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감상

  • [비포선라이즈-리차드 링클레이터] 그리고 비포선셋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러겠지만 그러던 중 언젠가 안좋은 날도 있겠지. 그럴 때 나도 좋을 때가 있었어 하면서 과거의 연인들을 하나씩 떠올려 볼 때 나올 수 있는 하나쯤… 그렇게 두 주인공간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까지 비엔나에서의 하루. 누군가 다른 곳을 쳐다볼 때 상대방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키워지는 사랑은 금새 불타오르지만 그들은 계속 다짐하듯 되내인다. 그저 오늘 하루 뿐인 것이라고, 원거리에서 연락처를 서로 건네주어 종종 연락하다가, 이따금씩 연락하다가 결국 식어버리는 그런 시시함과 상투함을 원치 않았던 그들은 원 나잇 스탠드식 쿨한 사랑으로 끝내자고 하면서도 계속 오늘 하루를 아쉬워한다. 이후의 약속과 사랑의 맹세를 미루고 미루던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6개월 후에 만나자면서 헤어진다. 이 헤어짐의 순간속에서 영화는 종결되고 둘은 과연 계속 사랑할까요? 라는 물음이 관객에게 주어진다.

    비포선라이즈가 내게 너무 놀라웠던 것은 멜로영화의 공식을 전혀 따르지 않고 있으며,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을 곳곳에 투입하지 않고 인물의 현실성만으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연인영화에서 서로 사랑하다가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하지 못할 말을 한 것을 후회하며 기차 플랫폼에서 유치하게 달려가 키스하고 그런 뻔한 레퍼토리를 깨버리고 있다. 둘은 사랑을 키워나갈 뿐, 논쟁을 조금이나마 할 뿐. 갈등하는 순간조차 없다. 물론 하루라는 제약된 조건이 계속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두 배우 외의 다른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고, 해괴한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고, 특별한 과거조차 지니지 않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과거,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갖고 있고,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사랑에 대한 느낌의 공유로 전체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단한 현실감각과 정교함. 그리고 마지막에 남겨주는 물음. 그들의 사랑은 계속될까요? 바로 이것. 우리는 액자속에서만 작품을 보는데에만 너무 익숙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뭔가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득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액자속에서 해결된다는 것은 어찌보면 기만아닐까? 동화속 주인공들은 모두 해피엔딩이지만 그 해피엔딩의 액자를 벗어나자마자 둘은 머리끄댕이를 잡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을지도 모른다. 서로 사랑함이 불타올라 키스하다 돌부리에 걸려 뇌진탕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둘의 사랑의 영원한 연속성으로 간직하고 푼 이 관찰자들의 욕구. 영원성은 현실상에서 모조리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을 간직해야한다. 이후에 그들은 10년을 살 수도 있고, 50년을 살수도 있으나… 모두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럴바엔 차라리 오픈시켜버리는 것이다. 둘은 하루를 사랑했었습니다. 이후에 그들이 얼마동안 사랑을 더 할까요? 각자의 대답속에 둘의 사랑이 있다. 비포선라이즈는 상투적이지 않은, 사랑의 진정성을 아끼고 싶어하는 그들이 주는 큰 선물이다, 큰 물음이다.

    그리고 9년 후.

    9년 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파리였다. 남자는 하루의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자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남자는 이미 결혼을 하였고, 여자는 연인이 있지만 둘 다 행복하지 못하다. 그것은 그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그 하루의 추억이, 아쉽게도 지켜지지 못한 6개월 후의 약속이, 그들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한 사랑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비포선라이즈가 추억으로 간직해 볼 사랑을 만들어보자… 고 하다가, 우리 이 감정을 추억속에서 보석처럼만 빛나게 하기 위해 하루로 끝내자 라는 지켜보지 못할 되내임이 계속 있엇다면 비포선셋은 그 하루가 짓누루는 연속성과 지금 맞지 않는 현실사이의 갈등이 있고, 또한 시간의 쫓김이 계속된다. 비포선셋은 해가 지기 전까지인데 공간배경은 본편보다 훨씬 단순해졌지만, 그 인물의 색채는 여전히 빛난다. 멜로영화에서 이렇게 멋지게 속편이 나올수도 있구나를 내게 각인시킨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하긴, 멜로영화에서 속편이 나온 것만 해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예상하는 대로 비포선셋의 종결도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듯 춤을 추고, 남자는 여자의 쇼파위에서 여자를 보고 있다. 음악은 흘러나오고, 둘은 지금 이 순간의 연장을 강렬하게 열망하고, 둘은 또한 현실의 장벽을 또 알고 있다.

    비포선라이즈가 사랑의 영원성에의 물음으로 가득차있다면, 비포선셋은 사랑의 현실감각이 여기에 조금 덧대어진 느낌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했다면 영화는 그야말로 속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만, 비포선셋은 이것 하나를 보아도 괜찮을 정도로 나름의 물음, 나름의 작품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말이다.

    생동하는 캐릭터.
    그들이 모조리 허구임을 알지만, 그들의 관계도 각본임을 알지만…
    나에게 다가와 버리는 둘의 눈빛.

    내가 그들의 사랑을 만들어 줘야겠다.

  • [장미의 이름-장 자크 아노] 장미란 하느님이 붙인 이름, 우리는 이름 없는 장미

    본래 책으로 읽을 때에는 ‘그 유명한 책’ 이 내겐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내가 책을 잘 못 읽었거나, 배경지식이 부족하구나 하고 덮어버렸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쯤 봐야 알겠다 한 부분이 많긴 하였으나, 우선 분량도 많고, 읽기 쉬운 소설도 아니었으며, 내가 본래 책을 다시 읽는 습관이 없어서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고전영화 게시판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영화판을 발견.

    보았다.

    영화만 보고나니 딱히 심히 이해못할 부분은 없기도 하였다. 사실, 책의 전체의 큰 줄거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방대한 주석이었으며, 뭔가 은유하고 있는 듯한 묘사와 역사적 배경이었으니깐. 영화에서까지 심히 얽혀있는 다양한 해석의 기회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누군가 장미의 이름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여(아마도 진중권이었을 것이다) 심리학자는 심리학자대로 재미있을 부분이 있고, 역사학자는 역사학자대로 재미있을 부분이 있고, 언어학자는 언어학자만큼 재미있을 부분을 마련해 둔 작품이 장미의 이름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 모든 학자도 아니기에 이런 다양한 해석의 기회들을 차단했을 영화 <장미의 이름>이 그렇게 서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하게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선 하루가 200페이지도 되고 300페이지도 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그에 비하면 하루가 섬광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그 정도만이 전개상의 차이이고, 제법 모든 것을 멋지게 구현했다. 거대한 도서관, 수도원의 분위기 등등.

    그리고 책에서는 하도 많은 은유들이 있어서 정작 주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느낌도 있었는데, 영화에선 좀 더 주 포커스에 집중해주고 있다. 거기에 주인공의 로맨스를 조금 더 부곽시켰다는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어쨌든 선택과 집중이었다.

    <장미란 하느님이 붙인 이름, 우리는 이름 없는 장미>

    장미 자체는 그 어떤 귄위, 플라톤식 본질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장미의 이름이란 그 장미라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수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장미를 두고 제각기의 이름을 붙여왔겠지.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권위와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방편에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수단이 목적화되는 것이고, 방편이 절대화되는 것이다. 장미에 다가가는 장미의 이름이, 장미의 이름의 이름을 또 나을 것이고… 장미는 어느순간 조금 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우회했던 이가 호르헤 신부가 아니었을까. 그가 부여한 절대화된 수단을 사수하기 위해서 모든 탐구활동을 가로막았던 그. 그건 어쩌면 현실사회의 보수의 일면화된 모습이기도 하되, 다른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근대과학의 대표적인 적이기도 하다. ‘진리’로 향한 무한걸음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 물론 장미의 이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치 않기도 하는 것이 장미의 이름은 그들의 목적지에 하느님이란 절대자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좀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한데 유용성으로 말미암아 종교는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실험과 확증성의 과학은 이 사회에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렇게 과학이 철학과 종교로부터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진리탐구를 긍정하는 이데올로기를 펼쳐왔던 것이다. 종교가 가로막았던 그것들을 이제는 누구도 가로막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이크로의 극점에서 세포의 분열은 있되 인간의 목적은 없고, 매크로의 극점에서 은하계는 있되 또한 보고있는 주체의 인간이란 없다. 진리라는 것이 목적을 잃고 흔들리고, 정밀함과 확즉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이, 수학이 그 공식들의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지구라는 구와 중력위에 있다는 것을 인간은 어느 순간 잊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가 직선도 아닌 곡선도 아닌 건물들을 난잡하게 지어대고 있었고… 어쩌면 모든 것은 부실공사 였는 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무한한 탐구의 걸음걸음이, 진리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잊어먹었는지는 않은지… 걸음의 끝이 없을테니, 그건 부가적인 질문이 아니라 그 걸음을 멈추어서라도 한번쯤 생각해보고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없는 장미’는 무슨 함의일까. 영화의 맨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책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음 인간. 인간 자신을 기능적 인간화 시키기는 불가하다는 이야기일까. 이름 붙일 수 없는 장미. 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이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권리라는 실존적 의미일까. 아니면 자연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주제를 알라 식일까.

    책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 [밀양-이창동] 가면을 벗어

    그녀는 위선적인 가면을 써왔던 것이다. 그녀는 외도를 했던 남편을 계속 사랑하고자 한다. 그를 잊지 못해 그녀는 남편의 고향에 까지 내려와 눌러 산다. 또한 그 남편에게 그녀 자신이 위선의 가면을 씌워준다. 남편은 오직 자신과 준만을 사랑해 온 충실한 남편이라고. 그것이 그녀의 극복법. 이미 죽은 자, 남편은 그녀가 가면을 씌워졌으니 그녀에게 귀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죽은 자를 소유하고 있는 주체다. 죽은 자를 사랑하는 ‘주체’, 그리워하여 고통하는 ‘주체’. 그것은 준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준은 그녀에게 귀속된다. ‘주체’ 가 위선적인 가면을 자신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씌워왔다. 그런데 주체가 소유해 왔던 아들 준을 잃게 된다. 그것도 타살이다. 그녀는 아들 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주체로서’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살인자’가 아들 준을 죽이는 주체의 권리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 균열하는 주체. 그녀는 절대자에게 손을 내민다. 절대자가 그녀의 주체를 대신하여 준다. 그러나 동일한 절대자가 ‘살인자’ 조차 포괄하고 있다는 순간 그녀의 ‘주체’ 가 꿈틀거린다. 어쩌면 그녀가 절대자에게 맡겼던 것은 그녀 자신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맡긴 것은 남편과 준에 대한 그녀의 소유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같은 과정으로 ‘살인자’의 주체를 인도하고자 하였다. 소유하게 되는 것은 절대자이지만 그녀가 손을 잡고 넘겨주는 것이니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붙들고 갈 ‘살인자’ 의 손은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체가 진동한다. 그녀의 위선의 가면이 조각나고 만다. 그리고 절대자에게 그녀 스스로의 투쟁을 시작해본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 남편도 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살인자’에 대한 증오로 인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송두리째 자각되어진다. 그리고 그 투쟁의 한 가운데서 그녀는 그녀의 팔을 긋는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녀는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애원하듯 절규한다. 살려달라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그녀는 ‘살인자’를 증오한다. 그녀는 무고한 ‘살인자’의 딸 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인간이 되었다. 이전의 주체와는 다른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녀는 그녀 자신의 감정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허위허식을 벗어던진 듯 하다. 그녀는 이제 빙 돌아서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마주치는 상처들을 만나면 다시 아파하겠지만 … 건강한 아픔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가 견뎌 낼 건강한 아픔.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나누면서 조금씩 짐을 덜어 내겠지.

    전도연이 상을 탄 영화라는 것을 계속 의식하면서 봐서 그런지 전도연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전도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정말 쉽지 않은 역할인데, 튀는 캐릭터도 아니고, 자질구레한 대사들로 커버치는 그런 배역도 아닌 데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는 게 정말 대단하긴 했다. 그런데 뭔가 전율을 불러 일으킬 정도, 팍! 팍!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왜일까. 이제것 봐 오던 전도연의 다른 작품에서의 모습과 조금 겹친다고나 해야할까. 그것은 송강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송강호의 능글맞음의 연기 센스는 칭찬할만 하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극중 배역과 충돌하는 모습이 자꾸 보였다. 경상도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했던지 자꾸 수그러들어지는 것만 같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것일까. 중년 연기자라 어찌할 수 없는 건가? 그러다가 안성기 처럼 될라. 아 그리고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라고 하는 광고카피는 송강호와 전도연의 러브스토리 혹은 송강호의 해바라기 사랑을 광고하는 듯 한데 내 보기에 러브 스토리는 주요 포커스가 전혀 아닌 듯하다. 왜 그런 카피문구를 썼는지… 팔아 먹으러면 어쩔 수 없는건가?

  • [칠레전투-파트리시오 구즈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내일부터다!

    오늘은 인터넷 달은 기념으로 하루종일 부여잡았지만… 내일부터는 좀

    규칙적으로 살아야겠다

    운전학원도 내일부터 하기 시작하니

    어느정도 정기적으로 하는 게 있으니 가능할꺼야..

    이 일기만 쓰고 나는 잘것인데…

    내일 뭘 할지 지금 여기서 정해보자…

    내일은 철학입문코스3를 수강신청!  해서 1,2강 들어야지..
    하루에 2강씩 듣는 걸로 하자. 그렇게만 해도 복귀(?) 전까지 거의 다 들을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내일 영화 “밀양” 을 보고…

    이 홈페이지 업데이트도 이제 신경을 써야겠다.
    하루에 영화평 하나씩은 무리겠고… 어쨌든 하루에 어느 카테고리든 글 하나씩 올리는 것으로 해야겠다.

    새로 온 컴퓨터… 다 좋은데
    스피커 본쳬(?)가 너무 커다랗고… 모니터가 넓고 밝아 좋은데 오래보고, 글씨보기에도 눈이 좀 힘들어지는 편이네.. 뭐 오래 보지 않게 되서 다행이다.

    난 규칙적 생활의 유지로… 졸리기 시작한다…

    내일부터 운전 주행이다!

    젠장

  • [동양철학에세이] 요약본

    공자∥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성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 공자는 몰락귀족의 가문에서 부유하지 못한 교육환경에서 자랐으며 어지러운 춘추시대에서 그의 뜻을 펼친 사람을 찾아 여행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의 나이 68세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씀 ; 공자는 가르침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가 비판받기도 하는 지배층을 대변한다는 사상이라는 것은 그의 부유하지 못한 생활과 그의 교육장로서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비판으로 여겨짐. 그는 어지러운 춘추시대에 덕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였고 시대적 상황과 맥락으로 그는 사회에서 가장 나은 정치를 펼칠 수 있게 하려는 철학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인(仁), 사람다움
    공자의 철학은 현세의 사람을 위한 철학 ;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던 것을 공자에서부터 사람의 삶으로 돌렸음을 그의 중심사상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인(仁)은 다양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지만 ‘사람답다’ 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道)인가에 있었다.
    ╙ 군자 – 소인 ; 군자는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이며                  주체성을 지키는 덕을 쌓은 사람이라는 의미. ‘사람다운 사람’
    군자는 구차적 생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람다움을 실현하는데 생의 목적                 이 있다고 역설
    성인 ; 사람다운 사람 위에 있는 사람으로 사람다움의 완성.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실천에서 나오는 사람.

    사람다움의 실천
    사람다움의 출발은 효(孝)와 형제간 우애(제) 그리고 구체적 실천 방법은 충(忠)과 서(恕)
    효(孝)와 제: 부모의 몸을 받드는 것에서 나아가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중    요하다고 여김. 기본적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자발적인 보은
    충(忠)과 서(恕): 충(忠)은 마음속에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것.
    서(恕)는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
    ☞ 인(仁). 즉 사람다움의 실천은 충서(忠恕)의 실천이며 충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         자신을 다하고 밖에서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인데 이에 중심이 되는 것은 효          (孝)와 제

    ‘답게’ 하는 정치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라잡을 수 있다고 여김에서 출발하여 그의 정치란 사람답게 바로잡는 일로 여겨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 이 정치!
    ; ‘다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가 잡힐 것임.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됨됨이와 사람사이의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함.
    ․권위를 세우는 것을 중히 여겼지만 법이나 힘으로 강제하는 것보다 덕과 예절로 권위를 세워 위에서부터 아래로 자연스레 뻗어나감을 중히 여김. 서로간 믿음을 바탕으로 각각의 역할을 다하는 사회; 대동(大同)사회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공자의 사상은 인간답게 살려고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철학이 유구히 이어져옴. 그러한 인간다움의 철학안에 있는 것은 자기 마음속의 만족 외에는 달리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데 이 현실사회에서 공자 사상의 비극아닌 비극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에대한 당위성과 유교의 낙관주의가 공자 사상의 강점;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진정 인간이기에 마땅한 책임이나 사명 의식이 있음에 호소하고 있는 공자의 사상은 현실사회에서나 또는 지금에서나 여전히 호소력 있는 사회 속 인간의 본연.

    노자∥인생의 보배를 간직하라
    유교가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다면 도교는 민중의 의식 속에 ‘잡초와 같은 철학’

    공자의 도 노자의 도
    ․노자는 공자의 효(孝), 사랑 그리고 충신(忠臣)에 대한 열망은 가정, 사회가 인위(人爲)적은 것들로 말미암아 혼란이 생겨났기 때문에 추구하게 되는 도덕으로 거짓말이 될 수 있다고 비판
    ․노자의 도(道)는 공평무사하여 있는 선악의 개념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지 아니하며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떤 반응르 보이지 않는다

    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이지만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황홀’ 하다고 표현. ‘도(道)’라 이름부침도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
    ☞ 고대로부터 내려온 ‘상제(上帝)’에의 관념을 바꿔 놓앗다는데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
    중국 고대에는 자연계 운행과 인간 세상의 사건도 모두 상제(上帝)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앙에 반(反)하여 노자의 도(道)는 인간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 없이 독립적 존재. 한정 할 수 없는 존재로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것임.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것으로 인간도 자연속 인간으로 도의 자연에 거슬리고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인위(人爲)의 부조리라고 역설

    노자의 정치론
    “천하는 불가사의한 그릇이어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잘하려고 애쓰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 하면 천하를 잃고 만다.”
    ☞ 노자는 인위적인 것을 따지는 것에서 오는 부조리를 거부하는 무위(無爲)의 정치론을 역설. 무위(無爲)의 통치술을 따져보자면 ‘요점을 지킨다’ 와 ‘공평 무사하다’는 성격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요점‘ 이란 노자의 도(道)이며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으며 ’공평 무사‘ 란 백성들의 본래 그러한 삶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본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
    ․‘제왕학’ 으로 가는 역설; 노자의 ‘대도’는 전제 군주의 교묘한 통치술의 모습을 띠기도 해서 전제군주의 비밀 정치를 옹호하고 군주의 통치술에 의존한 정치만 논하였으며, ‘대도’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 논의와 제도적 장치의 합리적 통치와는 거리가 먼 전제 군주를 위한 ‘제왕학’ 으로 볼 수 있음

    원초적 인간의 모습
    ․덕은 애써 얻어지는 것이 얻으려고 안달할수록 나타나지 않는다. 낮은 덕만이 얻고자 애쓸 뿐 과시하려 드는 덕이다.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고, 넒은 덕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고, 꾸준한 덕은 불건전한 것 같아 보이고, 진실한 덕은 변하기 쉬워 보인다.
    ☞ 노자의 덕(德) 개념이 자칫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는데 그것은 인위적인 것들로 찌들어 있는 사회총체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자는 어떠한 인위도 거부하고 원초적 인간의 모습으로 자연의 인간을 추구하였기에 갓난아이와 물을 제일 이상으로 보았으며 앎과 무지의 개념 선과 악의 나눔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 원초적 인간의 모습은 서로 평등한 관계이며 이기적이지 않고 양보하며 겸손한 모습.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부드럽고 약하며, 죽음에 가까울수록 단단하고 강해진다.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의 본래 모습이며 이를 지키려고 한 것이 노자의 철학.

    인생의 무게를 지키는 방법
    진정한 인생의 무게를 지키려는 사람은 먼저 통속적인 가치를 뒤집어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현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
    ☞ 노자는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물처럼 겸허하게, 골짜기처럼 포용력 있게, 통나무처럼 본래 모습을 지키는 것, 즉 근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역설
    ☞ 첫째, 포용하여 사랑할 것
    둘째, 요점을 단단히 지킬 것
    셋째, 천하의 앞에 나서지 말 것
    ☞ 노자의 철학은 세속의 가치들에서 벗어나고 공자처럼 훌륭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도 아닌 기본적인 생명의 욕구,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에 있음

    묵자∥약자를 지키는 방패

    피지배층의 대변자
    묵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하층민 출신 또는 노동자 계층 출신이었으며 뛰어난 기술자로 많은 도구들을 개발하기도 하였는데 전쟁에 반대하고 약소 제후국의 방어를 위해 싸우는 민중을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강철 같은 조직
    묵자의 사상을 따를 사람들은 ‘거자’ 라는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엄격한 생활의 통제 아래 집단적 결속이 투철했음; 철저한 금욕적 규율을 엄수했으며 오로지 남을 위해 일해야 했음. 또한 철저히 끝까지 지킨다는 신념이 있었음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 집단을 결속시킨 철학의 핵심은 겸애(兼愛)와 교리; 겸애는 서로 사랑하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로 겸애가 실현되면 교리가 따른다는 관계
    ☞ 무차별적 사랑 철학은 하급 무사 집단의 생활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아래 묵자는 사회혼란의 해결 방법론을 겸애사상이라 봄
    ☞묵자의 기준
    첫째, 옛날부터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해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
    둘째,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에서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음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살피면 알 수 있음
    ․‘하늘의 뜻’ 의 이용; 묵자의 주장은 피지배 계층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문화적 훈련을 쌓을 기회가 적어 쉽게 이해가 안될 것을 염려하여 ‘하늘의 뜻’ 이란 절대적 권위를 부여.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외피에 불가한 것이지 이념적인 측면은 없음.

    유가비판
    유가의 장례예제, 음악, 운명론에의 비판; 피지배층의 대변자로서 유가의 겉치레에 대한 공리주의식 비판. 운명론에 비판은 세습에 의한 차별성에 반대한 것임

    반전평화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나왔으며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 사랑을 나으며 그러한 정신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전쟁을 낳고 있다는 사고아래 묵자는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역설하고 실천

    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
    묵자의 철학은 피지배층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을뿐더러 진나라의 통일, 유묵의 대결구도 속에 한나라가 유가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들이면서 지속될 수 없었음. 그러나 진정 꿈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은 피지배층의 대변자로 있었지만 무차별적인 반전사상이 그의 철학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없게 하는 요인이 있었기 때문. 더 본질적으로 나아가자면 헌신적이고 자기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에 앞서야 하는 묵자사상에서 인간 내부의 이기심의 작용이 본질적으로 묵자 철학이 꿈으로 남게 함

    장자∥광활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 도(道)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의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 지듯이.”
    “도는 원래 그런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 저렇게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자시들이 지어낸 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 라고 가르치지만 ‘도는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 장자는 유가가 말하는 도는 진정 도가 아니고 도덕정치에서 인위적인 면모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를 나을 것이라고 비판하며 인위적인 면모를 거부할 것을 역설
    ☞ 장자는 중도(中道)를 기준으로 인간의 온건한 수명을 다할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라 함
    ․장자 혹은 도가 사상가들은 기술 도구등을 만드는 사람들과 가까웠거나 애착을 가진 사람들일 것. 근대 이전의 기술은 ‘예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도는 쇠파리에도 있고 똥오줌에도 있다. 도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역설
    ․전국시대의 혼란상황에서 지식인들의 나섬은 세상을 더 혼란시킬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표준으로 삼을 수 없는 기준이 없고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킬 수 있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
    ☞ 만물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만이 시비를 초월하고, 선악과 생사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다고 함
    ․만물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기초→인위적인 분별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함으로 열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 모두를 포용할 것이라 함

    상대주의의 한계; 모든 대상에 대한 자연히 그러하다 식의 인식은 모든 문제에 대해 의욕을 거부하게 되고 생사(生死)의 문제에 있어서까지 회의감을 지니게 하는 약간의 궤변으로 빠질 수 있음. 또한 인간의 개념으로 ‘자연스럽다’ 의 기준의 모호성.

    맹자∥유가의 파수꾼
    맹자는 스스로도 공자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이라고 불렸다. 춘추시대보다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의 인물로 공자처럼 여러 나라를 떠돌며 그의 사상을 국가정책에 반영토록 노력했으나 부국 강병 논리에 밀리곤 했다. 또한 맹자의 사상이나 민본사상이나 혁명사상으로 나타남에 현실사회의 패권위주 이데올로기와는 대립되는 면모가 있었다.

    무엇이 인간의 참 모습인가
    ․공자의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에서 나아가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본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
    ․성선설을 근거로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 즉, 선천적인 4단을 제시. 악을 행함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성질이 본성에서 멀어진 것

    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
    ․소인은 감각적 생리적인 욕구에 국한되지만 군자의 본성은 생리적 욕구를 초월한 인의예지.
    ․대인은 마음 고생을 하면서 남을 다스리고, 그 대가로 생산한 식량을 먹는 사람. 소인은 몸 고생을 하면서 남에게 다스림을 받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람
    ☞ 지배계층의 현실적 권력을 인정하면서 그들 내면에 본질적으로 들어있는 선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을 바랬던 것
    ☞ 맹자의 의의
    첫째, 노동민중에게까지 인간의 본질인 선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여 민중을 도덕적 실현이 가능한 범주로 끌어올림
    둘째, 지배층의 지배를 합리화했지만 도덕실천을 통한 자아의 완성이라는 책무 줌
    셋째, 지배 집단에게 그들의 본성이 감각적인 부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임을 일깨워줌

    유가의 파수꾼
    ․양주사상에의 비판: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해 자기 임금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
    ․묵자에의 비판: 무차별적 사랑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된다고 비판
    ․농가에의 비판: 지배집단도 분업의 논리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라 항변

    참다운 임금의 길
    ․성선의 근거는 하늘에 있음. 하늘이 도덕적 근원이라는 생각이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연결; 도덕의 근원인 하늘이 덕이 많은 사람을 택해 임금을 시킨다고 보아서 통치자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덕정치를 해야 한다고 설파 → 왕도정치
    ☞ 통치집단의 허위의식에 지적. 철저한 사익에 의한 전쟁을 배격했지만 구체적 경제적 토대를 제시함으로써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성을 확보
    ․음악도 여자도 재물도 민중과 함께하는 맹자의 왕도정치의 현대적 해석은 ‘민중을 위한’ 정치.
    ․천명을 받는 사람이 임금이며 백성이 따르는 임금이라고 하면서, 어질지 못한 임금이라면 갈아 엎을 수도 있다는 혁명론 제시(혁명론에는 반드시 민중의 뜻에 근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함)

    호연지기; 온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는 도덕 기운. 오직 실천을 통해 쌓은 정당함에서 나오는 기운으로 맹자는 이로부터 꿋꿋함이 나올 수 있었다.
    ☞ 맹자는 사회 속 인간의 도덕성을 바라보았고 그 실천을 중시여긴 사람

    순자∥동양의 프로메테우스
    이전까지의 인간 근원을 하늘에서 찾았던데 비해 순자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에서 나온다는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시킨 인문 정신의 완성자

    성악설과 인간의 철학
    ․순자도 맹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으로 규정함에는 동일하나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 주목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 → 인간의 생리적 욕구에 따르면 거기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본성이고 그것이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
    ․순자의 인간 마음작용 나눔: 성(性), 정(情), 려(慮), 위(僞) 의 순서대로 작용
    성(性): 생리적 본성                정(情): 사물에 대응하는 희노애락의 감정
    려(慮): 감정후의 사람의 사고작용   위(僞): 선택이 끝난 후 실행에 나가는 의지적 실천
    ․순자는 사람들의 심리상태에서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性)은 악이고, 위(僞)는 선이라고 함.
    ․순자의 철학적 가치는 위(僞)에 있음. 즉, 의지에 기초한 실천철학 → 의지의 제도화 ‘예’
    ․맹자에의 비판: 맹자가 주장한 본성은 현 사회의 제도를 거부하는 모순점이 있고 강조점이 군자에게 두었다는데 비판함
    ․자연에 대한 신비감을 배제하고 인간의 철학을 완성. 그러나 제례나 상례같은 행위에는 문화적 기능으로서 사회적 가치를 인정함 → 지성과 감성 모두 인정

    공동체를 위한 규범: 예
    ․인간의 악한 본성을 따른다면 사회에 혼란이 오지만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 → ‘예치’의 주장
    ․예 자체는 의지적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일 뿐 인간의 본질이 아닌 타율적 규제. 예의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인(과거의 훌륭한 임금들). 또한 예가 현실의 시의성에 맞는가 여부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로 탄력성을 보임.
    ․예의 제도를 바꾸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은 통치자들의 몫이되 통치자는 사람을 뒤하게 여기는 군자라고 함.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혼란상에서 통일을 이루어 혼란을 잠재우고푼 욕구에서 ‘후왕 사상’ 으로 정리됨 → ‘후왕 사상’은 한비자와 ‘이사’에 의해 법치주의 강조사상으로 나아감. 그러나 순자는 법의 외압적 강제보다 사전의 의지적 규제를 중시하는 면에서 법가사상과 차이를 보임
    ․순자의 혁명론; 군주란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보고 그렇지 않으면 뒤엎을 수 있다는 혁명론을 제시했지만 맹자의 혁명론과 차이가 있다면 맹자는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형식이였지만 순자는 직접적인 민중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데 차이가 있음

    순자의 논리학
    명실론: 지(知)와 지(智)개념의 구분(전자는 앎의 능력, 후자는 안 것과 실제 대상이 들어맞   았을 때 쓰는 용어). 명(名)의 개념을 재정의. 실명(實名)․공명(共名)․별명(別名)의 개념정
    의도 하였으며 명가의 궤변논리를 비판하기도 하였음

    ☞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도 철저히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여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다는데 주목해야 함.

    법가∥인간을 조직하고 인간을 활용한다
    법가 사상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기적 동물로 봄. 전통적으로 법가는 안으로 뼈대로 삼고 겉으로 유가의 도덕규범을 이용하여 통치.

    ․법가는 인간의 본연적 이기심을 이용하여 책략하고 효과를 냄을 중시하고 형식적인 허례의식을 탈피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실용성을 중시한다. 또한 원대한 이상과 철학을 강조하기 보다는 사회 정치적 현실 상황과 국면의 변화에 실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능률적 사고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단순한 실용성 부다는 현실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였고 사물의 실정을 측량하고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 사상임에 주목해야 한다.

    법가 사상의 선구자들과 체계화 되는 사상
    법가 사상가라 함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은데 정책에 있어 법가 이념과 닿는 인물로 관중, 자산, 한비자 등이 있고 법가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는 조나라 신도와 한나라의 신불해, 위나라 상앙이 있다.
    ‘세’ ; 권세, 세력이라는 의미. 군주의 위치에서는 권세와 지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      지혜와 덕망도 세가 없으면 무의미 할 것. → 유가가 백성들의 자발성을 근거로 삼는 반     면에 법가는 강제력을 근거로 하여 왕권을 강화하여절대 군주적 정치제도의 실현에 목적     있음
    ‘술’ ; 정치술, 책략이라는 의미. ‘무지(無知)’ ‘무위(無爲)’가 지식과 행동보다 낫다고 하여      노자사상과 관계. 유가에서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추구를 비판(실용성 추구에서 온 이념).
    군주가 관리를 통솔하는 방법으로 은밀하고 상황적인 판단으로 사회 혼란을 바로 세울      수 있음 그러나 문화적 가치의 유용성을 지나치게 낮게 보는 문제점
    ‘법’ ; 법의 엄격하고 공평한 적용. 법은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하며 엄중하고 무겁게 시행해     서 질서 유지에 힘씀. 그러나 따뜻한 인간적 아름다움을 없애버렸다는 비판점 있음.
    ☞ ‘세’ 는 왕의 지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통치술에서 도덕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시킴 ‘법’ 과 ‘술’은 군주와 관리와 민중 사이의 관계를 조종하는 이론

    법가 사상의 의의
    [사상의 요점]
    첫째,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국가는 그 이기심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부강을 꾀할 수 있다
    둘째, 군주는 법과 세와 술로 민중과 백관을 통솔하여그 제재방식은 사회 조직의 정점에 선 왕의 권세와 법의 강제에 의한다는 것
    셋째, 가치 판단의 기준은 현실적으로 효과있는 결과를 낳았느냐 아니냐 이므로 그 시대의 상황을 연구하고 대처 방안을 내는 것이 중요
    ☞ 현실적인 정치관으로 복종과 강제를 강조하여군주 전제주의를 이룸. 민주주의 원칙과 거리가 있지만 주나라 식 봉건제도를 넘어서 효율적 관리제도를 확립하는 이론이 됨. 후에도 유가 도덕론과 결합하여 중국 사회를 이끄는 기제적 사상으로 유지

    명가∥상식을 부순 사람들

    명가란; 명가는 어떤 계통성이나 조직의 모습은 드러나지않고 저술도 미미해서 규정짓기 애    매모호. 명가는 명칭과 실제 또는 형식과 내용의 본질과 그 관계성을 논한 사람들.
    ╙명가 사상이 나오게 된 원인
    첫째, 한자어 자체의 특성; 한 글자씩 존재한다는 고립어의 특징의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
    둘째, 옳고 그름이 불문명한 혼란한 시대적배경
    셋째, 공자․노자․묵가 등 이름의 문제를 다룬 전의 사상가들의 영향. 여러 사상가들 사이       의 논쟁속에서 궤변의 논리가 나왔을 수도 있음

    ․혜시; 전쟁반대와 박애 주장. 비유에 능한 언변으로 정책에 참여.
    ╙ 『장자』에 나오는 혜시의 열가지 명제: 역물십사(歷物十事)
    1. 지극히커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大一)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小一)이라고 한다.
    ☞ 사람들의 자신의 국한되 경험에만 비추어 대소 크기를 따짐은 한계가 있고 이런 개념 모두가 상대적일 수 있다. 경험세계에만 근거를 갖는 상식을 부숨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는 천리가 된다.
    ☞ 두께와 넓이가 다른 개념인데도 관계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편견에 문제제기
    3.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 자신의 위치에서만 평가하는 기준을 광범위하게 보아 절대적 위치는 없이 세상만물이 상대적인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함
    4.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 방향개념에서 기준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모호해지듯 우리의 일상적 말들도 기준이 없으면 모두 틀린 말이 될 수 있다.
    5. 나느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그곳이다.
    ☞ 우주 무한의 공간 속에서 중심이란 고정될 수 없으며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말속에서 자신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함을 비판
    6.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 시간 나눔의 개념도 상대적인 나눔에 지나지않는 다는 것.
    7.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 상대성 원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관찰자의 위치. 입장에 따라 다름에 있는데도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어버리고 한 면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8.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
    ☞ ‘같다’ ‘다르다’는 동전의 양면인 셈. 전체를 강조하면 개인의 의미가 죽고 개인을 강조하면 전체가 죽을 수 있지만 전체를 강조하고 개인을 강조할 때도 있다. 고정관념에의 비판
    9.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 부순다와 만든다, 푼다와 이어짐은 상대적일 뿐이다. 상식의 틀을 부수는 발상의 전환.
    10.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 결론, 1번~5번 까지의 명제는 공간 개념의 명제들이며 6번 7번은 시간개념의 명제들 8번 9번은 현상계의 존재들과 고정관념에 관한 명제로 세상의 모든 관념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데부터 개념에 차별성을 없애고 지양과 통일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을 내림

    논리의 대가 공손룡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
    ☞ 희다는 형용이 붙은 것은 빛깔을 나타내는 형체를 가리키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말이라 함은 누런 말 검은 말 모두 해당하지만 흰 말은 앞의 것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말에는 여러 빛깔이 있을 수 있는데 말에서 빛깔을 빼버리면 말 그 자체만 남는다. 흰    말은 그러한 말에다가 흰 색을 더한 것이기에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명가의 의의
    명가의 논리는 상식을 벗어나 혼란을 준다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진정 그들의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이 있었다. 고정된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비판의 철학으로 의의가 있다.

    주역∥점쟁이와 철학자

    주역이라는 책
    유교의 5경에 들어가는 책으로 ‘주나라의 역’ 이라는 뜻. 비유와 은유, 암호같은 말들로 되어 있는 주역은 5경중 가장 심오하다고 여겨져 공자가 애독했던 책이기도 함.

    ‘복희씨가 처음 8괘를 그렸고 신농씨가 64괘로 나누었다. 주나라 문왕이 비로소 괘에 풀이하는 말을 붙여 역이란 이름이 생겼고, 그 후 문왕의 아들 주공이 ’효사‘를 지어 일단 완성되었다. 공자가 다시 10익―’단전‘상 하, ’상전‘상 하, ’계사전‘상 하,’문언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을 지어 보충 설명하였다.’

    주역은 64괘와 각 괘에 대한 해석인 괘사, 각 효에 대한 해석인 효사로 이루어져 있고, 10익 가운데 문언전, 단전, 상전의 내용은 해당 괘에 포함시켜 편집해서 계사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처럼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 나무의 의미

    고도를 기다리며는 특별한 조명이나 무대배경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설정될 것이라 어느 시골길. 미정의 시대. 나무 한 그루만 있는 공간에서 오전-오후 정도만을 알려줄 수 있는 단순한 조명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부조리극이 심도 있는 줄거리와 플룻의 변화에 치중하기 보다는 등장인물의 대화와 행동양식에 의존하는 특성에 관여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는 나무 한 그루를 필요로 하는데 텅 빈 공간에 나무 한 그루만 달랑 서있는 격이 여서 당연히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으로 이 나무는 존재한다는 자체로 관객 각개에게 여러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이 나무와 등장인물간의 관계성에서도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무는 자연이며, 초월적인 관찰자적 위치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느 사회의 어느 경향에 국한 받지 않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연적 실존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조리극의 일반적인 경향일지도 모른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과 사회에의 관계성․인간의 생과 시간․인간 생의 목적의식의 상실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매일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만을 기다리며 다른 어떤 생산적인 활동도 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둘에게 있어 막중한 의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 상황에 있어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생의 목적의식의 상실의 부조리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들에게 고도는 생의 목적이자 지금 상태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의 희망이다. 그들의 이러한 상실을 현대사회에 비추어 더 주목해 보자. 인간은 태어났기에 생을 산다. 몇 천일이 될지 몇 백일이 될지 모를 하루들을 보내지만 하루하루에 특별한 목표 없이 하루하루는 그냥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한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이상적인 가치는 돈․명예․권력 등의 다소 물질적이고 규정할 수 있는 가치로 상정되어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고통과 고난도 감수한다. 그러나 위의 가치들은 행복의 완벽한 대표성을 띄지 못한다. 행복이란 지극히 추상적이면서 심리적인 가치인데다가 이상점이라는 절대성을 띄고 있지만 돈․명예․권력 은 구체적이고 표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물질적인 가치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게 할 수 없는 상대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순 속에 인간의 생의 목적을 상실까지 이르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러한 상실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다. 두 등장인물은 이러한 상실의 극한형태로써 무의미한 대화를 통해 시간을 흘려보내고 생을 존속시키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것 밖에 어떠한 다른 의욕적인 활동도 벌이지 않는다. 여기서 고도는 현대사회에 막연하게 다가오는 행복이란 개념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나무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무는 우선 여기서 이 둘의 무의미한 대화를 지켜보는  관찰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둘은 텅 빈 공간에서 하고 대화를 하는데 다른 한 개체로 나무가 존재한다. 나무는 이 둘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 그들을 관찰하는 존재로서 작용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도 은연중에 나무가 지켜보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화를 하다가도 가끔씩 나무를 쳐다본다든지 나무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지만 나무의 변화 등에 굉장히 신경 쓰곤 한다. 나무는 단순히 관찰자의 위치로 파악할 수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나무는 자연을 대표하기도 한다. 나무 하나가 자연물의 하나로 파악할 때, 이는 등장인물들과 상당히 대조되는 성격이다. 자연의 대표인 나무는 생의 목적의식의 상실상태 따위를 초월한 존재이며 중간에 잎이 나기도 하는 등 생존을 위한 창조적 활동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등장인물은 현 상황에서 고도만을 기다리며 어떤 다른 활동도 벌이지 않는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과 대조해 볼 때, 나무는 자연으로 더 확장시켜 보자면 절대자적 위치의 관찰자로 존재한다.

    ․ 나무의 다른 의미; 등장인물들과 공유점을 형성할 수 있는 존재
    나무는 자연의 대표성의 성격으로 관찰자적 위치의 의미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또한 한계적인 존재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공유점을 형성할 수 있는 존재다. 나무의 의미에 파고들기 전에 설정해 두어야 할 것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의 관계이다. 둘은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토라지기도 하고 서로 아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둘은 그 자체로 인간의 사회성을 의존시켜 주는 관계이다. 서로는 서로의 관계없이는 안되기에 서로 죽여주기의 자살을 할 수도 없다. 하나가 먼저 죽으면 남은 하나는 죽여줄 대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둘은 둘 자체로 하나의 사회이다. 그런데 둘 만의 관계의 사회성의 공유점을 나무에서 찾을 수 있다. 나무는 하나의 인간의 형상과 비슷하게 서 있음으로 대화의 상대자 등으로 존재 할 순 없지만 간접적인 사회 형성의 기재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했지만, 나무 가지가 나약하여 목을 맬 수 없음. 그리고 앙상한 나무 등의 외면은 이러한 나무의 사회성을 강조한다.

    ․ 나무의 위치
    나무는 정중앙 혹은 중앙 쪽에 있되 나무가 등장인물들을 대면하는 위치에 두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것이 나무의 이중적인 성격을 양쪽으로 대응하는 측면이다. 나무가 정중앙에서 노려보듯 지켜보고 있으면 나무의 자연성과 절대적인 관찰자 위치를 강조하는 측면이 될 테고, 약간 측면에서 보고 있다면 사회성을 약간 강조할 수 있는 경향이 있을 것 같다. 대체로 중앙 쪽에 위치하되 관객과 등장인물을 지켜보는 듯한 나무. 앙상한 가지를 위로 뻗음이 흡사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 [지금, 바로, 여기] 요약본

    一. 철학 Ⅰ

    철학적 기반에 대하여
    1. 동양철학의 정초
    동양철학에서 철학적 기반은 내가 사는 현실,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만으로 현존실재(現存實在) 하는 자리. 현금찰나(現今刹那) 의 위치함 속에서, 실존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실존의 주체는 모든 존재형식의 역(易)의 위치에 섰다.

    2.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시공간도 없고 오직 나만 있을 뿐이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공간개념이 형성된다. 또한 공간으로부터 시간 개념이 생겨난다. 내 의식속에서는 시공간이 분리된 상태로 인식되며, 존재자의 자리에서는 시공간이 없는 물(物)은 무물(無物)이며 무의 자리에서 시공간이 포함시키는 것이 파악이다. 시공간이 함게 있는 자리를 역(易)에서 말하면 시중이라고 하며 노자에서는 무명(無名)이라 한다. 물이 아닌 무물의 존재를 도(道) 또는 박(樸)이라 한다. 시중의 자리가 동약철학의 기반이요 도와 박이 다름 아닌 진리의 기반.

    3. 時中과 나
    시중(時中)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물(物)이 존재함으로 시공이 있고, 시공이 있음으로 하여 물이 있다. 공간은 물(物)이 앉은 상(象)이요, 시간은 물(物)이 옮기는 상(象)으로, 시간과 공간은 물의 존재 형식이다. 그렇기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의 위치로 내가 서있는 자리이며 내 존재가 곧 시중(時中)이며 내 앞에 마주치는 것 모두가 시중(時中)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현재 위치의 실존을 보지않고 있어 자기 상실에 이를 수 있으니 상실을 벗어나 오늘을 살기 위해 실존의 자각을 위한 것이 바로 동양철학적 기반이다.

    4. 易과 시0․공간
    역(易)은 변화(變化)라는 의미. 변화는 시공간적 의미로, 시공간상에서 하는 존재 파악이 변화이다. 역은 존재 형식을 말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며 이런 형식속에 물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괘(卦)와 효(爻)다. 괘효상(卦爻上)에서 물상(物象)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주역(周易)의 실질내용이다. 시공간의 철학이 주역에서 64괘와 384효로 전개되는데 이 전개는 괘와 효로만 끝나기 보다 마지막 괘를 미제(未濟)라 하여 무한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역(易)이 가지는 생생불이(生生不已)의 변화(變化)의 철학이다.
    생명은 물상(物象)을 빌려 존재하지만 물상에서는 역(易)으로 하여금 변화를 또 다른 생명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변화의 생명을 기(氣)라고 한다. 기(氣)철학은 생명을 문제 삼고 있다.

    5. 乾坤과 陰陽
    태초(太初)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혼돈(混沌)만이 있었다. 반고씨(盤古氏)가 혼돈을 둘로 갈라 공간(空間)을 만들어 그 안에 존재자를 있게 하였다. 공간의 벽을 하늘과 땅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있게 하는 존재공간이다. 주역은 이를 건곤(乾坤)이라 하였다. 건곤은 시간을 만들어내고 시간과 공간은 함께하고 있고 또한 건곤은 시공간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인식세계는 시공간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그 인식한 내용도 달라진다. 물상(物象)은 변화(變化)인데, 물상은 존재의 공간적 인식내용이요, 변화는 존재의 시간적 인식내용이다. 이 두가지 인식 내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역(易)의 건곤(乾坤)이요, 음양(陰陽)이다. 음양은 물상이요 변화이며 또한 도(道)이다. 역에서 도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시공간의 존재형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건곤이요. ­­, ― 로 기호화하여 음양이다. 음양은 변화(變化)를 공간화한 것이요 그러므로 물상(物象)이요 시간을 요구한다. 음양의 기호로 나타내지는 역의 괘(卦)와 효(爻)는 시계의 자판과 같은데, 괘효는 물상이요, 그 물상 속에서 이해되는 것은 변화이다. 그렇기에 음양은 바로 건곤(乾坤)이기도 하다. 건곤(乾坤)을 천지라 할 때, 음양의 물상(物象)적 파악이요, 건곤(乾坤)을 음양(陰陽)이라 할 때에는 물상의 시간적 파악, 곧 변화(變化)이다. 그러므로 건곤은 모든 존재자의 형식으로 시공간과 함께 하면서도 인식상에서는 시간은 공간과 분리되어 변화로, 공간은 시간과 분리되어 물상으로 파악된다. 이 분리, 파악되는 시공간의 연계속에서 존재자를 새롭게 파악하려는 것이 역(易)의 괘효(卦爻)이다. 그리고 거기서 파악되는 존재가 다름아닌 생명(生命)으로 살아있음의 존재자이다.

    6. 復과 始終
    복(復)은 무명(無名)의 자리로 유(有)도 아니요, 비유(非有)도 아니지만 유무(有無)가 그로부터 나오고, 동(動)도 비동(非動)도 아니나 동정(動靜)이 그로부터 나오고, 시(始)도 종(終)도 아니나 시종(始終)이 그로부터 갈라진다. 복(復)의 자리에 있는 것을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 하며 음양(陰陽)으로 말하면 화(和), 묘(妙),도(道)라 할 수 있다. 천지지심으로 봄으로써 모든 존재현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복(復)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과 물(物)의 마음이 교감(交感)하는 자리이며 의 마음으로 봄으로 해서 존재현상을 알게 하며 현상 너머를 볼 수 있게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1. 시간과 공간
    공간(空間)은 물상과 물상 사이를 말한다. 사이(空間)가 있기에 현존하는 상이 존재한다. 공간은 물상을 문제삼는데서 생겨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상만이요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물상(物象)만이 있을 뿐이다. 있다면 물상의 존재 모습이요, 그러한 존재형식이다.

    2. 존재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상(物象)이 있을 뿐이다. 물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생겨난다. 물상의 형상을 규정하여 알게하는 것이 공간이고 변화를 규정함으로써 알게 하는 것이 시간개념이다.
    ① 객관적 존재 현상: 시공간은 존재의 형식이고, 물상이 존재이지만, 물상은 의식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없다. 객관적 존재 현상이란 시간과 공간이 대상이 아닌 대상자체로 마주 서는 의식 현상을 말하며 이게 바로 물상(物象)이다. 이렇게 마주 서는 일련의 과정을 파악이라 하며, 파악된 존재 현상 속에서 물상의 존재형식으로 문제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② 인식된 시간과 공간: 인식되는 시간과 공간은 일정하기도하고, 상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특정하게 어떤 것을 꼬집어 절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라는 속에 상(象)을 가둘 필연성은 없다. 일정성(一定性)으로 파악될 필요도 있지만, 현존실재(現存實在)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식이라 하여도 주체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3. 시․공간의 비분리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고 있는 비분리성(非分離性)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분리성에서는 물상(物象)의 역(易)을 다룬다는 것이 기반한다. 시간과 공간은 물상(物象)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기에 그러한 비분리성이 성립한다.

    4. 시계와 시간
    시간과 공간은 시계와 잣대라는 정의함 속에 있지만, 이런 정의의 개념속에 사실이 묻혀질 수 있다. 올바른 인간의 이해에 있기 위해서는 개념으로 파악하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의 도구임을 인식하고 실제의 물상(物象)을 보기 위해서 정의를 해체(解體)해야 되고 새로운 정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5. 有와 無
    유(有)와 무(無)는 존재개념이 아닌 인식(認識)의 개념이다. 우리의 인식 기능이 완벽할 수 있다면 유․무 개념이 그대로 존재개념이 될 수 있지만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식(認識)의 개념에서 멈춘다 동양에서 존재부정의 무(無)개념은 없다. 무(無)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존재 또는 인식내용이 없음으로의 무일 뿐이다.

    6. 妙와 徼
    노자는 묘(妙)를 무욕(無欲)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 하였고, 요(徼)는 유욕(有欲)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 하였다. 무욕(無欲) 앞에는 상(象)을 가지지 못한 존재자가 마주 서는 것이고, 유욕(有欲) 앞에는 상(象)을 가진 존재자가 마주 선다. 묘(妙)는 무명(無名)에 해당하고 요(徼)는 유명(有名)에 해당한다. 무명은 현존실재(現存實在)요 유명이 우리 앞에 마주 서는 존재 현상으로 만물(萬物)이다.
    묘(妙)는 무욕(無慾)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마주 서는 것은 요(徼)일 뿐, 묘는 마주 설 수가 없는 것이, 무욕이란 실질적으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념(思念)자체의 단절 속에서 마주 선다는 대상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무욕이관기묘(無慾以觀其妙)라고 하여 묘(妙)란 무욕(無欲) 앞에 마주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무명과 동일 개념은 아니다. 역에서 묘(妙)는 복(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7. 色과 象
    색(色)은 상(象)이라는 말이요 구별이라는 말이다. 상을 구별로써 존재하는 것을 물(物)이라고 한다. 상(象)이 있어야 구별이 생기고 상을 가지는 구별이 명(名)이다. 노자는 명(名)이 있어 물(物)이 있게 되었다고 함으로 노자의 명(名)은 상(象)을 이루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명(名)은 곧 색상(色象)이라 해도 좋다. 색(色)은 구별이요 상(象)은 모양이다. 색(色)과 상(象)은 같이 있는 것으로, 물상의 근거가 된다 하여 묘(妙)라고도 할 수 있다.

    8. 태극도(太極圖)
    주림계(周痳溪)의 태극도(太極圖)는 다섯 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는 음양(陰陽), 그리고 세 번째는 오행(五行)을 그려놓은 그림이다. 동일한 그림 첫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그림은 모두 따로 떨어져 있는데 아직도 미해결된 문제가 많다. 태극도는 다섯 개의 그림이 모두 우리 앞에 마주 서는 존재자, 즉 물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第一圖는 무물지상(無物之象)을, 제이도(第二圖)는 물상(物象)을 그리고 생멸현상(生滅現象)을, 제사도(第四圖)는 물상이 가지는 존재형식으로 시공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오도(第五圖)는 만물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상에 있으며 그러므로 변화(變化)하고 그 변화는 것이 물상으로 그 물상은 실재를 존재 바탕으로 한다는 설명이 된다.

    易論的 사유에 대하여
    1. 陰陽論的 사유체계
    역론(易論)에서 드러나는 기본적인 사유체계는 현상(現象)론에 있으며, “변화의 존재” 로서 현상을 문제삼는다. 역(易)은 철저히 현상(現象)을 다루고 있는 학(學)이지만,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현상 즉 변화자체의 문제보다 그 변화를 어떻게 우리의 인식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가가 핵심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역론의 사유체계(思惟體系)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다름 아닌 ­­,―의 두 기호로 드러내지는 음양론적 사유체계이다. 음양으로 명칭되는 ­­,― 의 두 기호는 변화를 드러내는 기호요, 그러므로 음양은 변화가 그 의미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체인 만큼 음양이 변화 자체는 아니며, 공간적 표현의 기호 명칭인 만큼 공간이란 사유를 낳게 하며 그 의미는 공간적이다. 여기에 음양의 기호가 시공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시․공간의 좌표와 存在현상(象)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의 좌표 위에 있다.” 이것이 역론(易論)에서 내리고 있는 존재정의요, 그 존재가 다름 아닌 변화(變化)다. 변화만이 실재(實在)하는 존재현상이며 이러한 존재현상을 상(象)이라 한다. 그리고 그 상(象)의 존재형식이 바로 음양(陰陽)이요, 음양으로 시송간의 좌표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 괘효(卦爻)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괘효상에 시․공간이 있으며 그 시․공간 위에 상(象)을 잡아내고자 하는 것이 역론이다.
    괘효는 시공간의 좌표이지만 실제로는 공간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의 세계를 뛰어넘으려 하는 것이 동양사상의 궁극이다. 그러나 표현세계는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표현의 요구성이 있다. 그런 요구성 아래 나온 것이 역론이고 음양(陰陽)의 괘효(卦爻)이다.

    3. 표현의 세계와 의미
    역론(易論)에서 표현의 세계는 괘효(卦爻)이며 괘효에 붙여진 말이 담고 있는 의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역론이 가지는 기본적인 사유의 틀은 음양(陰陽)이요, 그러므로 음양론은 사유체계가 역(易)이 가지는 표현의 세계이다. 입상(立像), 설괘(設卦), 계사(繫辭)가 역(易)의 내용으로 구체화 해보자면 입상은 변화를 음양기호로, 설괘는 다시 입상을 구체화 시킨 것 그리고 계사는 설괘를 다시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표현의 구체화시킨 것인데 표현이 구체화 될수록 인식은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화․명료성의 이름아래 사물의 실체를 한정하고 해석에 국한될 수 있다. 이것이 역론이 갖는 한계로 의미가 넓어지고 풍부해짐을 표현함이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사실의 세계와 마주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로 진정한 동양철학이다.

    4. 표현의 세계와 인식
    표현의 세계는 표현의 대상 곧 사실의 세계만이 아닌 시공간과 함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의 세계상에서만 공간이 문제되는 것이요, 그 표현의 대상인 사실의 세계에서는 공간만을 문제삼을 수는 없으며 공간은 시간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의 세계와는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화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마주 세울 수 없고, 문제 삼을 수 없기에 표현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실재(實在)는 우리 앞에 마주한 존재현상과 다르며 알수 없고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표현의 세계가 배후 실재를 이탈함을 견제해야 한다.

    5. 표현 밖의 세계와 인식
    표현밖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하지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재 위에서 문제 되는 것은 그 실재가 문제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앎의 세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간에 그 앎이 한가지 일정형태로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없고, 절대적인 앎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앎의 요구는 실재 앞에 다가서려는 것이 아니라 앎의 세계를 확충하고 새롭게 하는 데 있다.

    6. 앎의 세계
    앎의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이 도(道)요, 자연(自然)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외에 우리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도(道)는 앎의 세계 뒤에서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는 하나 도(道)를 앎은 아니다. 역론(易論)의 요구는 변화이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하여 더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二. 철학 Ⅱ

    道에 대하여
    1. 道와 器
    존재자의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이 도(道)와 기(器)다. 역(易)에서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의 세계를 기(器)라고 한다. 도와 기는 노자에게는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이다. 상(象)을 가지는 것은 물(物)이다. 역(易)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물(非物)이 도(道)임 그리고 물(物)이 기(器)임. 이것은 동의어일 뿐이지 성격규정까지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有名과 無名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은 무(無)․유(有)개념과 등치개념으로 존재개념이다. 동양에서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무(無)의 개념은 없다. 다만 인식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노자는 이 무(無)를 도(道)라 하였는데 이 무(無)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될 수 없음의 무(無)를 뜻함이다.

    3. 東洋에서의 ○(圓)
    ○는 동양에서 도(道)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많이 그려지는데 이것은 문자의 한계를 간파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문자의 한계를 그림이 넘어서게 해 주는 것은 아니며, 문자와 그림의 상호극복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는 원(圓)으로 보느냐, 공(空)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원이라 봄은 원주가 끊긴데가 없어 시종(始終)이 없으니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공(空)이라 함은 무(無)를 드러낸 것으로 선(線)안의 공백(空白)을 문제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시무종은 시간이고 무는 공간으로 하나의 선분을 통해 시공간이 함께하는 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는 유교에서는 태극(太極)이요, 노자에게는 무(無)로 무극(無極)이 된다. 그러나 ○이 시공간이 함께하는 자리라면 무극이요 태극일 수는 없다. ○라는 그림으로 하여금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다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夷․希․微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 무한한 형상(形象)의 세계를 이(夷)라고 하고, 들리지 않는 무한한 소리의 세계를 희(希)라고 하며, 잡히지 않는 무한한 세계를 미(微)라고 한다. 이(夷)․희(希)․미(微)는 무한한 존재자의 세계를 말한다. 우리의 오감으로 보는 것은 위치에 따라 상대적이다. 무한히 달라지는 상(象)의 모습은 무한자(無限者)이다. 이․희․미의 개념은 무한자속에서 유한자를 만들어 갈수 있게 한다. 이 만들어 가는 일련의 작업을 앎이라 하고, 앎의 지평을 끊없이 넓혀가는 과정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5. 破와 覺

    파(破)는 깨는(碎) 것이고, 각(覺)은 깨는(開眼)것이다. 깨는 것은 파요, 열리는 것은 각이다. 파와 각은 새로운 세상과 마주 섬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한 번 마주서는 것이 아니라 날로 거듭되면서 있다. 그러므로 거듭 깨야만 그 새로운 세계와 마주 설 수 있다.

    6. 禪
    선(禪)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소요유가 선(禪)의 세계다. 선은 내앞에 마주 서는 현전(現前實在), 그 현전실재와 함께 하는 마음을 말한다. 선의 마음은 현금(現今)속에 살아 있음을 말한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는 것은 번뇌(煩惱)를 안겨다 준다. 염(念)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고 머무른 마음이 상(想)으로 여기서 생겨난 사실이 관념을 가리운다. 무념무상(無念無想)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말고 살아있게 해야 한다.

    理氣에 대하여
    1. 無極과 太極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은 동일개념은 아니지만 별개로 존재하는 개념들은 아니다. 음양이 태극과 동일 개념이 아닌것과 비유된다. 주자의 무극즉태극(無極卽太極)은 무극과 태극이 선후개념이 아니라는데 의미를 집중해야 한다. 무극과 태극이 동일개념이 아닌데 있어서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 견해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의미파악이다.

    2. 理와 氣
    존재자의 세계를 앎의 지평과는 상관없이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이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형이상(形而上)과 도(道)를 이(理)의 개념으로 치환(置換)시키고, 형이하자(形而理下者)와 기(器)를 기(氣) 개념으로 치환시킴으로서 물(物)의 세계를 전연 달리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철학이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유(有)의 철학으로 유(有)의 세계를 이원(二元)구조로 이해해 들어가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는
    유(有)개념조차 달라지며, 성리학의 이(理) 개념은 태허(太虛)도 무(無)도 아니다. 그것은 인식범주 안에 들어온 유(有)의 세계를 기(氣)와 더불어 이원구조로 파악하는 해석학적 존재개념일 뿐이다.

    3.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이발(理發)이 퇴계(退溪)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라면, 기발(氣發)은 율곡(栗谷)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율곡은 논리적 엄정성과 객관적 사실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면, 퇴계는 모든 객관적 사실도 인간 앞에 마주 서야만 의미가 있으며 논리도 인간에게서 주어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도덕적 엄정성이 그 철학의 기반이 된다고 하겠다. 율곡의 기발은 사단(四端)이 정(情)이라는 데 있고, 퇴계의 이발은 사단이 순선무악(純善無惡)이라는 데 있다.

    4. 一而二, 二而一
    혼돈(混沌)에서 갈라져 천지(天地)가 되는 것이 일이이(一而二)요, 천지가 있는 것은 혼돈이 갈라진 데서 온것이라는 것은 이이일(二而一)이다. 여기서 혼돈은 일(一)이고, 천지는 이(二)다. 천지는 구별된 유(有)의 세계로 노자의 유명과 같은 것으로 천지 즉, 이(二)는 수의 개념이지만, 혼돈 즉, 일(一)은 수의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이기(理氣)철학에서 보면 일(一)을 수 개념으로 봄으로서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다. 일원론이니 이원론이니 하는 것에 대해 개념이 불명확하여 제 3의 개념마저 도출해 낼 정도이니 본 의미에서 어긋난다.

    5. 氣質之性
    이기(理氣)철학에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은 성리학 전개의 기본법칙이다. 즉, 만물로써 말하면 물(物)의 존재현상이 기(氣)요 물(物)의 존재 근거가 이(理)다. 이(理)가 인간에게서는 성(性)이요, 기(氣)는 질(質)이다. 성(性)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이(理)요, 질(質)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기(氣)다. 기는 기질로서 성을 떠나 있을 수 없으며, 성 없이 기질만을 가지는 인간은 없다. 성(性)과을 함께 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되 기품이 다름아닌 기질지성(基質之性)이다. 그러나 본연의 성(性)의 개념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대비되는 것은 아니니, 성(性)의 개념에 있어 두가지 성(性)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성(性)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다만 기질지성(基質之性)은 기질포성(基質包性)의 성을 말하고,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그냥 성을 말한다.

    6. 人心과 道心
    마음은 성(性)․정(情)으로 인심(人心)․도심(道心)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성․정은 동정상(動情上)에서 심(心)을 이해한 것이라면 인심․도심은 선악상에서 심(心)을 문제삼는 것이다. 동정상(動情上)에서 문제삼을 때 동(動)하는 심(心)을 정(情)이라 하고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는 심(心)을 성(性)이라 한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바로 동(動)한 심(心)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정(情)이요 그리고 정(靜)의 상태에 있는 심(心)을 중(中)이라 하니 중(中)은 곧 성(性)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정(性情)은 심(心)의 동정(動靜)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 이기(理氣)와 같이 심(心)의 이원(二元)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에 대하여
    1. 槪念과 定議
    정의(定議)는 개념(槪念)의 의미를 확정하여 명확히 하는 것으로 개념의 내용을 묶어 고정된 의미의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고정된 의미에서 정의란 개념의 내용을 죽인 화석(化石)이라 할 수 있다. 다 시 말해서 죽은 개념이다. 개념과 정의는 결코 동일한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개념의 의미를 확장하여 명확하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개념의 내용에 한발 다가서는 것보다 개념의 내용을 고정시켜 사고의 폭을 죽일 수가 있다. 참다운 지식은 모든 것을 정의의 틀에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살아있는 말과 죽은 말
    표현에 갇혀있는 말은 죽어있는 말이요, 표현에서 자유로운 말은 사라있는 말이다. 지나간 말은 죽어있는 말이요, 오늘 하는 말은 살아있는 말이다. 말은 의미전달에 그 생명이 있다.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살아있는 말이 아니다. 말은 오늘로 살아 나와야 한다. 옛것이라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3. 살아있는 개념과 죽은 개념
    정의(定議)에 묶여 있는 개념은 죽어있는 개념이요 정의에서 자유로운 개념은 살아있는 개념이다. 정의는 개념을 이해하게 하나 정의로서 이해된 개념은 전부가 아니다. 개념은 살아 있어야 한다. 정의는 개념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오늘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해야한다.

    4. 言者와 知者
    진정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하였다. 말이라 함은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한낱 소리일 뿐이다. 그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이 다름 아닌 지(知). 곧 앎이다. 노자의 언어의 부정은 명(名)과 실(實), 다시 말해 개념과 개념의 지시체인 사실의 세계를 문제삼는데 있는 것이요 언어의 기능과 언어사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 철학은 말로써 시작한다. 말이 표현에 갇히면 죽은 말이되고 말이 정의에 묶이면 죽은 개념이 된다고 하고 있다. 노자에게 말한 말을 하지 않음은 죽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항상 새롭게 표현되면서 구사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세계가 구성되어야 하낟.

    5. 無言의 말
    무언지언(無言之言)은 살아있는 말이요, 무명지명(無名之名)은 살아있는 개념을 의미한다. 말이 지니는 의미체를 개념이라 함이 옳으며 말로써 구성되는 의미체가 바로 개념이다. 그러나 한번 구성된 개념은 언어의 틀 속에 갇혀 죽은 개념이 된다. 이런 죽은 말을 파(破)하고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무언지언(無言之言)이요 죽은 개념에서 새로운 개념을 깨치는게 무명지명(無名之名)이다.

    6. 말과 詩
    일상의 의미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말과 달리 시(詩)는 소통의 측면이 아니다. 물론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그 시(詩)에 담지만 전달을 위해서 나오는게 아니다. 시가 탄생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독립한다. 그리고 시어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독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상(象)을 만들어 새롭게 다시 담긴다. 그것이 시어의 묘용(妙用)이요 독립성이다.

    槪念들에 대하여
    1. 道
    도(道)는 곧 박(樸)이며 자연(自然)이다. 발가벗은 몸인데 내가 인식하는데는 상(象)으로 물(物)로 마주서기에 진정한 도는 아무도 볼 수가 없으며, 알수도 없다. 도는 알 수 없는지라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없어 무명(無名)이라고도 한다. 도는 개념도 아니며 도(道)는 그저 도(道)일 뿐이다. 도(道)를 앎의 대상으로 마주 세울 수는 없어도 무(無)로부터 유(有)를 만들어내고, 유(有)로부터 물(物)이 생겨난다.

    2. 理
    유학에서 이(理)는 천명(天命)으로 절대군주다. 이 절대군주에 부림을 당해야 하는 만물(萬物)은 기다. 이기는 주종관계로 모든 존재자의 세계에 질서를 세운다. 성리학은 주종적 사고를 철학이다. 그래도 이것은 인과(因果)론과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리학의 인과(因果)가 시간상에서 문제삼고 있는 개념이라면 이기(理氣)는 인과관계를 논리상에서만 문제삼고 있는 것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잇다. 그리고 인과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고 바탕위이지만 이기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가 바탕이다. 그렇기에 이기는 환원 불가능한 관계의 개념이다. 살아있던 유학이 성리학의 이(理)라는 천명아래 죽은 철학이 되고 말았다.

    3. 氣
    기(氣)는 실재하는 존재자, 곧 도(道)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양생학(養生學)으로 넘어오면서 생명(生命) 또는 생기(生氣)로 알게 되었고 성리학(性理學)에 와서는 물상(物象)으로 이(理) 없이는 아무 구실도 못하는 개념 규정이 내려지고 말았다.
    본래 동양철학 일반이 가지는 기(氣)는 이(理)와의 관계성도, 형이하자(形而下者)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기(氣)란 시(始)도 없고 종(終)도 없으며 타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오히려 규정될 수 없는 존재로 모았다. 기(氣)란 실재하는 것이기는 하나 파악되는 존재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마주서는 존재현상이 그로부터 생겨난다. 기(氣)를 거슬러 올라가면 혼돈(混沌)이요, 상(象)을 만들고 있는 의식현상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마음(心)이다. 기(氣) 결국 모든 것의 존재 바탕을 일컫는 개념이다.

    4. 性
    성(性)은 심(心)이다. 살아있는 마음이다. 성(性)은 성(性)․정(情)의 성이 아니라 마음이 살아있다는 성(性)이다. 마음이 살아 있는지라 동(動)하기도 하고 정(靜)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마음이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는 것은 동(動)한지라 정(情)이요, 그러지 않을때는 마음이 정(靜)한지라 그때의 마음을 성(性)이라 한다. 성(性)․정(情)은 마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5. 常
    노자에서 상(常)은 불변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장 정상적으로 있는 존재자의 모습을 말한다. 상(常)은 정상(正常)의 상이며, 자연(自然)이라 한다. 상(常)은 또한 일상(日常)의 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제의 상(常)이 그대로임이 아니라, 오늘은 오늘로서 새롭게 탄생하는 상(常)이다. 이 상(常)을 오늘에 있다하여 자연(自然)이라 하기도 하고 새롭게 있다고 하여 생명(生命)이라 하기도 한다.

    6. 和
    화(和)는 모든 존재자들이 스스로 자기로서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다 살려내는 것을 제물(祭物)이라고 한다. 다 살아 자기 존재자들이 서로를 간섭․방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로서 살아 있음을 의마한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화(和)는 존재자들이 다 살아 공존하며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이다.

    7. 不仁
    인(仁)은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해당되는 마음이므로 생명의 근원, 씨를 의미하기도 하며, 생명 자체이기도 하다. 공자의 인(仁)은 이러한 생명의 인간 모듬살이에서 사회적 질서로서의 도덕 의식으로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앉는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인(仁)을 부정하고 불인(不仁)을 주장한다. 인(仁)이 생명의 의미로서 남아있지 않고, 사랑으로 그리고 사회 의식으로 내려와 앉으면 곧 간섭이 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불인(不仁)은 간섭하지 않는 본래 그러한 대로 생을 영유하는 것이다. 진정 참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8. 知足
    지족(知足) 지지(知止)는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을 알라는 것이 지족이요, 그 필요한 것을 가지는 데서 그치라는 것이 지지다. 지족이 앎의 문제라면 지지는 실천의 문제다. 노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고 없어도 무방한 것들이 있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을 아는 것이 지족(知足)이요, 없어도 될 것을 얻지 않으려 하는 것이 지지(知止)다. 오늘의 문명사회는 바로 그 없어도 될 것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얻으려 하는 데서 자연(自然)을 해치고 있다. 그것을 염려한 것이 아닐까?

    9. 又日新
    일신(日新)은 오늘이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오늘러소 있다는 말이다. 오늘만이 의미가 있기에 오늘을 이탈하지 말고, 바로 오늘에 살면서 새로운 것과 마주 서라는 것이 우일신(又日新)이다. 또한 오늘의 문제를 오늘 해결하자는 것이다. 허상에 매달려 오늘을 보내면서 자신을 망각하고 사는 것에서 깸은 우명지(又明之)라 한다.

    10. 物化
    물화(物化)는 말 자체로 ‘물(物)이 변한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으나, 장자의 마지막을 맺는 말로써 크게는 장자 사상을 대표화는 개념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살아있다.”부터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한다.”의 역(易)의 사유논리에서 비롯된다 하겠으나 변화(變化)를 생명으로 개전(開展)시켜 모든 존재자를 살려내는 데로 이끌어 간 데서 장자철학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 호접몽(胡蝶夢)의 예화에서 장자는 생사(生死)조차 물화(物化)의 관점으로 본다. 장자는 존재자의 세계를 일러 제물(祭物)이라 했고, 그 제물을 물화(物化)라고 했다.

    三. 老․莊의 사유체계

    1. 有의 철학과 無의 철학
    유가(儒家)는 유(有)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도가(道家), 특히 노장(老莊)은 무(無)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太極)을 존재의 바탕으로 하는 유가철학이 그렇고 무극(無極) 또는 무(無)를 존재의 바탕으로 하는 도가철학이 그것을 말해준다.
    유가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은 그 핵심이 기(氣)보다는 이(理)에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보편성(普遍性)의 요구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理)는 불역(不易)으로 모든 존재자의 동일성(同一性)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유가의 학문적 목적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금수(禽獸)와는 다른 존재임을 분명히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명(天命)의 개념인 이(理) 개념이 창출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노․장은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마음(自然)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존재 근거를 요구하지도 않고, 도덕성 확보도 관심 대상이 아니다. 다만 노․장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앎을 근거로 한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인간생활에 어떤 문제들을 야기시키는가가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시비(是非) 보다는 진위(眞僞), 보다는 선악(善惡)보다는 사실(事實)규명에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마음의 소요(逍遙), 즉 모든 사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는데 있다.

    2. 도(道)는 알 수 있는가?
    역철학(易哲學)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철학의 존재기반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의 지배 아래 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없는 것을 대상으로 문젯삼을 수 없다는 것이 동양의 철학적 기반이다. 이런 기반 아래 노․장 철학의 ‘진리(眞理)의 정초(定礎)는 세워지는데 지금 바로 여기에 그 정초가 있다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기반이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이다.
    노․장은 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道)를 무(無)또는 무명(無名)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무(無)란 존재론적인 실재유무가 아닌 인식론상의 지(知)와 관련된 무(無)이다. 그러나 도(道)는 실재한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서 무(無)이다.
    노․장 철학에서 도(道)란 무엇인가의 대답은 ‘지금 바로 여기’ 실재(實在)하지만, 알 수 없다, 실재하는데 왜 알 수 없는가 그것은 앎의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개념의 세계요, 표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노장에서는 만물의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닌, 앎이 구성한 세계라고 한다. 우린 앎의 세계에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세계가 바로 무명(無名)이다.
    노․장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명(無名)의 세계가 아니라 유명(有名)의 세계를 밝히는데 있다. 인간은 유명의 세계를 벗어나 살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무명 세계에 있는 도(道)의 세계에 들어가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도(道)를 각(覺)할 수 있어 지인(至人) 과 진인(眞人)이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각(覺)이란,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닌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다는 무위(無爲)의 의미이다. 이런 앎의 지평은 현실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현실을 여는 것이다.

    3. 現前적 실재 사실과 도의 세계
    동양철학에서 명확한 이론적 체계와 사고행위가 비논리적이라는 비판은 서양철학에 기반하여 특성짓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분명성의 기파와 논리적 사고의 거부는 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유가 실질적인 내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불분명하게 드러내지고 있는 개념은 도(道)와 각(覺)인데 불분명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도(道)는 사실의 개념이 아니요, 각(覺)은 논리적 사고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道)는 개념을 지니지 않기에 현(玄)이라고도 하고, 묘(妙)라고도 하고, 무(無)또는 무명(無名)이라고도 한다. 도(道)는 의미체도 거부하고 모호성을 가질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신비하다라고 대치해서는 안된다. 동양철학에서는 그러한 모호성속에서도 명확하고 구체적인 세계와 마주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도(道)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으로서 도(道)고, 각(覺)은 사고가 아니라는 것으로서 각(覺)으로 개념과 사고의 세계에서 분별이 있다. 이 멈춤 속에 사실성이 있고 구체적인 위치성이 있다. 공자의 도(道)는 나의 도(道)와 다른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문제 삼는 것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 남이 마주선 세계가 아닌 내가 마주 선 세계를 말하고 있다.
    분명하게 환하게 드러나는 사실의 문제는 언어와 사고가 끊어진 자리에 서 있다는 말이다. 동양철학은 사실 앞에 중간자 없이 직접적으로 나와 마주서고자 하는데 있다. 직접 마주 서는 세계를 선(禪)의 세계라고 한다. 중간자를 없애고 직접 마주서는 것이 각(覺)이라 할 수 있다.
    우리와 직접 마주 서 있는 세계는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 마주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리와 법칙, 언어체계 등의 중간자가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늘 거부하고, 방해하고 있다. 이런 중간자를 노장에서는 유위(有爲)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위를 떠나 마주 서 있는 세계를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동양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한다는 역론(易論) 앞에 서 있다. 그렇기에 언어의 표현과 합리적 사고 내지 이성적 사고는 실질적인 세계와 마주 설 수 없게 고정되어 있음으로 거부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앞에 마주 서는 현전(現前)세계는 개념의 세계도 아니며 논리적 사고의 결과에서 오는 사념(思念)의 세계도 아니라는 것은 가장 구체적이요 사실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착심(着心)이라고 하여 변화하는 것을 불변적 세계로 묶어 두고 있다고 한다. 노장에서 문제 삼는 것은 내 앞에 직접적으로 마주 서는 현전적 세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가장 구체적으로 자기 특수성을 드러내면서 존재한다. 그것이 현전하는 참다운 존재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가장 구체적이요, 적실한 존재의 세계를 말한다.

    4. 살아있는 세계와 죽어있는 세계
    동양철학에서 살아있는 세계는 도(道)의 세계이고 죽어있는 세계는 개념(槪念)의 세계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사실적 존재자의 세계요, 생명의 세계요, 살아있음의 세계를 말한다. 한순간 머물러 있는 일이 없으며 동일한 상태를 두 번 되풀이 하는 일도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여여(茹茹)의 세계라 하고 선(禪)의 세계라고 한다.
    생물학적 존재를 벗어나 우주론적 생명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자는 다 살아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세계와 구별하여 그저 활물(活物)의 세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념의 세계이다. 개념의 세계는 사념의 세계요, 문자의 세계요, 말의 세계다.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넘어오자는 것이 동양철학 일반의 핵심이다.
    과거는 지난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다. 오직 찰라현금에만 사실이 있다. 우리는 단순한 어떤 개념조차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랑’ 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개념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더 모호해 진다. 직접마주 서는 세계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 사실이다. 동양철학에서 명(名)과 실(實)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 지는 것도 이런 개념의 부조리성에 우린 진정한 사실의 세계로 체득(體得)해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변화한다. 이런 변화하는 역론속에 도(道)가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활물(活物)적 생명의 세계 그것은 내 앞에 마주친 찰라 현금(現今)속의 현시성인데 특징이 있다.

    5. 과학주의적 세게관과 노장사상
    서양철학은 인간의 오만함 속에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진 독립된 존재로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고 자연을 인간의 정복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사고 속에 오늘날의 과학문명은 편리함을 가져다 준 만큼 인간 위기가 문제 되고 있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세계관은 문제 해결은커녕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동양사상에 비교해 볼 때, 서양사상의 특질은 사고의 틀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그리고 만든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틀이란 법칙이요, 원리요, 일정한 사고의 논리체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세계관의 틀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이원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양사상은 그러한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실로 예기치 못한 것도 있고, 틀에 있지 못했던 것들의 갑자기 튀어 나올 수도 있다. 그동안 끝없이 인간의 앞날을 밝게 해줄것만 같았던 기술문명속에서 영혼의 문제와 자연의 문제가 대두되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인간을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하려는 속에 서양사상의 한계가 드러난다.
    동양사상에서는 이 세계의 어느 것 하나 동일 반복의 선상에 이쓴 것이 없으며, 인간과 자연은 이분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고관이 들어있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살아있다는 역론(易論) 속에서, 틀을 벗어난 참 앎(道)와 마주치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동양사상에서 보는 서양사상은 틀 속에 머물러 있는 한계가 있는 세계이고 죽은 세계이다. 존재 사실로부터 무명(無名)을 이끌어내고 무위(無爲)를 추구하면서 현전(現前)하는 존재자들의 앎에 깨어야 한다.

    6. 老․壯에서 본 죽음의 문제
    노․장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氣)의 취산으로 보고 있으나, 문제의 출발은 열생오사(悅生惡死)의 관념을 심리적 기반으로 하여, 인생의 속박과 굴레를 생각하느 것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장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무관하다는 것이 노장의 입장이다.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좋다․나쁘다라고 생각하는 열오의 관념은 다 근거없이 주어지는 허망한 것이다. 지나친 상대의식으로 하여금 죽음을 문제삼기 보다는 삶의 실체를 찾는 철학이 노장 사상이다.
    살아 있는 것만을 문제삼는 노장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은 관념으로 참이 아니다. 죽음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이다.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삶의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관념에 얽매인 것이다. 관념을 버리면 생사 구분은 사라지고 생은 생으로써만 있는 것이다.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남을 현해(懸解)라고 하고 이러한 경지에 오른 사람을 지인(至人)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생과 사를 구분지을 필요가 없다. 서로 구별하는 속에 간섭이 생기고 의미 없는 감정이 생긴다.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속박의 관념이고 노장은 생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상이다.

    7. 老子 1장의 新 해석
    노자 1장은 언어(言語), 즉 말(道)에 대한 이야기요 그 말을 도(道)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은 도요 죽어있는 말은 도가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무명(無名)의 세계라 하고, 죽어있는 말을 유명(有名)의 세계라고 노자는 말한다. 명(名)이란 상(象)을 가지며 이를 개념이라고 한다. 무명(無名)이란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은 말이다. 상(象)을 가지지 않은 무명(無名)은 자유로울 수 있다.
    노자 1장은 말(名)이 상(象)을 만들어내고 상을 가짐으로써 물(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니 말이 있어 존재자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이 살아있어야 거듭 새로운 존재자, 살아 있는 존재자를 앞에 마주 세울 수 있다. 살아있는 말을 도(道)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이 있어 존재자가 있게 되고 말이 존재의 세계를 열어간다. 노자 1장은 이러한 존재자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四.
    老子를 읽어가며
    1. 노자 1장 말
    「노자」1장은 언어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언어의 세계야 말로 존재의 세계요, 그리고 거듭 존재를 내 앞에 마주 세우는 존재의 창출이다. 말이 있어 존재가 있게 된다는 것이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라는 것이요, ‘동출이명(同出異名)’ 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존재의 창출을 ‘유생어무(有生於無)’ 라고도 했다. 말로써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말은 모든 의미체, 표현되는 모든 것을이르는 것으로 노장이 문제 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노자 철학이 도(道)에 있는 것이 아니요, 말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 바로 1장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도(道)를 문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2. 노자 2장 萬物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2장이다. 유며의 세계는 있고 없음의 유무가 생겨나고 고하장단․상하좌우․선악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말이 있어야 하며 말은 표현으로서 가지는 의미체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드러나 있는 의미체이다. 그러므로 곧 존재는 말이고 말로서 존재하는 것이 만물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시간은 자신이 느끼 대로 상대적으로 의미주어 진다. 모든 것은 고정불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워진다. 무위는 기존의 의미체를 탈피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3. 노자 3장 無爲
    노자는 성인은 의미를 규격화하고 경쟁을 부추긴 존재라고 말한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비교하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을 노자는 거부한다. 욕심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니 마음을 비워라, 어진이를 받들지 마라. 금은보화를 귀하게 역기지말라, 지(知)를 내세우지 말라. 이것이 노자 3장의 무위(無爲)이다.
    4. 노자 4장 生命
    단순한 사물이라도 보는 시각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롭다. 무한히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라 한다. 우리는 사실로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도(道)란 알 수 없는 실재를 말한다. 우린 현실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의미를 찾아야만한다. 늘 새롭게 아는 것 그런 앎의 지평이 우리 현실이다.

    壯者를 읽어가며
    1. 逍遙遊
    한없는 사념(思念)의 세계, 이 세계를 달리며 생각나는대로 고삐를 풀어주는 것이 소요유(逍遙遊)이다. 사념(思念)의 세계에 울타리를 만들고 고삐를 매어 놓으면 그것은 관념(觀念)의 세계다. 사념(思念)의 세계는 자유로우나 관념의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고삐에 따라야하는 것은 사유(思惟)의 논리이다. 성인(聖人)조차 이런 예(禮)라는 창살에 묶여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네 마음을 경계가 없는데 맡기고, 무궁한 세게에서 노닐라 하는 것은 사념(思念)의 세계의 소요유(逍遙遊)이다.
    2. 齊物論
    천뢰악(天籟樂)이란 소리란 소리는 다 살려 한가지 소리도 죽이지 않고, 완전한 소리로 이루어 지는 음악을 말한다. 그런데 악인(樂人)이 나와 음(音)을 만들고 율(律)을 만들어 틀을 이루고 기준을 세워 틀에 맞지 않는 소리 기준에 맞지 않는 소리는 죽여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세상을 망친 사람이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도덕(道德)이라는 틀로 선악(善惡), 시비(是非)의 기준을 세워 억지로 살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보면 이것이오, 저곳에서 보면 저것이다. 세상의 어느 무엇 하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의 무엇 하나 이것 아닌 것이 없는데 가릴게 무엇이냐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제물(祭物)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연(自然)답게 살려노라는 것이다. 또 물화(物化)라는 용어를 설명하되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르게 있다는 말이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變化)하는 것으로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할 때 물화라고 하는 것이다. 물화로 있는 것을 제물(祭物)이라고 한다. 제물론이 물화로 매듭지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3. 養生生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간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배반하는 일이라 마음을 온전하게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양생(養生)이다. 양생(養生)은 오래 살려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살려는 마음을 버린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고 나면 죽는 것이 슬픈 것도 사는 일이 즐거울 것도 없다. 마음에 애락(哀樂)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을 현해(懸解)라고 한다. 죽고 사는 것에 관여하지 않고 그러한 대로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양생(養生)의 의미이다.

    [지금 바로 여기- 결론]

    ‘지금 바로 여기’ 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를 주체로 나의 공간, 나의 시각에서 살아가야 할 방법이다. 동양철학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움을 연상하곤 하는데 실제는 다르다. 현실의 철학이고,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새롭게 인식될 철학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살아가는 이유를 잊었다고 말한다. 그냥 시간이 흘러 왔다고,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왔건만 내 삶에 이유는 무엇이고,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고 어느 순간 회의하곤 한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사람이 제 자신을 잊었기 때문이다. ‘사회 속 인간’ 만을 알았지. ‘나의 다수가 사회’ 임을 몰랐던 것이다. 사람이 인식이 가능한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인식이 가능한 것이 제 삶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살아가야 할 방도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식이 가능하지 않은 것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허상을 본떠와 그것을 추구하느라 제 자신의 것마저 잃는 전도의 부조리를 일으키곤 한다. 이것이 인간이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 가장 큰 연유이다. 인간의 역설 그것은 제 자신의 주체와 사회 속에 있는 제 자신의 사회성 둘 간의 괴리이다. 인간은 제 삶만을 추구하고자 할 순 없다. 사회에서 태어났고, 완벽히 사회화 되었고, 떠나갈 수 없는게 사회이다. 그러나 자신은 제 자신의 사고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인간의 의미는 제 자신의 뇌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완벽한 사회화 덕택에 인간은 제 자신을 잃고 만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잊고 허상만을 쫓는 격이다.
    ‘지금 바로 여기’ 내 현제 위치에서 가장 중한 것을 봐야 한다. 가장 중한 것은 내 자신의 철학이고, 본질을 꿰뚫려고 하는 힘이다. 그런 신념과 힘속에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부조리마저 깨고 진정 중한 것을 찾악가는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 책 『지금 바로 여기』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며칠전 저희 동아리 사업으로 전태일 추모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태일 분신 33년을 기리며, 여러 다양한 추모행사르 벌이는 것이였죠. 저희는 이번 사업에 상영할 목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전태일 분신의 의미를 새롭게 보며 현실에서 자각하게끔 하는 영상물을 기획하는데 힘썼습니다. 영상물의 주제는 노동자들의 삶입니다. 소외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희는 그것으로 멈추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와서 우리 학교의 계단 밑 2평 정도의 휴게실에서 쉬시고 계시던 청소부 아주머니, 버스기사 아저씨, 현 비정규직 강사 노조위원장, 은행골 식당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모두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간청하지 못했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일상 삶의 주변이면서도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곁에 있고, 또 차후에 그렇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면서도 무관심했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영상물에 담았습니다. 영상물 제목을 고민하게 됬는데, 제가 ‘지금 바로 여기’ 로 하자고 해서 그것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 내 현실의 모습. 전 동양사상에서 배운 철학에서 한 웅큼 더 나아가 그런 제 자신을 위한 철학을 조금이나마 내 주변까지 확산키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정 이해를 확실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여기는 자신을 위한 철학이면서, 제 자신의 인식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당위성을 띄지만 이상주의적 성격이 진합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라는 것이 사회 속 인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 속 개인은 아무래도 나약해집니다. 노장사상은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하지, 사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자신의 인식이 시작이고 끝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이 현실에 있어서 커다란 범주이자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회‘ 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으로만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물의 제목을 그렇게 함이 이 책의 철학을 잘 담아내는 것인지 확신이 서진 않습니다. 제 생각엔 제 자신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하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러한 폭을 점차 넓혀가자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보낼 제 철학이기도 하고요. 제 자신을 다지고 그것을 사회로, 사회속 인간에서 나를 찾는 진정함을 추구하는 것이요.

    끝으로, 전 책을 읽을 때 항시 비판적으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진실일 수는 없다는 생각때문이죠. 이 책은 노장사상에 비추어서 동양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부분에 성리학과 우리나라의 퇴계․율곡 철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기론에 대하여, 본질을 잃고 형식에서 출발한 철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이기철학을 그렇게만 볼 수 있나요? 본질부터 따졌을 때, 이기철학은 본의의 뜻에서 벗어난 건가요? 전 이기철학 나름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있을거라고 추측되기도 하는데…

  • [Agnes Jaoui-Canta] 비오던 날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esn’t play for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He may play the jack of diamonds
    He may lay the queen of spades
    He may conceal a king in his hand
    While the memory of it fades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shape of my heart.

    And if I told you that I loved you
    You’d maybe think there’s something wrong
    I’m not a man of too many faces
    The mask I wear is one

    Those who speak know nothing
    And find out to their cost
    Like those who curse their luck in too many places
    And those who fear are lost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shape of my heart.

    내가 경주를 처음 간 것은 스무살에서 스물한살이 넘어가는 사이였다. 경주에 도착한 때는 1월 1일이었느깐. 그 새해 첫 날 부산터미널에서 헌혈을 하고 거기서 받은 도서생활권으로 맘모스 빵을 사고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생각보다 차비가 그리 비싸지 않아 경주행 통일호 기차를 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산행이었고 또 느닷없이 결정된 경주행이었다. 생애 처음 밟아보는 경상도는 어느 부문 기대만큼 이질적이었다.  모두가 내가 쓰지 않는 억양과 사투리를 쓰고 있고 나만이 입속에 전라도 억양 섞인 표준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익숙한 도심의 풍경속에서도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을 나게 하였다. 이제보니 그 때가 또한 난생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때 갑자기 길을 나서게 된 연유야 여러 말할 수 없을만큼의 복잡한 심경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스무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감을 평범하게 맞이할 수 없다는 것과 신년을 갑갑한 서울에서 보낼 수는 없다는 낭만적인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산으로 향하겠다는 것도 서울역에서 전광판을 보면서 정했을 만큼 느닷없는 일정이어서 여행은 대개가 방황 혹은 방랑이었고 춥고 빈곤하여 언제나 피로했다. 그 피로감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 걷고 있다는 그야말로 방랑 그 자체였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것. 약 4일동안 걷기만 하였던 것 같은데 그것은 때로 즐거웠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기도 하였고 또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피로한 몸을 더 고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버텨야 한다고 내가 그리도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앞으로 내가 더욱 이런 고립감 속의 방랑을 더욱 끝없이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선 곳을 걷는 일이 곧 내 미래의 인생이지 않을까. 생계를 버텨나가는 일은 더욱 그런 고된 방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내자 하고 나를 강제하였다.

    걸음의 마지막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토함산이었다. 1월 2일의 토함산은 인적이 드물었고 내가 불국사를 나와 토함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거의 저녁무렵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그 유명하다는 석굴암인데 그리 먼 곳에 있겠어? 그냥 좀만 걸으면 나오겠지 했다. 그래서 석굴암 출입 시간과 버스 시간이 달랑 달랑 한데도 토함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함산은 산이라고 잘 이야기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그때 내게는 어찌나 생각보다 높고 큰 산이었는지 그것도 불국사에는 그래도 사림이 조금 있었지만 토함산 길은 거의 전후방 가시거리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더욱이 어둑어둑해짐 속에 나는 조급해서 달리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뛰듯 걷듣 올랐다. 정신없이 오가는 중에 끼고있던 이어폰. 평소에 조금 지루한 곡들이어서 잘 듣지 않던 재생목록. 베토벤의 월광과 Sting-Shape of my heart 가 내 길의 동행자로 함께  해주었다. 어두워지는 산 속에서 스르르 올라치려고만 하는 두려움과 고독을 내려앉히던 두 곡. 특히나 Shape of my heart 의 기타소리가 나를 얼마나 위로해주었던지…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본 석굴암 조각은 기억속에 아련하여도 Shape of my heart의 멜로디를 들을때면 토함산을 오르고 내리는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부산-경주의 여행, 내가 길을 걷는 느낌, 낯선 길을 가듯 인생을 살자 라는 다짐에서 오는 쓰라림 끝 즐거움.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 [Sting-Shape of my heart] 토함산 내려오는 길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esn’t play for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He may play the jack of diamonds
    He may lay the queen of spades
    He may conceal a king in his hand
    While the memory of it fades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shape of my heart.

    And if I told you that I loved you
    You’d maybe think there’s something wrong
    I’m not a man of too many faces
    The mask I wear is one

    Those who speak know nothing
    And find out to their cost
    Like those who curse their luck in too many places
    And those who fear are lost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shape of my heart.

    내가 경주를 처음 간 것은 스무살에서 스물한살이 넘어가는 사이였다. 경주에 도착한 때는 1월 1일이었느깐. 그 새해 첫 날 부산터미널에서 헌혈을 하고 거기서 받은 도서생활권으로 맘모스 빵을 사고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생각보다 차비가 그리 비싸지 않아 경주행 통일호 기차를 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산행이었고 또 느닷없이 결정된 경주행이었다. 생애 처음 밟아보는 경상도는 어느 부문 기대만큼 이질적이었다.  모두가 내가 쓰지 않는 억양과 사투리를 쓰고 있고 나만이 입속에 전라도 억양 섞인 표준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익숙한 도심의 풍경속에서도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을 나게 하였다. 이제보니 그 때가 또한 난생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때 갑자기 길을 나서게 된 연유야 여러 말할 수 없을만큼의 복잡한 심경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스무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감을 평범하게 맞이할 수 없다는 것과 신년을 갑갑한 서울에서 보낼 수는 없다는 낭만적인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산으로 향하겠다는 것도 서울역에서 전광판을 보면서 정했을 만큼 느닷없는 일정이어서 여행은 대개가 방황 혹은 방랑이었고 춥고 빈곤하여 언제나 피로했다. 그 피로감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 걷고 있다는 그야말로 방랑 그 자체였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것. 약 4일동안 걷기만 하였던 것 같은데 그것은 때로 즐거웠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기도 하였고 또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피로한 몸을 더 고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버텨야 한다고 내가 그리도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앞으로 내가 더욱 이런 고립감 속의 방랑을 더욱 끝없이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선 곳을 걷는 일이 곧 내 미래의 인생이지 않을까. 생계를 버텨나가는 일은 더욱 그런 고된 방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내자 하고 나를 강제하였다.

    걸음의 마지막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토함산이었다. 1월 2일의 토함산은 인적이 드물었고 내가 불국사를 나와 토함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거의 저녁무렵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그 유명하다는 석굴암인데 그리 먼 곳에 있겠어? 그냥 좀만 걸으면 나오겠지 했다. 그래서 석굴암 출입 시간과 버스 시간이 달랑 달랑 한데도 토함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함산은 산이라고 잘 이야기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산이지만 그때 내게는 어찌나 생각보다 높고 큰 산이었는지 그것도 불국사에는 그래도 사림이 조금 있었지만 토함산 길은 거의 전후방 가시거리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더욱이 어둑어둑해짐 속에 나는 조급해서 달리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뛰듯 걷듣 올랐다. 정신없이 오가는 중에 끼고있던 이어폰. 평소에 조금 지루한 곡들이어서 잘 듣지 않던 재생목록. 베토벤의 월광과 Sting-Shape of my heart 가 내 길의 동행자로 함께  해주었다. 어두워지는 산 속에서 스르르 올라치려고만 하는 두려움과 고독을 내려앉히던 두 곡. 특히나 Shape of my heart 의 기타소리가 나를 얼마나 위로해주었던지…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본 석굴암 조각은 기억속에 아련하여도 Shape of my heart의 멜로디를 들을때면 토함산을 오르고 내리는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부산-경주의 여행, 내가 길을 걷는 느낌, 낯선 길을 가듯 인생을 살자 라는 다짐에서 오는 쓰라림 끝 즐거움.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 [이상은-Roman Topia] 아기자기하고 발랄한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초록빛 달과 붉은 대지와 마음속의 낙원, 그 낙원속의 나)

    달은 휘영하고 포도주는 향기롭구나
    어제도 내일도 없이 영원한 지금일뿐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상쾌한 밤 공기에 몸이 녹아드는구나
    우리는 영혼만 남아 밤새워 춤을 추누나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아아 우리가 떠나온 도시..얼음모래가 내리던

    말해줘 말해줘 더이상 슬프지 않다고
    노래해줘 노래해줘 우리는 하나라고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미소 짓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아아 우리가 떠나온 도시..얼음모래가 내리던
    아아 짙은 회색 하늘 아래 모두가 노래를 잊었지
    아아 우리 고향은 저 별들..떠나온 건 언제였나
    아아 엄마처럼 웃어주네..수천년 같은 얼굴로

    (초록빛 달과 붉은 대지와 내눈속의 그대..그대 노래 속의 나
    금빛  은하수와 은빛 공기와 마음속의 낙원, 그 낙원속의 나)

    우연히도 이상은을 좋아한다던 사람들을 동시간대에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이상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 것 같긴 한데? 하면서 담다디를 불렀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누군가의 미니홈피에서 “비밀의 화원”을 들었으면서도 그것이 이상은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기 영역이 있는 어떤 중년 가수겠지

    하는 그런 느낌만 있었다.

    이상은 12집이 이제 막 나오던 순간.

    우연히도 어느 클럽에선가, 누군가 한국 음악계를 비판하면서 이상은만은 제대로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던 것을 보았고, 그냥 관심이 없어 그런갑다. 했는데 아는 선배들 몇몇이 가수 누구 좋아하냐는 내 질문에,

    난 취향이 노인네틱해서 이상은 이런 애들 좋아해.

    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냥 호기심이었다.

    이상은? 누굴까? 하는 마음으로…

    당시, 약 1평짜리 자취방에는 컴퓨터도, mp3도 없어서
    CD Player로 스피커에 연결해서 음악을 듣곤 했는데

    여름 밤, 그 좁은 방에 울리던 이상은 11집이 얼마나 생소하던지 말이다.

    난 음악을 거듭 몇번씩 들어봐야 좋은지, 나쁜지를 아는데

    이제껏 들어왔던 그런 음악이 아닌 음악이었고

    지독하게 밀려오는 감정들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독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듣다보면 좀 스산해지기도 한 그 음악들을

    그래도 나는 부둥키고 있었다.

    왠지 오기가 생겼기 때문.

    왜 난 “비밀의 화원” 만 좋고

    나머지는 다 독해불가인거야!

    하는 오기.

    이상은이라는 중년가수를 이해해보고 말겠다는 오기…ㅋㅋ
    그래서 끊임없이 이상은의 11집 <신비체험> 을 들었는데

    그야말로 앨범제목이 나와 꼭 드러맞지 않은가 한다.

    그녀의 감정의 뭉텅이들이

    여름 밤, 1평짜리 방안에서 울리는데

    하나씩, 하나씩

    갑자기 던져지는 것이다.

    단어로 형용하기에, 감정이란 부유물은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할 때는 그리움이 툭 던져지고

    어찌할 때는 외로움이 툭 던져지고

    어찌할 때는 회망, 강인함, 추억 이런 것들이 툭! 툭! 던져져 왔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그 던져진 감정들과 놀아남이

    내겐 얼마나 소중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