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합숙] 아리랑요양원

승합차는 타쉬켄트를 벗어난 지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마을길로 들어섰다. 마을입구 부근에는 당나귀들이 무심하게 풀을 뜯고 있고, 집 앞에 나온 몇몇 아이들은 우리 일행이 탄 차를 빤히 쳐다봤다. 번잡한 타쉬켄트와 달리 무척이나 아담한 마을이었다. 우리 몇몇은 우르겐치나 안디잔 같은 소도시의 도심이 이럴거라며 농을 건네기도 하고, 몇몇은 이런 아늑한 분위기만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다들 합숙훈련 때문에 타쉬켄트에만 있다 보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산함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꺾어 돌아서니 한글로 된 현판이 떡 하니 걸려 있는 현대식 건물이 나타났다. ‘아리랑 요양원’ 이런 시골에 갑자기 한글로 된 현판이 걸려 있는 게 조금 이질적이기도 했지만, 머리만 아픈 끼릴문자가 아닌 한글로 된 현판이라서 반갑기 그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다렸다는 듯 박수부터 치며 환영해주셨다. 정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똑같아 보였지만 입에서 먼저 나오는 말씀은 러시아어. 그리고 드문드문 북한말과 흡사한 한국어가 나왔다. 신기하기부터 했다. 갑자기 ‘우리 할머니’가 그 어렵다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내레 ~~하오’ 라고 하시니 그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여기 우즈벡에 오시게 됐느냐고 묻자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에 살았었다면서 이야기를 꺼내셨다.

고려인 1세대. 연해주에 있다가 러시아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다고만 들었는데, 왜 그렇게 한건지, 어떻게 한 지는 모르고 있었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러일전쟁 당시 연해주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가담할까봐 열차에 무작정 태워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죽은 사람이 반, 산 사람이 반이라고 하셨다. 당시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기억이 할머니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겨졌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내게 어깨 마사지를 부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우리 고려인들이 부지런해. 우리 손으로 땅 일구고 다 해서 먹고 살았오. 우즈벡 사람들도 선량해서 우리 고려 사람들 다 받아줬지오. 그리고 꽉꽉! 꽉꽉! 주물루소!” 호탕하신 할머니! 할머니와 한국 동요 등을 함께 부르고 나니 오전 시간이 금새 지나갔다.
점심식사는 우리가 직접 준비한 것들이었다. 감자수제비, 호박전, 장조림 등 나름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이 드시기 편한 걸로 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다들 잘 먹었다며 거푸 인사를 하셨다. 사실 전 날 60인분의 음식준비를 미리 하느라 다들 새벽 늦게 자고, 손도 다치고 고생을 좀 했었는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노래와 춤 위주로 간단하게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다. 생소한 노래를 불러드릴 때는 조금 서먹서먹 하신 것 같더니 갖은 노래와 춤을 다 동원하다보니 게임을 진행하지 않아도 할머니, 할어버지들이 알아서 나오셔서 팔다리를 흔드시곤 하셨다. 어느 곳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다 똑같은 것 같다. 뭔들 해도 귀엽게 봐주시고, 호탕하게 웃고 즐기시는 모습을 보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고려인이든, 한국인이든, 우즈벡인이든 다들 함께하고자만 한다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란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다. 오늘 처음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지만 서로 어울리려고 노력하니 금새 웃고 춤추게 되지 않는가. 사실 우즈벡과 우즈벡 사람들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들어 오면서 과연 우즈벡 현지 사람들을 어떻게 지내야 좋을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되레 안 좋은 일이라도 겪을까봐 걱정하면서 오히려 자신감만 잃기도 했다. 물론 안전에는 유의해야 하지만 걱정이 앞서면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신나게 웃고 즐기는 시간을 보내고 나자 어느덧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 볼에 뽀뽀를 해주시면서 “자주 자주 놀러오라우” 하고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 호탕한 웃음 굳어지지 않게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데로 집에 전화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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