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현재 날짜는 2011년 12월 14일입니다. 제가 현지합숙훈련을 마친 때가 4월말이니 벌써 8개월이 지났네요. 후기를 일찍일찍 쓰려고 했지만, 이것저것 핑계와 제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늦어져 버렸습니다. 제가 입국했을 때 눈이 왔는데, 요 근래에 눈이 그렇게도 많이 오더랍니다. 눈이 와버리니, 와 겨울이구나. 벌써 1년이 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늦추면 안되겠다 싶어서 조금 억지로라도 현지합숙훈련 후기들을 올렸습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많은 일들도 있었고, 저도 조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한 것 같네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 후기들을 쓴 것은 아니고, 제 추억을 이렇게나마 보존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누군가가 이 후기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정보습득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반이었습니다. 암튼 이렇게든, 저렇게든 현지합숙훈련 후기까지 끝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니 우즈벡 현지합숙 사정이 조금이 달라진 부분도 있고, 조금 오해할 부분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첨언을 합니다. 무엇이냐면요?
모든 기수의 합숙훈련이 세계경제외교대에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 저희 62기까지는 대부분이 세계경제외교대에서 합숙훈련을 진행해왔지만 바로 다음 기수는 또 다른 곳에서 했고, 현재 훈련을 받고 있는 그 다다음 기수또한 또 다른 곳에서 현지합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지사정상 그리고 사무소의 판단에 따라 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곳에서 합숙훈련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교육일정 또한 현지사정상 사무소 판단으로 변경됩니다.
:: 교육일정이 끝나면 설문지를 받고, 각 교육일정이 어땠는지 사무소 및 코이카와 피드백을 하게 됩니다. 그 평과결과에 따라서 그리고 현지 사정에 따라 교육일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예로 우리 기수에서는 OJT가 1주일이었지만 현재 훈련을 받고 있는 신임기수는 OJT를 2주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외 등등등.
이 후기는 제가 겪은 당시 느낌을 살린 것입니다.
:: 글을 훈련이 끝나고 한참 후인 지금 올렸다해서, 지금까지 겪었던 것을 종합한 결과를 올린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사정과 입장이 변했다 해서, 그렇게 올리진 않았습니다. 그때 그렇게 보고, 느꼈던 것을 그대로 현재인 것처럼 적었습니다. 예를 들어 현지합숙훈련을 받던 때에 우와 좋다 라고 느꼈지만, 결국 실체는 별로였던 것들. 나중에 확인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제가 그 당시 좋다고 느꼈다면 그냥 좋다라고 써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후기는 제가 겪은 지극히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 이 후기는 코이카 및 우즈벡 코이카 사무소의 공식의견과는 상관없는 지극히 제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이 점은 다 아시겠죠?
현지합숙훈련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좋을까요? 사실 사람마다 다 판이하고, 기수마다 분위기도 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현지합숙훈련 때야말로 현지어를 익혀야 할 때라 생각하고 현지어 학습에 열을 올리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함께 지낼때가 좋을 때다 하면서 함께 어울리고 이것저것 활동하는 데 신경을 쓰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수도인 타쉬켄트에 있을때야 말로 여기저기 다 가봐야 한다며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다 자기 가치기준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데 제가 뭐라뭐라 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우애로운 관계를 맺어두면 향 후 정말 든든한 힘이 될 것이란 것. 이것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멀게는 우르겐치부터 가깝게는 사마르칸트까지, 다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제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갔고,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는 사무실 차량에를 올라탔다. 언제나 이별의 순간은 지금 일어나는 일 같지가 않아서 그 순간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들 떠났을 때야, 없구나. 이별했구나, 하게 되는 것 같다. 타쉬켄트에 사는 단원들의 짐들을 바쁘게 날라주고, 저녁을 먹고, 내가 이제부터 살아야 할 ‘내 집’ 에를 왔다. 아직 혼자는 아니었다. 사마르칸트에 가는 성현이가 차 시간에 맞지 않아 타쉬켄트에서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정리되지 않은 집에는 앉을 곳도 마땅치가 않아서 침대에 걸터앉고 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뭘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그냥 앉아서 우두커니 있을 뿐이었다. 전까지는 정말 빡빡한 일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숙사 방 안에 혼자 앉아있다가도 금새 다른 동기단원이 내 방을 들락날락해서 가만히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 또한 별 할 일이 없을 때면 다른 동기단원의 방을 들락날락하기 일쑤였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서 합숙훈련을 받던 우리는, 나름 하나의 공동체 식구가 된 것이었구나.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에게 익숙하게 지내 왔던 것이구나. 싶었다. 날이 길어졌다지만, 창 밖이 어두워질 때가 다 됐다. 창문 너머 또 다른 아파트가 나를 마주하고 있고, 가로등불이 켜진 거리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지금 있는 이 공간이 나의 움터일진데, 왜 이리도 허전할까. 뭔가 방 문 하나만 열면 사람들이 “왜 이제 왔어, 기다리고 있었잖아.”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익숙해지겠지.
내 속 텅 빈 공간을 우즈벡의 그 ‘어떤 것들’ 이 채워주겠지. 그 ‘어떤 것들’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것이 2년 동안의 내 임무일테지. 그리고 나도 우즈벡의 누군가들에게 무언가를 채워줘야 하는 거겠지.
수료식. 모든 훈련과정을 종료하고 제 활동지역으로 활동기관으로 파견되기 전 마지막 공식활동이다. 이제껏 배웠던 현지어와 함께하는 일정의 발표시간을 갖고, 지금껏 지내면서 찍었던 사진 및 영상을 모아 지금까지 이렇게 지냈다고 보여주기도 하는 행사다. 수료식이 다가올때쯤에는 정말 다들 바빴다. 각자 부임지로 파견되면 언제 올라올지 모르기 때문에 지방단원의 경우에는 필요한 생필품들을 미리 다 사둬야했고, 각자에게 부여된 발표준비도 해야했고 또 조금밖에 안 남은 시간 조금이나마 못 다한 이야기 하자고 옹기종기 모임의 꽃을 피우기도 해야 했으니. 거기다가 수료식에 조금이나마 특별한 퍼포먼스를 보여줘야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도 나와서 그것도 준비하느라 말이다. 나는 수료식데 상영할 영상 편집을 맡았는데, 저녁시간에 짬짬이 하려니까 매번 새벽에 자기 일쑤였다. 또 퍼포먼스 준비까지 하지, 여기저기 모임 자리에도 가지 하느라 나중에는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낮 쉬는시간마다 쓰러져 잘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런 바쁜 준비기간을 거치고 수료식이 시작했다. 수료식은 기본적으로 수료증을 받고, 각 현지어 클래스별로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료증을 받는 모습
우즈벡 전통 노래를 부르는 중
우즈벡어 A반은 각각 주제에 맞게 현지어 발표를 하고, 우즈벡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주제는 우즈벡 시장, 우즈벡의 독특한 문화, 우즈벡 음식, 소통 등에 관한 것이었다. 각각 외워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현지어에 그리 능숙하지 못해서 드문드문 참고하면서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우즈벡 노래를 부를 때는 현지어 선생님께 선물받은 스카프와 모자를 쓰고 하기도 했다. 우즈벡어 B반은 “인연”이라는 주제로 간단한 영상을 만들었다. 꽁트 비슷한 것으로 시간이 부족했는데도 불구하고 우즈벡어 자막까지 함께 제작해서 만들어냈다. 러시아어반은 각각 주제에 맞는 발표와 러시아어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활동했던 사진과 영상을 소스로 제작한 영상을 상영했다. 제작하면서 계속 반복해서 보긴 했지만, 스크린에 틀어진 영상을 보다보니, 그래 그 때 그랬었어, 재밌었어 하는 기억들 때문에 가슴이 잠시 뭉클해지기도 했다. 정말 짧은 기간 두 달이었는데, 정말 많은 시간과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기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 지금까지 연습했던 퍼포먼스와 노래를 불렀다. 퍼포먼스는 손과 발을 맞부딪치며 박자를 맞추고 노래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노래는 김동률의 “시작”이었다. 우리 기수의 국내합숙훈련때도 김동률의 “시작” 노래를 함께 불렀었다. 그때 이 노래를 부를 때 아 이제 수료식이 끝나면 곧 한국과 안녕이겠구나. 함께 훈련받던 동기들이 다들 세계 각국을 뻗어나가겠구나 하면서 설레임과 동시에 뭉클해지더니, 현지합숙훈련때는 설레임보다는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았다. 다들 가족처럼 함께했던 동기들 이제 언제 모두 다 모일 수 있을까. 각각 파견지에서 현지 기관에서 잘 활동해야 할 텐데. 하면서… 서로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사실 현지합숙기간에 여가시간에 그리 많지만은 않았다. 매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현지어 수업시간이 잡혀있었고, 현지어 수업시간이 끝나면 또 외부활동들이 있었다. 갖가지 교육 및 탐방 등등이 끝나면 바로 6시. 식사당번일 때면 서둘리 장을 보고, 저녁을 지어야했고 이것저것 치우고 나면 금새 8시였다. 점점 여름이 가까워진다지만 날은 아직 짧았고, 8시 쯤이면 이미 밖은 새까맸다. 숙제가 있는 날은 조금이나마 노력한 성의라도 보여줘야 하니 공책을 펴긴 펴야했고, 발표준비같은 것도 해야했고, 수료식이 얼마 안 남을 즈음에는 간단한 공연같은 거라도 보여줘야 겠다 싶었다. 암튼 이렇도록 빡빡한 나날들이었지만 그래도 짬짬이 시간은 남았다. 정말 가끔 주말에 남는 시간이 조금 있었고, 가끔 한가로운 밤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는 곳은 없었고,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니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 스포츠
세계경제외교대에는 실내 수영장이 있는데 약 5만숨정도를 주면 10번 정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우즈벡 수영장을 한번 이용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덜컥 등록해봤는데, 역시나 소문대로 시설은 좋았지만 깊었다. 깊다는 것은 수심이 깊다는 것으로… 수영장의 제일 얕은 곳은 깊이가 약 3미터, 제일 깊은 곳은 무려 5미터 가량 됐다. 수영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과 함께 벽 쪽 근처에서 수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물은 깨끗했고, 샤워실도 웬만큼 갖추어져 있었다. 문제는 한 달에 그 10번을 다 이용했어야 했는데, 너무 일정이 빡빡할 즈음이기도 했고, 심한 감기가 드는 바람에 2번밖에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 수영 외에도 학교 각종 시설에서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있다. 간단한 조깅을 할 수도 있고, 배드민턴 채가 있으나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남녀노소 다들 좋아하는 배드민턴이어서 내기 운동도 몇 번 했다.
* 버디활동
우리 기수에는 현지 학생과 버디라는 이름으로 서로 묶여서 같이 만나는 기회들이 있었다. 단원 한명 대, 현지 학생 두명 정도가 같이 묶였는데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 받을 것들이 꽤 있었다. 간단하게 무언가를 사야할 적에 아니면 좀 산책이라도 다니고 싶을 때 등등의 경우에 버디학생들과 만나서 여기저기 다니곤 했다. 주로 시간이 비는 주말에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고, 새로운 곳도 다니고 더러 뭔가 부족한 것들이 있으면 이것저것 사기도 하고 말이다.
* 시장투어
수도 타쉬켄트는 달리 눈요기 할 곳이 없는데, 그나마 가장 재밌는 곳은 다양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시장들이었다. 우리들도 매일 식사를 만들어 먹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식재료를 싸게 사고자 각종 시장들로 나다녔다. 한국 물품 가게들이 많은 가스삐탈리 시장부터 좀 큰 맘먹고 어떨 때는 꾸일륙으로, 어떨 때는 아부사히로, 가까운 빠르겐트 시장까지. 시장은 조그만 시장까지 합치면 가도가도 끝이 없을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다들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돌아다녀보면 조금씩 특색이 눈에 띄기도 하고, 시장마다 물품 가격도 조금씩 차이나 물건값 깎는 재미로, 한번씩 다녀왔다고 도장찍는 재미로 차비가 들더라도 여기저기 나다니곤 했다. * 그 외
기숙사안에서는 게 중에 한 단원은 양기아바드에서 사온 고양이를 키우기도 했다. 원래로 치면 현지합숙기간이라 보기에 안 좋은 경우라 사무소 눈치, 다른 선배단원 눈치보면서 몰래몰래 키우는 게 나름 별미 아닌 별미(?)였던 것도 같다. 그리고 정 할 일이 없으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꽃을 피웠다. 다들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요즘에 누가 좀 안 좋아 보이더라 등등부터 해서 좀 나가면 서로 인생고민까지 들어주는 시간들. 또 그냥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깐 오늘은 맥주, 오늘은 꼬냑, 오늘은 와인, 오늘은 보드카… ;;;; 와 함께하곤 했다. 일부 단원은 태어나서 코이카 오기 전까지 먹은 술보다 현지합숙기간에 먹은 술이 많다고 소탈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 만큼 우리들이 우애로웠다고나 할까… ㅋㅋㅋ
OJT란 On the Job Training 의 약자로 현지합숙 기간 중 각자의 부임지에서 선배단원과 함께 각 기관의 업무 등에 대한 간략한 인수인계를 받기도 하고, 지방단원의 경우에는 집을 구하기도 하는 일련의 활동 기간이다. 동기들 다들 함께만 지내다가 홀로 떨어져 홈스테이를 하면서 지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해서 이제껏 배웠던 현지어를 안 쓸래야 안쓸 수 없는 기간이기도 하다. 현지합숙 기간에는 언어가 조금 부족하면 코디의 도움을 받거나 다들 부족한 현지어이지만 협동해서 어떻게든 통했는데, 이제 홈스테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다. 조금이나마 한국어를 아는 학생의 홈스테이라면 그래도 가끔씩 도움을 받을 수 있을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농담조로 다들 그 기간 고행의 나날이었네 하고 회고하곤 하는 OJT 이다.
OJT 전 다들 낯선 환경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짐을 챙기곤 했다. 특히 지방단원의 경우에는 임지 파견때 짐을 한꺼번에 다 옮기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OJT때 짐의 절반 정도는 미리 갖다둬야만 해서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특별히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적었던 게 사실이었다. 거주지도 계속 살던 타쉬켄트, 심지어 기관도 계속 살던 세계경제외교대였던 것. 계속 학교를 왔다갔다 한다 치면 특별히 짐들을 다른 데 옮길 필요조차 없었다. 좀 못 챙긴 것들이 있으면 기숙사에 들어가서 들고 나오면 되니깐. 선배단원도 이미 몇 차례 인사했는데, 선배단원의 말에 의하면 수업이 거의 다 종강했기 때문에 시강 등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기대가 좀 되던 것은 홈스테이. 거기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보고, 듣게될까. 그리고 그것보다 더 기대되던 것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내 자신이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사실 지금까지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달리 다를 게 없었다. 동기들 다같이 돌아다니고, 다같이 공부하고, 다같이 놀다보니깐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 내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즈벡, 현지 문화에 직접 맞닿을 첫 순간이었던 것이다. 세계경제외교대의 선배 단원 두 분과 홈스테이집의 학생 한 명이 나와있었다. 현지학생의 이름은 Murod이라고 했다. 선한 얼굴로 웃는 Murod과 악수했다. 한국어 중급 정도 되는 Murod은 아직 현지어가 능숙치 않은 나를 위해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르시루트카를 타고 한참을 갔다. 약 40분 정도는 가는 것 같았다. 홈스테이할 집을 찾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선배 선생님들께서 말해주긴 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너무도 익숙한 학교 앞 아파트 같은 곳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게 되는 것이 내가 예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가능한한 번잡하지 않은 곳, 익숙치 않은 곳에서부터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그러면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지리 익히기도 좋고, 약간의 긴장감도 들려면 말이다. 마르시루트카에서 내려서 약 15분 정도를 걸었다. 어느새 어두워져 있어서 봄이어도 조금 추웠다. 타슈켄트 지역같지 않게 가로등이 드문드문 없는 듯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집들은 1층 집들이었다. 커다란 대문들이 인상적이었고, 길가에 가로수처럼 늘어선 나무들은 웬지 모르게 애틋했다. 꼭 한국의 내 고향 시골 부안 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Murod에게 이 나무들이 무슨 나무냐고 물으니 체리나무라고 했다. 이 체리나무에 곧 꽃들이 만개하고, 그 후에 바로 체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체리가 나올 적에 Murod의 할아버지의 딸기도 수확철이 되니 놀러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체리나무
홈스테이 집에 가는 길에 있던
집에 들어가니 Murod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나를 반겼다. 저녁때가 가까워진지라 저녁상도 차려져 있었다. 사실 말은 거의 통하지 않았다. 수업 초반부에 주로 배웠던 간단한 이름 소개 정도를 하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Murod의 도움도 있었고, 좋냐? 안좋냐? 라는 질문에 거의 대답하는 대화여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정말 화기애애한 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우셔서 상대방이 거의 외치듯 크게 말해야만 알아들으셨다. 그래서 나도 할아버지께 대답할 때는 유치원생이 제 목소리 크다 자랑하듯 짹짹거렸다. 우즈벡은 막내아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문화인지라, 막내아들 Nematjon이 집의 가장이었고 그 아래로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또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이제 유치원생 정도 되는 나이인 그네들은 나를 신기함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어댔다. 뭐라뭐라 하는 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다들 나를 적극적으로 반기는 것은 확실했다.
홈스테이 집 아이
초이호나choyxona
한 밤에는 Nematjon의 형인 Umidjon이 오늘 동창회 모임이 있으니 같이 choyxona에 가자고 했다. choyxona는 직역하면 ‘다방’인데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한국처럼 점원이 있어 서빙을 보고 그런 형태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방이 덜렁 있고, 그 옆에 부엌까지 쓸 수가 있는 대신 서빙을 보는 점원이나 요리사 따위는 없었다. 사온 식재료들을 써서 알아서 요리를 해서 먹는 곳이었고,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choyxona는 여자들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끼리 큰 솥에 고기요리도 하고, 스프도 하고 그 옆 큰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술과 함께 수다를 떤다. 이런 동창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덩치가 산더미 같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어서 겁이 좀 나긴 했는데, 조금 지나자 긴장이 풀려서 보드카를 몇 잔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choyxona 다음에는 Umidjon의 친척집에를 가서 우즈벡의 축제 음식 비슷한 수말릭 만드는 데도 갔다. 수말릭은 보리를 밤새 저어서 만드는 잼 비슷한 것이었는데, 좋은 날만 만드는 것이어서 그런지 다들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차량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다들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하면서 다들 나를 마당 스테이지(?)로 끌어내서 나도 같이 흔들어대면서 그 날 하루가 지나갔다. 첫 날치고 굉장히 많은 이벤트가 있구나 싶었다.
사실 그 다음날들은 홈스테이 집에서 그리 많은 일들이 있지 않았다. 우리의 OJT 기간이 일주일인데 학교 관계자도 만나고, 물품 인수인계도 받고, 선배단원과 함께하는 여러 방문일정을 소화하다보니 홈스테이 집에서 뭔가를 많이 하진 못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때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Murod과 주변을 산책하고 그런 재미가 있긴 했지만.
내 OJT 기간 중 홈스테이가 한 축이었다면 기관에서의 일들도 제법 있었다. 사실 기관의 담당자를 만나 여러 가지 수업에 관한 세부사항을 조율하진 못했다. 이미 선임 선생님의 수업이 종강을 해버렸기 때문에 이어서 인수인계를 받을 수는 없었고, 곧 여름방학을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수업을 개설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세계경제외교대의 수업은 정규수업이었기 때문에 커리큘럼에 맞춰서 수업을 개설해야했고, 코이카 단원을 위한 전용수업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방과 후 수업을 열기도 힘들었다.
현장사업이 필요했던 언어학부 소속의 교실
선임선생님과 현지 선생님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래서 그런 환경이 내겐 좀 문제였다. 코이카 컴퓨터 단원을 위한 전용 수업공간이 없다는 것. 전에 하던 것처럼 원래 있는 교실을 현지 선생님들과 같이 쓰는 것을 고민해봤지만, 그렇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빔프로젝터를 띄울 수도 없고, 컴퓨터는 전부 러시아어 프로그램으로 세팅이 돼 있었기 때문에 일부 프로그램은 정말 난항이 예상됐다. 특히 엑셀의 경우에는 함수 조차도 전부 러시아어였기 때문에 일정의 러시아어를 익혀야만 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언어학부에 있으면서, 아무도 쓰지 않는다던 컴퓨터실에 현장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는 현재 있는 컴퓨터실의 환경을 주로 조사했다. 이제껏 하던데로 하지 않고 새롭게 벌이는 일이어서 IT학부 및 언어학부 관계자와의 조율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향 후 세계경제외교대 코이카 컴퓨터 단원이 더 능동적으로 활동하려면 언젠가는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에게 필요하기도 헀고 말이다. OJT 기간 중 매일 저녁은 거의 현지어 일기를 쓰고, 발표준비를 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즈벡어로 글을 쓰는 것이 능숙치가 않아서 굉장히 짧은 문장이라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론 문법이 맞은지, 틀린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저 한우사전을 펼쳐서 갖가지 단어들을 조합하는 데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발표준비는 타쉬켄트인지라 수도에 대해 발표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고, 홈스테이-기관-현장사업 계획에 대해 주로 준비했다. 현장사업이 나 혼자 하고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소측에 미리 어필을 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였다.
OJT 기간, 1주일. 다들 같이만 있다가 따로 떨어져서 지내서 그런지 때로 시간이 참 안간다 싶긴 했는데, 이것저것 활동하고 준비하려다 보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종종 동기들에게 연락하곤 할 때 다들 재밌는 것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지만 그래도 동기들 다시 한번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부터 나왔다. 겨우 한달반 같이 살아놓고, 겨우 일주일 떨어진 것 가지고 신파를 찍는구나 싶겠지만, 정말 모두의 마음이 그랬다. 그 짧은 기간 같이 살면서 정이 이토록 두텁게도 쌓였구나 싶었다. 다들 부임지로 뻗어 나갈때는 아쉬워서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다들 했을 것이다.
이름부터 거창한 필드트립. 내 예상으로는 사마르칸트라는 곳 근처의 사막에를 가서 야영을 하고, 밥도 지어먹고 누군가는 힘들어서 탈진도 하고 그래도 서로 격려를 하고 부축이면서 여행하는 뭐랄까 박카스 국토대장정 비스무레한 것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번번이 예상은 빗겨나고 말았지.
어쨌든 필드트립. 떠나봐야 안다는 필드트립이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거리상 그리고 여건상 꼭 사마르칸트는 들르게 되있는 것 같다. 우리의 전 기수에서는 부하라도 함께 여행일정에 있었다고 하지만 2박 3일의 일정에서 부하라까지 소화하기는 무리가 아닐까 싶다. 왜냐면 부하라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우선 가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기차를 타게 되면 타쉬켄트에서 부하라까지 최소7시간은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2박 3일의 일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아닌 듯 싶다. 우리는 오직 사마르칸트만 갔는데도 일정이 꽤 빡빡했기 때문.
어쨌든 사마르칸트로 필드트립 !
기차를 탔다. 다들 들 뜬 마음으로 탑승했고 타쉬켄트를 벗어나면서까지 다들 가슴 속 조금의 설레임은 남아있었다.하지만 가도가도 변함없는 풍경. 그리 빠르지 않은 기차. 불편한 좌석 등이 그 설레임을 사르르 녹여버리고 대게 다들 잠에 들며 기차 여정 5시간을 버텼다지. 하지만 간간이 몇몇 단원들을 색다른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우리칸에 탔던 몇몇 일행은 심심하기도 하고, 창 밖 풍경에 감회가 새로워서 시 백일장 대회도 하고 그랬다. 장난 반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다들 멋진 시를 지어보여, 낭송까지 했다지.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자 청명한 날씨가 먼저 우릴 반겼다. 새파란 하늘에 가느다란 구름자락이 옅게 쓸려있었다. 그 쓸린 구름자락 때문에 새파란 하늘이 더욱 돋보였다. 마치 한국의 가을하늘과 흡사했다. 4월 초라 이제 봄이겠구나,사마르칸트는 남쪽 도시니까 좀 더 덥겠지 하고 옷을 가볍게들 챙겨왔건만 시퍼런 가을하늘에 바람이 몹시도 쌀쌀했다. 열차에서 다들 기지개를 키면서 나오다가 금새 몸을 움추려야만 했다.
역 전 앞에 대절한 시내버스가 있었는데 행선지 표지판만 이제 막 내린 거지 싶을 정도로 여타 다른 시내버스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우리 때문에 사마르칸트 대중교통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농담과 함께 차는 출발했다.
슈퍼솜사라고 불리우는 것을 먹으로 가는 길에 거의 사마르칸트를 관통하다 시피 했는데 다들 탄성을 감추질 못했다.사마르칸트는 타쉬켄트와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타쉬켄트는 대도시지만 낡은 도시이기도 하다. 도심지 일부 부유한 동네가 아니라면 대부분 언제 지어진지 모를 회색빛 낡은 아파트 그리고 구형과 신형간판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낡았지만 역사적인 도시는 또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공원에를 가도 유서깊은 것을 발견할 순 없고, 20-30년 전에 세운듯한 동상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마르칸트는 완전히 달랐다. 도로는 깨끗했고, 깔끔하게 글씨를 써 놓은 상점들이 모두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촘촘히 가로등이 있는 인도 그리고 도심 곳곳에 보란 듯이 서 있는 유적지들. 게다가 날씨까지 청명한 날 아니던가!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원같았다. 우즈벡 그 어디서도 못 보던 풍경이었으니 다들 놀랄 수밖에. 순간 사마르칸트로 파견 예정인 백성현 단원에게 다들 눈이 갔다. 특히 내 눈빛이야말로 오묘하게 부러움 + 질투심 + (그래도 질 수 없다는 약간의 자존감) 으로 불타올랐다. 왜냐하면 원래 내가 사마르칸트를 지망했고 백성현 단원이 타쉬켄트를 지망했었기 때문이다.사무소 측 판단으로 둘의 임지 배정지가 바뀌었는데 이유인즉슨 사마르칸트 IT 대학교가 신규 파견지역이기도 하고IT 전문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하드웨어에 좀 더 능숙한 백성현 단원이 어울릴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뭐 나도 별다른 불평은 없었다. 사마르칸트의 예쁜 거리를 보기 전까지는… (이건 단순히 필드트립때의 감상이고, 지금은 현 기관 및 내가 사는 도시 타쉬켄트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식당에 들어섰다.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들어서자 마자 식당의 모든 손님들의 시선. 상대적으로 수도 타쉬켄트에 비해 외국인이 적은 지방이기 때문에 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몰려 앉아 굶주린 배를 슈퍼솜사로 채우기 시작했다. 슈퍼솜사는 정말 생각보다 커서 보통 솜사처럼 한 손에 들고 쥐어 물으 뜯을 정도가 아니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서 정밀하게 서로 분배하면서 맛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의 본격 탐방 일정들이 시작됐다.
* 울르그벡 천문대, 샤흐리잡스, 레기스탄 등등
처음에는 정말 진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건물들이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앞에 대형 문(?)이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약간의 상인이 있기도 하나 대부분은 큰 광장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끼이서들 보면 유적지들에서 세월의 흔적이 그리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번지르르 하다. 아마도 개보수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바로 옆 유적지들도 모두 개보수를 하려는지 철골을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 우즈벡 유적 건물의 특징은 뭐랄까, 우선 웅장하다. 웅장하게 커다란 건물을 지어놓고 그 외벽에 세심하게 코란 글귀와 그림을 그려놓았다. 아주 예전에는 이 곳이 학교이기도 하고, 사원이기도 했다고 하나 현재는 대부분 관광구역으로 기능하는 듯 싶었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홀로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갑자기 저기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보니깐 경찰이었다. 무슨 일일까 했지만, 그리 위협적인 모양새는 아니어서 다가갔더니 이래저래 막 말을 하는데…대충 알아듣기로는 원래 이 미노르 탑 위에 올라가는 것이 금지돼있는데, 미노르 탑 위에 올라가게 해주겠다. 5,000숨만 달라하는 그런 얘기였다. 그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탑 위에 올라가서 보고 싶기도 해서 알겠다고 하고 올라갔다.내부는 개보수 중인지, 아니면 하다가 포기했던지 온갖 공사 기자재가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요리조리 해서 어디론가로 갔더니 계단이 나왔다. 경찰들은 내게 여기로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약 10분간 숨을 헐떡거리면서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 주변 유적지가 다 보였다. 그런데 맨 위에 안전장치가 별로 없어서 여유있게 감상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쏙 내밀어서 한바퀴 휘둘러보고, 카메라로 사진을 조금 찍고 내려온 게 다였다. 그래도 5,000숨에 좋은 구경 잘했다 싶었다. 내려가니 경찰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얘기를 해서 더 데려오라고 한다. 알았다고 하고 돌아섰는데, 정말 다른 단원들도 올라가고 싶다 하여 나름 마케팅까지 해준 셈이었다.
* 종이공방, 논 만들기 그리고 와인공장
종이 체험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종이가 풀어진 물에다가 판 같은 것을 건졌다 올리고, 내려놓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것들에 더 힘든 노동의 과정이 숨겨져 있었겠지만… 그래도 종이공방이 꽤 좋았던 것은 종이공방이 위치했던 곳의 한적한 풍경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마당에는 거위, 오리, 닭 같은 것들이 총총걸음으로 산책을 다니고 있고 한 쪽에는 물이 흐르고 물레방아 비스무레한 게 계속 물을 퍼 올리기도 한다. 아주머니들은 수다를 떨며 전통 종이로 수공예품을 만들고 계시고 한 것들, 등등. 종이를 말리는 시간 동안 우리들은 종이로 만든 수공예품을 신기하게 구경도 하고, 해지는 풍경 속을 산책했다. 소박한 즐거움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던 곳이었다.
논 만들기는 우즈벡의 전통 주식인 논. 러시아어를 리뾰쉬까를 만드는 집에 찾아간 것이었다. 본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무심하게 우릴 맞아주긴 했지만 논 만드는 화로를 직접 구경하고, 우리가 만든 논을 직접 가져갈 수도 있어서 한번쯤 해볼만한 경험이었다.
사마르칸트 쪽에 포도가 좋아서 와인이 유명하다고 하다. 우리도 공짜 와인을 실컷 먹겠구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듯 생포도를 발로 직접 밟는 것도 복, 수많은 오크통 사이사이를 걸을 수 있겠구나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보지를 못했다. 공장 옆에 박물관 같은 게 하나 있는데 거기서 해당 회사에서 제조한 와인 자랑을 실컷 듣고, 시음해보고 살 사람들은 사보는 일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웬만하면 사려고 했지만, 와인들이 너무너무 달아서 내 입에 맞는게 별로 없었다. 후에는 이게 마케팅 전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던 와인공장.
* 레기스탄 광장
밤의 레기스탄 광장은 우즈벡에 이런 곳이 있었어? 라는 놀라움을 아니 갖을 수 없다. 반듯하게 잘 닦인 도로에는 휴지 한 조각도 없고 그 넓은 대로 양 쪽에는 촘촘하게 가로등이 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넓은 크기에 비해 산책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우리가 걸을 당시에는 거의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광장에 가로등들이 그리 환하게도 켜져 있으니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를 걷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도 한다. 사마르칸트의 외양을 보면 깨끗하게 잘 가꾸어진 공원같아서 살기 좋은 것 같다 싶지만 어찌보면 너무 깨끗해서 정내미가 없기도 한 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것들을 찾기가 어렵고, 인간미의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 보란 듯이 가꾸어진 도시의 인도를, 단지 보면서 걸을 뿐. 그것이 사마르칸트의 득이자 실이기도 한 것 같다.
* 샤흐진다
샤흐진다는 묘한 구석이 있다. 우즈벡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거나 현자의 묘가 있으면 그 주의에 보통 다른 사람들의 묘들이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유는 그래야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샤흐진다도 묘인지라 여타 다른 관광지역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다른 관광지가 거대한 문을 시작으로 하여 관광물품 상인들의 등장 그리고 텅 빈 광장이 생뚱맞게 있었다면 샤흐진다는 단지 고즈넉하다. 웅장하게 세운 건물도 별로 없고 묘를 중심으로 하여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몇 개 지어놨고, 걷다보면 기도실 같은 것도 나오고 또 더 걷다보면 일반인(?)들의 공동묘지에 도달할 수 있다. 묘터이어서 그런지 상인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도 삼삼오오 천천히 둘러보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공동묘지. 우즈벡은 묘비에 고인의 사진을 새겨둔다. 그 사진들은 흑백이지만 너무 디테일하게 새겨져 있어 그들의 눈빛이 꼭 먼 하늘을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내게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소 혹은 다른 이에게 추천할만한 장소를 이야기하라면 샤흐진다를 이야기하겠다. 그 곳은 많은 이들의 삶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에, 가장 사마르칸트답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