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DJ

  • [2009.10.20.] 마로니에 공원에서 사생대회인지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봤다

    나도 언제적인가 수채화물감을 파레트에 풀어 쓴 적이 있다.
    아마, 고등학교때도 미술시간에 자습을 시키고 그랬을테니 한 10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당시
    미술시간에 수채화만 그리라고 하면
    온통 손에는 물감을 범벅해놓고, 파레트는 이색저색이 뒤섞여놓고선
    도통 이것저것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고 혼자 벅벅 짜증만 냈었다.

    그래도 선명한 원색을 흰 종이위에 싸아하고 그어가는, 그 첫느낌을
    꽤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이젠, 누가 그림그리라고 시키지도 않으니
    재능도 없는 이 어른은
    그림그릴 일도 없어져 버렸네

    회의할 때 낙서나 하는 게 다인
    요상한 어른이 돼버렸네.

    작년쯤에 테마여행컨셉으로
    스케치북과 화구용품을 가지고
    사진 대신 그림을 그려오는 여행을 한번쯤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는데…

    그것도 아직 못지켯네.
    그것도 아직 못지켰네.

  • [2009.10.17.] 지나친 배탈

    이건 내게
    지나친 배탈입니다

    하루종일
    허기진 배를 움켜쥐다

    저녁 7시가 되서야
    첫끼를 집어넣었단 말입니다

    메마른 감성으로
    꾸역꾸역 쳐넣었단 말입니다

  • [2009.10.14.] 고민

    잠시 고민드는 일이 생겼다

    그 핑계로 이것저것 해야할 일 다 제쳐두고

    웹툰으로 때웠다………….;;;

    아무튼

    선택이란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 [2009.10.13.] 징후

    신경민도 교체됐고
    윤도현도 하차했고
    김미화는 겨우 살았고
    김제동도 하차했고
    손석희 마저도 하차설이 나돌고 있다…

    물증은 없지만
    대단히 징후적이다.

    사실상
    위의 인사들이 ‘좌파적’이란 딱지 아닌 딱지를 달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감이 있지 않을까.

    저 다양한 방송인들 중
    제 자신을 좌파라고 지칭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을 한 적도 없었던 걸로 안다.
    해봐야 풍자적인 신경민 아나운서 클로징 멘트가 다인 걸…

    김제동은 일전에
    조선일보에서 하는 무슨 도서기부사업에 기부금까지 낸 적 있었다.
    그래서 김제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들이 그리 ‘급진적인’ 인사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제동은 언제나 따라붙는 정치색 논쟁들때문에
    ‘나 좌파는 아니요’ 라고 광고를 하고 다닐 불쌍한 인사였고
    손석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비판과 차이도 수긍할 수 없어하는
    이 사회 주류적인 수구세력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이젠 함부로 이명박에게만 책임을 지울 순 없을 것 같다.
    YTN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이 54% 대라고 한다.

    우리 사회 안의 이명박을 어느 정도 수긍해야 하는건가…
    참 우울한 정국이네…

    실업률이 10%인가를 넘으면
    사회가 변혁의 시즌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하던데…
    청년실업률이 더 높아져서, 바닥을 치길 기다려야 할까.

    오늘은 발제를 맡은 자본론을 좀 읽어봤는데
    그제나 이제나 그리 크게 나이진 것은 없지만
    나아지고 있긴 하구나
    했다.

    나 살고 있는 동안에
    좀 나아지면 좋으련만.

  • [2009.9.24] 인간

    모가지가 아파 슬픈짐승이여….;;

    흑흑흑

    나 목에 담 걸렸어

    아침마다

    머리를 들 수가 없어서

    손으로 머리와 머리카락을 쥐고 들어 일으키고 있음….ㅠㅠㅠㅠㅠ

  • [2009.9.15.] 왜 그럴까?

    전에는 잠깐만 걸을 때에도

    mp3 이어폰을 꽂고 살았는데

    요즘은 안 그렇다

  • [해운대-윤제균] 뜬 영화는 팍팍 씹어줘야…

    한국에서 천만인이 넘었던 영화를 쳐봤습니다. 시작은 실미도 부터이군요.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그리고 해운대입니다. 몇 년 후면 천만관객 넘은 영화들이 10위권을 구성할 시대도 올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벌써 5편이니깐요. 그다지 좋은 현상같지는 않네요. 그리 인구가 많지도 않은데 천만이라니요. 여기에는 영화사의 독과점 문제도 얽혀있는 것 같고, 배급사 횡포 문제도 있는 듯합니다. 괴물 때 김기덕 감독이 지적하기도 했었죠. 신기록이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데, 언론에선 또 그리도 날뛰는지요. 신기록입니다. 하는 것을 마치 스포츠 기록처럼 보도하네요. 영화라는 것은 상품이지만, 그래도 예술인 것인데…. 천만, 천만 막 이러니깐 철저히 상품같아 보이네요. 암튼 좀 느낌이 그렇습니다. 해운대를 봐서 그럴까요?
    천만 넘은 영화 중에서 제가 보지 않은 것은 실미도 뿐이군요. 그래도 실미도는 대략 압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에 원작 책을 읽었거든요. 책이 저질이라 볼 마음이 뚝 떨어졌었는데, 영화가 떠서 굉장히 의외였어요.

    그런데 저 중에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가 좋았다는 사람 볼 때마다 두루두루 욕하는 영화입니다. “어떻게 저게 천만을 넘을수가 있어, 참내.” 그런데 두루두루 욕해줄 영화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해운대이죠.

    망한 영화는 그래도 애틋한 마음이 들지만, 그리 고 퀄리티가 아닌데 뜬 영화는 팍!팍! 씹어주셔야 합니다.

    암튼 해운대.

    우선 볼거리가 있다는 거가 사람들을 이끌었겠죠. 이제 보니 천만 넘은 영화가 모두 그렇습니다. 괴수 영화 괴물,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도 그렇고… 왕의 남자는 사극에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이끌었겠네요. 해운대는 재난영화군요. 거기다가 최첨단 CG를 발라놓셨다고 하니, 뭐 호기심이 발동할 만 합니다.

    그런데 제 취향은…. CG가 얼마나 뛰어나건 뭐하건 영화 호감도에 별 영향을 못미칩니다. CG는 개인의 노력이기 보다, 돈을 얼마나 투하하였느냐에 따라 그 퀄리티가 나와요. 돈 많은 헐리우드 CG가 자연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스럽죠. 전 스토리가 저질이어도 CG 기술 하나는 인정해야겠다는 한 때의 ‘디워’를 도저히 용납 못하겠어요. CG가 얼마나 뛰어난지, 안뛰어난지만 본다 한다면 게임 동영상을 보지, 왜 영화를 보는걸까…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그리고 해운대의 CG가 특히나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CG가 스토리에 협조하는 기술로 쓰이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깨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마치, 그래 한번 보여줄게 하는 식으로 화려한 동선을 자랑하는 CG가 현실감 없이 툭툭 튀어나와버리는 것이죠. CG는 어디까지나 스토리 안에 있어야지, 그러면 됩니까. 그래도 헐리우드의 CG는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었는데, 해운대의 CG는 스펙타클을 보여주겠어 흐흐흐 제작자의 욕심이 드러날 만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 포토샵을 배운 사람이 포토샵 필터 이것저것을 막 써 놓은 듯한, 촌스러움이었어요.

    그리고 스토리의 주요 줄기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이 하나같이 전형적이고 진부해요.
    여기서 갈등은 넘쳐납니다. 약간은 옴니버스 같은 분위기를 내서 그런지요.
    설경구와 하지원의 러브러브와 설경구의 트라우마가 하나 있구요. 그 트라우마로 들어가면 설경구와 송재호의 갈등이 있구요. 엄정화와 박중훈과의 이혼부부 갈등이 하나 있구요. 또 뭐 있더라, 아. 이민기와 강예원의 러브 스토리도 하나 있군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 같이 상큼함이 없다는 겁니다. 설경구는 큰 아버지만 보면 화를 내고 있는데, 그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별로 공감이 되질 않아요. 하지원도 마찬가지에요. 설경구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정말 그것 때문에 거절한게 맞아? 라고 느낄만큼 기계적인 반응들을 합니다. 진정성이 없어요. 진정성이.

    여러 에피소드들에 배우들이 끼워맞쳐진 느낌이에요. 이혼부부의 이야기이든, 설경구의 트라우마이든, 이민기-강예원 커플 이야기이든… 너무도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또한 너무도 몰입하기 힘들게 두었어요. 그냥 여기는 이렇고, 저기는 저렇더라 정도에요. 그런 이유는 영화가 에피소드를 너무 많이 만들어 두어서 그럽니다.

    빨간리본 달기 등의 유치한 에피소드들을 빼고는, 여기 에피소드는 주로 관객에게 안타까움을 선사하려거나, 부산의 지역색깔을 드러내고자 하는데요. 롯데 팬들의 신문지 응원, 광안리 불꽃축제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넣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데로,
    그놈의 메가 쓰나미가 몰려 왔을 때, 모든 갈등들이 일순간에 팍! 하고 해결되는데, 여기에도 일말의 고민과 주저함이 없이, 쓰나미가 왔으니 서로 울고불고, 화해합니다. 엄정화의 전화통화나, 송지호가 설경구 잡아주는 것은 좀 너무하다 싶더라구요.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거긴 하지만요. 연출방식이 이건 좀 아니다 싶네요. 장중한 음악 촤악~~~ 깔고 나서, 일말의 눈동자 흔들림 하나 없이 사실은 정말 당신을 사랑했어 라고 기계적으로 고백하는 그들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객의 구경거리였을 뿐이었습니다. 슬로우 모션도 너무 많이 썼어요. 괜시리 영화 길어지게 말이죠.

    아, 그리고 한국형 재난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자의 욕심은 보이는데, 왜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것들을 그대로 갔다 썼는지… 차오르는 물 때문에 전신주가 잠기는 순간에 애태우는 씬은 제가 본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인데요.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고등학교 때 본 그 영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어서 차마 제가 낯뜨거워 지더군요. (제목을 알아내면 이건 추가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기연출을 못한 듯, 경력있는 연기자들이 모조리 TV 드라마 같은 ‘한국식’ 연기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군요. 매너리즘이에요! 매너리즘!

  • [도가니-공지영] 도가니가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진 않았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주안점으로 두고 있는 것이 장애인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소설에서는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장애인 아동들의 ‘삶’에 대한 문제는 그리 심도가 깊지 못하다. 주로 지적 장애와 청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나오는데 소설에서 그/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소설은 자꾸만 “아! 내가 이런 아이들의 아픔을 몰라주고!” 라며 감탄사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계속 주인공을 위해 동원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예로 몇몇 아이가 교사 강인호 선생님이 이제까지 자신을 대하였던 다른 선생님과는 달랐다면서 무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 필체와 거의 유사한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등의 행동에서 현실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도가니>가 독자들에게 “언젠가는 좋아질꺼야” 라는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지는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방관자 ‘정인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방관자 독자들을 너무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이 정말로 적극적인 해피엔딩이었으면 어떠했을까? 방관자였던 주인공이 투쟁에 직접 개입해서 투쟁을 승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가 ‘연민’을 느끼던 장애아동들과 서로 화목한 상태의 마무리. 그러면 지금 작품 <도가니>가 선사하고 있는 찝찝함이 어느 정도 상쇄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핑크빛 환상’을 선사해주는 것 아닌가. 독자들은 해피엔딩을 지켜보면서, “결국 불의는 종식될 것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서 어느 정도 심정적 동조만 해주면 될꺼야” 라는 생각을 가질 것 같고, 또 한명의 영웅 정인호 교사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심만 보여주면 된다. 헌데 단 한 명의 영웅,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세계를 뒤엎어버리는 완결된 ‘책의 세계’는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책의 세계는 그 순간 환희로 종식되고, 독자들은 한 편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어 라면서 눈물 찔끔 흘리면서 안심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은 독자들을 결국 배신한다. 독자 자신과 가장 닮은 듯한 주인공이 “에이 까짓것 한번 해보지.” 라고 나서지를 않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할 투쟁현장을 회피하고 찝찝한 현실의 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게 너무도 찝찝한 것은 주인공 정인호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고, 너무도 있을 수 있는 현실성 때문이다. 독자들은 <도가니>를 통해 핑크빛 환상을 획득하기는 커녕, 광주인화학교 사건이 도대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 경과가 궁금해져버렸고, 주인공 정인호와 닮아버린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어쩔 수 없다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던 과거의 문제들 또한 주인공 인호의 것과 마찬가지 핑계는 아니었던가 하게 되고, 미래에 닥칠 어떤 문제들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보기도 한다.

    소설 <도가니>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상록수>의 채영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작자의 접근법과 태도에 있다. 작자는 이번 소설에서도 주 타겟팅을 운동 이력이 있는 비장애인 386세대 정도로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그녀들에게 끊임없이 이것 보세요 너무도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이것 보세요 너무도 파렴치한 교장이 아니던가요. 라는 감정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건 작가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욕심에 휘말린 과도한 도취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 공지영이 일관되게 문제시 하는 화두,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일어서십시오.” 라는 미약한 구호를 386세대에게 해대고 있어서, 한편 장애인과 장애인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 에이블 뉴스에서 <도가니>가 핑크빛 환상을 심어주었다는 글을 보고, 한번 써본 것.

    ** 아래 기사 실렸다! ㅋㅋ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9&NewsCode=000620090821113918608125

  • [도쿄!-옴니버스]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그리고 봉준호의 일본포착!

    “도쿄!” 는 도쿄를 배경으로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에요.
    미셸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 레오 까락스의 <광인>,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 이렇게에요.

    공드리의 작품에선 인간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그냥 가만 있을 때 별로 유용한 것이 못되죠? 인간이란 동물은 식물처럼 자연에 가만히 생존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고, 도구들처럼 그것 자체가 기능이 있어 유용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그래서 기능을 계발해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기능을 계발하는 것을 꿈을 꾼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저것 취미생활이 많아봐야 다 필요도 없구요. 착해도 달리 이로울 게 없는 것 같아요. 지금 현실에서는요. 우선, 직업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합니다.
    주인공 여자는 직업과 꿈 그리고 인간의 기능에 대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녀는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추고 있고, 취미생활도 많은 것 같지만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고, 직업으로 삼을만한 것도 없어요. 그녀는 남자친구의 꿈을 응원해주는 것을 잘하고, 그것을 최대한 서프트 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고 해요. 현실이요. 그래서 그녀는? 의자가 됩니다. 이제 그녀는 걱정이 없어졌어요. 의자는 존재가 기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즉자존재이죠. 그녀는 다재다능한 어느 남자의 집에 들어가는데요. 거기서 그 남자의 삶을 응원해주기도 하고, 의자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그녀는 만족합니다.

    까락스의 작품은 광인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왜 나타났을까요? 인간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몰라서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것이겠죠. 거리를 돌아다니는 뻔뻔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요?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도쿄에 나타난 광인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죄인들’ 일본인들 사이에 나타나요. 근데 예수와는 정 반대죠. 예수는 치료하고, 용서하고 그렇지만, 현대판 예수 광인은 일본인이 남긴 폭탄으로 테러를 합니다. 왜냐구요? 그 광인 말로는 일본인이 역겹게 생겼다고 했던가요? 못생겼다고 했던가요?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는 군요. 암튼, 일본인들은 그런 광인을 받아들일 수가 없죠. 그래서 결국은 재판에 붇히고 목을 매답니다. 근데 예수와 같이 광인은 죽었다가 부활도 해요. 그리고 결국 없어집니다. 광인의 이야기는 그 독특한 설정과 이것저것 실험적인 카메라들이 매우 세련되고 이색적이었어요. 전 까락스의 작품을 처음 본 셈인데… 굉장히 놀랬습니다.

    봉감독의 작품은 히키코모리의 이야기입니다. 히키코모리란 부모님한테 돈 타면서 집에서 나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죠. 여기서 주인공은 사람 많은 것도 싫고, 더운 햇빛도 싫어서 그랬다고 말해요. 암튼 혼자 사는 데 어느날 피자배달부가 나타납니다. 당연히 뿅가죠. 그래서 주인공의 최초의 외출. 그런데 10여년만에 도쿄가 너무도 달라져 있는 거에요. 다들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고, 배달부는 로봇들이었던 거에요. 그리고 여자를 만나서 웬지 로맨틱하게 영화가 끝납니다.

    세 감독 모두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어떤 중요한 포착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이거였고, 저건 저거였다라는 딱딱 떨어지는 기능으로 말하기는 힘들 것 같구요.

    셋을 뭉뚱그려보면..
    고도화된 후기 산업사회 일본 속, 일해야 하는 일본인.
    일 외에는 아무것도 자아실현 할 수 없고, 자기 정체성 없이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는 일본인.
    사실은 자기 정체성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잊으려 애쓰는 것 뿐이라는 역사적 인식까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을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지만요.
    여기서 단연 특출났던 것은, 레오 까락스였던 것 같아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스가 정말 남다릅니다. 거장은 거장인가 봅니다. 미셸 공드리도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내는 것 같은데요.

    오오, 내가 좋아하는 봉감독은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봉감독의 특기와 장점은
    어떤 그릇에 담던지 자기 색깔을 낸다는 것인데
    봉감독의 색깔은 항시 시사적이면서, 현실 관련성이 있었죠? 그리고 색깔이 대단히 한국적이죠…

    그 색깔을
    잘 모르는 나라 일본에서까지 발휘하긴 힘에 겨웠나 봐요.
    그렇게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까락스와 공드리와 함께 묶어 두니깐… 좀 그런 감이 느껴진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ㅋ
    전 <도쿄!>를 본 다음에 <마더>를 봤거든요. 히히

    PS: 광인을 연기했던 드니 라방 연기 잘 하더군요.

  • [마더-봉준호] 한국적인 정서

    한국적인 정서는 어떤 것일까요?

    보통 ‘한의 정서’ 라고들 하는데요.
    ‘한의 정서’ 라는 것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부여한 것이란 걸 아시나요?
    (국문과 전공수업에서 배웠지요)

    우리 고전문학을 보면 알수가 있듯이
    한국인에게 ‘한의 정서’가 그리 대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의 정서’가 익숙한 것은 ‘애수’ 나 ‘비애’의 정서를 갖고 있는 일본일걸요.
    화투장 비광만 봐도 얼마나 비애의 감정이 느껴집니까… ㅎㅎ 이건 농담입니다.

    우리 고전문학에서 대세인 정서는
    아무래도 해학의 정서 같아요.

    먹고 살기 힘든 민생들은
    내가 시름시름 앓는 구나 하지를 않고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라든가 양반님들은 똥이나 밟고 발랑 넘어져버려라(이건 지어낸거지만) 했잖아요.

    ㅎㅎ 허튼 소리가 역시나 많아집니다.

    영화 <마더>를 드디어! 봤는데요.
    봉준호 감독은 정말 한국적인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이 박찬욱 감독과 대조되는 부분인 것도 같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세계에서 상을 두루 받는 이유는 한편 그의 영화가 세계 어디서든 먹힐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의 영화는 전혀 한국적이지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봉준호가 더 뛰어나다거나, 박찬욱이 더 뛰어나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죠.
    정서의 원형이 어디에 있건 영화 잘 만들면 되는 건데요. 뭘. ㅋ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요. 이건 그냥 제 취향의 문제입니다 ㅎ

    다시 <마더>!
    영화는 그다지 시덥지도 않은 아줌마의 ‘비극’입니다.
    그녀의 비극은 궁상이 따로 없어요.

    진범을 찾는답시고
    아들 친구 그리고 피해자 고객인 고딩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물상 찾는 게 다입니다.
    저는 처음 비장미 넘치는 포스터를 보고
    진범 쪽에 무슨 조직폭력배라도 개입해가지고
    엄마 혼자서 조직폭력배랑 대결해서 싸우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덥지 않은 것들과 시덥지 않은 상황만을 만들어내죠.
    엄마는 혼자 빨빨거리면서 뛰어다니지만, 고등학생 하나 구출 못하고 소주병 깨트리고 숨는 그런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궁상떠는 아들내미한테는 혼 한번 제대로 못내고, 침맞자 하는 그런 아줌마에요.

    아줌마가 당하는 시련들도 그리 비장미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어떤 악의 축들과 대결하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궁상스러운 상황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막걸리 타령만 하는 할머니는 압권이지요.

    몰입도 떨어지게 뭐 이래 하신 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이게 더 리얼하지 않나요?
    그리고 굉장히 한국적이지 않았나요?
    해학적이면서 풍자적이고 뭐 그렇지 않았나요?
    뭐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겠지만
    전 이게 훨씬 더 리얼하고 우리 한국적인 삶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줌마의 이런 궁상이
    스틸컷으로 볼 때는 그리 비장미가 없을 수 있었겠지만요.
    절대 정곡을 놓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저를 “콕!” 하고 찌른 엄청난 비극 이었습니다.
    저를 콕 찌르는 이 영화는 제 순간적인 감흥을 넘어서, 제가 갖고 있는 한국인 어머니상에게까지 다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결론과 해학…
    그야말로 일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ㄲ ㅑ!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봉준호야!” 라는 환호와
    비극이 주는 뭉클뭉클함을 간직한 채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봉준호의 이야기 하는 방식과 영화 만드는 기술이
    나날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박찬욱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영상으로 말하기라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히히

    PS: 김혜자 선생님의 연기야 말로 비교 대상이 없는, 다른 차원의 경지였던 것 같아요. 원빈은 잘생긴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노력은 좋아보였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윤제문씨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