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11시 정도. 그는 이 정도는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낮에 스타벅스 쿠폰을 써서 자리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서보니 공기의 결이 다르다. 진짜 여름이구나. 체감하게 되는 공기다. 하지만 그는 여름에 강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밤에도 꽤나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는 날씨겠군. 이라며 기뻐했고, 하지만 이 여름은 또 금방 지나가버리지, 하며 미리 아쉬워했다.
더운 날씨 덕분인지 스타벅스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첫번째 스타벅스는 들어갈때부터 혹시? 하는 마음가짐이었고 역시나. 두번째 스타벅스는 지하1층부터 4층까지 있으니까 뭐, 한 자리 쯤은… 하면서 들어선 곳이었다. 단 한자리도 없었다. 그는 스타벅스는 접기로 했다. 길 건너편에 팀홀튼 카페가 하나 생긴걸 기억했다. 거기 테이블이 노트북을 펼칠만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험삼아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팀 홀튼으로 향하는데 웬 스타벅스 간판이 하나 눈에 띠었다. 여기도 스타벅스가 또 있었나? 이제껏 이 길을 수십번은 지나갔던 것 같은데, 건물 안에 있어서 몰랐던 곳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을 다시 품고, 들어가보니 꽤 불편해보이는 높은 테이블 하나가 비어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팀 홀튼은 오픈빨 버프까지 받아서 더더 자리가 없겠군. 일단 높은 테이블에 앉았지만, 역시나 불편했다. 생크림을 듬뿍 쌓아 둔 화이트 모카를 쪽쪽 빨고 나니, 문서 파일을 열어 볼 의지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낮-오후 시간을 다 버티고 저녁 6시까지 버티는 건 무리일 성 싶었다. 영화 예매 어플을 한번 켜봤다. 근처 아리랑 시네센터엔 관심있는 작품이 없었다. 영상자료원도 마찬가지. 서울아트시네마를 들여다보니 오후 4시 친밀함이 눈에 띠었다. 지금 시각이 오후 3시 10분… 충분히 갈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예매 버튼을 누르니, 빈 자리가 3-4자리 있었고 좌석도 나쁘지 않았다. 한번 매진이 되었다가 상영 전에 취소자리가 난 듯했다. 뜻밖의 영화긴 한데, 흔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더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바로 짐을 꾸렸다.
친밀함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작품이라고는 들었는데, 그게 최근에 만든 작품인지, 초기작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극장에 입장하니 좌석을 꽉 매운 관객들이 보였다. 대체로 연령대도 2-30대 관객들이었다. 이렇게도 시네필들이 많은데, 왜 극장가 한국 독립영화는 관객이 이리도 적은걸까… 그는 씁쓸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영화의 제작연도를 대략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인터미션을 갖고 있는 꽤 긴 영화임을 알게 되었다. 세로 한글자막 이었다. 긴 영화가 되겠군, 이란 생각에 그는 느슨한 집중력을 가지고 영화를 쳐다봤다. 초반에 딴 생각을 많이 했다. 영자막의 위치와, 크기 그리고 이탤릭을 쓰지 않고, 느낌표를 주로 쓴느구나, 정도의 생각. 그리고 영자막이 2줄이 될 때는 가운데 정렬을 하지 않고 왼쪽 정렬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 그러면서 느슨하게 따라가고 있는데 중간에 방심했는지 꽤 중요한 갈등의 국면으로 추정되는 인터뷰 장면에서 5분 정도 졸은 것 같다. 드디어 인터미션이 찾아왔다. 화장실에 가고, 물을 사고 하는 등의 행동 사이사이에 그는 급히 러닝타임을 확인했다. 4시간 15분… 끝나는 시각이 8시가 넘어서였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나서 등장인물이 연극안내라고 2시간 15분짜리 연극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그는 알아챘다. 아, 이 영화의 2부는 저 연극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주려는 셈이었군. 정말이었다. 연극 촬영 영상을 영화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감흥을 취하는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촬영은 그가 그 연극을 실제로 감상한다고 하였을 때 눈이 갈 법한 곳을 적시에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물이 격정적으로 감정을 내뿜고 있을 때, 그는 알았다. 내가 저 연극을 보고 있었더라면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확인코자 했을텐데, 지금은 그 선택권이 박탈되었군. 연극이 진행되는 와중에 그는 1부에서 이 연극에 대해 언급했던 것들을 떠오르려고 했지만, 그닥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엔 1부가 있었다는 걸 순간적으로 잊기도 했다. 2부 연극에서의 인물들이 고유한 매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나? 1부에서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 자체의 줄거리는 잘 따라가지 못했다. 대사가 너무 많은데 세로자막은 그에게 정말 힘겨웠다. 결국 2부에서도 중간에 10분 가량은 잔 것 같다. 자괴감이 몰려온 사이, 연극이 끝났다.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이 에필로그가 중요하다. 여기서 감독은 뭔가를 남겼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번 집중력을 발휘해보았다. 지하철에서의 재회. 그리고 풋웃음을 내게 만드는 따스한 엔딩이었다. 이걸 위해서 에필로그를 했던 거였구나. 그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터라 이 영화에 관한 인상이 그렇게 좋게는 남지 않겠구나, 라고 미리 결론 내리고 있었건만 엔딩 덕분에 마음이 흔들리게 생겼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뚝감을 가봤다. 다른 테이블에선 구남자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독 이 테이블의 목소리가 굵게 울려서 집중만 하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구 남자친구는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기에 평소에 에너지를 쉽게 잃고, 더군다나 원래 체력이 약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친구를 한달에 한번 만난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 아니냐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을지로4가의 카페에 갔다. 오, 맙소사. 여기 카페마저 자리가 없었다. 여긴 다른 대체제를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기도 힘겨운데 이를 어쩌나, 하며 그는 그저 맴맴돌고 있었다. 그때 한 외국인이 와서 그에게 자신이 이제 곧 자리를 뜰 것이니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얘기해줬다. 그는 그 외국인을 안다. 이틀 전에 그 외국인이 노트북 충전기와 케이블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약 30분 동안 충전기와 케이블을 빌려준 적 있던 바로 그 외국인이었다. 그는 연신 땡큐땡큐를 소심하게 말했다. 그 외국인은 평소에 밤 늦은 시각까지 있던 이였는데, 자리를 못찾아 헤매는 그를 위해 자리를 양보한 것 같았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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