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DJ

  • 오늘의 동선

    소니 카메라에 또 고장증상이 생겨 남대문 소니센터부터 방문.

    수리기사님이 자주 뵙게 된다고 서로 어색한 인사를 마친 후- 여기서 바로 부품 교체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에이- 환승할인은 포기해야겠구나, 하지만 카메라를 바로 받을 수 있다니, 기쁘군.

    하며 한참 후 메모리카드랑 연계된 일정의 부품을 3만 2천원에 교체하고 서비스 센터를 나섰다.

    다음은 필름을 맡기고 파나소닉 렌즈 수리를 맡기로 충무로를 가야한다.

    어차피 환승할인도 안되는 것, 교통비 아낄 겸 걸어가자며…

    먼저 필름부터 필름스캔을 맡기고- 사설 수리업체에 찾아갔는데- 이 렌즈는 수리가 안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그리고 업체에서 남대문에 파나소닉 서비스센터가 있으니 그리 가보라고 안내해줬지만

    일말의 의심이 들어- 파나소닉 남대문센터에 전화를 해보니 (오늘 한 일중 가장 잘한 일!)

    남대문센터는 렌즈 수리는 담당하지 않는다고, 서초점에 가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서초점으로 가려는 지하철을 타려는 찰라

    카메라를 잠시 들여다보니…어랏? 기분좋게 수리한 이 카메라가 배터리 오류란 메시지가 뜨면서 또 작동을 멈춘다.

    급히 소니센터 수리기사님과 연락을 해보니, 카메라를 맡겨야 할 것 같다며… 해서

    급히 남대문 쪽으로 선회해서…. 카메라를 맡겼다…

    이걸로 세보니, 이 카메라의 다섯번째 고장이다.

    처음에 셔터막 교체, 두번째 메인보드 교체, 세번째 배터리 고장, 네번째 SD 카드 근처 전원부 교체

    그리고 이번이 다섯번째… 과연 이 다섯번째가 마지막 고장일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이번에 수리비는 또 얼마나 나올 것인가 우울해지기도 하고…

    이 카메라는 어디 쉽게 빌려주지도 못하겠다, 라는 생각도 들고…

    세상에서 가장 짜증나있는 사람으로  돌변하여 파나소닉 서초점에를 갔다.

    내가 왜… 이 렌즈를 고치러 와야하는거지… 하는 회의감이 들어-

    파나소닉 렌즈는 수리 후, 찾을 때는 그냥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고

    학교까지 오는데 외주 맡고 있는 저자가 또 전화를 해서- 집에 들어가면 또 수정사항을 얘기해주겠다고 한다.

    원래는 교정으로 넘기고 나서, 수정사항을 한꺼번에 하기로 한 것을

    교정으로 넘기기 전에 수정을 또 한번 하고, 교정 보고 난 후 또 수정을 하겠다는 얘기.

    이건 뭐…

    1차, 2차 수정… 이런 게 아니라 수시로 내용 고치고 사진을 이것 넣었다가 저것 넣었다가…

    수정하자는 것도 전화로… 그것도, 수정사항만 간략하게 얘기하는게 아니라 관심없는 이런 저런 얘기들 부연까지…

    멸망하라 지구여!

  • 논쟁을 위한 제언 Proposal for a Tussle (2007)

    불안

    “개미의 길 :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1909~2004”라는 제목 하에 57편의 영화를 모아 놓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논쟁의 불씨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 글은 2007년에 비엔나영화제와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이 장-피에르 고랭을 객원 큐레이터로 초청하여 마련한 에세이영화 특별전의 서문이다. ☞ 상영작품 목록 보기]  이 리스트는 십중팔구 사람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만들 것이며 매 상영 시마다 해당 영화가 이 리스트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영화의 선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거나 조롱 내지는 심지어 야유가 쏟아질 수도 있으며 십 수 편의 다른 영화들이 부당하게 누락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조망이란 우연적이고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는 학술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취향에 기인한 것이다. 확실히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특별전의 관객들을 줄곧 따라다닐 논쟁은 에세이 그 자체의 개념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에세이스트 엘리자베스 하드윅이 지적했듯, 에세이란 용어에는 “엄밀함이라는 평온”(serenity of precis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문학에 있어서의 에세이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를 소설이나 시와 같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식을 지닌 장르와 대비시키고 있다. 영화적 에세이에 대해 다루고자 할 때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픽션이 무엇이며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분법 속에서 관객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영화사(史)의 박물관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 간의 대립만큼이나 낡아빠진 것이다. 에세이의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그러한 이분법의 확실성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는 그 분리의 양 측면을 동시에 수용하는 형식이며, 다큐멘터리에서 픽션으로 혹은 그 반대로의 이행이 가능한 형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픽션 대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른 대립을 만들어낸다.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장르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표현의 개별성과 자유로운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는 문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혹한 대접을 받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 영화적 에세이와 문학적 에세이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다시 하드윅을 빌려 말하자면, “자유는 발휘되어 왔다. 하지만 그건 몇몇(관객들)에겐 거의 금기의 대상이었고, 때론 미처 발휘되기도 전에 경계를 넘다 포획되곤 했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필름 에세이스트들이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오만불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 주장은 변덕스러울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스타일과 개인적 방식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이는 신성불가침의 상업적 고려를 전적으로 무시함으로써만 관객에게 제시될 수 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작업하며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픽션은 언제나 스튜디오적 이미지를 불러들이며 다큐멘터리는 제도적 맥락 내에서 자라난다. 그것들은 모두 틀과 방법들,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구속들에 대해 말한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 있어서의 에세이 또한 “클로즈드 숍”(하드윅) – [주] 노조원만을 고용하고 비노조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사업장 – 이 아니다. 이러한 영화를 구상하고, 그것의 역사를 개괄하며, 그 가운데 독특한 작품들의 목록을 만들려 시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어쩌면 야유하는 이들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블랙 홀

    문학이라고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 집착함으로써 클로즈드 숍이라는 미로를 빠져 나가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문학적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적 에세이는 주제(subject matter)란 주체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the subject)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에세이의 핵심에는 그것을 쓰거나 영화적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이에게 중요한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는데, 이러한 관심은 그것[관심사]을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명명할 – 말하자면, 그것[관심사]를 논리 정연한 방식으로 영화화할 – 수 있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에세이의 핵심에는 무언가 강렬한 것이 있어서 이는 그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around) 말하게끔 실존적 요구를 자극한다. 이러한 블랙홀이 없이는 에세이스트의 걸음걸이란 (그리고 에세이스트의 목소리에 우선하고 이를 조건 짓는 걸음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에세이의 기이한 패러독스가 있다. 결국 우리는 에세이의 수행을 자극한 것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가 거기서 점점 일탈해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에세이를 독자 혹은 관객과 결합시키는 기이한 전환이 있다.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든 혹은 언어, 이미지, 사운드, 음악을 통해서든) 그것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이에게 그것이 강제하는 춤이다. 이 회고전에 포함된 57편 영화들[의 제작]을 자극한 것[동기, 주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채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들이 스스로의 전제 주변에서 춤출 때 보여주는 부단한 운동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에세이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열어주고 우리 자신이 되게끔 하는 충동의 형식으로서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다시 한 번 문학적 에세이에 대한 하드윅의 말을 인용하자면, “에세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평등이 존재하는 공중에 의해 소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라는 말을 “관객”으로 바꾸어도 이러한 원리는 변함없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 (지가 베르토프, 1929)

    끊어진 아드아드네의 실타래

    하지만 독자는 [에세이를 읽는 데 요구되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만 관객은 그렇지 못하다. [문학적 에세이의 경우] 매 페이지마다에서 논의는 언제나 중단되고, 거듭 읽혀지며, 음미되고, 회고되고, 새롭게 이해될 것을 요청한다. 소설 심지어 시보다도 더, 문학적 에세이는 2차, 3차, n차 독해를 요청하지 않는 독서란 진정한 독서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구문 중간에 종종 독서를 멈추고 그간 밟아온 과정을 화고해 봄이 없이 몽테뉴[의 <수상록>]의 단 한 페이지라도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그의 글쓰기를 성찬(聖餐)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더듬거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그를 든든한 후원자로 삼되 결코 그에게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몽테뉴란 이름을 당신의 취향에 따라 에머슨, 해즐릿, 키에르케고르, 니체 혹은 릴케의 이름으로 바꿔본다 해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다. 그들의 글을 단숨에 읽은 척하는 이는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그들을 알렉상드르 뒤마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전적으로 다른 생리를 따른다. 그것들이 상영되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그 흐름을 돌이켜보는 일은 고사하고 거기에 개입할 수조차 없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 가차 없이 녹아드는 이미지들은 출현하는 즉시 사라지며,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흐름에 언제나 잘 어울리는 것은 픽션이다. 픽션의 인물들은 그 일시성 속에서 잘 살아간다. 반대로 에세이 영화들은 언제나 그들 각자와의 전투를 치른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의 지위 그리고 음성, 소음, 음악과 같은 사운드의 지위는 동일한 요소들이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문제되는 것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시되는 것의 순서가 아무리 혼란스럽다 해도) 픽션의 시간적 배열과 (묘사된 리얼리티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다큐멘터리의 사실적 설명에는 선형성이 존재하며, 이는 영화 이미지와 그 흐름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에세이는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그 방향을 돌리고 그 흐름 자체 위로 흘러넘치게 하는 작업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 편의 에세이 영화 속에서 이미지는 결코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오고 그 자신의 시간성과 일회성을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순수한 반복 내지는 사운드를 통한 재(再)프레임화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한 편의 위대한 에세이 영화의 성공은 시간에 저항하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천한 가지 방식에 달려 있다. 세헤라자드는 영화 에세이스트들이 지은 궁전에 거주한다.

    세헤라자드, 엔지니어

    따라서 에세이 영화는 유희적일 수밖에 없다. 지연에 대한 요구는 에세이 영화들을 끊임없이 그 바깥으로 밀어낸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영화는,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집중과 일관성을 꿈꾼다. 그것들이 전개되는 공간은 언제나 농밀하다. 그것들은 고착적이며 그로 인해 상찬된다. 영화 에세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유목적이며 종종 그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영화 에세이에 있어서는 산종(dissemination)이야말로 규칙이며 언제나 열려 있는 연상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이상이 된다. 영화 에세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억압시킨 것 위에서 노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규칙으로 운용되는 게임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발명해내는 일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에세이 영화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독특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것, 목적에 복무하게끔 구성되어 있는 것들을 인용하고, 표절하고, 강탈하며, 다시 정리하는 데서 전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재차 삼차 반복하는 데서 편안함을 느끼며 이로써 동일한 요소들이 새로운 배열 속에 놓이게 된다. 에세이는 탁월한 리좀적 형식이며 영원히 확장되고 발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자체의 활력이 소진되는 것 이외에는 중단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세이는 니체적 의미에서의 반추(rumination)이자, 그것이 선택한 소재들로 향하는 출입구를 증식시키려 노력하는 지성의 굽이침이다. 그것은 잉여이자, 표류이며, 파열이고, 생략이자, 돌이킴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유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감정으로 전환되고 다시 사유로 돌아가는 사유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장르들(다큐멘터리, 팸플릿, 픽션, 다이어리… 등등)과 시시덕거리긴 하지만 결코 어느 하나에 고착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미학의 영역을 넘보긴 하지만 역시 고착되진 않는다. 그것은 형식 및 내용 모두에 있어서 자유분방함 그 자체이며, “흰코끼리 예술”이 아니라 “흰개미 예술”이다. 물론 이는 마니 파버에게서 전면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파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가 단지 로렐과 하디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자. 왜냐하면 그의 말은 영화 에세이스트들에게 훨씬 더 잘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라는 허식을 향한 아무런 야심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목적도 없이 하염없이 산재(散在)시키는 비버와 노력과 같은 작업에 몰두한다. (이들의) 예술을 묘사하는 가장 포괄적인 표현은 흰개미 같다(termite-like)는 것일 터이며, 이는 특수화라는 장벽을 뚫고 길을 내는 작업처럼 여겨지며, 예술가 자신이 그의 예술이 당면한 경계들을 폐지하면서 이러한 경계들을 이후의 성취를 위한 조건들로 바꿔버린다는 것 이외엔 아무런 대상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흰개미(들)

    파버의 제언을 면밀히 살펴보자. 에세이 형식을 분석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나’(I)가 존재하지 않을 때 에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는 증거에 입각한 것이지만 논의의 장을 망쳐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는 대명사에 수반되는 자전적인 것, 일기 같은 것, 고백적인 것들이 꼭 에세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나’의 발화를 통해 드러나는 페르소나에 에세이 영화를 결부시키는 것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끝없이 개량되는 유형학 속에서 논의의 장은 무너져버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자. 이와 같은 ‘나’를 향한 기원(祈願)과 상찬에는 영화 에세이를 그것의 영예로운 문학적 친척과 분리시키길 원치 않는 무기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파버의 제언을 우리의 논의에 끌어들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그가 [에세이의] 방정식에서 ‘나’라는 항을 제거하고 대신 벌레의 본능적 에너지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본능적 에너지는 미학적 찬양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가장 인접해 있는 해충 구제업자를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에세이 영화가 결국 [‘나’와의] 볼썽사나운 관련으로부터 벗어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 속에서 발화하는 것이 1인칭 단수대명사라는 사실, 특정한 유형의 페르소나가 담론의 흔적으로서 출현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영화들 속에서는 일종의 에너지가 프레이밍, 편집 및 믹싱 작업에 부단히 관여하고 그러한 작업을 재(再)정의하며 장르라고 하는 규정적 가정들로부터 영화를 벗어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에세이 영화가 존재한다면? 영화 에세이의 실험이 스스로를 세계와 맞서게끔 하는 한 영혼의 실험인 것은 부차적으로만 그러할 따름이며 이는 적응을 강요하는 규칙들의 체계에 맞서며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의 실험이 되기 위함이다. 무한한 영혼의 빛과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의기양양한 인간의 목소리”(수전 손택)의 예시가 아니라, 실천과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필름메이커의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는 영화의 이드(Id)를 수용하는 경험으로서의 영화 에세이.

    <향기어린 악몽> (키들랏 타히믹, 1977)

    이드

    결국 우리는 영화 에세이란 하나의 영토가 아니며 영화가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대립물들의 픽션적이고 다큐멘터리적 형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르라기보다는 일종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의 환원이 불가능한 영화적 상태일 수도 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당신은 D.W. 그리피스의 <밀 사재기>(1909)를 통해 영화의 기원에서도 에세이[적 형식]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몇 년 후 그리피스는 영화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담아내는 작업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애석해하게 된다. 20년 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지나, 당신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에서 에세이의 승리를 본다. 하지만 몇 차례의 시도 이후, <열정 :돈바스 심포니>(1931)와 <레닌에 관한 세 개의 노래>(1931)에서는 스탈린주의가 그의 목을 죄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상업영화의 압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에세이는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너무 일찍, 너무 늦게>(1981),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1983) 혹은 장 뤽 고다르의 <말의 힘>(1988) 같은 영화로 몸을 숨긴 채 다시 등장한다. 혹시 이것이 극도로 서구적인 양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 순간,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7), 키들랏 타히믹의 <향기어린 악몽>(1977) 혹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2000) 같은 영화들과 더불어 아시아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멈추고자 하면 또 중동과 남미로….

    물론 이는 성급하게 말해본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남는다. 상황이 아무리 불길하다 해도, 에세이적 에너지는 가장자리에, 영화를 사로잡고 있는 ‘이드’ 속에 생생히 살아 넘치고 있다. 시대가 억압적이고 지배적 미학이 길의 정면을 가로막고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활력적으로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런 때일수록 에세이에 대해 말하기엔 적기라는 것이다. […]

    장-피에르 고랭
    캘리포니아 샌 디에고에서
    2007년 9월 11일
  • 새벽, 광주, 돌아다님

    뻐근하고 덥고 설탕이 필요한 듯 싶어서 잠깐 밖에 나갔다

    편의점에서 돼지바만 사먹고 돌아갈까 하다가, 늦은 시각이라 생각보다 안덥네, 하면서 새벽의 능평삼거리를 돌아다녔다.

    이 동네는 참 족보없다고 느끼는 게- 건물들의 나잇대가 거의 비슷비슷하다… 한 10년 내에 생긴 듯한 새것스러움.

    그리고- 성남, 판교의 도심이 커지고, 집값이 비싸지면서 이 동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곳곳이 공사판이다… 상가들도 조금 마초스러워서

    젊은 층이 주로 갈 법한 것들 보다는 고깃집, 도우미 항시대기를 붙여 둔 노래방 등이 많다…

    뭔가 점점 북적거리고자, 꿈틀꿈틀 대는 지역엔 처음 살아보는 것 같아.

    부안은 시간이 갈 수록 쇠락하는 곳이었고

    대학로는 이미 번성해 있는 곳이어서… 더 발전한다기 보다는… 조금 정체 수준이었고

    연신내도 이미 자리가 잡히고… 오래된 집들이 조금씩 빌라로 리모델링이나 하는 수준이었는데

    여기는… 지나가다가 어랏? 여긴 웬 공터가 그대로 있네?! 하는 순간

    바로 며칠 뒤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어버리는 그런 동네…

    공사차량도 낮에는 꽤나 왔다갔다 하는 것 같고- 이사 오는 집도 많고- 빌라 분양문의 현수막도 엄청많다…

    무분별한 빌라 난개발이란 타이틀로 jtbc 뉴스룸에도 나왔던 곳이니 뭐…

    이 무분별함으로 인해… 삼거리는 매일같이 눈치를 보며 끼어들기를 하고, 사람들은 또 그 사이사이로 무단횡단을 즐비하게 하긴 하는데…

    그래도- 뭔가 생기있는 곳이다, 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내일은 뭔가 더 좋아져있겠지, 하는 속물적인 기대심리가 은근히 생기기도 하고…

    한때 돈 놓고 돈 먹기를 했다던 90년대의 서울의 부동산 시장의 풍경이 이랬을까.

    시골에 살던 난 겪어본 적이 있어야지 ㅎㅎ

  • 미뤄뒀던 것들을 하기

    오전에 일어나 약간의 외주 수정 작업을 하고 나니,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 미뤄뒀던 것을 해야지?! 라고 생각만 하고, 잠을 잤다… 일어나보니 거의 저녁 5시.

    꿈 중에선 운전하다가 사고도 한번 나고, 우즈벡에 내가 다시 돌아가서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집에 어둠의 기운이 새로 생겨나 있기도 했다…

    개꿈.

    일어나서 저녁해먹기는 너무 귀찮았으나

    사먹으면 또 돈이니깐. 돈까스를 튀겨 먹었다. 역시 고기는 언제나 흡족하기만 해.

    가만히 있는데도… 뭔가 집중이 안되고… 뭐가 이리 안될까 싶어서… 뭔가 봤더니

    덥고 습해서 그런 것이었다.

    집 자체가 그리 더운집은 아닌데- 에어컨을 틀고 나니, 이전까지 느꼈던 불쾌감이 싹 걷히고… 쾌적해졌다…

    인간은 이렇게도 단순하지.

    에어컨을 틀어두고…

    미루고 미뤄뒀던

    운동화도 빨고

    사운드 장비 하나를 중고나라에 올려두고

    마트가서 멀티탭 하나를 사오고

    어도비 프로그램을 버젼업했다…

    이제 미루고 있는 것은 형광등 청소만 빼고 거의 다한 듯 싶네.

    방학이 되니, 훨씬 여유롭긴 하다만-

    왜 여유로운거지? 헉 뭐가 잘못된건가?! 하고 초조하기도 하다…. ㅎㅎ

  • 정동진도 간다~

    뜻밖의 곳에서 영화초청이 된다.

    원래 인디포럼이나 여성영화제 쪽을 예상했었는데- 그 쪽은 다 떨어지고

    지금까진 미쟝센단편영화제와 정동진독립영화제…

    정동진은 규모가 큰 곳은 아니지만

    바닷가에서 보는 야외상영, 꽤나 매력적일 것 같다…

    정동진은 한 두번정도 갔던 것 같은데…

    그게 다 스무살 언저리쯤이었으니

    감개무량 ㅎㅎ

  •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남긴 것들

    혜리 / 발악 /묨 / 방문 / 버닝브라더스

    폭발하는 황혼 / 첫눈 내리는 날 / 모놀로그 / 사창리 / 감독님 연출하지 마세요

    주우와 한별 / 마이 케이컬 러브 / 마음의 편지 / 윤리거리규칙

    고철을 위하여 / 사랑이 죄인가 / 따로 또 같이 / 나의 새 남자친구 / 나 여기 있어요

    저 사람 / 악당출현 / 씨름 / 종합보험 / 치석 / 콜

    그 냄새는 소똥냄새였어 / 기쁜 우리 젊은 밤 / 첩첩산중 / 인류의 영원한 테마

    음유시인 / 밀실 / 첩첩산중 / 텐더 앤 윗치

    장례난민 / 야간근무 / 더 헌트 / 경계 / 오제이티

    가리워진 길 / 복덕방 / 물가의 아이 / 이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 보호자 / 동백꽃이 피면 / 염색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 / 혜영 / 2박 3일

    앰부배깅 / 장롱면허 / 누렁이들 / 다희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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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결과는 꽤 의외다…

    왜… 왜죠?!

  • 고장

    푸마의 에어컨 가스가 다 새버렸는지 에어컨이 선풍기보다 못한 바람을 내뿜기 시작했다.

    차량 에어컨 없는 우즈벡에서 4년이나 살았어도… 더운 건 더운 거 였다.

    더욱이 시내도로는 그나마 창문 열고 다닌다해도, 고속도로를 창문열고 다닐 수는 없으니… 결국, 카센타로 향했다.

    컴프레셔, 밸브 등등 정확히 이름을 모르겠는 것들을 몽땅 갈면 수리비로 50만원이 나온다고 했다.

    내가 이 차를 30만원에 샀는데, 에어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니…

    그런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 싶었다.

    이 차 사고, 뒷 브레이크와 사이드 고치는데 30만원, 팬벨트 교체하는데 20만원. 에어컨 고치는데 50만원.  지금껏 거의 백만원이 소요되었다.  수리비용만.

    차를 수리 맡기고 근처 까페에 가서 이것저것 끄적이며 시간이나 때우고

    카메라나 조작해볼까, 하고 삼각대마저 함께 들고 갔다.

    심심풀이 촬영을 조금 하고… 모니터링 하려고 내 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니, 카메라가 팍 꺼졌다 켜진다.

    그리고 방금 촬영했던 파일도 날아가버리고.

    이건 가끔, 충격이 가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긴 한데, 요새들어 부쩍 횟수가 늘어진 것 같다.

    메인보드 교체 이후, 화밸도 푸르딩딩해지고..

    부랴부랴 남대문까지 가서 카메라를 맡겨보니 전원 상단부 회로 문제인 것 같다고 하며, 또 맡기고 가야한다고 한다.

    이 카메라… 140만원 주고 사서

    한달만에 셔터막 고장으로 20만원에 교체하고, 지금으로부터 2주전에 메인보드 고장나서 40만원에 교체했는데

    상단 회로부 고장은 또 얼마가 소요될지….

    집에 왔다.

    오랜만에 청소를 하는데, 15만원 쯤 주고 산 중고 냉장고 바닥에 또 물이 고여 있다.

    냉장고 사자마자 나타난 현상이라, 판매자 분이 직접 오셔서, 냉장고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라며 대강 고쳐주고 가셨는데..

    그 이후, 물이 잠깐 안 새다가… 또 근래에 다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지도 않다…  샌 물이 멀티탭 쪽에 닿는 것이 불안하게 만든다.

    또 책상 위 샤오미 보조배터리도 고장이 나 있고…

    쌰구려 가성비 같은거나 따지니, 주변에 고장난 것만 점점 쌓여가는 것 같다.

    괜시리 다운되게 만드는 인스턴트 일상

  • 벌써 1학기가

    학교에 새로 들어갔다 해봤자, 4학기 뿐이다.

    2년이면 끝나버릴 학사일정의 1/4 이 휙 지나버렸다.

    그 사이, 학교에서 배운 것들로 영화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내가, 바로 좋은 연출가가 나설 수 있을만큼 준비돼 있을까, 에 대한 질문엔 주저하게 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됐겠지, 라고 생각했던 지난 어떤 시기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또 다급하게 지나가버릴 남은 시간들을 생각하니 괜시리 초조해지기도 한다.

    학교 때문에 능평리로 이사온 지 제법 한달이 차 가는 시점에

    오늘에서야 제대로 된 밥을 차려먹었다…

    예전에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연신내에서 줄기차게 해먹었을때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곧 방학일테니… 이런 시간도 좀 더 많아질테다…

    초조함 속에서도 꿋꿋이 안정된 여건을 만들어내어

    다져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오랜 마음에 끄적여보았다.

    이제 내일 발표 2개니까- 그거 준비하러 가야지.

  • 전주영화제 참관기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5년도 더 된 때에 전주영화제가 처음 시작되었다. 고등학생인 나는 전주에서 무슨 영화제, 지역에서 뭔가라도 해볼라고 아둥바둥 예산만 쓰다가 망하겠군. 이라며 시크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 영향 때문만은 아니고 어쨌든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영화지망생 노릇을 하면서도 전주영화제는 한번도 못갔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화인들이 눈도 배도 푸짐하게 호강시키는 영화제라며 좋아들 하고, 전주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고향집이 아직 있는지라 남들보다 접근성도 유리한데도 안갔던 것은 지역영화제까지 찾아갈만한 열정이 없어서, 였다. 사실 전주영화제 뿐 아니라 부산, 제천 등등도 찾아갔던 적이 없었다. 영화제라고 하면 뭔가 버라이어티한 축제 한 마당이 벌어질 것 같지만 사실상 어두컴컴한 극장을 왔다리 갔다리 할 뿐인데 왜 거기까지 찾아가나? 뭐 좋은 영화면 어떻게든 나중에 찾아볼 수 있겠지? 게다가 교통비, 숙박비, 밥값까지 부담되니… 하는 못되고 게으른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거기까지가 전사이고, 올해 처음으로 전주영화제에 갔다. 전주영화제가 매해 조금씩 이상해지기도 하고, 괜찮아지기도 하고 그렇다던데 난 처음 간 지라 대조군이 없었고 국제영화제의 위상에 걸맞게 영화 프로그램이 방대해서 선택의 폭이 넓은 것에 꽤 놀랐다. 서울에서 하는 미장센, 아시아나, 여성영화제 등은 시간대별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아야 둘 중 택 1 정도였는데.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영화들이 전주 밑반찬처럼 풍성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여기 모여 있었다. 영화의 거리에 자리한 CGV, 메가박스, 전주시네마타운 이 세 극장에서 주로 영화를 봤는데 프랜차이즈 극장이 아니라서 호기심을 자아냈던 전주시네마타운의 상영환경이 너무 안좋아 실망스러웠다. 낡은 프로젝터에 깨지는 사운드로 보고 있으려니 먼 길 달려 온 영화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전주영화제 기간 동 총 5편을 예매해 보았는데 그 중 익스팬디드 시네마 단편선이 가장 전주영화제 스럽다라는 생각이 든다. 실험적인 작품들이 모여있었는데 단편 하나는 집 안에 있는 고양이만 계속 찍어두었다. 저것도 디지털 영화의 얻어내기의 일부인가 보다. 라며 자세히 보다보니 이걸 왜 유투브가 아닌 극장에서 봐야하나 라는 생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막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의 정적인 모습을 회화처럼 담은 또 하나의 에세이 영화. 뭔가 감흥이 밀려오고 있었으나 살짝 졸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거칠게 뒤 흔든 또 한편의 영화와 그 이후에는 다양한 의미를 삽입할 수도 있을 것도 같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도 같은 도전적인 생뚱맞은 서사의 극영화가 한편 나오고, 마지막엔 3D 극영화인데 내러티브는 뻔한 영화가 하나 나왔다.

    각 단편들이 틀어져 나올 때, 난 언제나 뭔가 준비를 하도 보려고 한다. 이번 영화는 의미일까, 감흥일까? 고양이, 사막 풍경, 뒤흔드는 카메라가 나올 때는 의미는 포기하고 내가 느끼는 감흥에 집중해야 할 것만 같았고- 명백한 극영화가 나올 때는 의미에 조금 더 집중하려고 했다. 사실 감흥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완전히 배제될 순 없으며, 의미를 주로 고민한다고 해서 감흥이 덜 한 것은 아닌데도. 내 스스로 그렇게 프레이밍을 하고 노력해야만 보일 것만 같고, 누군가 이 영화 좋았어? 라고 물었을때 그 감상을 언어화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나? 좋았나? 안 좋았나? 라는 대답에 뭔가 느낌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여기저기 뒤적거려보아도 뭐 하나 또렷하게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남은 것들은 있다. 고양이를 영화라고 우기는 창작자의 고집, 사막 위의 두 인물이 풍기는 고요, 거칠게 흔들어 버리는 카메라를 우직하게 담고있는 스크린, 생뚱맞게 목 잘려버리는 캐릭터가 유발하는 웃음, 3D 매체를 활용하려는 소품배치. 이것들은 찰라보다 조금만 더 긴 인상들이지만 그렇게 남은 것들이 앞으로 조합되어 내 안의 무언가에 어떤 영향이라도 주지 않을까?

    영화의 감상을 표현할 때, 재밌었다/재미없었다. 라고만 표현하게 되는데, 한국어 또는 언어 자체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관객이 영화라는 총체를 재밌었다, 재미없었다 라고 응축하는 것 또한 감상의 자유이지만, 어떤 영화에 있어선 다른 목적을 갖고 접근하고 또 다른 것을 얻어낼 수 있지도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영화제의 영화들은 그런 이상한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이 전주영화제를 개최해주는(?) CGV나 메가박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이른 바 예술이네 뭐니 하는 이상한 영화들을 이렇게 전주영화제 기간 동안 할당해서 틀어주니깐, 평소엔 안 틀어줘도 괜찮지?! 하는 것은 아닐지. 이런 풍성한 영화들을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가장 열악했던 시설의 극장이 프랜차이즈 극장이 아니었다는 현실 또한 잔인하다 생각했다.

  • 마리 스테판(에릭 로메르 편집기사) 마스터 클래스

    ● 에릭 로메르 독립 프로덕션의 경제성

    프랑스 뉴웨이브과 각자의 저변을 넓혀갈 때 에릭 로메느는 오히려 독립 제작규모로 돌아섰는데, 그는 자신의 영화가 어느 정도 규모로 찍어야 손해를 보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주 관객층이 대학생 젊은층인 것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일례로 <여름이야기>는 총 5명의 스탭으로 구성되어있었는 촬영팀 2, 사운드1, 제작1, 연출1 명 정도의 단촐한 구성이었고 해당 스탭과 배우들이 한 집에 기거하며, 로케이션 지역의 변덕스러운 날씨 변동에 순발력을 발휘해가며 촬영을 진행하였다.
    <나무, 시장, 미디어테크> 에서는 더 나아가 각자의 스탭들이 다른 생계일을 하는 와중, 중간 휴게시간 및 퇴근 이후에 모여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 에릭 로메르의 프로 프로덕션

    에릭로메르는 시나리오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일단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하고 나서, 로케이션을 선정하면 로케이션을 반영한 시나리오 수정을 한번 진행하고, 캐스팅을 확정하면 배우의 어투를 비롯한 캐릭터를 반영한 수정을 다시 한번 진행한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확정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시나리오의 콤마 하나도 바꾸지 않는다. 즉흥연기 스타일이 아니다.

    ● 에릭 로메르 “심플함. 리얼함. 거리감”

    주를 이루는 인물 간 대화에서 카메라 또한 숏을 잘게 쪼개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인물의 동선으로 주가 되는 인물과 그렇지 않는 인물의 블로킹을 잘 계획하기 때문. <여름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센터에 서있으면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을 빙빙 돌면서 벌어지는 대화가 꽤 나오는데 이로 인해 이 영화가 누구의 이야기인지가 명확해지면서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주요 공간에서 관습적으로 대화가 종료되면 롱샷으로 빠지곤 하는데, 에릭 로메르는 긴장감의 유지를 위해서 그것을 지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