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이상은-신비체험] 여름, 한 평짜리 방 안에서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초록빛 달과 붉은 대지와 마음속의 낙원, 그 낙원속의 나)

    달은 휘영하고 포도주는 향기롭구나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영원한 지금일뿐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상쾌한 밤 공기에 몸이 녹아드는구나
    우리는 영혼만 남아 밤새워 춤을 추누나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아아 우리가 떠나온 도시..얼음모래가 내리던

    말해줘 말해줘 더이상 슬프지 않다고
    노래해줘 노래해줘 우리는 하나라고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아아 우리가 떠나온 도시..얼음모래가 내리던
    아아 짙은 회색 하늘 아래 모두가 노래를 잊었지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웃어주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초록빛 달과 붉은 대지와 내눈속의 그대..그대 노래 속의 나
    금빛  은하수와 은빛 공기와 마음속의 낙원, 그 낙원속의 나)

    우연히도 이상은을 좋아한다던 사람들을 동시간대에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이상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 것 같긴 한데? 하면서 담다디를 불렀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누군가의 미니홈피에서 “비밀의 화원”을 들었으면서도 그것이 이상은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기 영역이 있는 어떤 중년 가수겠지

    하는 그런 느낌만 있었다.

    이상은 12집이 이제 막 나오던 순간.

    우연히도 어느 클럽에선가, 누군가 한국 음악계를 비판하면서 이상은만은 제대로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던 것을 보았고, 그냥 관심이 없어 그런갑다. 했는데 아는 선배들 몇몇이 가수 누구 좋아하냐는 내 질문에,

    난 취향이 노인네틱해서 이상은 이런 애들 좋아해.

    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냥 호기심이었다.

    이상은? 누굴까? 하는 마음으로…

    당시, 약 1평짜리 자취방에는 컴퓨터도, mp3도 없어서
    CD Player로 스피커에 연결해서 음악을 듣곤 했는데

    여름 밤, 그 좁은 방에 울리던 이상은 11집이 얼마나 생소하던지 말이다.

    난 음악을 거듭 몇번씩 들어봐야 좋은지, 나쁜지를 아는데

    이제껏 들어왔던 그런 음악이 아닌 음악이었고

    지독하게 밀려오는 감정들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독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듣다보면 좀 스산해지기도 한 그 음악들을

    그래도 나는 부둥키고 있었다.

    왠지 오기가 생겼기 때문.

    왜 난 “비밀의 화원” 만 좋고

    나머지는 다 독해불가인거야!

    하는 오기.

    이상은이라는 중년가수를 이해해보고 말겠다는 오기…ㅋㅋ
    그래서 끊임없이 이상은의 11집 <신비체험> 을 들었는데

    그야말로 앨범제목이 나와 꼭 드러맞지 않은가 한다.

    그녀의 감정의 뭉텅이들이

    여름 밤, 1평짜리 방안에서 울리는데

    하나씩, 하나씩

    갑자기 던져지는 것이다.

    단어로 형용하기에, 감정이란 부유물은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할 때는 그리움이 툭 던져지고

    어찌할 때는 외로움이 툭 던져지고

    어찌할 때는 회망, 강인함, 추억 이런 것들이 툭! 툭! 던져져 왔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그 던져진 감정들과 놀아남이

    내겐 얼마나 소중했던지.

  • [김연우-연인] 그리움과 외로움 속에서

    가끔 힘이 들때면 하늘을 봐요
    좋은 생각만 하기로 해요
    그대맘속에 내가 있다면
    멀리 있는게 아니잖아요

    떠나오던 그날 두눈에 고인눈물 감추려
    친구들 뒤로 숨던 그대가 자꾸만 밟히죠
    가끔씩 그대 목소리 어딘지 다르게 느껴지는 날에
    난 아무말도 묻지못하고 나쁜생각만 자꾸하게 되죠

    사실 편하단 얘긴 거짓말이죠
    모든게 낯설고 힘들지만
    그대생각에 난 힘을내죠
    내가 그대를 행복하게 해줄께요

    첫눈오는 밤도 곧 다가올 그대의 생일도
    함께해주지 못한다는게 미안할 뿐이죠
    가끔은 그대생각에 한숨도 못잘만큼 보고싶지만
    나 그대에게 더욱 커다란 사람이 되고싶은마음 아나요

    사실 편하단 얘긴 거짓말이죠
    모든게 낯설고 힘들지만
    그대생각에 난 힘을내죠
    내가 그대를 행복하게 해줄께요

    그댈 향한 마음 바다를 건너서 그대의 꿈속으로 찾아갈께요
    그대 괜찮단 얘기 거짓말이죠
    보고싶을수도 있겠지만
    끝이란 말이 생각날 만큼 울지 말아요
    그대만은 지킬테니까

    좋은 생각만 하기로 해요
    그대맘속에 내가 있다면
    멀리 있는게 아니잖아요

    원래부터 고운 목소리로 좋아했던 김연우인데

    듣다 듣다보니 조금 질리는 듯 해서,

    계속해서는 안 듣고, 잊어버릴 때쯤 찾곤 하는 가수였다.

    그런데 내가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쳐 하던

    제주도에서의 2년동안의 시기에…

    제일 위안이 되는 것은 책과 음악이 되주었다.

    특히나, 책은 가만히 앉아서 읽는 것이지만

    새벽녘에 도로 위에 줄곧 서있어야 하는 그때 시절에

    정말 이내 마음을 달래주던 것은 노래들.

    그 기간 중 줄곧 mp3에 넣어두고선

    들어왔던 곡이 바로 김연우의 8211과 이소라의 Sharry였다.

    캄캄한 밤.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차들만 쌩쌩 달리는데

    또 그 차 안에서는 단란한 것만 같은 사람들이 어디론가로 마구 달려가는 데

    그 사람들 행복의 단면과 단면.

    그 간격에

    나는 존재로 있지 못하였고, 기능으로만 존재했던

    그 순간.

    내 감정을 줄곧

    커다란 주걱을 휘젓듯이 뒤엎어주면서

    네가 지금 살아있다

    라고 말해주었던 그 노래들.

    그러면

    내 자신의 현재는 없이
    내가 끝도없이 과거와 미래의 양극으로 멀어져만 가는데

    그것을 어디에도 없는 존재, 내가

    관찰하면서

    유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소라-눈썹,달] 나도 아파했던가?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우리 큰 누나가 이소라의 노래를 종종 부르긴 했으나, 그 우울한 노래 부르는 사람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그 사람에게는 뭔가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스물한살에서 스물두살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정말 어느날 갑자기 이소라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소라 노래가 좋다고 했고, 인기는 없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좋다고 자주 오르내리는 노래들 찾아듣는 습관으로 이소라 음악을 무작정 틀어두었다.

    그게 어느 겨울, 고지대에 있던 원룸형 내 자취방안에서였다.

    그 때, 왜이리도 할 일이 없었을까. 잠깐의 공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갑자기 찾아온 겨울방학의 시기가 얼마나 차가웠던지 난 생각할, 생각해야할 것들을 앞두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바쁘고 바빴던 시기. 그리고 또 바쁠 것 같은 내년.
    내 젊음에 왜 그렇게 여유가 없지? 이렇게 졸업앞까지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한 쪽에서는 왜 군대를 가지 않느냐고 묻고, 한 쪽에선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난 자신있게 그 무엇도 말하지 못하였고
    그저 버티는 내년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을 간직하면서도
    내년을 간절히 기다리기도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힘들다 라고 투덜대고 싶어했던
    그저 이도저도 아니면서 복잡한 겨울중이었다.

    나 자신도 모를 내 자신의 기분과 인생과 젊음 때문에
    그 자체의 스트레스 때문에 방 안에서 그저 잠을 자고, 깨어 있으면 이소라의 노래를 틀어두었다.

    잘 모르겠던 ‘귀신같은 목소리’ 가 어느 순간 들리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이소라의 앨범 때문에 내가 그런 상태에 휩싸여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에와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고

    난 그 차디찬 젊음의 고통(?)을 이소라와 함께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
    기뻐했던 것 같다.

    이렇게 간절한 감정이 있구나.
    느낌이 있구나.

    이소라의 노래에서 나오는 호소는 그때 내게
    비교대상으로 위안하기 보다 ‘그녀와 마주앉아 있기’였던 것 같다.

    약 한시간 동안 플레이 되는 이소라 6집을 듣고 있는동안 죽은 듯 누워있고
    음악이 모두 끝나면 ‘연극이 끝난 뒤’ 의 허탈감을 또한 간직하고
    또 한참을 누워있었던 그 때였으니깐.

    솔직히 이소라의 앨범이 그 때 내게 분연히 일어나게 하는 의지와 치유의 효과는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소라의 앨범은 나를 지독한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사람들을 잘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잘 안하고…

    그리고 후에 그 시기가 끝이 났을 때에도
    기억속에 이소라의 앨범은 치유보다는 그저
    깊은 감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있지 않은가.
    감정의 결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이소라의 목소리.

    그 늪의 매혹.

  •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창비,1994) : 상흔 그리고 솔직한 현재

    지나가 버린 시대에서 한 인간이 구성되어버리고, 혹은 그 시대에서 생성되었다면 그 인물은 지나간 시대를 추억할 수 없다. 기억한다고 말하기 조차 거리감 느껴질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나야! 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모두가 그 시대는 이미 끝나버렸다고 말해버린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존재의 변이뿐인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형되어왔던가? 하지만 시간과 역사와 인간의 구성물들은 마음먹은대로, 이성적으로(혹은 이해타산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 변하지 못할, 변하지 않은 인간이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어쩌면 자신이 희망이 될 것만 같은 아무것도 모를 사람에게도 이야기한다. 부르짖지 않고, 울먹이지 않고, 그렇다고 더듬더듬 힘겹게도 아니고, 나긋나긋은 더욱 그럴리 없고… 어찌보면 의뭉스럽게, 어찌보면 완고하게, 어찌보면 아파라고 직설적으로…

    좀 더 인간적으로, 좀 더 민주적으로, 좀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을 열정으로 꿈꾸었던 시대. 그 속에서 만들어졌던 자아는 이제 모두 배반되어야 하나보다.
    그럴 수 없는 것. 그땐 그래야 했었고, 지금은 이래야만 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단순 감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치기어린 의협심을 따질것도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느껴지는 것들. 그래서 ‘아직’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고, 어떻게든 버텨왔던 것이고, 기다려왔던 것인데 ‘하나 둘씩 떠나버리네, 아쉬운 사람들’ 이 어느 순간 이젠 목청 높여서 끝났다고, 끝나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목숨바쳐 지지키려 했던 것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이전의 것들은 유행지난 것일 뿐이라고 싸움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인가?

    추억이란 감정만을 대동하는 것. 아니 좀 더 하면 몇 줄의 멋진 약력일뿐? 나는 마치 그때 이소룡의 매니아였어라고 이야기 하듯 매니아들의 번지르르한 자부심의 증거가 될 추억. 추억에서 그리움의 감정이나마 느낀다면 그것은 조금 더 양심적인 것일까? 그러나 최영미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추억 그리고 그리움과는 거리가 멀다.  4월을, 5월에를 부르짓지 않겠다는 작자는 과거가 지금껏 자신에게 남기는 상흔들을 반사된 표면들에게서 응시하고 그것을 다시금 받아들인다. 상흔의 반사 그리고 수용이라 함은 고통을 수반한다. 바로 그때의 고통에의 공감에서 오는 고통, 공감 이후의 자신에게 지어진 의무에의 고통, 현재와 자신과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고통. 그 아픔의 감정을 아파라고 이야기 하는 시. 4월을 그리고 5월을 노래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것이 이미 끝나버렸다고 인정하는 것일진대, 그녀에게 그날들은 죽지 않았다고, 평생을 아파하더라도 지고가겠다고 끈질기게 그날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은

    과거를 지켜보는 감정은 시간과 세월과 하늘과 함께 온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과 세월속에 늙어가는 자신. 그리고 얄밉게 서럽게 생겨먹은 하늘. 부대끼며 산다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간과 세월은 흐르고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작자는 시간과 세월을 자신의 나이로 소화시키고 하늘을 전신주위에 얹힌 그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의 소산이기 보다 시간과 세월의 흐름속에서 느껴온 감정과 느낌의 축적물에 기대어있다.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늙어가는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은 사랑을 기다리고,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위해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상을 펴는 이가 그녀인 것이다.

    하지만 상흔의 응시와 자아로의 받아들임에서 오는 고통은 그녀가 선택하였기에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진정 회복제로써 기능 할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 그리고 상처 이후에 넘어 설 ‘치유’가 작자의 시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변이를 뜻할 수도 있는 치유는 거부하는 것이 옳을 것임에 돌알을 깨물듯이 곱씹고 곱씹으면서 진정 올 치유를 기다리고 기다리겠다는 것인데 그 순간 독자는 내가 바로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하루하루를 같이 아파하면서 어느시절처럼 어깨동무하면서 목청 부르짖거나 하진 못하여도 끈질긴 인생을 동반하여야 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상을 펴두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와 함께 나설 수 있도록 그렇게… 그런데 지금 그녀의 이야기는 메아리 치고만 있지는 않은가. 그저 향수로, 추억으로 예전의 이야기로 그녀가 서러워할 그리움이라는 것으로 그렇고 있지는 않은가. 창자를 꺼내듯 영혼(느낌과 감정의 시간적 집적물들이란 용어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어찌할 수 없이)을 해부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그저 허탈해하는 군중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시집은 물어보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나, 당신과 함께 기다리게 될 것이나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기다림의 정서가 시 내면 깊숙깊숙히 그리고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한번 생각하게  하는데, 그날이 올 것인가? 살가죽을 벗겨서 장구를 만들고 징을 울려댈 그날이 올 것인가?

    하지만 그날은 오지 않는다.
    그녀가 온갖 창자를 다 해부하고 이야기를 하여도, 지나간 시대의 상처를 현재까지 품고 있는 그 허심탄회함에도 그날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그 날 ‘ 왔다 하여도 그것을 이루었던 칼자루와 총자루는 그 순간 뒤엎어져서 기뻐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깊숙히 찌를 것이다. 인간 그리고 인간들의 세상속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수는 있어도 모두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절대적인 그 날은 올 수 없는 이상향인 것. 그 이상향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어떤 이상향이었던지 어떻게 가야되는지를 말해야 조금 더 많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역사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지양의 발걸음. 오늘 하루를 사는 순간이 바로 공산주의다라고 선언할 삶.

    최영미의 시는 과거를 소환함의 고통과 자아를 배반하도록 상처남기는 것들, 그리고 시간과 세월 속에서도 끊임없는 기다림. 이것들인데 어쩌면 당연하게 생겨나는 감정일지 모른다. 거기에까지 이른 작자의 끊임없는 성찰은 진정 우리시대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소중하기 때문에, 작자의 시가 노래이지 않기 위해서 과거가 현재에 도달해서 온 성찰과 양심적 감정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펼쳐내야만 한다. 그것은 작자와 우리들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 짜장면(안도현,열림원,2000)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을 쓰기는 난해하다. 그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것이 전해주는 가슴의 울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서 거리를 두고 메스질을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메스질은 해부학처럼 마구 찢겨지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성역을 치고 그것에서 느끼는 아련한 감동을 아련한 것 이상 어느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느끼게 하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이렇게 도식적인 질문은 경계하더라도 어떤이라는 물음은 부득이도 필요한 것이다. 사회성과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가만 놔두지 않고 침범하는 것이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어떤 감동이던가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그 작품과 작가를 위한 최대한의 배려일 것이다.

    안도현의 <짜장면>을 읽었다. 전에 안도현의 몇 구절의 시를 훑어본 것 외에 아는게 없는 작가였다. 이름이 익숙한것으로 보니 꽤 유명한 작가인가보다 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짜장면>은 성장이야기인가?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가 이어진다. 어른이 읽는 동화를 표방하는 <짜장면>에게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초월을 이야기 하는 것일거다. 지나친 초월성과 다르게보이기는 우리 시대 어떠한 것들이든지 팽배하여서 더 자극적인 것, 더 엽기적인 것의 행태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짜장면>에게서 거기까지를 기대하지 말자. 익숙한 것들의 이야기 속에서, 일상성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들은 수없이도 많다.
    17살 주인공. 전교1등을 놓쳐보지 못했던 아이가 반항이라고 불릴만한 일탈을 한다. 이유라 할 것은 어른들의 세계속에 짓눌리는 자신이고 싶지 않아서, 그 아이가 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탈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인 오토바이를 탄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주인공. 만리장성의 배달부가 된 주인공은 주변 상가와 젊은이들간의 일상성속에서 사회에 대한 관찰을 시도한다. 중화요리를 시켜먹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들, 하지만 <짜장면>이 그것의 주된 포커스는 아니다. 주된 포커스는 주인공의 젊음과 방황 그리고 그의 가정이다. 모범생처럼 길들여져야 하는 가정. 권력욕과 가정폭력이란 실상을 감춘 체 거기로의 편입을 강요하는 세계의 지리멸렬함에서 일탈하는 청년이 이제 선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양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자신이란 존재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아 버리고, 짜장면에 버무러지면 짜장면이 되고 마는 양파. 양파까던 이의 손끝에 독한 향을 남겼다가도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 양파. 그것이 우리의 젊음이란 말일까? 젊음의 열정은 그렇게 한꺼풀 한꺼풀 벗겨져버리고는 이내 사회속에서 침윤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침윤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장이다. 짜장면이라는 요리는 분명 양파를 필요로 하는 것. 양파는 짜장면을 이루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잊었던 것을 생각하자.
    잊고 있었던 것 획일성의 사회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자는 것이 주된 교훈처럼 들린다. 짜장면은 양파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젊음의 열정에서 성공의 신화로 둔갑했던 것이 우리 사회 자양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정하려는 사회의 논리는 새로운 자양분들이 어떻게 양질의 것이던가 판단할 여유조차 두지 않은 채 짓눌러버리려고만 한다.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방황이 마구 돌출되는 것이 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른과 닮은 청소년, 어른과 닮은 어린아이들이 존재하면서 자양분들은 일찍 빛을 일어버리고 어른들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자양분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타자 혹은 이방의 것들로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로 전락시켜지고 만다.

    관찰하는 것
    염색물을 들인 배달부들을 단순 문제아로 치부하지는 않았는가.
    어머니의 자아의 배태됨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가.
    우리 자식 짜장면 먹을 때 입가에 묻히는 춘장에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는가.

    한때는 젊었을 때가 있었지
    모두는 한 때 젊었을 때가 있었지. 열정, 방황, 일탈의 시기란 게 있었지. 그때는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왜 어른이 되면 속물인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속물로 되려 하는 것일까? <짜장면>은 이야기하길 젊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분노하려 했던 것 그것들을 자신이 압제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떠올리게 만든다.

    주인공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그때가 있었지.
    그런때가 있었지만 이미 오토바이는 바다로 쳐박혀 버리고, 주인공은 운좋게도 팽나무에 걸쳐 살아남는다. 그때 수평선을 보면서 나 자신을 위해 눈물지었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되물으면서 눈물흘리는 주인공. 너무 착한 결말이 아닌가? 관찰하는 것과 일탈하는 것들에 더불어 이것은 너무도 착한 성장이야기로 남아버리고 만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이것은 동화이다. 여기서 과격한 어떤 것을 바랄 수는 없다. 동화라는 것은 일상의 이야기, 바로 자신의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속에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돌발적으로 무언가가 뛰쳐나올 필요는 없다. 나도 저랬더랬는데 지금 나는 과거의 모든 것들을 잊고 있었어 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 모모(미하엘 엔데,비룡소,2000)

    오랜만에 읽은 단비같은 책. 시험기간 중에 버겨운 텍스트 속에서 헤매이다가 소설 한 구절이라도 스치면 마음이 요동치듯 <모모>는 내게 그런 책이 되어 주었다. 약 3개월 동안의 군대생활 중에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모모>라는 친구는 얼마나 나를 반갑게도 달래주었던지!이 <모모>와 함꼐하는 여행은 한 편의 에니메이션만 같다. 구성이나 생생한 묘사가 나를 평면적인 책 한권이 아닌 생동하는 영상의 가운데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동감에 앞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작가의 마음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모>를 통해 내게  전해왔다. 온 자본주의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나는 너무나도 권하고 싶다. 수많은 책들이 돈을 중히 여기지 말라고, 명성이나 권력같은 것은 차후로 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소선껏 살라고 말하지만 <모모>만큼이나 똑 부러지면서 예쁘게 말한 책은 그리 흔치 않은 듯하다(물론 다른 책들의 이야기방식을 평가절하함은 결코 아니다)이 세상에서 이런 책들이 한 권. 한 권. 함께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공감하면서 세상은 일미리라도 일진전 해나가는 거겠지. 인간으로, 인간을 향해서 말이다.

  • 구멍(최인호,열림원,2000)

    이 소설집을 읽으면, 특히나 김종광의 작품집중 이것을 첫번째로 읽어본다면 이런 단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을까? “이게 모-야?”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문체, 전하는 메시지 또한 너무 직설적이거나 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도 많고 말이다. 이야기이긴 이야기인데 이것이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식이면 나도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김종광의 내피까지 다다른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사실, 김종광의 작품을 쭉 따라 읽어 본 내게도 위의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만큼 <낙서문학사>의 외피들은 너무도… 뭐랄까 독창적? 기괴성? 이 유독 도드라져있었다. 설마 <모내기 블루스>에서 보였던 그 길 쪽으로 재미를 붙일줄이야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분명히 <낙서문학사>의 모습이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정말 ‘서슴없는 행위’ 만은 아니다. <경찰서여, 안녕>에서 <모내기 블루스> 그리고  <낙서문학사>로의 행로는 어찌보면 일관되어 있고, 예정된 일탈이라 할 수 있다.

    1.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블루스>, <낙서문학사>
    프로 소설가(김종광은 자신을 이렇게 명명한다고 한다) 김종광의 이름으로 처음나온 것이 <경찰서여, 안녕> 이다 등단작인 <경찰서여, 안녕> 부터 시간순서대로 딱 10개의 단편들을 모아 둔 그 소설집을 보면 아, 김종광이 어떤 작가이다 하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가 있다. 김종광은 자신만의 특색있는 문체를 취하면서, 삶의 다양하고,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담는 메세지를 해독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혹은 한꺼플만 살짝 벗겨보면 이해가 되는 그런 식의 글쓰기 방식을 수행한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은 농촌 쪽에 조금 더 집중되긴 하지만 주로 서민들 혹은 그 부근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담고 있는 그의 애정어린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이야기꾼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가 겪은 것,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말을 짓는 능력을 가진 그 자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도록 타령을 불러본다는 식으로 자세를 잡고 있는데, 물론 그가 객관적인 제스쳐를 취하거나 거리두기를 통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맹물 혹은 회색깔의 작품을 내고 있는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식하는 것 외부의 것에는 전혀 터치를 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것은 더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의 이야기타령은 분명 대상인 독자들에게 더 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유머를 적절하게 섞는 것이고, 텍스트 자체가 그리 어렵게 두지 않은 것이다. <경찰서여, 안녕> 에서부터 그러한 것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경향성인데… 중요한 첫번째 작품집을 볼 때 작품집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 특유의 문체가 더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 함이 옳을지언대 예를 들어 <전당포를 찾아서> 를 비롯한 첫 작품집 후기(?)는 그 특유의 말의 독특함은 조금 자제되었을 망정, 주인공 모습에 성찰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띤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님이 성찰의 모습은 분명 아니고, 우선 주인공의 정체성이 다른 이야기들처럼 고전적인 성격으로 딱 정해져버린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종광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인물들 성격이 고전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격부여가 원래 되있던 것 처럼, 착한 놈은 계속 착하고, 나쁜 놈은 계속 나쁘고 한다 할까? 거기에 그의 정체성도 규정되어 있어 작품내에서 그 주인공은 목적의식은 가져 목적은 달성하더라도 성찰이나 여러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는 인간상의 모습이 거의 없다. 변화과정이라 해도 거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지사라는 것. 그러나 <전당포를 찾아서>같은 경우는 그 인물 자체가 지향점이 없는 모호한 상태로 출발하여 방황하면서 자기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종광의 그 이후의 작품에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진다. 다시 보여주기 방식의 이야기풀이가 이어지게 되는데… <경찰서여, 안녕> 과 <모내기 블루스>의 구별선은 유독 눈에 띤다. <경찰서여, 안녕> 이 정말 다양한 영역들을 작가의 재치와 더불어 그가 지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점이 투영되어 향연을 벌이고 있다 싶을 정도라면 <모내기 블루스>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바로 농촌에서 농촌사람들이 농촌의 어려움과 더불어 농촌사랑 이야기한다 정도인데… 아니면 도시  빈민의 어려움인데 그 양상은 농촌 것들과 비슷하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규정지은 한계로 인함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꾼은 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을 이야기하여 울리는 감동을 원하기 보다, 새로운 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거기에 합당한 칭찬을 요구한다. 이야기꾼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이야기꾼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했던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하는 순간, 반응자의 반응은 시큰둥해진다. 그거 저번에 했던 얘기잖아요, 하고… <모내기 블루스>가 그런 꼴이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이어서 나온 것이 바로 <낙서문학사>인데… <낙서문학사> 에서도 비슷한 레파토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선 차치하고, 정말 괴기스러운 돌출작품부터 보자.

    2. 낙서문학?
    김종광은 정말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낙서문학 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부터 특이하지 않은가? 낙서문학이란 그 실체가 뭐냐 하면, 새로운 문학 장르. 그거다. 그 성격이 어떻게 되었든, 규범이 어떻게 되었든 그런것은 모두 상관없다. 새로운 문학 장르라는 것, 예술 장르라는 것. 그것이 한번 받아들여지게끔 만들어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서, 정말 뚱딴지 같은 것에서 고귀한 것으로 흐르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하다. 돈과 몇가지 권위를 짊어지는 것, 거기다가 신비화의 과정이랄까? 사실 예술이란느 것이 그렇다. 어떤 그 주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어떤 생성물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성물 그 자체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거장의 음악을 들려주어봐야, 거장의 그림을 보여주어봐야, 거장의 문학을 읽어주어봐야 어린아니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 또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술에게 감동받는 것은 그 생성물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생성물을 생성하기까지 생산자(?)가 깃들인 노력을 이해했기 때문이고, 생성물 자체를 다른 것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는 방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기를 어떻게 한 것도 예술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광은 새로운 것을 한 번 창조해봤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개끔 하는 과정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원래는 별것도 아닌 예술 가지고 온갖 갖은 권력과 돈놀음들을 하면서 대중들을 놀려대고 있는 문학권력을 직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런 겁없음이란! 우선 작품으로써 이렇게 본격적으로 현실문학 자체를 비꼰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는 것, 거기에 발을 내밀었다는 것에 정말 경의를 표한다. 이건 정말 이야기꾼의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의미없는 것을 의미있는 척 하려는 광대보다는, 왕 앞에서 왕의 부패상을 꼬집어 내는 촌철살인. 그럴 때 이야기꾼은 유희를 위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감동과 사랑을 위한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도 이야기꾼 김종광의 다른 영역에서의 개척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 진보한 모습은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투리 유희와 함꼐 농촌이야기가 나오고, 서민들의 삶이 나오는데 그 방식이 전과 비슷비슷하다. 거의 대게의 작가들이 자가만의 특유 소재에 계속해서 천착하긴 하지만, 김종광의 이야기 방식이 더욱 문제되는 것은 그는 이야기 형식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깊게 파고드는 성찰 없이 보여주기의 제스쳐를 취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는 것이다. 소설가 김종광이 좀 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면 내용에 맞는 형식조차 제멋대로 변용하는 재치를 발휘했으면 한다. 이전 소설가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떠랴,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딱히 그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서의 감동을 주는 형식을 주문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으로의 작가의 변모란 획득에 앞서 손실이다. 다만, 그가 그의 재미있고 쉽게 보여주는 형식만으로 취할경우 노출되는 한계점을 문체의 개발을 통해서 극복해주기 바랄 따름인 것이다.

  • 낙서문학사(김종광,문학과지성사,2006) : 다소 산만하지만 고투

    이 소설집을 읽으면, 특히나 김종광의 작품집중 이것을 첫번째로 읽어본다면 이런 단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을까? “이게 모-야?”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문체, 전하는 메시지 또한 너무 직설적이거나 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도 많고 말이다. 이야기이긴 이야기인데 이것이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식이면 나도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김종광의 내피까지 다다른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사실, 김종광의 작품을 쭉 따라 읽어 본 내게도 위의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만큼 <낙서문학사>의 외피들은 너무도… 뭐랄까 독창적? 기괴성? 이 유독 도드라져있었다. 설마 <모내기 블루스>에서 보였던 그 길 쪽으로 재미를 붙일줄이야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분명히 <낙서문학사>의 모습이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정말 ‘서슴없는 행위’ 만은 아니다. <경찰서여, 안녕>에서 <모내기 블루스> 그리고  <낙서문학사>로의 행로는 어찌보면 일관되어 있고, 예정된 일탈이라 할 수 있다.

    1.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블루스>, <낙서문학사>
    프로 소설가(김종광은 자신을 이렇게 명명한다고 한다) 김종광의 이름으로 처음나온 것이 <경찰서여, 안녕> 이다 등단작인 <경찰서여, 안녕> 부터 시간순서대로 딱 10개의 단편들을 모아 둔 그 소설집을 보면 아, 김종광이 어떤 작가이다 하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가 있다. 김종광은 자신만의 특색있는 문체를 취하면서, 삶의 다양하고,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담는 메세지를 해독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혹은 한꺼플만 살짝 벗겨보면 이해가 되는 그런 식의 글쓰기 방식을 수행한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은 농촌 쪽에 조금 더 집중되긴 하지만 주로 서민들 혹은 그 부근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담고 있는 그의 애정어린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이야기꾼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가 겪은 것,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말을 짓는 능력을 가진 그 자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도록 타령을 불러본다는 식으로 자세를 잡고 있는데, 물론 그가 객관적인 제스쳐를 취하거나 거리두기를 통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맹물 혹은 회색깔의 작품을 내고 있는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식하는 것 외부의 것에는 전혀 터치를 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이것은 더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의 이야기타령은 분명 대상인 독자들에게 더 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유머를 적절하게 섞는 것이고, 텍스트 자체가 그리 어렵게 두지 않은 것이다. <경찰서여, 안녕> 에서부터 그러한 것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경향성인데… 중요한 첫번째 작품집을 볼 때 작품집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 특유의 문체가 더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 함이 옳을지언대 예를 들어 <전당포를 찾아서> 를 비롯한 첫 작품집 후기(?)는 그 특유의 말의 독특함은 조금 자제되었을 망정, 주인공 모습에 성찰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띤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님이 성찰의 모습은 분명 아니고, 우선 주인공의 정체성이 다른 이야기들처럼 고전적인 성격으로 딱 정해져버린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종광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인물들 성격이 고전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격부여가 원래 되있던 것 처럼, 착한 놈은 계속 착하고, 나쁜 놈은 계속 나쁘고 한다 할까? 거기에 그의 정체성도 규정되어 있어 작품내에서 그 주인공은 목적의식은 가져 목적은 달성하더라도 성찰이나 여러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는 인간상의 모습이 거의 없다. 변화과정이라 해도 거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연지사라는 것. 그러나 <전당포를 찾아서>같은 경우는 그 인물 자체가 지향점이 없는 모호한 상태로 출발하여 방황하면서 자기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종광의 그 이후의 작품에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진다. 다시 보여주기 방식의 이야기풀이가 이어지게 되는데… <경찰서여, 안녕> 과 <모내기 블루스>의 구별선은 유독 눈에 띤다. <경찰서여, 안녕> 이 정말 다양한 영역들을 작가의 재치와 더불어 그가 지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점이 투영되어 향연을 벌이고 있다 싶을 정도라면 <모내기 블루스>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바로 농촌에서 농촌사람들이 농촌의 어려움과 더불어 농촌사랑 이야기한다 정도인데… 아니면 도시  빈민의 어려움인데 그 양상은 농촌 것들과 비슷하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규정지은 한계로 인함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꾼은 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을 이야기하여 울리는 감동을 원하기 보다, 새로운 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거기에 합당한 칭찬을 요구한다. 이야기꾼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이야기꾼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했던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하는 순간, 반응자의 반응은 시큰둥해진다. 그거 저번에 했던 얘기잖아요, 하고… <모내기 블루스>가 그런 꼴이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이어서 나온 것이 바로 <낙서문학사>인데… <낙서문학사> 에서도 비슷한 레파토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선 차치하고, 정말 괴기스러운 돌출작품부터 보자.

    2. 낙서문학?
    김종광은 정말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낙서문학 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부터 특이하지 않은가? 낙서문학이란 그 실체가 뭐냐 하면, 새로운 문학 장르. 그거다. 그 성격이 어떻게 되었든, 규범이 어떻게 되었든 그런것은 모두 상관없다. 새로운 문학 장르라는 것, 예술 장르라는 것. 그것이 한번 받아들여지게끔 만들어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서, 정말 뚱딴지 같은 것에서 고귀한 것으로 흐르는 과정은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하다. 돈과 몇가지 권위를 짊어지는 것, 거기다가 신비화의 과정이랄까? 사실 예술이란느 것이 그렇다. 어떤 그 주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어떤 생성물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성물 그 자체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거장의 음악을 들려주어봐야, 거장의 그림을 보여주어봐야, 거장의 문학을 읽어주어봐야 어린아니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 또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술에게 감동받는 것은 그 생성물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생성물을 생성하기까지 생산자(?)가 깃들인 노력을 이해했기 때문이고, 생성물 자체를 다른 것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는 방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기를 어떻게 한 것도 예술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광은 새로운 것을 한 번 창조해봤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개끔 하는 과정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원래는 별것도 아닌 예술 가지고 온갖 갖은 권력과 돈놀음들을 하면서 대중들을 놀려대고 있는 문학권력을 직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런 겁없음이란! 우선 작품으로써 이렇게 본격적으로 현실문학 자체를 비꼰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는 것, 거기에 발을 내밀었다는 것에 정말 경의를 표한다. 이건 정말 이야기꾼의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의미없는 것을 의미있는 척 하려는 광대보다는, 왕 앞에서 왕의 부패상을 꼬집어 내는 촌철살인. 그럴 때 이야기꾼은 유희를 위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감동과 사랑을 위한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도 이야기꾼 김종광의 다른 영역에서의 개척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 진보한 모습은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투리 유희와 함꼐 농촌이야기가 나오고, 서민들의 삶이 나오는데 그 방식이 전과 비슷비슷하다. 거의 대게의 작가들이 자가만의 특유 소재에 계속해서 천착하긴 하지만, 김종광의 이야기 방식이 더욱 문제되는 것은 그는 이야기 형식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깊게 파고드는 성찰 없이 보여주기의 제스쳐를 취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는 것이다. 소설가 김종광이 좀 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면 내용에 맞는 형식조차 제멋대로 변용하는 재치를 발휘했으면 한다. 이전 소설가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떠랴,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딱히 그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서의 감동을 주는 형식을 주문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으로의 작가의 변모란 획득에 앞서 손실이다. 다만, 그가 그의 재미있고 쉽게 보여주는 형식만으로 취할경우 노출되는 한계점을 문체의 개발을 통해서 극복해주기 바랄 따름인 것이다.

  • 그것은 꿈이었을까(은희경,현대문학,1999)

    그것을 무어라 하더라. 미시감이라 하던가. 처음 접하는 장소와 분위기인데 마치 전에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가은 느낌. 처음 가본 곳을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스님이 내가 왜 스님이 되었을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생의 절반정도를 소비하는 꿈을 인생으로 믿는 다는 것. 허무맹랭하지만, 꿈과 인생이 정말 혼재한다는 상상은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라고 생각해버리면, 믿을려고 한다면 현재 또는 비현재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그 구분조차도 어쩌면… 어차피 인생을 사는 것은 몸뚱이가 있는 땅 위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주름잡는 횟빛 뇌가 아니던가. 더욱이 문학이란 장르 이래 꿈과 현실은 적절히 배합될 조건을 가지고 있다. 구분의 미묘한 조건은 무엇이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인가 일 뿐이다.
    작품에서 은희경은 현실과 비현실을 매우 자유롭게 섞어버린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구분하는 것 조차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왜 꿈인가.
    사회환경을 살펴보는 게 적절하다. 몇 명 등장하는 불친절한 사람들. 현실에 편협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에 비해 기묘한 주인공의 성격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진솔해 보이기는 한다. 적어도 그는 속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와 미나. 사람들을 무턱대고 따르는 사람. 사랑을 움직일 줄 모르는 지극한 순수함. 그녀들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또한 사랑에 관한 것 외에도 영원히자 못한 것, 그 중 인생살이가 어쩌면 찰라에 불과하다는 아쉬움도 적절히 섞여있다. 속물들에게 작품은 꿈으로서 이야기한다. 영원한 것, 완전한 사랑… 이것들을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그 삭막함을 간직하면서 살꺼냐고, 하지만 작품의 칼날은 너무 무디다. 또한 작품자체가 꿈이라는 현상혹은 매체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만큼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물에 대한 관심은 2차적이 되고 말았다. 꿈을 꾸는 이유가 있어 꿈이왔다가 아니라, 꿈이 꾸어졌는데 그 내용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더라 하는 식의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도전적 소설을 구성해본 작가 역량의 한계로 생각된다.

    -주인공이 애타게 찾으면서 도망가는 이유는
    주인공은 그 여자를 애타게 사랑하면서 도망간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가 아닐까 한다.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주인공은 죽음 혹은 사멸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육체를 현실에 둔 인간이 어찌 죽음을 순조롭게 맞을 수 있겠는가. 어찌 꿈의 세상속의 자기 존재를, 그 전도를 쉽사리 획득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주인고은 결국 그녀에게 간다. 그러면 이후부터는 전도되었다. 이상속에 살면서 현실이라는 괴로운 꿈을 꾸다 왔었지 하는 주인공의 자유료운 삶이 다음으로 전개될 것이다.

  • 별들의 들판(공지영,창비,2004)

    별로 기대가 가지 않았지만 공지영이 쓴 문학이란 전부 읽어 해치우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시나 빌렸다. 전체 소감은 이전의 작품에서 발휘되었던 가치들이 회색빛 뿌연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고나 해야할까. 공지영의 문학에는 힘이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거나 절규하고 있지만 그래도 힘이 있었다. 그 상처는 명쾌하게 치료되지 못하고 끝나버리기 일쑤였고, 읽는 이까지 음울해질 정도였지만 밑바닥 치는 음울함은 아니었다. 왜였을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지나온 삶이었다고 느끼게 하는 호소력 외에도 언제나 그 이야기들이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지 않고 현재로의 소환 형식을 띠며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이 그랬었어가 아닌 삶은 이런 지난한 과정이야 라고 이야기 함 속에서,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향한 방향설정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었던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몇년간의 공백을 지나고서 나온 별들의 들판이라는 작품집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래왔던 레파토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였고, 그녀가 취급했던 익숙한 소재들은 베를린이란 이색적인 공간에서도 여전했으며 전의 작품들에서 보였던 미래지향적인 희망은 그만 퇴색되어버렸다. 전의 작품들을 읽었던 독자라면 느끼게 될 재현효과의 힘에 기대어서 어느 정도의 충만감정도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베를린이라는 공간
    별들의 들판은 베를린을 공간설정으로 하여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각 작품의 공통적 요소는 베를린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베를린의 아우라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작소설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베를린이랄까. 작자후기에서 말한 우연히도 베를린에서 1년정도 살게 된 기회를 얻게 되었고, 베를린에서 몇 년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경험적 소산이 결정적 이유이겠으나 그것은 외부에서 얻은 힌트에 불과한 것이고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베를린의 이미지를 바라보자.
    베를린은 주지하다시피 초고속성장신화가 있던 곳이고, 동서분쟁의 공간적 ,정치적 공간이었으며 현재는 독일통일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미래상을 전망해볼 때 독일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청사진이 될 수도 있겠는데, 작품에서는 동서분쟁에서 통일로 인해 남북갈등으로 전환되어버린 베를린의 현주소를 되짚기 보다, 그러한 동서갈등과 남북갈등의 상처들. 그 상처받은 도시의 거주민들이 풍기는 ‘향기’ 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는 누가 어떤 성향이던가, 누가 어느정도 부자였던가에 주목하지 않고 상처를 받았던가, 지금 그것을 치유했던가에 주목하고 있으며, 공지영 특유의 변해버린 사람들에 대한 관찰자 정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망명자와 거의 인력수출이라는 명목으로 독일에 간 여성들, 유학 간 사람들을 주 주인공으로 삼는데 그들이 베를린에 갔던 이유는 자의적 선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베를린은 그 이방인들 모두를 받아들이는 도시로 그려진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베를린이 동서분쟁 당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계선에 서면서 정점에 서 있었던 그러한 긴장감의 형성과 갈등의 국면 국면들을 넘어왔던 도시라는 것이다. 상처받은 도시 베를린의 사람들은 경계와 정점에 동시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이방인들이 부유하는 향기를 내뿜는데, 베를린의 사람들이 부유하는 것은 그 어떠한 끈도 매여있지 않고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시 베를린에서의 서로다름과 상처에 대한 동질감이 그들을 엮어주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이었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 살 수 있었고, 살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베를린의 현장은 다른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맺는 존중과 배려속에서 자기 자신이 상처를 가다듬게 만들고 달랐던 것은 베를린의 포용력 속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이다.

    -강제하지 않는 치유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해. 라는 메세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은 강제하지 않는 치유와 대립되는 것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상대방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동일선상에서 눈을 맞대야 해야 하지만, 현재에서 상처의 치유 방식은 그렇게 아늑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줄꺼야 라는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상처입었던 사람들이 유행같은 주류질서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차이를, 자신의 상처를 망각시키고 다수의 질서에 동화하는 것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처를 거듭난 자아의 성숙이 아닌 상처를 망각한 자아의 변화인 것이다. 거기서 작가는 제발 그들을 좀 내벼려둬! 라고 이야기하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성을 먼저 강조하고 그들 치유의 과정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서 결국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사랑이었다고 나타낸다. 수평적 사랑. 한 사람은 들어주고, 한 사람은 말하고만이 아닌, 끝없이 ‘좋은 이야기’를 내뱉는 권위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구멍뚫린 가슴안을 바라봐주는 사랑. 강제하지 않는 치유는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에 첨가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걷어버린 동류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으로?
    공지영의 전작들에서 주로 보이던 소재, 주로 보이던 문제의식, 주로 보이던 인물들, 주로 보이던 치유의 방식들이 나타났으나 앞서 말했듯 소환형식을 띠며 현재에서 미래지향적이던 문제의식은 이미 퇴색되어 버렸다. 티백을 두번 세번 우려내서 더이상 색깔도 향기도 만들지 못하면서 녹차라고 우기듯이 되버린 것은 무엇일까? 문제의식과 미래지향적 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루만짐, 어루만짐. 이 세상에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들은 물론 많다. 한국의 폭력과 광기의 역사속에서 묻혀 버린 것들을 다시 소환해야 하고 재평가해야하고 그것들을 치유해야 함은 당연한 말일진대 전망없는 치유는 단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는 보상금과 명패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상처입었던 이유들을 되짚어 보면, 현재에 계속 행해지고 있는 칼질의 칼손잡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금방 분명해질것인데, 어루만짐 그 자체 만으로 그쳐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추억에 권위 부여하기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