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학기] 첫 만남 (201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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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프로젝터는 있지만 컴퓨터는 없는 교실에서 첫 컴퓨터 수업을 진행하라고 했다. 거기다가 커리큘럼상 첫 수업 주제는 MS Windows. 그렇다면 무조건 말로 다 설명을 해야했다. 실습도 못해보니 한시간 이십분이면 굉장히 방대한 양을 해야만 하리라. 도대체 무얼 보여주고, 무얼 설명한단 말인가. 그것도 MS Windows에 대해서. 딱히 기발한 게 떠오르지도 않고, 현지어 및 영어로 설명하기에는 실력이 너무 모자란지라 MS Windows에 하드웨어 요약정보를 추가했다. CPU, RAM, HDD 등등의 것. 그리고 윈도우는 윈도우 역사를 간단하게 말하고, 디스크 조각모음 같은 기능을 추가적으로 프레젠테이션에 배치했다. 우즈벡어로 대본을 준비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첫 수업을 프레젠테이션으로 준비하라고 한 걸로 보아 현지 선생님들이 함께 참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맞지도 않는 문법으로 우즈벡어를 더듬더듬 하는 것보단 조금은 나은 영어로 진행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현지 선생님들이 영어를 그리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들에게 시범을 보이자고 약속을 한 적은 없으니깐, 학생들에게만 유용한 정보면 된다는 나름의 계산이었고, 조금 남은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영작 대본으르 준비하는데, 오랜만에 영작을 하려니깐 왜 이렇게 어순이 해깔리고 어휘가 생각이 안나던지. 자꾸 영작을 써보려고 하면 우즈벡 단어가 먼저 떠오르고 영단어는 저 뒤에 숨어있다가 겨우 기어나오기 일쑤였다. 구글 번역기의 힘도 빌리고, 컴퓨터 사전의 힘을 빌려서 겨우 영작을 했다. 그래도 우작은 작문을 해놓고 나서 문장이 맞는지 틀린지 확신이 없어서 항상 답답했는데 영작은 문법이 맞는지 여부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수능영어, 내신문법이 이럴 때는 유용한가보다 했다.

처음에는 영작을 해놓고 다 외워버릴까 싶었는데, 써놓고 보니 분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은 적었다. 거기다가 위의 프레젠테이션을 나에게 순순히 맡겨줄 지 확신이 없었다. 기관에서 말을 계속 바꿔왔던 것이다. 바로 전에도 수업계획에 관한 프레젠티이션을 준비하라고 하여 약 열흘간 40장에 이르는 프레젠티이션을 준비해갔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나를 똥개훈련 시키는 것인가 싶었지만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 순순히 정규수업만 내게 주어진다면 뭐 큰 문제는 아니니깐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순순히 내게 시간을 할당해줄지, 아닐지 의심과 함께 학교로 출발했다.

다른 수업들도 오늘이 첫날이어서 그런지 카페드라 쪽이 북적거렸다. 학생들은 반이 배정되길 기다리고 있었고, 컴퓨터 선생님들도 반편성에 관련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우선 뭔가 정해지면 말해주겠지 해서 기다리고 있어봤다. 선생님들이 학생들 몇몇을 부르고 컴퓨터실로 데려갔다. 다른 선생님도 그랬고, 또 다른 선생님도…. 어? 그렇게 하고 나니깐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다들 각각 교실에 들어가버렸다. 그러면 내가 맡을 학생들은 다 어디간거지? Abduqodir한테 물으니 Abduqodir는 확실하게 대답은 해주지 않고 나보고 따라오라한다. 갔더니 Dilfuja의 컴퓨터 수업. Abduqodir는 Dilfuja에게 오늘 이 수업에 나를 참관시키는 게 어떻냐고 물었고 Dilfuja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Dilfuja의 컴퓨터 수업을 참관하라고 하고 Abduqodir 는 가버렸다.

힘이 쭈욱- 빠지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3일전에는 월요일 첫 번째 시간과 세 번째 시간에 수업이 있으니 컴퓨터 수업을 준비하라고 했건만 또 참관이었다. 저번 학기가 한달 남았을 때 참관은 충분히 했다. 그때 참관 경험이 그리 좋은 경험만은 아니었던 것이, 갑자기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아무말도 없이 나가버리면(한번 나가서 30분동안 안돌아오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학생들한테 뭘 하지도 못하고 그냥 투명인간처럼 앉아있곤 하기 일쑤였고, 딱히 현지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는 걸 경청하려 하려고 해도 러시아어로 Delphi 수업을 해버리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맡기로 했다던 학생들은 어디에 있는건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어떻게 해야하나. 하면서 1빠라 수업시간이 지났다.

수업이 끝나고 Dilfuja에게 내가 맡기로 했다던 수업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방금 그 반이 다음주부터 내가 맡을 그룹이라고 이야기했다. 큰 믿음은 가지 않지만 그럼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3번째 빠라는 1시부터 시작이니 약 2시간이 좀 넘게 시간이 남아있었다. 밖에나가 좀 걷다 와야겠다 싶었다. 자주가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근처 거리를 좀 걸었다. 그래도 갑갑한 마음은 쉽게 풀리질 않았다. 도대체 언제 수업이 안정될 건가, 뭘 어떻게 해야 최선인건가. 차라리 정규수업 따위는 다 포기하고 방과 후 수업만 진행하는 게 어떤가 뭐 이런저런 잡생각만 왔다리 갔다리 했다. 그래도 3번째 빠라 수업이 있다고 했으니… 하면서 학교로 향했다.
Shoira 가 복도에 있는 이 9명의 학생들이 내 학생들이라 한다. 그런데 남는 컴퓨터실이 없다고 한다. 내가 수업하기로 했다던 한국어 센터에 있는 공간은 준비가 됐냐고 묻는다. 그 곳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나는 Abduqodir 가 말했던 빔프로젝터가 있는 강의실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Shoira가 좋다고 했다. 학생들이 조금은 내게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면서 자리에 앉는다. 나는 간단한 내 소개를 하고, 준비했던 영어 대본을 읽었다. 학생들이 영어를 잘 하긴 하지만, 발음이 미국식 발음이 아닌 영국식에 가까운 우즈벡식 발음인지라 잘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MS Windows와 Hard Ware에 관한 정보전달을 포기하고, 수업계획과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을 조금 갖았다. 뭐 늘 질문받던 것, 한국은 어떠냐, 나이는 몇 살이냐, 우즈벡이 좋냐 등등의 것.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프로그램이 제일 재밌냐, 어디 출신이냐, 기숙사에 사냐 등등의 것을 물었다. 그리고 약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수업 끝냈다.

기뻤다.

제대로 된 수업을 시작하진 못했지만 나와 함께하는 아이들을 만나본 것이다.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어쨌든 첫 만남을 가졌다는 것 그 자체가, 내겐 기뻤다. 기관 파견 4개월만에 갖은 첫 만남이었으니 내겐 더 없이 소중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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