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DJ

  • 갑자기 든게된 두 노래

    Living Stone의 Architect 였다. 원래 감미로운 미성톤의 팝노래를 듣던 편인데

    뭐지? 신선한 에너지의 보컬이었다.

    생각보다 나이가 어린 아티스트라서 놀래기도

    그리고 또 한가지 곡을 유튜브 뮤직 알고리즘이 들려줬다.

    New Rules 라는 가수의 Pasta 라는 곡.

    뭔가 보컬 발성이 리빙스턴이랑 비슷하다.

    Architect는 노래분위기에서 가사를 대충 추측할 수 있었는데, 이건 노래제목이 Pasta ? 뭐지? 유리상자 같은 느낌의 가사인가? 싶어서 가사 해석을 좀 살펴봤는데…

    가사가 좀 마음에 안든다. 묘하게 잘난체하는 느낌? 악동뮤지션이 찬혁만 3명인데 계몽적인 가사의 노래를 하는 느낌?!

    그래서 리빙스턴은 다른 곡들도 더 찾아들어볼 것 같고… 뉴룰스는 조금 짜게 식어버린 편…

  • 꿈에서

    꿈에서 울었다. 거의 통곡이었다.

    낮잠이었다.

    일어나고나서, 진짜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건 아닌지 확인했다.

    없었다.

    그런데 마음은 통곡했던 것처럼 울렁거리고 있었다

  • 탈의실에서

    내 세면용품을 담은 파우치는 원래 트래블용이라서 그런지 샤워실을 스치기만 해도 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곤 했다. 일단, 정리를 하면서 타월로 닦아낼 요량으로 옷 보관함 쪽에서 이리저리 정리를 하는데 바닥에 물이 좀 떨어졌다. 탈의실 정리하시는 김광규 닮으신 분께서 물을 다 털고 나와야한다고 말씀해주셔서 알겠다고 하고는, 물품 정리를 다 마친 후에 한쪽 구석에 있는 밀대걸레로 물기를 쓰윽 닦았다. 옷 챙겨 입고 나서려는데 그 김광규 닮으신 분께서 내가 있던 자리를 검사하러 가시려나 모양이다. 계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서로 스쳐가는데 가시는 걸음 뒤로 나를 45도 각도로 찌릿, 눈빛을 쏘시는데… 순간적으로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내 자리는 밀대걸래로 쓱쓱 밀었기에 물기없이 깔-끔. 난 태연히 신발을 신고 나왔다.

  • 더 베어 봄

    시즌 1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면서 어? 라디오헤드는 거의 치트키 수준 반칙아닌가? 했지만 눈물이 주르륵… 시즌2는 좀 그러네 하면서 보다가 리치의 성장서사 시퀀스. 아, 이건 과한 거 아닌가? 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차 안에서 부르면서 가는 리치의 열광적인 모습을 보고는 또 눈물 주르륵…

    라디오헤드는 원래 좋아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너무 메이저의 냄새가 풀풀나는… 그녀의 채도가 너무 높아서 나랑은 안맞네- 했었는데 . 그 유치했던 Love story 를 그 이후에 몇번을 더 찾아 들었고, 들을 때마다 차 안에서 자기 자신의 삶에 열광하는 리치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보고나서 며칠동안은 노래 들을 때마다 울컥해버리는…

    그냥 더 베어는 너무 열광적인 드라마였던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올 때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이 든다. 모던하고 거대한 이 공간은 잠시 내 계급을 잊어버릴 수 있는 특유의 몰입을 선사하는, 참 특이한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관람자들은 서로를 의식하고 때론 경쟁도 한다. 지금 나는 이 고급예술에 완전하게 동기화되었다고 선언을 하고 싶은 욕망에 관한 경쟁이다. 역설적인 것은 고급예술이 대상으로 하는 것이 무척 불쌍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구조와 일체화를 시도하지 못하고 미끌어져 대상이 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구조와 자기 자신 사이의 틈. 예술가가 틈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틈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야. 틈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야. 틈은 아름다워. 틈은 예뻐- 이런 식으로. 어떤 식으로든 그 틈을 활용해 스펙타클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과정…

    관람자가 그 과정에 완전히 동기화되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 과정이 유의미하지만, 역량의 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싶은 마음.

    그 욕망은 관람자의 특권이자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특유의 놀이이기도 하다. 미술이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합당한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 해금

    스마트폰 중독, 도파민 중독, 쇼츠 중독, 집중력 저하 이런 이슈가 남일 같지 않은 것이 유튜브에만 가면 한번씩… 클릭할 수 밖에 없는 푸바오, 어이없는 고양이 등… 에 빠져 삼매경을 보내는 일이 하루에 꼭 몇번씩 있었다.

    조금 느긋한 도파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며, 도서관에서 소설책이라도 빌려 읽어야지- 하면서 좀 보고 있다.

    새해 첫 책, 장강명의 댓글부대 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를 읽고

    어제는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단편소설집이었고

    문체가 읽기 편해서 그런지… 어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다는 것이 인상깊다고 생각하는 중.

    하루에 책 한권을 펼치기 시작해서, 그날 하루에 다 끝낸 일이 정말정말 없었던 일인데- 참 오랜만이구나

    조금씩 조금씩 성미 급한 뇌를 느리게 만들어야지, 하는 목표로

    거의 절독했던 책과 문학에 해금을 풀어야겠다.

    혁명의 넝마주의란 책을 오늘 빌려왔는데 어렵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 마의 산

    한 1년 전쯤 그랬다. 책 좀 읽어야지. 난 맨날 누워서 읽으려고 하니깐 전자책에 도전해봐야지. 그리고 을유문학사세계문학 전집 100권 세트를 큰맘먹고 질렀다. 에헷, 일년동안 이 100권 중 얼마나 읽을 수 있으려나, 혼자서도 궁금해하고 그랬는데, 결론은 1권이었다. 그것은 세계문학전집의 첫번째 책이 토마스만의 “마의 산” 이었기 때문. 아 정확히 말하자면 마의산 상권, 하권 이렇게 2권.

    내가 이토록 작품 하나를 긴 기간동안 읽은 게 별로 안되는데(어려우면 중간에 포기해버리기 때문)

    역대급 중에 하나였다.

    지금껏 돌이켜보면

    중학교 때인가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100년동안의 고독” 이건 초중반부가 힘들었지만, 후반부는 빠른 속도로 훌훌 읽었었고

    군대에서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이건 아무리 되넘겨 읽어보더라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 시점에선 번역의 탓으로 조금 돌려본다.

    그리고 이 “마의 산”

    내용 자체가 난해하다기 보다는, 이거 왜 갑자기 또 이런 사소구리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담? 하는 순간, 또 내 나름의 딴생각을 해버리면서 눈은 텍스트를 분명 훑고 있지만 내용은 들어오진 않는 그런 희안한 경험. 아, 도저히 안되겟다 하면서 읽다맑다를 연거푸 한 끝에 1년이 걸렸다.

    드디어 명작을 하나 읽었다, 뭐 이런 감흥보다는 드디어 넘겼다… 는 느낌으로 첫 작품을 읽었으니, 을유문학사 세계문학전집 연말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런지??

  • 2023

    별 일 없었던 해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것저것 일들이 있었지- 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제법 차분하다. 지나간 2023이 너무 아쉽다, 라기 보단 2024가 더 걱정된다 라는 마음. 이건 뭐 매해 강도만 달랐지, 비슷했던 연말의 공통 감상이다.

  • 두가지 기억

    기억1.

    초등학교 시절 중 언제인지조차 묘하다는 게 참 이상하다. 보통 학년마다 노는 친구 구성이 달랐기 때문에 어렴풋한 기억이라도 친구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고, 아 몇학년 때겠구나라고 추정이 가능한데말이다. 떠오르는 얼굴은 전혀 없고, 그 기억엔 그 집의 위치. 구조 그리고 구 집안밖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많은 아이들만 생각난다.

    그 집은 성황산의 입구 근처에 있었다. 성황산은 부안읍내에 있는 유일한 산이었다. 지금은 상소산이라고 뜨던 데, 원래 상소산인데 입말로 성황산이라고 불렀는지, 중간에 이름이 바뀌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어렸을 적 난 성황산도 아니고, 발음 가는 대로 서광산 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고 산 정상까지의 길이 공원길처럼 너르게 닦여있고, 거의 꼭대기까지 차로 가버리면 한 5분이면 쑹- 하고 가버릴 수 있는 나즈막한 산이었다. 성황산은 백일장 대회나 소풍갈 때 자주 가는, 어린아아들에게도 익숙한 산이다. 성황산 입구 즈음에 조용하게 생긴 집들이 몇 채 있었다. 그 집들은 당시 유행하던 벽돌양옥집 양식 같은 것을 뒤집어 쓰지 않고 그냥 시멘트를 툭툭 쌓아서 슬라브 지붕을 올려버린 게 아닐까? 라고 생각될만큼 단조로웠다. 부안 읍내에도 사실 단순한 집들은 꽤 많았지만, 성황산 입구 부근에 있던 집들의 인상이 강했던 이유는 성황산을 조금만 올라가더라도 그 집들의 안쪽이 훤히 보여서 였다. 벽돌담은 없거나 낮았고, 단조로운 시멘트집에 또 창문은 또 큼직큼직해서 세간살이 같은 게 언뜻언뜻 비치곤 했다. 집이 작거나,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런 느낌은 또 아니었는데, 집들이 뭐랄까 너무 단조로워서 무슨 창고 하나를 지어두고 색색깔 슬라브지붕 올려서 그냥 집으로 하고 살지 뭐, 라고 한 것만 같았다. 부안읍이 그리 땅이 비싸고, 밀도가 높은 읍은 아니었기에, 어린 생각에도 이 오르막에 굳이? 집을 지어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낯선 아이들 무리와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우리집에서 놀래? 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나도! 나도!! 하면서 아이들은 수가 불어 거의 열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그 아이의 집으로 갔는데 그 집이 그 성황산 입구 오르막에 있는 집이었다. 집은 외부에서 보는 것과 흡사하게 안 구조도 너무 단조로웠다. 방인지 거실인지 모를 것만 냉큼 있고 끝인데다가 그 안에 가구도 별로 없었다. 그저 바닥에 이불따위가 펼쳐져 있는 그 방에서, 드르륵 문만 열면 바로 외부. 그 아이의 부모님은 둘 다 부재하고 계셨고, 덩그러니 집만 있는 데서 그 열명의 아이들은 방과 마당, 대문 사이사이를 막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정신없이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 기억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은 내 초등학교 시절에도 한번씩 그 아이가 잘 살까? 하고 한번씩 궁금해했는데, 그 아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 집이 어디였는지도 헤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달동네, 달동네 하던 곳에 나도 갔었는데, 그 달동네의 아이는 잘 살까? 라고??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집을 포함한 입구 오르막의 집들이 딱히 달동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부안이 굳이 달동네가 있을만한 도심이 아니고, 성황산 입구 바로 아래에는 부안군청도 있었고, 도서관도 있다. 거기서 한 10분만 걸어가면 초등학교까지 나오기에 입지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집들 뒤로 산이 있다는 건, 사실 성황산이 말만 산이지, 거의 공원 수준인데… 외진 곳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극히 부동산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땅값이 비싼 입지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쪽을 유독 선호하는 분들이 있어서 원래 땅주인들이 집을 쉽게 팔 것 같지 않은 느낌의 그런 입지?

    근데 왜 나는 아, 오늘 한 가난한 아이가 사는 집에서 놀다왔어- 라는 기억으로 남기고 말았을까. 정작 정신없이 놀 때는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여기저기 뛰어놀다 왔으면서.

    기억2.

    우리집은 내가 유치원 때 한번 이사를 했다. 처음 살았던 곳은 상가 뒤편의 작은 단칸방이었다. 우리집이 상가를 직접 운영했던 것은 아니고 상가는 세를 줬었고, 우리집은 상가 옆 한사람이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터널같은 골목을 지나, 그 뒤에 있는 단칸방이었다. 그 방 크기가 한 5평 정도 되려나? 거기에 우리 총 다섯가족이 연탄불을 떼면서 살았다. 그래도 작은 마당이 있어서 마당에서 꿩을 잡아서 먹었던 기억도 있고, 유치를 빼서 지붕 너머로 던졌던 기억도 있던 추억의 집이다.

    각방이 있는 빨간양옥집으로 이사갈 줄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었던 때, 동네 골목에서 유치원 친구를 만난 나였다. 여자아이였는데 좋아했던 여자애 뭐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그런 친구 중 하나였다. 그 아이는 동네 친구는 아니었고 어디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동네 골목에서 혼자 놀던 나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했나 보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집에 가볼래?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그 친구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엔 마침 아무도 없었고, 집엔 이것저것 그래도 놀 게 있었으니깐 하면서.

    터널같은 골목을 지나고 마당이라고 하기엔 꽤 작은 터, 아궁이 부엌, 재래식 화장실 그리고 단칸방. 방에는 그래도 세 어린이가 자랐던 곳이기에 꽤 다채로운 것들이 있었다. 무슨 트로피 같은 것이 옷장 위로 쭉 나열되어 있기도 했고. 플라스틱 로보트 장난감 따위 등등.. 나는 멜로디언 건반을 하나, 둘 쳐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눈빛이 아, 뭐랄까- 너, 좀 딱하구나… 라고 생각하는 걸 당시에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아, 여기 앞에 가게 그것도 우리집꺼야, 막 이런 식으로 얘기했던 기억.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 라고 약간 허둥댔었고, 그 친구는 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냥 휘- 둘러보고 갔다.

    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가 놀 거 많다고 집에 데려갔는데, 막상 가보니 별로 놀것도 없네- 하고 가던 길이나 가야겠다 한 거 일수도 있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 낙산을 넘어

    대학로에서 걸어서 한 2-30분 정도이기에

    가끔 대학로에서 약속이 있거나 할 때

    조금 일찌감치 나와 걸어아곤 했었는데

    언제나 한성대입구쪽으로 살짝 에둘러서 걷곤 했었다.

    지도에서 대학로와 집 쪽을 직선으로 이어보면

    낙산과 창신 쪽에 그어지는데

    여긴 그야말로 언덕배기, 산…. 또 창신 쪽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어서 길을 중간에 뚝 끊기게 해두고 있어서

    외출한 김에 조금 걸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나와봤고

    아파트 단지 하나가 중간에 가로막긴 했어도

    별 무리없는 횡단

    오랜만에 낙산에 가보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단편영화를 찍을 때

    신세를 졌던 세탁소는 없어졌고

    그 맞은평 정육점은 그대로고

    츄러스가게도 바뀌었고

    그래도 대학로는 예전에 하도 오래 살아서

    뭔가, 정이 가는 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