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여기] 요약본

一. 철학 Ⅰ

철학적 기반에 대하여
1. 동양철학의 정초
동양철학에서 철학적 기반은 내가 사는 현실,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만으로 현존실재(現存實在) 하는 자리. 현금찰나(現今刹那) 의 위치함 속에서, 실존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실존의 주체는 모든 존재형식의 역(易)의 위치에 섰다.

2.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시공간도 없고 오직 나만 있을 뿐이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공간개념이 형성된다. 또한 공간으로부터 시간 개념이 생겨난다. 내 의식속에서는 시공간이 분리된 상태로 인식되며, 존재자의 자리에서는 시공간이 없는 물(物)은 무물(無物)이며 무의 자리에서 시공간이 포함시키는 것이 파악이다. 시공간이 함게 있는 자리를 역(易)에서 말하면 시중이라고 하며 노자에서는 무명(無名)이라 한다. 물이 아닌 무물의 존재를 도(道) 또는 박(樸)이라 한다. 시중의 자리가 동약철학의 기반이요 도와 박이 다름 아닌 진리의 기반.

3. 時中과 나
시중(時中)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물(物)이 존재함으로 시공이 있고, 시공이 있음으로 하여 물이 있다. 공간은 물(物)이 앉은 상(象)이요, 시간은 물(物)이 옮기는 상(象)으로, 시간과 공간은 물의 존재 형식이다. 그렇기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의 위치로 내가 서있는 자리이며 내 존재가 곧 시중(時中)이며 내 앞에 마주치는 것 모두가 시중(時中)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현재 위치의 실존을 보지않고 있어 자기 상실에 이를 수 있으니 상실을 벗어나 오늘을 살기 위해 실존의 자각을 위한 것이 바로 동양철학적 기반이다.

4. 易과 시0․공간
역(易)은 변화(變化)라는 의미. 변화는 시공간적 의미로, 시공간상에서 하는 존재 파악이 변화이다. 역은 존재 형식을 말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며 이런 형식속에 물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괘(卦)와 효(爻)다. 괘효상(卦爻上)에서 물상(物象)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주역(周易)의 실질내용이다. 시공간의 철학이 주역에서 64괘와 384효로 전개되는데 이 전개는 괘와 효로만 끝나기 보다 마지막 괘를 미제(未濟)라 하여 무한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역(易)이 가지는 생생불이(生生不已)의 변화(變化)의 철학이다.
생명은 물상(物象)을 빌려 존재하지만 물상에서는 역(易)으로 하여금 변화를 또 다른 생명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변화의 생명을 기(氣)라고 한다. 기(氣)철학은 생명을 문제 삼고 있다.

5. 乾坤과 陰陽
태초(太初)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혼돈(混沌)만이 있었다. 반고씨(盤古氏)가 혼돈을 둘로 갈라 공간(空間)을 만들어 그 안에 존재자를 있게 하였다. 공간의 벽을 하늘과 땅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있게 하는 존재공간이다. 주역은 이를 건곤(乾坤)이라 하였다. 건곤은 시간을 만들어내고 시간과 공간은 함께하고 있고 또한 건곤은 시공간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인식세계는 시공간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그 인식한 내용도 달라진다. 물상(物象)은 변화(變化)인데, 물상은 존재의 공간적 인식내용이요, 변화는 존재의 시간적 인식내용이다. 이 두가지 인식 내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역(易)의 건곤(乾坤)이요, 음양(陰陽)이다. 음양은 물상이요 변화이며 또한 도(道)이다. 역에서 도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시공간의 존재형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건곤이요. ­­, ― 로 기호화하여 음양이다. 음양은 변화(變化)를 공간화한 것이요 그러므로 물상(物象)이요 시간을 요구한다. 음양의 기호로 나타내지는 역의 괘(卦)와 효(爻)는 시계의 자판과 같은데, 괘효는 물상이요, 그 물상 속에서 이해되는 것은 변화이다. 그렇기에 음양은 바로 건곤(乾坤)이기도 하다. 건곤(乾坤)을 천지라 할 때, 음양의 물상(物象)적 파악이요, 건곤(乾坤)을 음양(陰陽)이라 할 때에는 물상의 시간적 파악, 곧 변화(變化)이다. 그러므로 건곤은 모든 존재자의 형식으로 시공간과 함께 하면서도 인식상에서는 시간은 공간과 분리되어 변화로, 공간은 시간과 분리되어 물상으로 파악된다. 이 분리, 파악되는 시공간의 연계속에서 존재자를 새롭게 파악하려는 것이 역(易)의 괘효(卦爻)이다. 그리고 거기서 파악되는 존재가 다름아닌 생명(生命)으로 살아있음의 존재자이다.

6. 復과 始終
복(復)은 무명(無名)의 자리로 유(有)도 아니요, 비유(非有)도 아니지만 유무(有無)가 그로부터 나오고, 동(動)도 비동(非動)도 아니나 동정(動靜)이 그로부터 나오고, 시(始)도 종(終)도 아니나 시종(始終)이 그로부터 갈라진다. 복(復)의 자리에 있는 것을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 하며 음양(陰陽)으로 말하면 화(和), 묘(妙),도(道)라 할 수 있다. 천지지심으로 봄으로써 모든 존재현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복(復)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과 물(物)의 마음이 교감(交感)하는 자리이며 의 마음으로 봄으로 해서 존재현상을 알게 하며 현상 너머를 볼 수 있게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1. 시간과 공간
공간(空間)은 물상과 물상 사이를 말한다. 사이(空間)가 있기에 현존하는 상이 존재한다. 공간은 물상을 문제삼는데서 생겨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상만이요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물상(物象)만이 있을 뿐이다. 있다면 물상의 존재 모습이요, 그러한 존재형식이다.

2. 존재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상(物象)이 있을 뿐이다. 물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생겨난다. 물상의 형상을 규정하여 알게하는 것이 공간이고 변화를 규정함으로써 알게 하는 것이 시간개념이다.
① 객관적 존재 현상: 시공간은 존재의 형식이고, 물상이 존재이지만, 물상은 의식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없다. 객관적 존재 현상이란 시간과 공간이 대상이 아닌 대상자체로 마주 서는 의식 현상을 말하며 이게 바로 물상(物象)이다. 이렇게 마주 서는 일련의 과정을 파악이라 하며, 파악된 존재 현상 속에서 물상의 존재형식으로 문제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② 인식된 시간과 공간: 인식되는 시간과 공간은 일정하기도하고, 상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특정하게 어떤 것을 꼬집어 절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라는 속에 상(象)을 가둘 필연성은 없다. 일정성(一定性)으로 파악될 필요도 있지만, 현존실재(現存實在)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식이라 하여도 주체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3. 시․공간의 비분리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고 있는 비분리성(非分離性)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분리성에서는 물상(物象)의 역(易)을 다룬다는 것이 기반한다. 시간과 공간은 물상(物象)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기에 그러한 비분리성이 성립한다.

4. 시계와 시간
시간과 공간은 시계와 잣대라는 정의함 속에 있지만, 이런 정의의 개념속에 사실이 묻혀질 수 있다. 올바른 인간의 이해에 있기 위해서는 개념으로 파악하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의 도구임을 인식하고 실제의 물상(物象)을 보기 위해서 정의를 해체(解體)해야 되고 새로운 정의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5. 有와 無
유(有)와 무(無)는 존재개념이 아닌 인식(認識)의 개념이다. 우리의 인식 기능이 완벽할 수 있다면 유․무 개념이 그대로 존재개념이 될 수 있지만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식(認識)의 개념에서 멈춘다 동양에서 존재부정의 무(無)개념은 없다. 무(無)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존재 또는 인식내용이 없음으로의 무일 뿐이다.

6. 妙와 徼
노자는 묘(妙)를 무욕(無欲)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 하였고, 요(徼)는 유욕(有欲)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 하였다. 무욕(無欲) 앞에는 상(象)을 가지지 못한 존재자가 마주 서는 것이고, 유욕(有欲) 앞에는 상(象)을 가진 존재자가 마주 선다. 묘(妙)는 무명(無名)에 해당하고 요(徼)는 유명(有名)에 해당한다. 무명은 현존실재(現存實在)요 유명이 우리 앞에 마주 서는 존재 현상으로 만물(萬物)이다.
묘(妙)는 무욕(無慾)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마주 서는 것은 요(徼)일 뿐, 묘는 마주 설 수가 없는 것이, 무욕이란 실질적으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념(思念)자체의 단절 속에서 마주 선다는 대상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무욕이관기묘(無慾以觀其妙)라고 하여 묘(妙)란 무욕(無欲) 앞에 마주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무명과 동일 개념은 아니다. 역에서 묘(妙)는 복(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7. 色과 象
색(色)은 상(象)이라는 말이요 구별이라는 말이다. 상을 구별로써 존재하는 것을 물(物)이라고 한다. 상(象)이 있어야 구별이 생기고 상을 가지는 구별이 명(名)이다. 노자는 명(名)이 있어 물(物)이 있게 되었다고 함으로 노자의 명(名)은 상(象)을 이루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명(名)은 곧 색상(色象)이라 해도 좋다. 색(色)은 구별이요 상(象)은 모양이다. 색(色)과 상(象)은 같이 있는 것으로, 물상의 근거가 된다 하여 묘(妙)라고도 할 수 있다.

8. 태극도(太極圖)
주림계(周痳溪)의 태극도(太極圖)는 다섯 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는 음양(陰陽), 그리고 세 번째는 오행(五行)을 그려놓은 그림이다. 동일한 그림 첫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그림은 모두 따로 떨어져 있는데 아직도 미해결된 문제가 많다. 태극도는 다섯 개의 그림이 모두 우리 앞에 마주 서는 존재자, 즉 물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第一圖는 무물지상(無物之象)을, 제이도(第二圖)는 물상(物象)을 그리고 생멸현상(生滅現象)을, 제사도(第四圖)는 물상이 가지는 존재형식으로 시공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오도(第五圖)는 만물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상에 있으며 그러므로 변화(變化)하고 그 변화는 것이 물상으로 그 물상은 실재를 존재 바탕으로 한다는 설명이 된다.

易論的 사유에 대하여
1. 陰陽論的 사유체계
역론(易論)에서 드러나는 기본적인 사유체계는 현상(現象)론에 있으며, “변화의 존재” 로서 현상을 문제삼는다. 역(易)은 철저히 현상(現象)을 다루고 있는 학(學)이지만,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현상 즉 변화자체의 문제보다 그 변화를 어떻게 우리의 인식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가가 핵심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역론의 사유체계(思惟體系)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다름 아닌 ­­,―의 두 기호로 드러내지는 음양론적 사유체계이다. 음양으로 명칭되는 ­­,― 의 두 기호는 변화를 드러내는 기호요, 그러므로 음양은 변화가 그 의미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체인 만큼 음양이 변화 자체는 아니며, 공간적 표현의 기호 명칭인 만큼 공간이란 사유를 낳게 하며 그 의미는 공간적이다. 여기에 음양의 기호가 시공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시․공간의 좌표와 存在현상(象)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의 좌표 위에 있다.” 이것이 역론(易論)에서 내리고 있는 존재정의요, 그 존재가 다름 아닌 변화(變化)다. 변화만이 실재(實在)하는 존재현상이며 이러한 존재현상을 상(象)이라 한다. 그리고 그 상(象)의 존재형식이 바로 음양(陰陽)이요, 음양으로 시송간의 좌표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 괘효(卦爻)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괘효상에 시․공간이 있으며 그 시․공간 위에 상(象)을 잡아내고자 하는 것이 역론이다.
괘효는 시공간의 좌표이지만 실제로는 공간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의 세계를 뛰어넘으려 하는 것이 동양사상의 궁극이다. 그러나 표현세계는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표현의 요구성이 있다. 그런 요구성 아래 나온 것이 역론이고 음양(陰陽)의 괘효(卦爻)이다.

3. 표현의 세계와 의미
역론(易論)에서 표현의 세계는 괘효(卦爻)이며 괘효에 붙여진 말이 담고 있는 의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역론이 가지는 기본적인 사유의 틀은 음양(陰陽)이요, 그러므로 음양론은 사유체계가 역(易)이 가지는 표현의 세계이다. 입상(立像), 설괘(設卦), 계사(繫辭)가 역(易)의 내용으로 구체화 해보자면 입상은 변화를 음양기호로, 설괘는 다시 입상을 구체화 시킨 것 그리고 계사는 설괘를 다시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체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표현의 구체화시킨 것인데 표현이 구체화 될수록 인식은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화․명료성의 이름아래 사물의 실체를 한정하고 해석에 국한될 수 있다. 이것이 역론이 갖는 한계로 의미가 넓어지고 풍부해짐을 표현함이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사실의 세계와 마주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로 진정한 동양철학이다.

4. 표현의 세계와 인식
표현의 세계는 표현의 대상 곧 사실의 세계만이 아닌 시공간과 함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의 세계상에서만 공간이 문제되는 것이요, 그 표현의 대상인 사실의 세계에서는 공간만을 문제삼을 수는 없으며 공간은 시간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의 세계와는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화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마주 세울 수 없고, 문제 삼을 수 없기에 표현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실재(實在)는 우리 앞에 마주한 존재현상과 다르며 알수 없고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표현의 세계가 배후 실재를 이탈함을 견제해야 한다.

5. 표현 밖의 세계와 인식
표현밖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하지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재 위에서 문제 되는 것은 그 실재가 문제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앎의 세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간에 그 앎이 한가지 일정형태로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없고, 절대적인 앎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앎의 요구는 실재 앞에 다가서려는 것이 아니라 앎의 세계를 확충하고 새롭게 하는 데 있다.

6. 앎의 세계
앎의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이 도(道)요, 자연(自然)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외에 우리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도(道)는 앎의 세계 뒤에서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는 하나 도(道)를 앎은 아니다. 역론(易論)의 요구는 변화이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하여 더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二. 철학 Ⅱ

道에 대하여
1. 道와 器
존재자의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이 도(道)와 기(器)다. 역(易)에서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의 세계를 기(器)라고 한다. 도와 기는 노자에게는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이다. 상(象)을 가지는 것은 물(物)이다. 역(易)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물(非物)이 도(道)임 그리고 물(物)이 기(器)임. 이것은 동의어일 뿐이지 성격규정까지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有名과 無名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은 무(無)․유(有)개념과 등치개념으로 존재개념이다. 동양에서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무(無)의 개념은 없다. 다만 인식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노자는 이 무(無)를 도(道)라 하였는데 이 무(無)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될 수 없음의 무(無)를 뜻함이다.

3. 東洋에서의 ○(圓)
○는 동양에서 도(道)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많이 그려지는데 이것은 문자의 한계를 간파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문자의 한계를 그림이 넘어서게 해 주는 것은 아니며, 문자와 그림의 상호극복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는 원(圓)으로 보느냐, 공(空)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원이라 봄은 원주가 끊긴데가 없어 시종(始終)이 없으니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고, 공(空)이라 함은 무(無)를 드러낸 것으로 선(線)안의 공백(空白)을 문제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시무종은 시간이고 무는 공간으로 하나의 선분을 통해 시공간이 함께하는 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는 유교에서는 태극(太極)이요, 노자에게는 무(無)로 무극(無極)이 된다. 그러나 ○이 시공간이 함께하는 자리라면 무극이요 태극일 수는 없다. ○라는 그림으로 하여금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다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夷․希․微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 무한한 형상(形象)의 세계를 이(夷)라고 하고, 들리지 않는 무한한 소리의 세계를 희(希)라고 하며, 잡히지 않는 무한한 세계를 미(微)라고 한다. 이(夷)․희(希)․미(微)는 무한한 존재자의 세계를 말한다. 우리의 오감으로 보는 것은 위치에 따라 상대적이다. 무한히 달라지는 상(象)의 모습은 무한자(無限者)이다. 이․희․미의 개념은 무한자속에서 유한자를 만들어 갈수 있게 한다. 이 만들어 가는 일련의 작업을 앎이라 하고, 앎의 지평을 끊없이 넓혀가는 과정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5. 破와 覺

파(破)는 깨는(碎) 것이고, 각(覺)은 깨는(開眼)것이다. 깨는 것은 파요, 열리는 것은 각이다. 파와 각은 새로운 세상과 마주 섬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한 번 마주서는 것이 아니라 날로 거듭되면서 있다. 그러므로 거듭 깨야만 그 새로운 세계와 마주 설 수 있다.

6. 禪
선(禪)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소요유가 선(禪)의 세계다. 선은 내앞에 마주 서는 현전(現前實在), 그 현전실재와 함께 하는 마음을 말한다. 선의 마음은 현금(現今)속에 살아 있음을 말한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는 것은 번뇌(煩惱)를 안겨다 준다. 염(念)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고 머무른 마음이 상(想)으로 여기서 생겨난 사실이 관념을 가리운다. 무념무상(無念無想)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지 말고 살아있게 해야 한다.

理氣에 대하여
1. 無極과 太極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은 동일개념은 아니지만 별개로 존재하는 개념들은 아니다. 음양이 태극과 동일 개념이 아닌것과 비유된다. 주자의 무극즉태극(無極卽太極)은 무극과 태극이 선후개념이 아니라는데 의미를 집중해야 한다. 무극과 태극이 동일개념이 아닌데 있어서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 견해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의미파악이다.

2. 理와 氣
존재자의 세계를 앎의 지평과는 상관없이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이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형이상(形而上)과 도(道)를 이(理)의 개념으로 치환(置換)시키고, 형이하자(形而理下者)와 기(器)를 기(氣) 개념으로 치환시킴으로서 물(物)의 세계를 전연 달리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철학이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유(有)의 철학으로 유(有)의 세계를 이원(二元)구조로 이해해 들어가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는
유(有)개념조차 달라지며, 성리학의 이(理) 개념은 태허(太虛)도 무(無)도 아니다. 그것은 인식범주 안에 들어온 유(有)의 세계를 기(氣)와 더불어 이원구조로 파악하는 해석학적 존재개념일 뿐이다.

3.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이발(理發)이 퇴계(退溪)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라면, 기발(氣發)은 율곡(栗谷)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율곡은 논리적 엄정성과 객관적 사실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면, 퇴계는 모든 객관적 사실도 인간 앞에 마주 서야만 의미가 있으며 논리도 인간에게서 주어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도덕적 엄정성이 그 철학의 기반이 된다고 하겠다. 율곡의 기발은 사단(四端)이 정(情)이라는 데 있고, 퇴계의 이발은 사단이 순선무악(純善無惡)이라는 데 있다.

4. 一而二, 二而一
혼돈(混沌)에서 갈라져 천지(天地)가 되는 것이 일이이(一而二)요, 천지가 있는 것은 혼돈이 갈라진 데서 온것이라는 것은 이이일(二而一)이다. 여기서 혼돈은 일(一)이고, 천지는 이(二)다. 천지는 구별된 유(有)의 세계로 노자의 유명과 같은 것으로 천지 즉, 이(二)는 수의 개념이지만, 혼돈 즉, 일(一)은 수의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이기(理氣)철학에서 보면 일(一)을 수 개념으로 봄으로서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다. 일원론이니 이원론이니 하는 것에 대해 개념이 불명확하여 제 3의 개념마저 도출해 낼 정도이니 본 의미에서 어긋난다.

5. 氣質之性
이기(理氣)철학에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은 성리학 전개의 기본법칙이다. 즉, 만물로써 말하면 물(物)의 존재현상이 기(氣)요 물(物)의 존재 근거가 이(理)다. 이(理)가 인간에게서는 성(性)이요, 기(氣)는 질(質)이다. 성(性)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이(理)요, 질(質)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기(氣)다. 기는 기질로서 성을 떠나 있을 수 없으며, 성 없이 기질만을 가지는 인간은 없다. 성(性)과을 함께 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되 기품이 다름아닌 기질지성(基質之性)이다. 그러나 본연의 성(性)의 개념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대비되는 것은 아니니, 성(性)의 개념에 있어 두가지 성(性)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성(性)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다만 기질지성(基質之性)은 기질포성(基質包性)의 성을 말하고,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그냥 성을 말한다.

6. 人心과 道心
마음은 성(性)․정(情)으로 인심(人心)․도심(道心)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성․정은 동정상(動情上)에서 심(心)을 이해한 것이라면 인심․도심은 선악상에서 심(心)을 문제삼는 것이다. 동정상(動情上)에서 문제삼을 때 동(動)하는 심(心)을 정(情)이라 하고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는 심(心)을 성(性)이라 한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바로 동(動)한 심(心)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정(情)이요 그리고 정(靜)의 상태에 있는 심(心)을 중(中)이라 하니 중(中)은 곧 성(性)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정(性情)은 심(心)의 동정(動靜)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 이기(理氣)와 같이 심(心)의 이원(二元)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에 대하여
1. 槪念과 定議
정의(定議)는 개념(槪念)의 의미를 확정하여 명확히 하는 것으로 개념의 내용을 묶어 고정된 의미의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고정된 의미에서 정의란 개념의 내용을 죽인 화석(化石)이라 할 수 있다. 다 시 말해서 죽은 개념이다. 개념과 정의는 결코 동일한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개념의 의미를 확장하여 명확하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개념의 내용에 한발 다가서는 것보다 개념의 내용을 고정시켜 사고의 폭을 죽일 수가 있다. 참다운 지식은 모든 것을 정의의 틀에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살아있는 말과 죽은 말
표현에 갇혀있는 말은 죽어있는 말이요, 표현에서 자유로운 말은 사라있는 말이다. 지나간 말은 죽어있는 말이요, 오늘 하는 말은 살아있는 말이다. 말은 의미전달에 그 생명이 있다.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살아있는 말이 아니다. 말은 오늘로 살아 나와야 한다. 옛것이라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3. 살아있는 개념과 죽은 개념
정의(定議)에 묶여 있는 개념은 죽어있는 개념이요 정의에서 자유로운 개념은 살아있는 개념이다. 정의는 개념을 이해하게 하나 정의로서 이해된 개념은 전부가 아니다. 개념은 살아 있어야 한다. 정의는 개념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오늘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해야한다.

4. 言者와 知者
진정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하였다. 말이라 함은 의미가 담겨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한낱 소리일 뿐이다. 그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이 다름 아닌 지(知). 곧 앎이다. 노자의 언어의 부정은 명(名)과 실(實), 다시 말해 개념과 개념의 지시체인 사실의 세계를 문제삼는데 있는 것이요 언어의 기능과 언어사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 철학은 말로써 시작한다. 말이 표현에 갇히면 죽은 말이되고 말이 정의에 묶이면 죽은 개념이 된다고 하고 있다. 노자에게 말한 말을 하지 않음은 죽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항상 새롭게 표현되면서 구사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세계가 구성되어야 하낟.

5. 無言의 말
무언지언(無言之言)은 살아있는 말이요, 무명지명(無名之名)은 살아있는 개념을 의미한다. 말이 지니는 의미체를 개념이라 함이 옳으며 말로써 구성되는 의미체가 바로 개념이다. 그러나 한번 구성된 개념은 언어의 틀 속에 갇혀 죽은 개념이 된다. 이런 죽은 말을 파(破)하고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무언지언(無言之言)이요 죽은 개념에서 새로운 개념을 깨치는게 무명지명(無名之名)이다.

6. 말과 詩
일상의 의미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말과 달리 시(詩)는 소통의 측면이 아니다. 물론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그 시(詩)에 담지만 전달을 위해서 나오는게 아니다. 시가 탄생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독립한다. 그리고 시어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독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상(象)을 만들어 새롭게 다시 담긴다. 그것이 시어의 묘용(妙用)이요 독립성이다.

槪念들에 대하여
1. 道
도(道)는 곧 박(樸)이며 자연(自然)이다. 발가벗은 몸인데 내가 인식하는데는 상(象)으로 물(物)로 마주서기에 진정한 도는 아무도 볼 수가 없으며, 알수도 없다. 도는 알 수 없는지라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없어 무명(無名)이라고도 한다. 도는 개념도 아니며 도(道)는 그저 도(道)일 뿐이다. 도(道)를 앎의 대상으로 마주 세울 수는 없어도 무(無)로부터 유(有)를 만들어내고, 유(有)로부터 물(物)이 생겨난다.

2. 理
유학에서 이(理)는 천명(天命)으로 절대군주다. 이 절대군주에 부림을 당해야 하는 만물(萬物)은 기다. 이기는 주종관계로 모든 존재자의 세계에 질서를 세운다. 성리학은 주종적 사고를 철학이다. 그래도 이것은 인과(因果)론과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리학의 인과(因果)가 시간상에서 문제삼고 있는 개념이라면 이기(理氣)는 인과관계를 논리상에서만 문제삼고 있는 것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잇다. 그리고 인과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고 바탕위이지만 이기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가 바탕이다. 그렇기에 이기는 환원 불가능한 관계의 개념이다. 살아있던 유학이 성리학의 이(理)라는 천명아래 죽은 철학이 되고 말았다.

3. 氣
기(氣)는 실재하는 존재자, 곧 도(道)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양생학(養生學)으로 넘어오면서 생명(生命) 또는 생기(生氣)로 알게 되었고 성리학(性理學)에 와서는 물상(物象)으로 이(理) 없이는 아무 구실도 못하는 개념 규정이 내려지고 말았다.
본래 동양철학 일반이 가지는 기(氣)는 이(理)와의 관계성도, 형이하자(形而下者)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기(氣)란 시(始)도 없고 종(終)도 없으며 타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오히려 규정될 수 없는 존재로 모았다. 기(氣)란 실재하는 것이기는 하나 파악되는 존재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마주서는 존재현상이 그로부터 생겨난다. 기(氣)를 거슬러 올라가면 혼돈(混沌)이요, 상(象)을 만들고 있는 의식현상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마음(心)이다. 기(氣) 결국 모든 것의 존재 바탕을 일컫는 개념이다.

4. 性
성(性)은 심(心)이다. 살아있는 마음이다. 성(性)은 성(性)․정(情)의 성이 아니라 마음이 살아있다는 성(性)이다. 마음이 살아 있는지라 동(動)하기도 하고 정(靜)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마음이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는 것은 동(動)한지라 정(情)이요, 그러지 않을때는 마음이 정(靜)한지라 그때의 마음을 성(性)이라 한다. 성(性)․정(情)은 마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5. 常
노자에서 상(常)은 불변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장 정상적으로 있는 존재자의 모습을 말한다. 상(常)은 정상(正常)의 상이며, 자연(自然)이라 한다. 상(常)은 또한 일상(日常)의 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제의 상(常)이 그대로임이 아니라, 오늘은 오늘로서 새롭게 탄생하는 상(常)이다. 이 상(常)을 오늘에 있다하여 자연(自然)이라 하기도 하고 새롭게 있다고 하여 생명(生命)이라 하기도 한다.

6. 和
화(和)는 모든 존재자들이 스스로 자기로서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다 살려내는 것을 제물(祭物)이라고 한다. 다 살아 자기 존재자들이 서로를 간섭․방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로서 살아 있음을 의마한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화(和)는 존재자들이 다 살아 공존하며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이다.

7. 不仁
인(仁)은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해당되는 마음이므로 생명의 근원, 씨를 의미하기도 하며, 생명 자체이기도 하다. 공자의 인(仁)은 이러한 생명의 인간 모듬살이에서 사회적 질서로서의 도덕 의식으로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앉는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인(仁)을 부정하고 불인(不仁)을 주장한다. 인(仁)이 생명의 의미로서 남아있지 않고, 사랑으로 그리고 사회 의식으로 내려와 앉으면 곧 간섭이 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불인(不仁)은 간섭하지 않는 본래 그러한 대로 생을 영유하는 것이다. 진정 참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8. 知足
지족(知足) 지지(知止)는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을 알라는 것이 지족이요, 그 필요한 것을 가지는 데서 그치라는 것이 지지다. 지족이 앎의 문제라면 지지는 실천의 문제다. 노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고 없어도 무방한 것들이 있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을 아는 것이 지족(知足)이요, 없어도 될 것을 얻지 않으려 하는 것이 지지(知止)다. 오늘의 문명사회는 바로 그 없어도 될 것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얻으려 하는 데서 자연(自然)을 해치고 있다. 그것을 염려한 것이 아닐까?

9. 又日新
일신(日新)은 오늘이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오늘러소 있다는 말이다. 오늘만이 의미가 있기에 오늘을 이탈하지 말고, 바로 오늘에 살면서 새로운 것과 마주 서라는 것이 우일신(又日新)이다. 또한 오늘의 문제를 오늘 해결하자는 것이다. 허상에 매달려 오늘을 보내면서 자신을 망각하고 사는 것에서 깸은 우명지(又明之)라 한다.

10. 物化
물화(物化)는 말 자체로 ‘물(物)이 변한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으나, 장자의 마지막을 맺는 말로써 크게는 장자 사상을 대표화는 개념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살아있다.”부터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한다.”의 역(易)의 사유논리에서 비롯된다 하겠으나 변화(變化)를 생명으로 개전(開展)시켜 모든 존재자를 살려내는 데로 이끌어 간 데서 장자철학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 호접몽(胡蝶夢)의 예화에서 장자는 생사(生死)조차 물화(物化)의 관점으로 본다. 장자는 존재자의 세계를 일러 제물(祭物)이라 했고, 그 제물을 물화(物化)라고 했다.

三. 老․莊의 사유체계

1. 有의 철학과 無의 철학
유가(儒家)는 유(有)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도가(道家), 특히 노장(老莊)은 무(無)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太極)을 존재의 바탕으로 하는 유가철학이 그렇고 무극(無極) 또는 무(無)를 존재의 바탕으로 하는 도가철학이 그것을 말해준다.
유가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은 그 핵심이 기(氣)보다는 이(理)에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보편성(普遍性)의 요구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理)는 불역(不易)으로 모든 존재자의 동일성(同一性)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유가의 학문적 목적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금수(禽獸)와는 다른 존재임을 분명히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명(天命)의 개념인 이(理) 개념이 창출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노․장은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마음(自然)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존재 근거를 요구하지도 않고, 도덕성 확보도 관심 대상이 아니다. 다만 노․장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앎을 근거로 한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인간생활에 어떤 문제들을 야기시키는가가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시비(是非) 보다는 진위(眞僞), 보다는 선악(善惡)보다는 사실(事實)규명에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마음의 소요(逍遙), 즉 모든 사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는데 있다.

2. 도(道)는 알 수 있는가?
역철학(易哲學)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철학의 존재기반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의 지배 아래 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없는 것을 대상으로 문젯삼을 수 없다는 것이 동양의 철학적 기반이다. 이런 기반 아래 노․장 철학의 ‘진리(眞理)의 정초(定礎)는 세워지는데 지금 바로 여기에 그 정초가 있다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기반이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이다.
노․장은 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道)를 무(無)또는 무명(無名)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무(無)란 존재론적인 실재유무가 아닌 인식론상의 지(知)와 관련된 무(無)이다. 그러나 도(道)는 실재한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서 무(無)이다.
노․장 철학에서 도(道)란 무엇인가의 대답은 ‘지금 바로 여기’ 실재(實在)하지만, 알 수 없다, 실재하는데 왜 알 수 없는가 그것은 앎의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개념의 세계요, 표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노장에서는 만물의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닌, 앎이 구성한 세계라고 한다. 우린 앎의 세계에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세계가 바로 무명(無名)이다.
노․장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명(無名)의 세계가 아니라 유명(有名)의 세계를 밝히는데 있다. 인간은 유명의 세계를 벗어나 살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무명 세계에 있는 도(道)의 세계에 들어가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도(道)를 각(覺)할 수 있어 지인(至人) 과 진인(眞人)이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각(覺)이란,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닌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다는 무위(無爲)의 의미이다. 이런 앎의 지평은 현실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현실을 여는 것이다.

3. 現前적 실재 사실과 도의 세계
동양철학에서 명확한 이론적 체계와 사고행위가 비논리적이라는 비판은 서양철학에 기반하여 특성짓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분명성의 기파와 논리적 사고의 거부는 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유가 실질적인 내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불분명하게 드러내지고 있는 개념은 도(道)와 각(覺)인데 불분명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도(道)는 사실의 개념이 아니요, 각(覺)은 논리적 사고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道)는 개념을 지니지 않기에 현(玄)이라고도 하고, 묘(妙)라고도 하고, 무(無)또는 무명(無名)이라고도 한다. 도(道)는 의미체도 거부하고 모호성을 가질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신비하다라고 대치해서는 안된다. 동양철학에서는 그러한 모호성속에서도 명확하고 구체적인 세계와 마주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도(道)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으로서 도(道)고, 각(覺)은 사고가 아니라는 것으로서 각(覺)으로 개념과 사고의 세계에서 분별이 있다. 이 멈춤 속에 사실성이 있고 구체적인 위치성이 있다. 공자의 도(道)는 나의 도(道)와 다른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문제 삼는 것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 남이 마주선 세계가 아닌 내가 마주 선 세계를 말하고 있다.
분명하게 환하게 드러나는 사실의 문제는 언어와 사고가 끊어진 자리에 서 있다는 말이다. 동양철학은 사실 앞에 중간자 없이 직접적으로 나와 마주서고자 하는데 있다. 직접 마주 서는 세계를 선(禪)의 세계라고 한다. 중간자를 없애고 직접 마주서는 것이 각(覺)이라 할 수 있다.
우리와 직접 마주 서 있는 세계는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 마주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리와 법칙, 언어체계 등의 중간자가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늘 거부하고, 방해하고 있다. 이런 중간자를 노장에서는 유위(有爲)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위를 떠나 마주 서 있는 세계를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동양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한다는 역론(易論) 앞에 서 있다. 그렇기에 언어의 표현과 합리적 사고 내지 이성적 사고는 실질적인 세계와 마주 설 수 없게 고정되어 있음으로 거부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앞에 마주 서는 현전(現前)세계는 개념의 세계도 아니며 논리적 사고의 결과에서 오는 사념(思念)의 세계도 아니라는 것은 가장 구체적이요 사실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착심(着心)이라고 하여 변화하는 것을 불변적 세계로 묶어 두고 있다고 한다. 노장에서 문제 삼는 것은 내 앞에 직접적으로 마주 서는 현전적 세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가장 구체적으로 자기 특수성을 드러내면서 존재한다. 그것이 현전하는 참다운 존재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가장 구체적이요, 적실한 존재의 세계를 말한다.

4. 살아있는 세계와 죽어있는 세계
동양철학에서 살아있는 세계는 도(道)의 세계이고 죽어있는 세계는 개념(槪念)의 세계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사실적 존재자의 세계요, 생명의 세계요, 살아있음의 세계를 말한다. 한순간 머물러 있는 일이 없으며 동일한 상태를 두 번 되풀이 하는 일도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여여(茹茹)의 세계라 하고 선(禪)의 세계라고 한다.
생물학적 존재를 벗어나 우주론적 생명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자는 다 살아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세계와 구별하여 그저 활물(活物)의 세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념의 세계이다. 개념의 세계는 사념의 세계요, 문자의 세계요, 말의 세계다.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넘어오자는 것이 동양철학 일반의 핵심이다.
과거는 지난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다. 오직 찰라현금에만 사실이 있다. 우리는 단순한 어떤 개념조차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랑’ 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개념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더 모호해 진다. 직접마주 서는 세계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 사실이다. 동양철학에서 명(名)과 실(實)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 지는 것도 이런 개념의 부조리성에 우린 진정한 사실의 세계로 체득(體得)해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변화한다. 이런 변화하는 역론속에 도(道)가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활물(活物)적 생명의 세계 그것은 내 앞에 마주친 찰라 현금(現今)속의 현시성인데 특징이 있다.

5. 과학주의적 세게관과 노장사상
서양철학은 인간의 오만함 속에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진 독립된 존재로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고 자연을 인간의 정복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사고 속에 오늘날의 과학문명은 편리함을 가져다 준 만큼 인간 위기가 문제 되고 있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세계관은 문제 해결은커녕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동양사상에 비교해 볼 때, 서양사상의 특질은 사고의 틀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그리고 만든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틀이란 법칙이요, 원리요, 일정한 사고의 논리체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세계관의 틀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이원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양사상은 그러한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실로 예기치 못한 것도 있고, 틀에 있지 못했던 것들의 갑자기 튀어 나올 수도 있다. 그동안 끝없이 인간의 앞날을 밝게 해줄것만 같았던 기술문명속에서 영혼의 문제와 자연의 문제가 대두되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인간을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하려는 속에 서양사상의 한계가 드러난다.
동양사상에서는 이 세계의 어느 것 하나 동일 반복의 선상에 이쓴 것이 없으며, 인간과 자연은 이분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고관이 들어있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살아있다는 역론(易論) 속에서, 틀을 벗어난 참 앎(道)와 마주치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동양사상에서 보는 서양사상은 틀 속에 머물러 있는 한계가 있는 세계이고 죽은 세계이다. 존재 사실로부터 무명(無名)을 이끌어내고 무위(無爲)를 추구하면서 현전(現前)하는 존재자들의 앎에 깨어야 한다.

6. 老․壯에서 본 죽음의 문제
노․장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氣)의 취산으로 보고 있으나, 문제의 출발은 열생오사(悅生惡死)의 관념을 심리적 기반으로 하여, 인생의 속박과 굴레를 생각하느 것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장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무관하다는 것이 노장의 입장이다.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좋다․나쁘다라고 생각하는 열오의 관념은 다 근거없이 주어지는 허망한 것이다. 지나친 상대의식으로 하여금 죽음을 문제삼기 보다는 삶의 실체를 찾는 철학이 노장 사상이다.
살아 있는 것만을 문제삼는 노장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은 관념으로 참이 아니다. 죽음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이다.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삶의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관념에 얽매인 것이다. 관념을 버리면 생사 구분은 사라지고 생은 생으로써만 있는 것이다.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남을 현해(懸解)라고 하고 이러한 경지에 오른 사람을 지인(至人)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생과 사를 구분지을 필요가 없다. 서로 구별하는 속에 간섭이 생기고 의미 없는 감정이 생긴다.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속박의 관념이고 노장은 생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상이다.

7. 老子 1장의 新 해석
노자 1장은 언어(言語), 즉 말(道)에 대한 이야기요 그 말을 도(道)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은 도요 죽어있는 말은 도가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무명(無名)의 세계라 하고, 죽어있는 말을 유명(有名)의 세계라고 노자는 말한다. 명(名)이란 상(象)을 가지며 이를 개념이라고 한다. 무명(無名)이란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은 말이다. 상(象)을 가지지 않은 무명(無名)은 자유로울 수 있다.
노자 1장은 말(名)이 상(象)을 만들어내고 상을 가짐으로써 물(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니 말이 있어 존재자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이 살아있어야 거듭 새로운 존재자, 살아 있는 존재자를 앞에 마주 세울 수 있다. 살아있는 말을 도(道)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이 있어 존재자가 있게 되고 말이 존재의 세계를 열어간다. 노자 1장은 이러한 존재자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四.
老子를 읽어가며
1. 노자 1장 말
「노자」1장은 언어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언어의 세계야 말로 존재의 세계요, 그리고 거듭 존재를 내 앞에 마주 세우는 존재의 창출이다. 말이 있어 존재가 있게 된다는 것이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라는 것이요, ‘동출이명(同出異名)’ 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존재의 창출을 ‘유생어무(有生於無)’ 라고도 했다. 말로써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말은 모든 의미체, 표현되는 모든 것을이르는 것으로 노장이 문제 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노자 철학이 도(道)에 있는 것이 아니요, 말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 바로 1장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도(道)를 문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2. 노자 2장 萬物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2장이다. 유며의 세계는 있고 없음의 유무가 생겨나고 고하장단․상하좌우․선악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말이 있어야 하며 말은 표현으로서 가지는 의미체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드러나 있는 의미체이다. 그러므로 곧 존재는 말이고 말로서 존재하는 것이 만물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시간은 자신이 느끼 대로 상대적으로 의미주어 진다. 모든 것은 고정불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워진다. 무위는 기존의 의미체를 탈피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3. 노자 3장 無爲
노자는 성인은 의미를 규격화하고 경쟁을 부추긴 존재라고 말한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비교하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을 노자는 거부한다. 욕심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니 마음을 비워라, 어진이를 받들지 마라. 금은보화를 귀하게 역기지말라, 지(知)를 내세우지 말라. 이것이 노자 3장의 무위(無爲)이다.
4. 노자 4장 生命
단순한 사물이라도 보는 시각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롭다. 무한히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라 한다. 우리는 사실로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도(道)란 알 수 없는 실재를 말한다. 우린 현실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의미를 찾아야만한다. 늘 새롭게 아는 것 그런 앎의 지평이 우리 현실이다.

壯者를 읽어가며
1. 逍遙遊
한없는 사념(思念)의 세계, 이 세계를 달리며 생각나는대로 고삐를 풀어주는 것이 소요유(逍遙遊)이다. 사념(思念)의 세계에 울타리를 만들고 고삐를 매어 놓으면 그것은 관념(觀念)의 세계다. 사념(思念)의 세계는 자유로우나 관념의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고삐에 따라야하는 것은 사유(思惟)의 논리이다. 성인(聖人)조차 이런 예(禮)라는 창살에 묶여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네 마음을 경계가 없는데 맡기고, 무궁한 세게에서 노닐라 하는 것은 사념(思念)의 세계의 소요유(逍遙遊)이다.
2. 齊物論
천뢰악(天籟樂)이란 소리란 소리는 다 살려 한가지 소리도 죽이지 않고, 완전한 소리로 이루어 지는 음악을 말한다. 그런데 악인(樂人)이 나와 음(音)을 만들고 율(律)을 만들어 틀을 이루고 기준을 세워 틀에 맞지 않는 소리 기준에 맞지 않는 소리는 죽여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세상을 망친 사람이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도덕(道德)이라는 틀로 선악(善惡), 시비(是非)의 기준을 세워 억지로 살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보면 이것이오, 저곳에서 보면 저것이다. 세상의 어느 무엇 하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의 무엇 하나 이것 아닌 것이 없는데 가릴게 무엇이냐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제물(祭物)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연(自然)답게 살려노라는 것이다. 또 물화(物化)라는 용어를 설명하되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르게 있다는 말이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變化)하는 것으로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할 때 물화라고 하는 것이다. 물화로 있는 것을 제물(祭物)이라고 한다. 제물론이 물화로 매듭지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3. 養生生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간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배반하는 일이라 마음을 온전하게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양생(養生)이다. 양생(養生)은 오래 살려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살려는 마음을 버린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고 나면 죽는 것이 슬픈 것도 사는 일이 즐거울 것도 없다. 마음에 애락(哀樂)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을 현해(懸解)라고 한다. 죽고 사는 것에 관여하지 않고 그러한 대로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양생(養生)의 의미이다.

[지금 바로 여기- 결론]

‘지금 바로 여기’ 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를 주체로 나의 공간, 나의 시각에서 살아가야 할 방법이다. 동양철학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움을 연상하곤 하는데 실제는 다르다. 현실의 철학이고,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새롭게 인식될 철학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살아가는 이유를 잊었다고 말한다. 그냥 시간이 흘러 왔다고,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왔건만 내 삶에 이유는 무엇이고,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고 어느 순간 회의하곤 한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사람이 제 자신을 잊었기 때문이다. ‘사회 속 인간’ 만을 알았지. ‘나의 다수가 사회’ 임을 몰랐던 것이다. 사람이 인식이 가능한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인식이 가능한 것이 제 삶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살아가야 할 방도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식이 가능하지 않은 것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허상을 본떠와 그것을 추구하느라 제 자신의 것마저 잃는 전도의 부조리를 일으키곤 한다. 이것이 인간이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 가장 큰 연유이다. 인간의 역설 그것은 제 자신의 주체와 사회 속에 있는 제 자신의 사회성 둘 간의 괴리이다. 인간은 제 삶만을 추구하고자 할 순 없다. 사회에서 태어났고, 완벽히 사회화 되었고, 떠나갈 수 없는게 사회이다. 그러나 자신은 제 자신의 사고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인간의 의미는 제 자신의 뇌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완벽한 사회화 덕택에 인간은 제 자신을 잃고 만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잊고 허상만을 쫓는 격이다.
‘지금 바로 여기’ 내 현제 위치에서 가장 중한 것을 봐야 한다. 가장 중한 것은 내 자신의 철학이고, 본질을 꿰뚫려고 하는 힘이다. 그런 신념과 힘속에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부조리마저 깨고 진정 중한 것을 찾악가는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 책 『지금 바로 여기』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며칠전 저희 동아리 사업으로 전태일 추모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태일 분신 33년을 기리며, 여러 다양한 추모행사르 벌이는 것이였죠. 저희는 이번 사업에 상영할 목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전태일 분신의 의미를 새롭게 보며 현실에서 자각하게끔 하는 영상물을 기획하는데 힘썼습니다. 영상물의 주제는 노동자들의 삶입니다. 소외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희는 그것으로 멈추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와서 우리 학교의 계단 밑 2평 정도의 휴게실에서 쉬시고 계시던 청소부 아주머니, 버스기사 아저씨, 현 비정규직 강사 노조위원장, 은행골 식당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모두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간청하지 못했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일상 삶의 주변이면서도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곁에 있고, 또 차후에 그렇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면서도 무관심했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영상물에 담았습니다. 영상물 제목을 고민하게 됬는데, 제가 ‘지금 바로 여기’ 로 하자고 해서 그것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 내 현실의 모습. 전 동양사상에서 배운 철학에서 한 웅큼 더 나아가 그런 제 자신을 위한 철학을 조금이나마 내 주변까지 확산키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정 이해를 확실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여기는 자신을 위한 철학이면서, 제 자신의 인식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당위성을 띄지만 이상주의적 성격이 진합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라는 것이 사회 속 인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 속 개인은 아무래도 나약해집니다. 노장사상은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하지, 사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자신의 인식이 시작이고 끝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이 현실에 있어서 커다란 범주이자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회‘ 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으로만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물의 제목을 그렇게 함이 이 책의 철학을 잘 담아내는 것인지 확신이 서진 않습니다. 제 생각엔 제 자신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하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러한 폭을 점차 넓혀가자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보낼 제 철학이기도 하고요. 제 자신을 다지고 그것을 사회로, 사회속 인간에서 나를 찾는 진정함을 추구하는 것이요.

끝으로, 전 책을 읽을 때 항시 비판적으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진실일 수는 없다는 생각때문이죠. 이 책은 노장사상에 비추어서 동양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부분에 성리학과 우리나라의 퇴계․율곡 철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기론에 대하여, 본질을 잃고 형식에서 출발한 철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이기철학을 그렇게만 볼 수 있나요? 본질부터 따졌을 때, 이기철학은 본의의 뜻에서 벗어난 건가요? 전 이기철학 나름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있을거라고 추측되기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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