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DJ

  • [2007.7.21.] 있을까요?

    전에 기범이랑 막 우기기를 했던 게 생각난다.

    오랜만에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었기에…
    누구랑 같이 자면(?) 언제나 그렇듯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었다….ㅋ

    그 중 얘기를 하다하다…

    행복이란 게 있는가, 없는 가로 서로 우겨댔다.

    나는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기범은 행복이라는 것은 있다…

    그때 내 기억으로는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행복이라는 느낌을 설명할 수가 있느냐,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행복이라 함은 결국 다른 ‘좋은 것’들로 추종되는 것이지, 끝없이 다가가지기만 할 뿐 그것 자체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여, 사회와 괴리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독립된 행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굴러먹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지느냐, 어떻게 권리 지어지느냐, 어떻게 영향 미치느냐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다수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행복의 추구로 자폐적으로 나간다는 것은, 마치 독립된 개인으로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당사자가 되어야만 그것을 깨달을 것이냐!

    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물론 쓰면서 그때 우왕좌왕 했던 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ㅋ)

    기범은

    각 개인의 삶을 강제할 수 있는가. 왜 강제할려고 하는가. 각 사람은 그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 좋은 환경에서 사는 좋은 사람을 행복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농사지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농사짓는 그것 만으로 행복하다. 헌데 왜 일부로 행복하다는 사람을 ‘다른 영역’으로 까지 끌어들이려 하느냐. 왜 그럼으로 하여 불행하게 만드느냐. 모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든 한 생각을 따르도록 만드려고 하는 것은, 강제일 뿐만 아니라 욕심이지 않겠느냐.

    그리고 후에

    매트릭스의 밧데리가 될 꺼냐! 라고 나는 우겼고,
    기범은 무슨 소리냐! 라고 우겼다…

    행복이라는 것 있을까, 없을까는 결국 언어의 문제겠지만…
    기범과 내가 막 떠들어댔던 것의 문제는 지금 돌이켜봐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마구마구 정해진 것이 없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토록 호화롭고, 재미있구나!

  • [2007.7.19.] Agnes Jaoui

    가끔씩 그런 노래가 있다
    바로 내 귓가 옆에서 노래하는 듯한…
    가슴을 아주 그냥 뒤집어 놓는 듯한…

    그것 외에 다른 노래는 들을 수 없게조차 만드는 노래.

    가끔씩 그런 앨범이 있다

    어느 한 곡 좋은 것 골라보라고 하면 한참을 생각하다가 앨범이 좋다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앨범…

    Agnes Jaoui 의 Canta.

    <타인의 취향>의 각본을 쓴 것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데 노래를 불렀단다, 프랑스인인 것 같은데 앨범에 수록된 곡은 거의(확인불가) 포르투칼어란다… 프로젝트 앨범 같은 것인데 국내에는 발매되지 않았단다…아쉽군!

    요새는 계속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수 있는 국내가요만 당겼었는데… 오랜만에 내게 찾아온 반가운 앨범.

    이 앨범을 들으면…

    출지도 모르는 춤을 머릿속에서 빙그르르- 돌려보게 된다.
    그러면 간지러워 지는 손톱 끝.

    가슴과 몸이 부르르르 떨린다

  • [2007.7.15.] 왼손잡이 이야기

    2명씩 앉는 탁자에

    오른손잡이가 왼쪽에 앉고, 왼손잡이가 오른쪽에 앉아있어

    밥 먹을 때마다 서로 팔꿈치를 부딪쳤다고 한다.

    그럴 때

    “넌 왜 왼손잡이 인거야!”

    라고 고함을 질러야 할까?

    예외적인 왼손잡이 때문에 오른손잡이가 불편해졌다고 생각해야 할까?

    둘이 자리만 서로 바꾸면 더 넒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 더 구체적으로, 다른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수가 적은 사람 들에 대해 적대적 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기어린 감정을 품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가?

    괜시리 함께 있게 되면 상당부분 신경써야 하고, 도와야 하거나 그래야  하므로 말이다.

    그런데 장애인 혹은 소수자는 본래 장애인과 소수자의 영원기준에 의해서 장애특질, 소수자가 되게 하는 특질의 존재 이후부터 그렇게 불리는가?

    좀만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보자.

    현재는 사람들의 거의 반 이상이 눈이 나빠 안경을 쓴다. 그중 어떤 이들은 안경이 없으면 거의 사물을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안경이 만약 없었다면 그렇다면, 시력이 나쁜 이들은 시력장애인이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력이 나쁜 사람을 장애인이라 하지 않는 것은 우선 시력이 나쁜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  때문은 아닐까? 시력 안 좋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물안경을 만들어도 도수있는 것을 만들어야 하고, 수업시간에 ‘눈 안좋은 사람은 앞에서 들으세요’ 라는 선생님의 말도 추가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불편사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력 안 좋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일반화 되어 있기에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정상의 범주에 들여놓은 것이다 . 조선시대에 어느 임금 혹은 선비(이름 생각 안남)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안경이라는 것을 쓴 사람이 조선에 거의 없어, 안경을 굉장히 해괴망칙한 기구정도로 보았다고 한다. 그때시절에 안경을 쓴 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시대에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 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가 장애라고 불리우는 것은 기술적 지원, 사회적 제반시설로서 얼마든지 비장애의 범주로 둘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엄청난 재정과 과학기술이 필요하지도 않다. 턱이 없이 평평한 건물을 지어둔다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NO 배려로 일관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부가비용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인간이면, 시민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좀만 참어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유컨대 인질범이 소수를 죽인다고 협박할 때, 다수가 안락하게 평온하기 위해 가차없이 그 소수를 포기하는 생각과 흡사할 수 있다. 그냥 좀 참지. 라는 생각 앞에 단 한번이라도 내가 그 당사자라면 이라는 가정법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그 쉬운 가정법 아래 그 서슬퍼런 당신의 공격성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 [2007.7.15.] 싸이월드 일기

    본 것 또 보고, 본 것 또 보고…

    하는 싸이버릇 때문에 홧김(?)에 비밀번호를 나도 모르는 것으로 바꿔 버렸었다….

    한 한달동안 잠잠했지??

    그때는 컴퓨터하는 시간도 무엇인가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건만…

    웬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책임한 것도 같고

    어떻게들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복귀!

    다시 염탐꾼으로 돌아가 볼까? ㅋ

  • [2007.7.14.] 지독한…

    생활패턴 바꾸기는 고사하고…

    방금 지독한 불면증 때문에 고생했다…

    무려 5시간동안 누워있었느나 내가 잠든 시각은 대략 30분…

    온갖 잡념들이 날 괴롭혔다…

    흑흑….

  • [2007.7.13.] 제주도의 계절은 **이다.

    바람이다.

    오늘 바람 좀 불었다고 7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추웠던… 기염을 토했다.

    참 대단하시다, 제주도 계절이시여.

    지지난 겨울은 그 어떤 곳보다 춥더만,
    지난 겨울은 어떤 날은 더운 적도 있었고..

    지지난 여름은 바람 한 점 안불고 그야말로 달구는 날들의 연속이었건만
    이번 여름은 비오고 조금 그러다보니 덥다 하는 날이 거의 없다…

    여기서 생활하는 이로서는 참 행운스러운 일인데

    특이하게 생각되면서, 묘하게 불안해지는 것이…

    모르겠다!

    난 몇달(?) 있으면 전역이다! ㅋ

  • [2007.7.12.] 주의자?

    이한우가 나보고 오늘 금욕주의자가 아니냐고 했다…

    공부만 너무 열심히 하는 금욕주의자냐고 따져 묻던데

    옛날에 하금철이 나보고 쾌락주의자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참 인간이라는 게 다양하지?

    그렇지?

    근데 요새 열심히 공부하는 것 하나도 없는 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은 비교적 구어체의 부드러운 서술인데 비해 몇주째 붙들고 있고… 잠은 늘어만 가고… 수다만 늘고 ㅋㅋㅋ

  • [2007.7.11.] 요즘은…

    이정우의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듣는 중.

    생활패턴 만들기는 대략난감.. 랜덤하게 자고, 깨고 그러고 있다.

    독어와 토익은 완전 일시중지!

    전역때까지 그래도 목표는!

    책 100권.
    영화 100편.
    철학사입문코스 강의 시리즈 다 듣기.
    영화 관련 강의 다 듣기.
    최신 독일어 책 끝내기.

    하자! 하자!

  •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창비,1994) : 상흔 그리고 솔직한 현재

    지나가 버린 시대에서 한 인간이 구성되어버리고, 혹은 그 시대에서 생성되었다면 그 인물은 지나간 시대를 추억할 수 없다. 기억한다고 말하기 조차 거리감 느껴질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나야! 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모두가 그 시대는 이미 끝나버렸다고 말해버린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존재의 변이뿐인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형되어왔던가? 하지만 시간과 역사와 인간의 구성물들은 마음먹은대로, 이성적으로(혹은 이해타산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 변하지 못할, 변하지 않은 인간이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어쩌면 자신이 희망이 될 것만 같은 아무것도 모를 사람에게도 이야기한다. 부르짖지 않고, 울먹이지 않고, 그렇다고 더듬더듬 힘겹게도 아니고, 나긋나긋은 더욱 그럴리 없고… 어찌보면 의뭉스럽게, 어찌보면 완고하게, 어찌보면 아파라고 직설적으로…

    좀 더 인간적으로, 좀 더 민주적으로, 좀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을 열정으로 꿈꾸었던 시대. 그 속에서 만들어졌던 자아는 이제 모두 배반되어야 하나보다.
    그럴 수 없는 것. 그땐 그래야 했었고, 지금은 이래야만 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단순 감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치기어린 의협심을 따질것도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느껴지는 것들. 그래서 ‘아직’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고, 어떻게든 버텨왔던 것이고, 기다려왔던 것인데 ‘하나 둘씩 떠나버리네, 아쉬운 사람들’ 이 어느 순간 이젠 목청 높여서 끝났다고, 끝나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목숨바쳐 지지키려 했던 것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이전의 것들은 유행지난 것일 뿐이라고 싸움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추억뿐인가?

    추억이란 감정만을 대동하는 것. 아니 좀 더 하면 몇 줄의 멋진 약력일뿐? 나는 마치 그때 이소룡의 매니아였어라고 이야기 하듯 매니아들의 번지르르한 자부심의 증거가 될 추억. 추억에서 그리움의 감정이나마 느낀다면 그것은 조금 더 양심적인 것일까? 그러나 최영미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추억 그리고 그리움과는 거리가 멀다.  4월을, 5월에를 부르짓지 않겠다는 작자는 과거가 지금껏 자신에게 남기는 상흔들을 반사된 표면들에게서 응시하고 그것을 다시금 받아들인다. 상흔의 반사 그리고 수용이라 함은 고통을 수반한다. 바로 그때의 고통에의 공감에서 오는 고통, 공감 이후의 자신에게 지어진 의무에의 고통, 현재와 자신과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고통. 그 아픔의 감정을 아파라고 이야기 하는 시. 4월을 그리고 5월을 노래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것이 이미 끝나버렸다고 인정하는 것일진대, 그녀에게 그날들은 죽지 않았다고, 평생을 아파하더라도 지고가겠다고 끈질기게 그날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은

    과거를 지켜보는 감정은 시간과 세월과 하늘과 함께 온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과 세월속에 늙어가는 자신. 그리고 얄밉게 서럽게 생겨먹은 하늘. 부대끼며 산다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간과 세월은 흐르고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작자는 시간과 세월을 자신의 나이로 소화시키고 하늘을 전신주위에 얹힌 그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의 소산이기 보다 시간과 세월의 흐름속에서 느껴온 감정과 느낌의 축적물에 기대어있다.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늙어가는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은 사랑을 기다리고,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위해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상을 펴는 이가 그녀인 것이다.

    하지만 상흔의 응시와 자아로의 받아들임에서 오는 고통은 그녀가 선택하였기에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진정 회복제로써 기능 할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 그리고 상처 이후에 넘어 설 ‘치유’가 작자의 시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변이를 뜻할 수도 있는 치유는 거부하는 것이 옳을 것임에 돌알을 깨물듯이 곱씹고 곱씹으면서 진정 올 치유를 기다리고 기다리겠다는 것인데 그 순간 독자는 내가 바로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하루하루를 같이 아파하면서 어느시절처럼 어깨동무하면서 목청 부르짖거나 하진 못하여도 끈질긴 인생을 동반하여야 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상을 펴두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와 함께 나설 수 있도록 그렇게… 그런데 지금 그녀의 이야기는 메아리 치고만 있지는 않은가. 그저 향수로, 추억으로 예전의 이야기로 그녀가 서러워할 그리움이라는 것으로 그렇고 있지는 않은가. 창자를 꺼내듯 영혼(느낌과 감정의 시간적 집적물들이란 용어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어찌할 수 없이)을 해부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그저 허탈해하는 군중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시집은 물어보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나, 당신과 함께 기다리게 될 것이나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기다림의 정서가 시 내면 깊숙깊숙히 그리고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한번 생각하게  하는데, 그날이 올 것인가? 살가죽을 벗겨서 장구를 만들고 징을 울려댈 그날이 올 것인가?

    하지만 그날은 오지 않는다.
    그녀가 온갖 창자를 다 해부하고 이야기를 하여도, 지나간 시대의 상처를 현재까지 품고 있는 그 허심탄회함에도 그날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그 날 ‘ 왔다 하여도 그것을 이루었던 칼자루와 총자루는 그 순간 뒤엎어져서 기뻐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깊숙히 찌를 것이다. 인간 그리고 인간들의 세상속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수는 있어도 모두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절대적인 그 날은 올 수 없는 이상향인 것. 그 이상향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어떤 이상향이었던지 어떻게 가야되는지를 말해야 조금 더 많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역사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지양의 발걸음. 오늘 하루를 사는 순간이 바로 공산주의다라고 선언할 삶.

    최영미의 시는 과거를 소환함의 고통과 자아를 배반하도록 상처남기는 것들, 그리고 시간과 세월 속에서도 끊임없는 기다림. 이것들인데 어쩌면 당연하게 생겨나는 감정일지 모른다. 거기에까지 이른 작자의 끊임없는 성찰은 진정 우리시대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소중하기 때문에, 작자의 시가 노래이지 않기 위해서 과거가 현재에 도달해서 온 성찰과 양심적 감정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펼쳐내야만 한다. 그것은 작자와 우리들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 짜장면(안도현,열림원,2000)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을 쓰기는 난해하다. 그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것이 전해주는 가슴의 울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서 거리를 두고 메스질을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메스질은 해부학처럼 마구 찢겨지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성역을 치고 그것에서 느끼는 아련한 감동을 아련한 것 이상 어느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느끼게 하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이렇게 도식적인 질문은 경계하더라도 어떤이라는 물음은 부득이도 필요한 것이다. 사회성과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가만 놔두지 않고 침범하는 것이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어떤 감동이던가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그 작품과 작가를 위한 최대한의 배려일 것이다.

    안도현의 <짜장면>을 읽었다. 전에 안도현의 몇 구절의 시를 훑어본 것 외에 아는게 없는 작가였다. 이름이 익숙한것으로 보니 꽤 유명한 작가인가보다 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짜장면>은 성장이야기인가?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가 이어진다. 어른이 읽는 동화를 표방하는 <짜장면>에게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초월을 이야기 하는 것일거다. 지나친 초월성과 다르게보이기는 우리 시대 어떠한 것들이든지 팽배하여서 더 자극적인 것, 더 엽기적인 것의 행태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짜장면>에게서 거기까지를 기대하지 말자. 익숙한 것들의 이야기 속에서, 일상성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들은 수없이도 많다.
    17살 주인공. 전교1등을 놓쳐보지 못했던 아이가 반항이라고 불릴만한 일탈을 한다. 이유라 할 것은 어른들의 세계속에 짓눌리는 자신이고 싶지 않아서, 그 아이가 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탈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인 오토바이를 탄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주인공. 만리장성의 배달부가 된 주인공은 주변 상가와 젊은이들간의 일상성속에서 사회에 대한 관찰을 시도한다. 중화요리를 시켜먹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들, 하지만 <짜장면>이 그것의 주된 포커스는 아니다. 주된 포커스는 주인공의 젊음과 방황 그리고 그의 가정이다. 모범생처럼 길들여져야 하는 가정. 권력욕과 가정폭력이란 실상을 감춘 체 거기로의 편입을 강요하는 세계의 지리멸렬함에서 일탈하는 청년이 이제 선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양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자신이란 존재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아 버리고, 짜장면에 버무러지면 짜장면이 되고 마는 양파. 양파까던 이의 손끝에 독한 향을 남겼다가도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 양파. 그것이 우리의 젊음이란 말일까? 젊음의 열정은 그렇게 한꺼풀 한꺼풀 벗겨져버리고는 이내 사회속에서 침윤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침윤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장이다. 짜장면이라는 요리는 분명 양파를 필요로 하는 것. 양파는 짜장면을 이루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잊었던 것을 생각하자.
    잊고 있었던 것 획일성의 사회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자는 것이 주된 교훈처럼 들린다. 짜장면은 양파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젊음의 열정에서 성공의 신화로 둔갑했던 것이 우리 사회 자양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정하려는 사회의 논리는 새로운 자양분들이 어떻게 양질의 것이던가 판단할 여유조차 두지 않은 채 짓눌러버리려고만 한다.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방황이 마구 돌출되는 것이 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른과 닮은 청소년, 어른과 닮은 어린아이들이 존재하면서 자양분들은 일찍 빛을 일어버리고 어른들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자양분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타자 혹은 이방의 것들로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로 전락시켜지고 만다.

    관찰하는 것
    염색물을 들인 배달부들을 단순 문제아로 치부하지는 않았는가.
    어머니의 자아의 배태됨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가.
    우리 자식 짜장면 먹을 때 입가에 묻히는 춘장에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는가.

    한때는 젊었을 때가 있었지
    모두는 한 때 젊었을 때가 있었지. 열정, 방황, 일탈의 시기란 게 있었지. 그때는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왜 어른이 되면 속물인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속물로 되려 하는 것일까? <짜장면>은 이야기하길 젊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분노하려 했던 것 그것들을 자신이 압제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떠올리게 만든다.

    주인공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그때가 있었지.
    그런때가 있었지만 이미 오토바이는 바다로 쳐박혀 버리고, 주인공은 운좋게도 팽나무에 걸쳐 살아남는다. 그때 수평선을 보면서 나 자신을 위해 눈물지었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되물으면서 눈물흘리는 주인공. 너무 착한 결말이 아닌가? 관찰하는 것과 일탈하는 것들에 더불어 이것은 너무도 착한 성장이야기로 남아버리고 만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이것은 동화이다. 여기서 과격한 어떤 것을 바랄 수는 없다. 동화라는 것은 일상의 이야기, 바로 자신의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속에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돌발적으로 무언가가 뛰쳐나올 필요는 없다. 나도 저랬더랬는데 지금 나는 과거의 모든 것들을 잊고 있었어 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