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약 7년 전쯤에 남쪽을 보았다. 그가 가장 궁금했던 점은 벌집의 정령에서 어떤 완성형에 이르렀던 빅토르 에리셰가 남쪽으로 다른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무언가를 뛰어넘었다, 는 말을 그 스스로가 체감할 수 있을까? 라는 지점이었다. 그 7년 전에 보았을때 모종의 이유로 자막이 충실하지 않았었다. 영자막본을 보았거나 한글자막이었음에도 번역이 충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막 때문인지 영화가 매우 난해하다고 느꼈고, 중간에 더러 졸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에게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순간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마룻바닥을 두들겼고, 주인공 또한 마룻바닥을 두들겼다. 아버지와 딸은 층은 달랐지만 둘만 아는 비밀코드처럼 마룻바닥을 두들기면서 소통했다. 직접 만나 소통할 순 없지만, 그렇게 두들기렴서 자신의 안녕을 소통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밖에 전할 수 없는 자신의 단절된 사정을 표현하였다. 그 두들김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으며, 그것은 딸의 엄마가 모르는 그 둘만의 소통방식이었다. 집은 낮임에도 그림자가 가득 차 있었다. 또 한가지 순간은 딸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트래블링 하는 시선이 미치면 딸의 아버지가 죽어있었다.. 그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트래블링은 차가웠다. 주검 뒤로 흐르는 물 때문에 글너 인상이 더 생겼을 지도 모른다.
7년만에 남쪽을 다시 봤다. 이번에는 자막은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봤던 그 남쪽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딸은 마룻바닥을 두들기며 소통하지 않았다. 그 순간도 주기적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아버지가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몇차례 두들겼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순간이지만 그가 기억했던 순간과는 달랐다. 그가 기억하던 딸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은 기억과 같았다. 그리고 내용은 생각보다 난해하지 않았다. 파고들면 좀 더 어려워질 수 있겠지만, 서사 자체가 복잡하거나 아에 멈춰있진 않았다.
영화를 각자만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이 참 묘하다,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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