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DJ

  • [2007.6.13.] 철학

    요즈음 아트앤 스터디 동영상 강의에 익숙해지고 있다.

    고미숙의 <괴물로 보는 한국 근대성>

    이정우의 <코라의 시대>

    이 참 깨우쳐준 것이 많다.

    철학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먼저 탐구해봐야 할 학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학문이라고 외피를 쒸울것 없이

    우리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
    우리의 존재조건을 묻는 것.
    우리의 삶의 진로를 방향 지우는 것이 바로 철학일진대…

    이 철학이 없기 때문에..

    삶이, 관계가 공허하네. 이런 이야기 따위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정우씨가 가르쳐준 후기 구조주의에 관심이 간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감시와 처벌>만 유일하게 읽었는데.. 그것도 겨우 읽긴 했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인물들인지 내 능력이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즐겁다.
    그들에게 다가가갈수록 내 인생이 더욱 웅숭깊어질것만 같다.

  • [2007.6.12.] 연일 피…

    연일 피를 쏟고 있다.

    어제는 일어나자 마자 피가…
    오늘은 이빨을 닦다가 피가!

    비염이 악화되었나 보다.
    몸이 피곤해서는 아닐텐데
    피를 흘려서 그런지 몸이 피곤해지는 것 같가도 하다…. 좀 오버인가?
    그래서 독일어공부도 이틀째 쉬었고 운동도 쉬었다.

    리듬이 깨져버리다니..

    좀 여유가 생기면
    치과와 이비인후과를 동시에 다녀야겠다.

    으으으~ 무서운 병원…

  • 별들의 들판(공지영,창비,2004)

    별로 기대가 가지 않았지만 공지영이 쓴 문학이란 전부 읽어 해치우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시나 빌렸다. 전체 소감은 이전의 작품에서 발휘되었던 가치들이 회색빛 뿌연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고나 해야할까. 공지영의 문학에는 힘이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거나 절규하고 있지만 그래도 힘이 있었다. 그 상처는 명쾌하게 치료되지 못하고 끝나버리기 일쑤였고, 읽는 이까지 음울해질 정도였지만 밑바닥 치는 음울함은 아니었다. 왜였을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지나온 삶이었다고 느끼게 하는 호소력 외에도 언제나 그 이야기들이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지 않고 현재로의 소환 형식을 띠며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이 그랬었어가 아닌 삶은 이런 지난한 과정이야 라고 이야기 함 속에서,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향한 방향설정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었던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몇년간의 공백을 지나고서 나온 별들의 들판이라는 작품집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래왔던 레파토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였고, 그녀가 취급했던 익숙한 소재들은 베를린이란 이색적인 공간에서도 여전했으며 전의 작품들에서 보였던 미래지향적인 희망은 그만 퇴색되어버렸다. 전의 작품들을 읽었던 독자라면 느끼게 될 재현효과의 힘에 기대어서 어느 정도의 충만감정도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베를린이라는 공간
    별들의 들판은 베를린을 공간설정으로 하여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각 작품의 공통적 요소는 베를린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베를린의 아우라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작소설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베를린이랄까. 작자후기에서 말한 우연히도 베를린에서 1년정도 살게 된 기회를 얻게 되었고, 베를린에서 몇 년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경험적 소산이 결정적 이유이겠으나 그것은 외부에서 얻은 힌트에 불과한 것이고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베를린의 이미지를 바라보자.
    베를린은 주지하다시피 초고속성장신화가 있던 곳이고, 동서분쟁의 공간적 ,정치적 공간이었으며 현재는 독일통일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미래상을 전망해볼 때 독일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청사진이 될 수도 있겠는데, 작품에서는 동서분쟁에서 통일로 인해 남북갈등으로 전환되어버린 베를린의 현주소를 되짚기 보다, 그러한 동서갈등과 남북갈등의 상처들. 그 상처받은 도시의 거주민들이 풍기는 ‘향기’ 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는 누가 어떤 성향이던가, 누가 어느정도 부자였던가에 주목하지 않고 상처를 받았던가, 지금 그것을 치유했던가에 주목하고 있으며, 공지영 특유의 변해버린 사람들에 대한 관찰자 정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망명자와 거의 인력수출이라는 명목으로 독일에 간 여성들, 유학 간 사람들을 주 주인공으로 삼는데 그들이 베를린에 갔던 이유는 자의적 선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베를린은 그 이방인들 모두를 받아들이는 도시로 그려진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베를린이 동서분쟁 당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계선에 서면서 정점에 서 있었던 그러한 긴장감의 형성과 갈등의 국면 국면들을 넘어왔던 도시라는 것이다. 상처받은 도시 베를린의 사람들은 경계와 정점에 동시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이방인들이 부유하는 향기를 내뿜는데, 베를린의 사람들이 부유하는 것은 그 어떠한 끈도 매여있지 않고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시 베를린에서의 서로다름과 상처에 대한 동질감이 그들을 엮어주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이었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 살 수 있었고, 살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베를린의 현장은 다른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맺는 존중과 배려속에서 자기 자신이 상처를 가다듬게 만들고 달랐던 것은 베를린의 포용력 속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이다.

    -강제하지 않는 치유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해. 라는 메세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은 강제하지 않는 치유와 대립되는 것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상대방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동일선상에서 눈을 맞대야 해야 하지만, 현재에서 상처의 치유 방식은 그렇게 아늑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줄꺼야 라는 말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상처입었던 사람들이 유행같은 주류질서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차이를, 자신의 상처를 망각시키고 다수의 질서에 동화하는 것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처를 거듭난 자아의 성숙이 아닌 상처를 망각한 자아의 변화인 것이다. 거기서 작가는 제발 그들을 좀 내벼려둬! 라고 이야기하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성을 먼저 강조하고 그들 치유의 과정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서 결국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사랑이었다고 나타낸다. 수평적 사랑. 한 사람은 들어주고, 한 사람은 말하고만이 아닌, 끝없이 ‘좋은 이야기’를 내뱉는 권위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구멍뚫린 가슴안을 바라봐주는 사랑. 강제하지 않는 치유는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에 첨가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걷어버린 동류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으로?
    공지영의 전작들에서 주로 보이던 소재, 주로 보이던 문제의식, 주로 보이던 인물들, 주로 보이던 치유의 방식들이 나타났으나 앞서 말했듯 소환형식을 띠며 현재에서 미래지향적이던 문제의식은 이미 퇴색되어 버렸다. 티백을 두번 세번 우려내서 더이상 색깔도 향기도 만들지 못하면서 녹차라고 우기듯이 되버린 것은 무엇일까? 문제의식과 미래지향적 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루만짐, 어루만짐. 이 세상에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들은 물론 많다. 한국의 폭력과 광기의 역사속에서 묻혀 버린 것들을 다시 소환해야 하고 재평가해야하고 그것들을 치유해야 함은 당연한 말일진대 전망없는 치유는 단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는 보상금과 명패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상처입었던 이유들을 되짚어 보면, 현재에 계속 행해지고 있는 칼질의 칼손잡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금방 분명해질것인데, 어루만짐 그 자체 만으로 그쳐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추억에 권위 부여하기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박완서,웅진씽크빅,2002)

    처음 읽은 박완서의 장편소설이었다. 전에 읽은 것은 단편모음집이었으니 일명 거장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참 늦게도 읽은 셈이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묶여 온 단편들의 섬세함, 역시 거장답다(?) 라는 그 역량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장편을 읽는 사이 시종일관 나는 자유롭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사실 작가 박완서는 내게 작품보다 그녀의 활동과 말들로 익숙한 작가였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을 지내고 있는 작가, 조선일보에 가끔씩 논설을 기고하는 작가, 더욱이 이문열의 거침없는 발언(?)에 항의하는 뜻으로 네티즌들이 이문열 책 장례식을 벌였던 그 때 조선일보에 이보다 더 시대의 비극은 없을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기고했던 작가… 그래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J-1비자’ 라는 살짝 반미감정이 드러난 작품을 읽었을 때도 놀랍고 아리송했던게 당연했다. 이게 웬일이람 하고. 사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지내는 것 자체만 두고 이 작가는 안 좋은 작가라고 딱지를 떼 버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우선 언론매체이고, 문학상이니깐. 그래서 기고하는 것 하나만을 가지고 작가에 대한 평가기준을 내려오진 않았다. 문학권력 논쟁의 태풍의 눈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비평가 권성우조차도 조선일보에 몇 차례 작품을 소개하는 기고를 한 적이 있는 것이다(그것에 빌미잡혀 강준만한테 질타를 당했지만). 하지만 박완서는 조선일보를 언론매체로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야합했다’ 고 여겨지는 여러 겹치는 활동들을 해 왔고, 그것과의 공조에서 얻어지는 권력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 거기에 문인들의 비판이 잇따를 때마다 조선일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라는 둥의 반응을 보여왔던 것이다. 비평가 정과리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 합류할 때조차 조선일보가 나쁜 줄은 알지만 그것도 언론매체이기 때문에 내부속의 비판자가 되보이겠다는 핑계를 달았던 사례(그것은 붙인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를 보면 문인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극악함은 널리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겠는데? 하며 자연스럽게 손 맞잡은 모습. 그래서 작가 박완서의 작품을 피해왔었다. 사실 헤깔릴까봐 피해왔다. J-1비자 같은 작품을 볼 때 이 작가 도대체…뭘까. 라고 당황하게 되는 것. 더욱이 내가 충분치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으아.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래서 박완서의 이 장편소설을 대하던 와중에도 수없이 의심해보았다. 더욱이 6.25를 전후로 하여 이념갈등의 모습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었지만 미군 앞에서 그 단물을 얻어보고자 하는 한국인들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에 혐의를 두어야 할 부분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읽다가 판단정지. 자전적 소설인 이것에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데 있어서 작가의 주요 포인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 앞에서 내게 닥쳐온 것은 이런 것들이었고 전 이렇게 했답니다. 여기에 그리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었고 그렇다고 가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실 가학적인 서술은 일종의 치켜세움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그냥 솔직했다. 그러니 우선 외부의 박완서는 치워보고 작품을 한 번 보자.

    6.25, 피난, 생존을 위한 갖은 몸부림들, 주인공의 연애 등 그 시대의 갖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언제나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작품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처음부터 등장하고 있지 않다. 없는 가부장 때문에 가부장에 익숙해 있던 존재들은 차기 가부장을 찾고자 하는 데 차기 가부장의 유력한 후보인 오빠는 다리에 총구멍을 간직한 채 말을 더듬고, 광기에 접어드는 때도 있으며, 말도 안되는 떼를 써서 가족을 육체적 정신적 위험에 빠트리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는 오빠의 회복에 전념한다. 그것을 가부장의 복권 그 자체가 이 위기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최고의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 나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주인공은 가부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족들을 거리감 있게 바라보면서도 가부장의 복권을 내심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가부장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때문이다. 그녀가 가부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추측하기로, 가부장이란 직위는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로 자기실현을 포기해야 하는 존재이며 또한 주인공 일가의 가부장이라 함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노릇을 하기 위해 어찌 보면 비근대적일 수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올케와 주인공 나는 부양을 일부분 책임 지면서 가부장이 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지만 집안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양은 누군가가 해야 할 것을 대신 내가 잠깐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올케와 주인공 나의 속내가 있으며 거기에는 가부장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나의 엄마는 가부장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부장 역할의 일부분을 수행하는 데 그것은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전통적, 비근대적 가치의 수호이다. 이런 미완의 가부장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 나에게 보이는 가족은 언제나 불안하며, 누구도 생계부양의 의무를 떠맡으려 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를 혐오하기 까지 한다. 작품은 주인공 나는 다른 가정을 꾸리고 그녀의 본가에선 올케와 주인공 나의 엄마로 꾸려지는 가정을 보여줌으로 해서 끝을 맺는데 주인공 나의 엄마는 일정 부분 옛 가치들을 단념할것 같은 예감을 보이고 있으며, 올케는 종래 가족이 바라던 가부장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이것은 가부장과 가부장제 자체의 부정이 아닌 비근대적 모습의 가부장이 근대적 가부장 모습으로 바뀐다라는 함의일 것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가족 내의 생계부양의 문제와 가부장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하고 있는 한편 급물살 같은 사회모습 속에서 안정을 바라고는 있되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보다는 근대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는 마음을 눈치챌 수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걸맞는 새로운 가부장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자체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근대화를 모두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재래적 관습(치료법 등)의 따뜻함, 구수함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산업화 속에서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감정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하나의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과 사건속에 대응하는 것들속에 드러나는 사회의식을 캐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이 반영일지, 어떤 것이 신변잡기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현재의 작가임에 주목할 때 그때는 그랬어 라는 생각에서 그때를 그랬어로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를 추측할 수는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맥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 속의 맥락에서 연관지어 생각해야한다. 작품 속에서 인민치하에서 본 무용극에 분노하는 모습이나, 어서 국군의 통치아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을 현재 작가의 반공 가치관에서 강조된 것이 아닐까 하는 판단은 너무 섣부를 수가 있다. 그 시절 다른 이념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불가능했던 조건에서 계속 국군아래 있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인민군을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작품속에 드러나는 가부장에 대한 기대, 위의 통치자가 있었으면 한다는 기대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였고 이어지는 현상에서 주인공 나가 그려내고 있는 시선이 어떠한가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작품에서는 주인공 나에 의해 가부장은 기대함과 동시에 부정되는데 그 부정은 종래 비근대적인 가부장의 부정이 되고, 근대적 가부장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산이라 함은 가부장, 전통적인 가치관들의 통칭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마치 힘겨웠던 군대에서의 경험을 후에 추억으로 삼듯이 비근대적인 가부장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 가부장의 조건지움이 오로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냉엄한 자본주의 시장 법칙에 대한 토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데 과거의 모습을 변형하면서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어투가 조금 씨니컬하지만 나는 작품을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려내는 과거의 모습과 일화속에서 표현되는 주인공 나의 감정묘사의 섬세함. 시대상황을 너무 광범위하게 벌려놓지도 않고 주인공 나와 상관지어지는 사회현실상이 작품내에 적절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것 등등. 문장화 할 수 없는 뭉클함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앞서 작가 박완서와 조선일보와의 밀월아닌 밀월으로 인한 내 의심은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 박완서 자신이 이문열처럼 자신의 문학권력을 이용하고, 무지함인지 신념일지 모를 것으로 선택이나 아가 같은 작품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반공사상에 철두철미한 발언을 한 경력은 물론 없으며, 정치적 발언을 한 적은 거의 없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나쁜 것들에 대해 자기는 문학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모습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나와 올케를 향해 자신은 모르니 결백해 라는 듯한 행동양식을 취한 엄마의 행태가 박완서의 모습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니길 바라지만…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이왕주,효형출판,2005)

    갑자기 택시에서 고등학생이 내리길래
    무슨 사정인가 봤더니만
    택시비가 없는 아이가 택시를 탔다고 택시기사가 떨구고 가버린 것이다.

    원래는 아버지가 매일 태워다 주셨다던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는 고등학생.

    외딴 곳에 돌아갈 방도도 없어서 신호봉을 들고있는 우리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그런데
    한 20분쯤 지났을까.

    어느 택시기사가 갑자기 서는 거였다
    택시비가 없어서 지나가던 차에게 가는 김에 데려다 주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그런데 택시비가 없으니 택시는 그냥 보낼 참이었는데

    지나가다가 도로에 서있는 우리를 봐서 다시 돌아왔단다
    행선지도 안물어보고, 차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선뜻 어서 타라는 택시기사 아저씨.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렇게 골고루 있는거다.

    헤헤헤

  • [2007.6.11.]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갑자기 택시에서 고등학생이 내리길래
    무슨 사정인가 봤더니만
    택시비가 없는 아이가 택시를 탔다고 택시기사가 떨구고 가버린 것이다.

    원래는 아버지가 매일 태워다 주셨다던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는 고등학생.

    외딴 곳에 돌아갈 방도도 없어서 신호봉을 들고있는 우리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그런데
    한 20분쯤 지났을까.

    어느 택시기사가 갑자기 서는 거였다
    택시비가 없어서 지나가던 차에게 가는 김에 데려다 주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그런데 택시비가 없으니 택시는 그냥 보낼 참이었는데

    지나가다가 도로에 서있는 우리를 봐서 다시 돌아왔단다
    행선지도 안물어보고, 차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선뜻 어서 타라는 택시기사 아저씨.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렇게 골고루 있는거다.

    헤헤헤

  • 영화 읽기(영화진흥위원회교재편찬위원회,커뮤니케이션북스,2004)

    도서관에서 영화 관련 기본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을 찾는데 다 예전에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좀 컬러플하고 그러면서도 쉽게 쉽게 설명한 책이 없을까 하다가 이 책을 골랐다. 사실 내가 원하던 그런 책이 아니었는데 좀 뜻밖이었다. 이것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과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 영화 이야기도 교과서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뜨아하고 여기던 내가 너무 갇힌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미술, 음악 등은 당연히 교과수업으로 편성되어도 영화는 아직이라고 생각하는 것. 제 7의 예술이라는 영화는 문학, 미술보다는 훨씬 우리 일상에 친숙한데도 불구하고 일명 작품성 있는 작품은 관객의 냉소를 받기 일쑤지 않는가. 그럴수록 영화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임을 왜 생각치 못했을까.
    국내 최초의 영화 교과서라고 한 이 영화 읽기는 영화 기술에 관한 정보 교육 보다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우해서는 어떻게 바라봄이 필요할 것인가에 목적을 두고 제작된 듯 하다. 예술영역의 교과서 답지 않게(?) 그 나름의 관점도 형성되어 있어서 재밌고 안재미있고의 이분법적 가치평가에서 다양한 가치평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 교재가 학교에서 활용되어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토론의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던 책은 아니었지만 새로웠고 기쁜 책이었다.

    *책으로 알게된 추천 사이트
    영상 미디어 센터 미디어 액트 www.mediact.org
    영상 시나리오 작가 협회 www.scenario.or.kr
    영화인 회의 www.kafai.or.kr
    한국 독립 영화 협회 www.coincine.co.kr
    한국 영상 자료원 www.koreafilm.or.kr
    한국 영화 감독 협회 www.kfds.org
    한국 영화 학회 www.fisak.com
    한국 독립 영화 협회 독립영화 데이타베이스 www.indiedb.net

  • [2007.6.9.] 좀 슬펐어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예전에 사두었지만 아껴두고(이건 핑계에 불과할지도…) 안 읽고 있던
    김선우의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다면>을 읽었다.

    드문드문 조금씩 읽었지만 이번에는 한박에 쭈욱 읽어보려 한 것

    김선우의 시.

    먼저 비평을 통해 만난 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그녀의 시의 작품성에 대해 일정이상을 신뢰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시들이 많다.

    아직 내가 느낀 그것들이
    그녀의 화려한 수사와 적절한 메타포로 인한 표면의 겉들이지
    심층적인 것들인지 판단은 안 서지만

    그녀의 시.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시집이다.

  • [2007.6.8.] 별일 없어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예전에 사두었지만 아껴두고(이건 핑계에 불과할지도…) 안 읽고 있던
    김선우의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다면>을 읽었다.

    드문드문 조금씩 읽었지만 이번에는 한박에 쭈욱 읽어보려 한 것

    김선우의 시.

    먼저 비평을 통해 만난 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그녀의 시의 작품성에 대해 일정이상을 신뢰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시들이 많다.

    아직 내가 느낀 그것들이
    그녀의 화려한 수사와 적절한 메타포로 인한 표면의 겉들이지
    심층적인 것들인지 판단은 안 서지만

    그녀의 시.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시집이다.

  • [2007.6.7.] 오랜만에 읽은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예전에 사두었지만 아껴두고(이건 핑계에 불과할지도…) 안 읽고 있던
    김선우의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다면>을 읽었다.

    드문드문 조금씩 읽었지만 이번에는 한박에 쭈욱 읽어보려 한 것

    김선우의 시.

    먼저 비평을 통해 만난 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그녀의 시의 작품성에 대해 일정이상을 신뢰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시들이 많다.

    아직 내가 느낀 그것들이
    그녀의 화려한 수사와 적절한 메타포로 인한 표면의 겉들이지
    심층적인 것들인지 판단은 안 서지만

    그녀의 시.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