다른 한적하고 적적한 여유로움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상점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있지 않아 좋았다. 여기저기 뿌려져 있듯 한 진들과 돈대 등 유적지를 먼저 탐방하는 우리 일행에게 우선 놀라웠던 것은 거의 무제한 히치하이킹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버스 대중교통이 그리 편리하게 되어있진 않았고 걸어갈 수 없어서 맛들이기 시작한 히치하이킹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총 8명이었는데…. 서로 편을 갈라서 히치하이킹을 하여도 차가 지나가기만 한다면 거의 10분도 채 안되어서 차를 잡을 수 있고, 거의 섬의 정 반대편까지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가시는 길이라면서들 데려다 주었다. 아! 이 섬의 민심! 하면서 맛들인 우리들은 그 이후 석모도에서 버스를 한번 탔을 뿐, 그 외 모든 교통수단을 히치하이킹으로 해결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역사기행이었지만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었던 우리 일행은 각종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는 솔직히 그리 큰 감회가 없었다. 정말 기억에 남는 것은 태어나서 가장 길었던 갯벌! 한밤중에 뛰며 걸었던 동막해수욕장의 갯벌은 바닷물 있는 곳까지 닿는데 30분 가량 걸렸다. 돌아올 때는 등대의 불빛이 우리를 졸졸 따라오더니만 그것은 육군 경비병의 감시망이었다. 밤에는 해안 출입금지 임에도 불구하고 쌩까고 갔던 우리는 이후 군인들에게 신분확인을 받아야 했지만…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우리를 기다렸던 나머지 일행이 우리가 영화 “해안선” 처럼 총맞고 돌아올 줄 알았다고 걱정하였지만, 어찌되었든 정말 잊을 수 없었던 장장 한시간의 갯벌체험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마니산으로 가려 하였던 우리 일정을 수정하여 바로 석모도를 갔다가 여행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하였는데, 비가 퍼부어 대던 석모도 보문사는 정말 “운치 있었다” 무슨 암자까지 엄청나게 많은 계단이 있었는데 우산을 쓰는게 부질없어 비를 그대로 맞아가며 나다녔던 보문사. 맨발로 걸었던 그 모든 정취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본래 3박 4일 일정이 폭우로 2박 3일 일정으로 줄여지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그리도 다이나믹한 기억을 남겨주었던 강화도. 여유가 된다면 이후에 꼭 한번 다시 찾아가 볼 섬, 내 기억속에 생생함으로 가까워진 섬 강화도였다.

  •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한 사람의 인생

    이 영화는 사실 좀 지루하게 보았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었던 배경지식(?) 혹은 추측이 완전히 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영화 포스터만 오래 전부터 봐 왔었는데, 어린애가 왕이랍시고 대신들의 큰절을 받고 있으니… 나는 코믹영화인 줄 알았다. 프린세스 다이어리나 뭐 주성치식 그런 영화 같은 것?

    보는 내내 도대체 웃긴 부분은 언제 나오지??

    이랬으니,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다!!!

    스토리를 지루하게 보고 있어도
    그래도 묘하게 끌어 당기는 것이 있었는데

    후에 생각해 보길 그것은 한 ‘사람’ 의 인생.
    황궁의 신기했던 것들이 차츰 지루해질 때 쯤
    격동하던 시대에 감옥에 갇힌 듯이 살게 되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한 ‘사람’

    그 사람은 한 인간이기 보다 하나의 조건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중 근본적인 것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해야한다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아이러니한 즐거움떄문이 아닌가

    그런데, 중국의 마지막 황제는 인간에 앞서
    조건지움의 생이었다.

    구역은 황궁. 품위는 황제 그러나 권력은 잃어버린 중국의 마지막 황제.
    영화는 여기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리하여, 격동기를 맞는 중국의 시대적 상황을 배제하고 있으며
    중국을 중국인의 눈으로 보기 보다 서구의 휴머니즘적 시각으로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나는 중국의 격동기 시기의 복잡다나한 문제들을 잘 알지 못하여
    서구 휴머니즘적 시각으로만 본 마지막 황제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에 생각해보기에 마지막 황제라는 근대와 현대의 격렬한 충돌의 시기에 가장 정점에 서있어야 할 인물이, 제국주의 점령과 투쟁의 시기에…

    그를 하나의 관찰자로 격하시키고, 인간극장 같은 영화를 만들어버린 면이 없지않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내 가슴을 퍽! 하고 떄리는 순간이 있어서
    나는 이 영화를 꽤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었다.

    몇십년을 감옥에서 보낸 예전의 황제였던 이 ‘사람’ 이
    공산주의 중국을 구경꾼마냥 지나가버리고

    그가 갇혀있던 황궁의 의자에 다가가던 그 순간.
    어린애가 묻는다.

    아저씬 누구세요?

    나는 예전에 이곳의 주인이었단다
    라고 대답했던가?

    어떤 말을 했던 그건 별로…
    그 보다는 할아버지가 다 되버린 그 한 ‘인간’ 이 해설프게 웃던 그 표정, 얼굴, 모습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한 순간에 강제되고,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인생이 어쩌면 멈추어버렸구나.
    그 동안 지나버린 기나긴 시간을 그가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또한
    자조적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지혜를 얻게 되었구나…

    하고 그 사람의 인생이
    내 가슴을 퍽! 하고 쳐버렸다.

  • [빌리 앨리어트-스티븐 달드리] 지금 나는 빌리 처럼 살고 있을까?

    빌리 앨리어트는 가장 오랫동안 아주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이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는 아무리 영화를 좋게 보았다고 해도 몇 씬과 함께 그것들이 주는 어리둥실한 느낌들로 영화를 추억하곤 하는데, 빌리 앨리어트만은 아주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서 발을 또각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다. 그것은 가끔씩 홀로 묻는 질문 때문일것이다

    지금 나는 빌러처럼 살고 있을까?

    나는 지금 나에게 충실한가? 나는 지금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럼 적어도 꿈을 향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가?

    탄광촌 마을의 시멘트 바닥에서 발가락이 부러질 듯 춤을 추는 빌리. 마치 자아를 저주하는 듯 광기에 서려있다. 나는 왜 발레를 좋아하는가. 발레를 출 수 없다면 이 발가락을 부러트려버리고 말겠어. 라는 듯 빌리의 춤은 그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결국 보수적이던 아버지도 형도 빌리에게 발레를 허용하고 만다. 결국 비상하는 빌리. 그 빌리가 있기까지 아버지는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파업이 진행중인 광산의 엘르베이터를 타고 말았을 것이다.

    꿈을 가진 것, 그것을 향한다는 것이 위대한 일이고 당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이 잔혹한 현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동화같지만 않은 현실의 중압감. 영화는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의를 배반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랬다면, 빌리 아버지가 엘르베이터 타는 모습이 그렇게 암담해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후에도 쇠락해가는 광산촌을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와 빌리의 형을 그려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중압감 속에서 자기세대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빌리에게 투영하는 것. 왜 다음 세대에 넘기는가. 자기세대에서 끝장을 봐야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이것은 중요한 한계이기도 하면서 지극힌 현실적인 반영이기에 그 문제의식과 풀이과정을 이제 빌리 앨리어트를 본 관객들에게 넘기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국적 자본을 비판하면서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
    제 3세계에서의 노동착취를 안타까워하면서 나이키 신발을 신는 것.
    한달을 10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이어나가는 극빈층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따뜻한 아랫목의 낭만적 겨울을 생각하는 것.
    어쩌면 여가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
    어쩌면 인생을 즐겨라 라는 단어 자체.

    내 자신의 외부의 것들을 모두 부정해야만 하는현실.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런 현실속에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딜레마이고
    그러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함부로 자신이 타자와의 존재가치를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내 자신을 내가 심판할 수는 있다.

    최소한의 선을 두는 것.
    가볍지 않은 꿈을 꾸는 것.

    내 꿈을 살아가려는 그 지난한 과정.

    외부의 타협적이고 고정적인 가치들이 정체하라고 말할 때
    한번 내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빌리처럼 살고 있을까?

    그 언제라도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 끝없는 물음의 과정속에서
    어느때에는 빌리처럼 비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샤인-스콧 힉스] 불멸의 영화

    어제 그리고 그제
    잠을 많이도 잤다

    그래서 오늘은 참았다

    그 대신 거의 아무것도 못했다.
    낮에 독일어 공부를 좀 하긴 했으나 저녁 이후로는…
    거의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함이 옳으리라

    글도 안 쓰고
    책도 안 읽었다

    그래 오늘은 잠 참은 적응기간이라고 치자
    내일부터가 진짜일테다!

  •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충만한 기쁨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영화일것이다.
    추석특선이었던가에서 처음 본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TV에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빙을 하지 않고 있었다! ㅋ 그럴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지만, 암튼 특선으로 본 영화가 너무너무너무 좋았던 어린 나는….

    집근처 비디오샵이 망하자 누나를 설득해, 저건 소장가치가 있는 영화라면서 구입을 권유했던 것이고… 이후 시도때도 없이 봐서 이후 그 어떤 영화도 이 영화만큼 많이 본 영화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대적할 영화를 찾는다면, 나홀로 집에 정도가 될려나? ㅎㅎ

    음악영화를 너무도 좋아하긴 하고,
    또 이 영화에 나오는 노래가 너무도 좋기도 하였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보게 된 연유는… 그 어느 장면을 보든지 충만해 있는 감정들 때문이었던 것같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있다.
    너무도 눈부시게도… 꽉 들어 차 있는 그것.

    거기에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끼어들고만 싶어서
    집에서 이 영화를 틀고, 또 틀고… 영어 노래인데도… 쉬운 것은 어린 나이에도 가사를 조금 외워 흥얼거리고도 했었다.

    그때도 특선명작이었던 것이, 이젠 정말 고전영화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이 영화…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재생된다면

    난 더없이도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그녀들의 기쁨과 환희에 겨운 노래들
    아… 듣고싶네

  • [스왈로우 테일-이와이슌지] 유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옌타운이란 단어가 있다. 옌이 한창 고가를 달리고 있을 때 못사는 나라의 못사는 사람들이 고가인 옌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본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어 일본을 옌타운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옌타운이라고 불렀다. 그렇게되어 옌타운은 이주노동자들이 부르는 일본이기도 하며, 일본 내의 이주노동자를 지칭하게도 되었다. 옌타운에 사는 옌타운들의 삶 속의 꿈을 그리고 있는 영화가 스왈로우 테일이다.

    삶의 단면, 생활의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 영화의 특이한 연출 때문인데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환상할 법한 것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로 My Way 노래 테이프를 찾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등장인물, 위조지폐를 이용해서 쉽게 부자가 되어 버리는 옌타운, 국제 경찰 조직 인물들과 그 행위, 사회의 밑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등장인물이 일본열도를 뒤흔드는 일본내 대스타가 되는 이야기. 그 하나의 소재가 영화 하나를 만들만큼 영화적인데, 이것들이 뭉뚱그려 있으니 이것은 참 특이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유쾌하기도 하다. 생각해보길, 킬러의 존재는 참으로 비현실적이지만 킬러 소재 하나만 영화가 채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걸 제재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납이 된다. 그런데 그 킬러영화에서 갑자기 불치병이야기도 나오고, 외계인도 나오고, 거대 태풍이 몰아쳐서 도시가 잠기는 이야기도 나와버린다면? 각자 어느 영화의 제재나 될 법한 것들이 소재로 앙증맞게 혹은 뻔뻔하게 자리잡고 있어 버리니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 앞서 이것들은 무엇일까 하고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이것들은 도대체 뭘까? 이 비현실적 상상력들이란.

    -뭘까?
    그것들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치부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린다.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옌타운과 국가 정체성 문제도 짚고 넘어가고 싶고, 성장 이야기도 말해주고 싶고, 돈 앞에서 선 인간들의 이야기도 말해 보고 싶고 등등. 그런데 예술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 메세지로 명료하게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야기속에 어떻게든 쑤셔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는 그 사건들이 제법 있을 법한 일들이라고 개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의 사건들에 개연성을 모두 집어넣으려면 이야기를 굉장히 길게 끌어갈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압축하자니 어설프게 보일 것이 뻔하고… 그래서 아예 포기를 한다. 개연성 따위는 집어치워! 보여줄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큰 테두리 줄기 아래 곁 테두리 소재들의 엽기적인 출몰들. 그러나 이 포스토 모던틱한 무의미성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큰 테두리의 스토리라인조차 침범할 경우 그 영화를 완전 쓰레기 영화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만 한다면, 영화 자체가 쉬어진다. 개연성 불가와 개연성의 범주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유롭게 보여줄 것을 아주 쉽게 등장시키고, 생략할 것을 마음대로 생략하는 제작자 위주의 영화를 마음놓고, 대놓고 만들어 제낄 수 있기 때문. 또한 무의미한 척 했던 것 중 어떤 것에 살짝 의미를 덧씌우기를 한다면 영화는 ‘뼈 있는 농담’ 을 했다는 호평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영화(?) 는 그 모든 스토리 간에 구분선이 묘연해지고, 어떤 것이 유효하고 어떤 것이 유효하지 않은 것인지, 관객조차 내가 저것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던지, 감동했던지 조자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감동을 얻지는 못하였는데 어떤 마음의 움직임은 얻었는데 그것이 ‘새로운 감동’ 인 것인지 그저 ‘색다른 느낌’ 이었던지 판단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효성과 불필요의 구분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끝도 없는 SF란 상상력의 낭비이고 광대함이 광대해진만큼 공허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뜻 밖의 살인사건으로 부터 시작되는 엉뚱한 이야기들은, 그 큰 줄기를 이루는 위조지폐 사건, 클럽의 비약적 성공 사건, 대스타가 되는 사건, 메이홍이 죽는 사건에서는 유효하나 그 외의 것에서는 굳이 그 정도로 엉뚱함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점을 낳게 한다. My way 테잎을 찾으려는 것,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것 말이다. 테잎 찾기와 국제 경찰조직은 영화에 액션적 요소로서 볼 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방대하게 만들어 버렸고, 너무 엉뚱하였으며, 큰 줄기 이야기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한 마디로 불 필요한 부분에서 오버했다. My way 라는 노래로 하여금 인생의 길과 제 인생의 장애물들, 변해버린 자아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의 비약이 너무 심했던 듯 하며, 국제 경찰조직 같은 경우는 위조지폐를 만드는 배경이 되긴 하였으나 그것을 위한 필연으로 등장시킨 경우 치고는 너무 광대하였고, 의뭉스러운 점을 너무 많이 만들고 있다. 거의 묻지마 등장으로 일관하고 있어버리니 좀 황당해질 수 밖에… 이 모든 SF적인 요소들은 그래도 영화 자체에 이미지 형성 혹은 분위기 형성에 있어서는 적합하게 묘하고, 엉뚱하고, 쎈티멘탈하고, 삽화적인 느낌으로 착실히 녹아내려 있다. 하지만 영화는 분위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앞서 말했듯이 엉뚱한 것들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압축, 생략, 상상력의 발현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영화기법은 아주 유효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분별한 확장으로 영화 자체를 분위기로 이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므로 영화의 스토리 라인 일부를 사건으로 떼 내어서 말해 본 것이다.

    – 엉뚱한 것들을 모두 껴안아 주는 것은
    매우 광대한 스토리들, 수많은 등장인물들, 개연성 불가의 이어짐들 이것들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영화자체가 그리 산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 진행을 보여주는 것들은 고백체 혹은 1인칭 주인공의 나레이션에 상당부분 의지하여 안정감을 유지한다.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같은 경우가 그런 일면을 볼 수 있다. <스왈로우 테일> 에서도 초반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자막과 함께 등장하던 나레이션은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양하고 광범위한 이야기들을 산만하지 않게 소화하고 있다. 그것은 그 광범위한 이야기를 우선 1인칭 주인공의 한에서 소화해내고 있고, 그것이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와 결부되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성장 이야기야 말로 가장 거대해질 수 있는 스토리라인일 수 있다. 일부를 유아기적 상상력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고,  일부를 성년기의 새로운 세상의 모습으로 치부시킬 수도 있는 양면의 장점. 스왈로우 테일에서 주인공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주인공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어, 주인공은 외부의 것들 모두를 수용한다. (아니 수용하기 보다 외부의 것들에 반발하려는 의지가 없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어이없는 것을 어이없게 여기지 않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따라와야 할 법한 지저분한 고정관념과 충돌들이 없기 때문에 영화는 모두를 수용하면서도 그리 산만하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가 계속 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성장한다. 백지상태라고 여겨졌던 주인공의 과거는 결코 백지상태가 아니었다. 문신을 하는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낸다. 성장을 위해서 자신이 누락시켰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한 마리 나비로 성장하여, 한 주체가 된다. 가만히 있었던 주인공은 이제 자신이 무엇인가를 꾸미게 되는 데 그 행동양식이 옳건, 그르건 주인공과 함께 호흡했던 관객들은 이 성장의 모습이 감동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감동을 위한 초석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조금 넓히면 옌타운인데, 아무리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도 그들 모두의 이야기 주체는 옌타운이라는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선은 일관된 것이다. 1인칭 주인공의 성장이야기, 옌타운이라는 동일한 목소리라는 시선이 이 영화의 광범위를 수용해주는 동력이라면 동력, 원천이라면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
    영화에서 주 타격대상이 되는 것은 돈이다. 돈은 영화 초반부 주인공 엄마의 죽음에서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못치루고, 그녀가 모아 둔 돈을 티격태격 하는 모습, 그리고 중반부 위조지폐로 쉽게 벌리는 돈, 주인공이 위조지폐를 만들었을 때 위조지폐를 찢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모두가 목숨 거는 돈이란 결국 무용한 것 이 이야기이다. 언제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수많은 뻔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감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왈로우 테일>에서는 돈은 의지만 있으면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 현대사회에서 돈에 부여한 그 주체를 탈각시키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 그것은 바로 위조지폐로 돈을 산더미처럼 모아 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라면 찢어도 상관 없는 것, 너도 찢어봐, 나도 찢어볼게 하는 식의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그것이 결국 마지막 돈을 태우는 모습으로 결부되는 것. 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놀랍고 현실적인 발상으로 만들어버린 시선이 놀랍다.

    -정체성
    옌타운은 일본 사람도 아니고, 자신들의 고국 사람들도 아니게 된다. 돈을 벌어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옌타운이다 라고 하고, 그들만의 클럽을 만드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는 그리 소용이 없어 보인다. 그저 동일성을 형성하는 집단이라면 그 집단 내부의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고 산다면 그 집단을 국가에 앞서서 생각해봐야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에는 일본인처럼 생긴 옌타운들보다 일본어를 훨씬 잘하는 미국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은 옌타운들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한 소리다. 그러면 모든 것은 분화된다. 국가라는 정체성으로만 상정하기에는 그것들이 포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협소한 것이다. 옌타운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일본인 처럼 생기지 않은 일본인들도 국가로부터 떨어져 있고, 또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수많은 비주류들은 국가가 포함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이런 국가 정체성의 협소한 모습의 지적.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유효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최종후기
    난 사실 영화를 매우 좋게 봤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게 보았던 부분은 영화의 분위기 자체였고, 영상미와 일부 의미심장하게 하려 했던 대사에 기인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바로 후에 반성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저곳 이 후에 다시 뜯어보았다. 이 생각의 과정은 아주 오래걸렸다. 영화 스토리의 일부분을 잊을정도의 시간동안 이 감상문이 쓰여졌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매우 후련하다. 이 글로 하여금 <스왈로우 테일>은 내게 새롭게 왔다. 확신하건대 더욱 좋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도록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의 울림이 더욱 깊어졌으며 더욱 오래남을 것만 같다.

  • [다섯손가락-수요일엔 빨간장미를] 그 옛날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주고파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슬퍼 보이는 오늘밤에는
    아름다운 꿈을 주고파

    깊은 밤에도 잠 못 이루던
    내 마음을 그녀에게 주고 싶네

    한 송이는 어떨까 왠지 외로워 보이겠지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꺼야

    시린 그대 모습 씻어주고 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슬픈 영화에서처럼
    비 내리는 거리에서

    무거운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습관일진대 나는 서먹서먹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옆에 있어도 그야말로 대놓고 노래를 흥얼거려서 주위 사람들의 핀잔까지 들어가면서도 더 억지스러운 흥얼거림을 하는데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정작 또 사람들이 그래 너 한번 노래한번 해봐라 하고 멍석깔아줘서 노래를 시키는 것은 또 엄청 싫었다. 노래를 잘 못하기도 하고, 가사를 외운 노래가 거의 없기도 하고, 무대 공포증(?) 때문이기도 하고… 등등등. 그야말로 장난꾸러기 너 그래 어디 한 번 판벌려 줄게 맘놓고 저질러봐라 할 때 아무것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누나들은 노래 테이프 인기가요 테이프 대신에 줄기차게 PEACE 라고 하는 피아노 악보를 사왔다. 그것은 인기있는 대중가요를 피아노 음계로 편곡하는 것으로 악보당 500원주고 음악사 등에서 파는 것이었다. 나는 음자리를 볼 줄은 모르고 단순 거기에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사진이 있고 또 내가 못 외우는 가사가 바이브레이션 부분까지 물결로 그려지면서 착실하게 기재되어 있어 정말 할 일 없고 심심할 때마다 그것을 옆에 쌓아두고 한 곡씩, 한 곡씩 부르고 놀고 그랬다. 그 중, 유독 수요일 빨간장미를의 PEACE 만이 다른 악보처럼 누런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어서, 단순 그 이유 때문에 그 노래의 유행이 한참이나 지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PEACE를 찾아서 부르고 자연히 흥얼거리고 그랬다.

    6학년때던가, 5학년때던가. 이미 한참이나 유행지난 수요일에 빨간장미를을 매번 흥얼거리던 내가 우스워보였나보다. 몇몇 짓궂었던(내게 있어서 이제 그녀들은 짓궂다!) 여자아이들이 내가 무슨 일로 교단을 서게 될 일이 있자 담임 선생님을 추동하여 수요일에 빨간장미를 노래를 시키라고 했다. 아아! 정말 그 순간 앞이 시커멓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 모두가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노래라니. 동요도 아니고 유행도 지난 대중가요라니. 거기다가 가사도 다 못외웠는데! 가사를 모른다고 뻐튕겼더니, 맨날 흥얼거리면서 모를리가 있느냐고 반박. 정말 모른다고 뻐튕기니 그럼 맨날 흥얼거리던 그대로라도 한번 해보라고 당하고..

    앞이 시커먼 가운데 나 혼자 가사를 막 지어내서 억지로 쥐어 짜듯 수요일에 빨간장미를을 노래했다. 지금 생각들기로는 그저 앞에 가서 노래한거구만! 일텐데 그때는 꽤나 부끄러웠고, 나를 단체로 타박하던 그 여자아이들이 짖궂게만 보여 억울했던지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날이 비오는 수요일이었던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 데 지금 돌이켜 보길 그런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