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책으로 읽을 때에는 ‘그 유명한 책’ 이 내겐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내가 책을 잘 못 읽었거나, 배경지식이 부족하구나 하고 덮어버렸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쯤 봐야 알겠다 한 부분이 많긴 하였으나, 우선 분량도 많고, 읽기 쉬운 소설도 아니었으며, 내가 본래 책을 다시 읽는 습관이 없어서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고전영화 게시판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영화판을 발견.
보았다.
영화만 보고나니 딱히 심히 이해못할 부분은 없기도 하였다. 사실, 책의 전체의 큰 줄거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방대한 주석이었으며, 뭔가 은유하고 있는 듯한 묘사와 역사적 배경이었으니깐. 영화에서까지 심히 얽혀있는 다양한 해석의 기회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누군가 장미의 이름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여(아마도 진중권이었을 것이다) 심리학자는 심리학자대로 재미있을 부분이 있고, 역사학자는 역사학자대로 재미있을 부분이 있고, 언어학자는 언어학자만큼 재미있을 부분을 마련해 둔 작품이 장미의 이름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 모든 학자도 아니기에 이런 다양한 해석의 기회들을 차단했을 영화 <장미의 이름>이 그렇게 서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하게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선 하루가 200페이지도 되고 300페이지도 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그에 비하면 하루가 섬광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그 정도만이 전개상의 차이이고, 제법 모든 것을 멋지게 구현했다. 거대한 도서관, 수도원의 분위기 등등.
그리고 책에서는 하도 많은 은유들이 있어서 정작 주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느낌도 있었는데, 영화에선 좀 더 주 포커스에 집중해주고 있다. 거기에 주인공의 로맨스를 조금 더 부곽시켰다는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어쨌든 선택과 집중이었다.
<장미란 하느님이 붙인 이름, 우리는 이름 없는 장미>
장미 자체는 그 어떤 귄위, 플라톤식 본질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장미의 이름이란 그 장미라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수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장미를 두고 제각기의 이름을 붙여왔겠지.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권위와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방편에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수단이 목적화되는 것이고, 방편이 절대화되는 것이다. 장미에 다가가는 장미의 이름이, 장미의 이름의 이름을 또 나을 것이고… 장미는 어느순간 조금 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우회했던 이가 호르헤 신부가 아니었을까. 그가 부여한 절대화된 수단을 사수하기 위해서 모든 탐구활동을 가로막았던 그. 그건 어쩌면 현실사회의 보수의 일면화된 모습이기도 하되, 다른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근대과학의 대표적인 적이기도 하다. ‘진리’로 향한 무한걸음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 물론 장미의 이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치 않기도 하는 것이 장미의 이름은 그들의 목적지에 하느님이란 절대자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좀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한데 유용성으로 말미암아 종교는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실험과 확증성의 과학은 이 사회에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렇게 과학이 철학과 종교로부터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진리탐구를 긍정하는 이데올로기를 펼쳐왔던 것이다. 종교가 가로막았던 그것들을 이제는 누구도 가로막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이크로의 극점에서 세포의 분열은 있되 인간의 목적은 없고, 매크로의 극점에서 은하계는 있되 또한 보고있는 주체의 인간이란 없다. 진리라는 것이 목적을 잃고 흔들리고, 정밀함과 확즉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이, 수학이 그 공식들의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지구라는 구와 중력위에 있다는 것을 인간은 어느 순간 잊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가 직선도 아닌 곡선도 아닌 건물들을 난잡하게 지어대고 있었고… 어쩌면 모든 것은 부실공사 였는 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무한한 탐구의 걸음걸음이, 진리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잊어먹었는지는 않은지… 걸음의 끝이 없을테니, 그건 부가적인 질문이 아니라 그 걸음을 멈추어서라도 한번쯤 생각해보고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없는 장미’는 무슨 함의일까. 영화의 맨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책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음 인간. 인간 자신을 기능적 인간화 시키기는 불가하다는 이야기일까. 이름 붙일 수 없는 장미. 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이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권리라는 실존적 의미일까. 아니면 자연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주제를 알라 식일까.
책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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