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터블 음악을 귀에 꽂고
거리를 부유하다가
이 상태로 죽을때까지 간다고 생각하다 보면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잘못생각했구나 싶기도 하고
우주 속에 있다 사라지고 말뿐이라 생각하다 보면
꺼리낄 게 무어냐 생각하기도 하고
부정하기 힘든, 부정할 수 없는
불안
하이데거가 긍정했다고 한 그 불안.
불안이 나를 잠식한다
바쁜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포터블 음악을 귀에 꽂고
거리를 부유하다가
이 상태로 죽을때까지 간다고 생각하다 보면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잘못생각했구나 싶기도 하고
우주 속에 있다 사라지고 말뿐이라 생각하다 보면
꺼리낄 게 무어냐 생각하기도 하고
부정하기 힘든, 부정할 수 없는
불안
하이데거가 긍정했다고 한 그 불안.
불안이 나를 잠식한다
바쁜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시간은 29에서 정지 할 거야 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오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19살 때도 난 20살이 되고 싶진 않았어
모두 다 무언가에 떠밀려 어른인 척 하기에 바쁜데
나는 개 나이로 3살 반이야 모르고 싶은 것이 더 많아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개가 되려나 봐 손을 델 수 없게 자꾸 뜨거워
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내 꼬리가 아닌 거 같아
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거야짖어대는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지마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If your lights are blinking and you are running low
Come on get filled up so you can drive away
With my love
With my love
뭐냐, 이 정확히 인디스러운 이름은…
이거 그냥 어중이 떠중이 인디밴드고만!
했는데…
그 구린 음질의 mp3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확 나를 잡아두고 놓칠 않게 된 음반이 되었다.
조금 혀 꼬부라진 가사가
질러주고, 쑤셔주고, 능구렁이 처럼 슬슬 넘어가는 것이
내공이 장난아니다
가사 또한 음미할 만하고
우린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저런 것도 할 줄안다는 듯이
이것 저것 다 들려주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연히 발견하게 된 감격스러운 그룹!16
이번 학기는 좀 짱이었음… ㅋ
국문과 수업들을 막 들으니깐, 온갖 이론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내가 얼마나 무식했는지 절감하고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금요일 <현대비평론> 수업은 정말 어려우면서, 희열을 느낄만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수업이었는데
마지막 2주는 학생들의 발표수업이었다…
근데
학생들 발표문이 선생님 수업 교재보다 더 어려웠던 것이다.
그냥 맑스와 푸코는 기본이고,
데리다, 들뢰즈, 벤야민, 칸트…. 아감벤까지…
잘 이해 못해서 그냥… 멍때리고 있었다… ㅠ
시험끝나면 나도 공부 좀 해야되겠다.
잘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겠지만…
뭔가 그들이 통채로 내 질투심을 자극했다구!
나는 좋은 음악이 있으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그 음악이 내게 지겨워질때까지 들어서 그야말로 ‘단물’을 쪽 뺀 다음에야 새로운 노래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비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움을 찾을 수 없어서, 같은 음악이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고 느낄것만 같다. 아무런 느낌도 자아내지 못할테니깐. 반복되는 비트니깐.전쟁과 테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멈추려고 하지도 않고, 멈춘적도 사실 그리 없다. 뉴스를 틀면 나오는 누구의 테러로 인해 누구누구가 죽고, 누구누구가 부상당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완전히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복되고 있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간의 분쟁 이야기, 아랍 지역에서의 분쟁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슬픔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망’ 이란 명명은 누군가 죽었어 라는 감정적인 정서을 자아내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까지 미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것은 정치로 이해된다. 테러 규모가 컸을 때 상대편 국가의 대응은 어떻게 될 것인가. 테러소탕작전에 테러집단은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활까지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원거리의 전쟁이 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을 안다.헌데 죽음 자체가 울리는 비트는 매우 강렬하다. 펭귄뉴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느낀 것처럼 죽음의 비트는 엄청난 진폭을 울릴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십, 수백의 강렬한 진폭-전쟁과 테러를 매우 진부한 비트로 느끼고 마는 것은 뭘까? 그것은 우리 안의 P칩 때문이 아닐까? 강렬한 죽음의 비트를 P칩과 같은 것들은 차단한다. 그것은 우리와 너희의 범주에서 너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칩은 존재 자체로 비트 개인주의자를 양산한다. P칩을 경계로 우리와 너희의 범주를 가르는 것이다. 너희의 이야기는 그 어떤 강렬함이 있다 하더라도 P칩을 통해 들어온다면 단순한 반복으로 들려온다. 그 어떠한 진폭도 형성하지 못하는 진부함이 될 것이다.다시 전쟁으로 들어가보면, 우리는 내면화된 P칩 때문에 외부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트를 이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비트를, 아랍인의 비트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P칩이 형성한 외연에 갇혀, 우리의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뻗고 있는 서구 열강에 적극적으로 포섭된 시야를 가지고 있다.전쟁과 테러 그리고 죽음이 갖고 있는 비트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단지 P칩이 있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비트를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로 아랍권과 이스라엘권의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무감각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한국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조승희씨의 테러때에도 마찬가지였다. P칩이 갇고 있는 외연의 안쪽에서 죽음의 비트가 조금이라도 울려퍼지면 우린 엄청난 충격을 느끼곤 했다.개별 비트들이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별로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과 집단의 비트들이 공정하게 울려퍼질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한국의 광장에선 주변부 국가들의 비트를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강렬한 비트라 할지라도…
시는 참 쓰기 쉽다.
형식도 자유롭고, 분량도 적고 말이지.
물론 ‘좋은 시’ 를 쓰는 건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이지만
시 쓰는 것은 참 쉬운 것이다.
시에 덧씌워진 어떤 ‘신성성’ 만 거두워 낸다면 시 처럼 쓰기 쉬운 게 어디있으랴.
나는, 보존하고 싶은
아이디어나, 순간적 감정들, 상황등을
시로 쓰곤 했었다.
그냥… 보존방법의 일환으로 제멋대로 적어두곤 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것도 부쩍이나 줄어들었다.
시로 쓸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영화화 시킨 아이디어로 보존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아이디어 메모지를 기록하는 일도 요즘 부쩍 줄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보존하고 싶은 ‘새로운 감흥’ 들이 줄어서인 것 같다.
이젠
내가 너무 세상에 익숙해져있고, 길들여졌나보다.
미디액트 강의 시간은 7시 정도였지만
종로에는 조금 일찍 가기로 했다.
종로에 또 무슨 풍경이 벌어지고 있을 지 궁금했다.
음… 가보니…
경찰들이 군데군데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청계광장이든, 서울광장이든 텅 비어있고
그 주위를 차벽이 둘러쌈은 물론이며
주변 곳곳에, 심지어 관광안내소와 횡단보도 앞 부근까지
그야말로 시민들에게 시위를 하듯 서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위협하고 있으니깐, 아무짓도 하지마!
하는 번지르르함이었는데…
청계광장 근처와 시청광장 근처 인도는 물론
지하철역 한쪽 통로까지 완전히 봉쇄하고 있는 저 소심함을 보니
참 짜증이 났다.
그렇다면, 광장은 뭐하려고 만들어놨담.
참… 한심해졌다.
이제 관료들의 마인드는 완전히 기업과 마찬가지인것만 같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주권자가 아닌 고객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광장장사’ 안하겠다면 안하는 것이다…. ;;;
경찰이 시민에게 손해배상청구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서… 한쪽에선
위협시위나 하고 있고…
나는 종로의 거리를 지나치면서
뭔가 일어나면 바로 쳐내고
일어나지 않으면 히죽거릴 그들을 이길 방법은
위협적인 근엄함을 희극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위협적으로 서있는 그들을 매우 우수꽝스럽지 않냐고 만들어버릴
기발한 ‘시민의 방법’ 은 무엇일까.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안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교내신문 에서였다.
인터뷰 같은 것이 짤막하게 났는데…
순간 느낀 것이
나는 찌질한데, 그는 참 대단한 것 같아 였다.
그런데 그와 수업이 하나 겹쳤다.
나는 가끔씩 그를 관찰한다.
키 크고, 잘생겼고
하고 다니는 스타일을 보니 귀티가 흐르고
성격도 좋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자신감도 넘치고
문학적 감수성도 가히 넘쳐 흐르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는 의지의 청춘인 듯하다
그를 바라볼 때 마다
내 삶의 의지가 쭈우우우우욱 미끄러져 버리는 느낌이다.
그런 자기비하를 동반하면서도
그에 대한 내 관심은 매우 집요하다.
꽤 먼 거리에서 맨 앞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신경숙 소설의 주인공처럼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처럼
앉아있는 내게
이 질투심이 ‘나의 힘’ 이 될 지…
그런데 난 왜, 질투심을 느껴야만 하는 건 지…
아래에는………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을 옮겨본다.
그가 좋아한다 했고, 나도 관심가졌던 시인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2424
머릿속은 형용할 수 없는 뭉태기들로 잔뜩 막혀있어
그런데 주둥이만 내밀면 가지런히 정리된 실이 쭉쭉 튀어나오지
가만보면,
뭉탱이들은 천연덕스럽게 왕왕거리고
뻗쳐나간 실들은 매듭을 걸고 있었어
예상치 못한 매듭이 타인들을 뒤섞어 묶어놓아.
엉키고, 엉키고, 엉키고…
“한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좋아서 탈이야. 원작품의 의도는 염두에도 없고 제멋대로 재주만 부리는군요. 막걸리 연극이랄까. 너무 텁텁해요. 깨끗하지 못하고 …” -전혜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연극을 그리 많이 봐오진 않았건만… 한국에선 배우들의 오버스러운 혹은 대단히 연극스러운 연기들로 인해 작품을 보기 보단, 연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곤 했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데, 당연히 연극의 작품마다 나오는 캐릭터들은 연기자들의 ‘재주넘기’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싶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의 일환으로…
이젠 그런 연기자들에 맞춰져서 ‘창작’ 이 되는 것 같다.
푼수떠는 오버 캐릭터와 고집 센 사람, 바보 혹은 광인 등으로 압축지어지는 해당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절규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아님 웃어댄다. 희비의 감정선이 매우 극단적으로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에 표출하는 캐릭터들… 현실에서 보면 조울증에 걸렸나 보다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캐릭터들이… 이젠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져서, 연극에선 원래 이런가보다 하고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젠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연극이라곤 거의 없으니깐.
연극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는 그런 캐릭터들의 집합이었다.
그야말로 캐릭터들의 향연으로 연극을 이끌어 가는데…
아니, 인물은 왜 이렇게 많고, 극은 왜 이렇게 긴지… 그리고 몇몇 거슬리는 형식적 결함들.
* 전형적인 연극 캐릭터
여기서도 전형적으로 ‘연극에서만’ 드러나는 캐릭터가 모조리 총출동한다.
억척어멈 캐릭터, 바보 캐릭터, 주접떠는 푼수 캐릭터, 이해할 수 없는 내숭 캐릭터
현실감이 뚝뚝 떨어지지만, 우리는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수없이 많은 연극에서 봐왔던 캐릭터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캐릭터 양식에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적당히 연기력을 선보이고, 웃음을 자아내고 그런 상투성이 좀 답답하다.
* 독백이 너무 많다.
독백은 너무나 쉬운 장치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 장치이다. 어디 영화에서 나래이션 장치를 쓴 영화 말고, 독백을 그리 많이 하던가. 보통 그리스 비극을 보아도, 오오! 하는 짧은 독백을 쓰고 인물간 충돌로 극을 진행시켜가는데, <감포…> 는 그야말로 독백 천지다. 그것은 극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이, 현재진행형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를 보여줌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엄청난 과거’ 들을 독백으로 보여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감포…> 에선 이런 독백을 통한 고백’ 의 맹점을 ‘단순한 과거’ 대신 복잡하게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힌 ‘복잡한 과거’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고, 고백할 때 관객의 감정선을 극도로 자극하는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독백에서도 엄청나게 고함지른다…;;)근데 이것은 또 다른 맹점이다.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것과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는 것.
* 감정선이 너무 극단적이다.
연극 내내, 배우들은 고함지르고, 슬퍼하고,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자주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나로서는 시종일관 불편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모잘라 감정을 너무 쉽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연출하는 지 말이다. 그것이 극의 주요한 전개와 필연성을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슬픔과 웃음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연출자의 목표가 너무 심플하고 단순하게 드러난다. 아님 복잡다나한 감정보다, 극단적인 감정 연기가 연기하기 쉬워서 그런가?
* 쓸데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있다
캐릭터의 과거만을 추적하는 것도 빡센데… 별 관련없는 인물의 사건들이 마구 등장한다. 예를들어 핵폐기장 건립 문제가 그렇고, 침 뱉는 고시생에 얽힌 사건이 그렇고, 시장통에서 야채 파는 에피소드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그렇고… 제일 결정적이면서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 시장통 깡패들의 등장이었다. 아아 너무도 진부한 깡패들의 방해행위는… 또 너무도 신파적으로 연출된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핵심서사에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그것도 별로 신선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기어이 2시간 넘는 시간을 채우는지!
왜 내용적 측면은 얘기 안하냐고?
음… 솔직히, 너무 극이 산만하기도 하고, 경주 사투리 대사를 내가 몇 개 놓쳐서 내용을 충실히 파악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극의 주제라할까, 뭐 그런것은 그리 복잡하진 않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정도로 해두자. ㅋ
그런데 극이 너무 형식적 측면에서 중구난방이어서 핵심서사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반성하시오! ㅋ
PS:
열수 역을 한 남자배우 참 잘생겼단 말이야 ㅋㅋ
시장 아줌마 역을 한 여자배우 연기는 참 재미있었음.. 역시 오버스러운 캐릭터이지만 ㅋ
일어나보니 오후 4시 정도였다.
그는 오늘까지 발표문을 올려야 한다는 마음에
어제 새벽 5시가 넘도록 발표문을 붙잡고 있었지만
역시 별 소득은 없었다.
몸은 계속 찌뿌등했다.
감기기운과 ‘정상적’이지 못한 수면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발표문은 더이상 손보지 말고 어제 짜집기 했던 상태 그대로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밖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는데
왜 밖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천천히 몸을 놀려 저녁시간때쯤이나 되었을까.
밖은 생각보다 추웠다.
기껏 환히 밝힌 마트에 가보면
정작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는 가끔 영화나 드라마속에 나오는 대사로
“냉장고에 먹을 것 있으니깐, 아무거나 빼서 먹어.”
라는 대사를 참 부러워했다.
그의 기억속에 냉장고에, 간단하게 빼서 먹을 수 있는 것이 들어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저 집엔 냉장고만 열면, 뭐든 있나보다 하고 부러워했었다.
마트에 살만한 건 과자밖에 없다.
더이상 과자는 싫었다
그는 처음 오는 사람처럼, 마트를 빙빙- 돌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결혼을 하나보다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